2022년 12월 20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가 1, 26-38)
“Behold,
I am the handmaid of the Lord.
May it be done to me according to your wor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한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면 당황해하며 어쩔 줄을 모르게 됩니다. 그러나 예상 밖의 일도 사실은 예상할 수 있고, 그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당황해하는 것은 아직 그 상황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갑곶성지에서는 봉안당에 들어오실 때 사제가 직접 안치 예식을 합니다. 고인을 위한 마음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금 살아서 힘들어하는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유가족 중의 몇은 고인의 죽음을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분명 언젠가는 자기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잘 알고 있지만, 지금의 죽음을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기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상 밖의 일은 우리 인생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특히 예상 밖의 일도 또 예상하는 일도 모두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상 밖의 일이라고 불평불만 속에서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하느님과 함께하는 희망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듣습니다. 예상했던 일이 아닌, 분명 예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아기를 잉태한다는 것, 당시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아기를 가지면 간음했다고 공개 처형으로 돌에 맞아 죽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왜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면 자기는 죽을 수밖에 없으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가브리엘 천사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라는 말에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7)라고 고백하십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예상 밖의 일에서도 하느님께서 계심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이라는 옷으로 보이는 예상 밖의 일이 자주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주님을 찾고 또 주님을 믿고 있습니까? 주님을 찾고 믿기보다, 고통과 시련 자체에만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인생은 살아가기에 너무 짧고, 증오하기에는 너무 길다(정호승).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을 잉태하십니다. 천사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이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성모 마리아에게만 일어나는 일일까요? 주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말을 믿으면 우리 또한 우리 한계, 곧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정말 우리 주위에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인물들이 있고 그들의 특징은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유튜브 채널 ‘비오는 날’에는 ‘장애를 이겨낸 다섯 명의 특별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중 가장 먼저 ‘젠 브리커’(Jen Bricker)는 태어날 때부터 양다리가 없는 여자입니다. 부모는 다리가 없는 아이를 버렸습니다. 루마니아에서 고아로 자라던 그녀는 미국 일리노이주의 작은 마을에서 온 부부에게 입양되어 세 아들과 함께 자랍니다.
그녀의 양부모는 그녀와 세 아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도록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집안에서는 단 하나의 규칙이 있었는데 “절대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라는 규칙이었습니다.
어린 나이부터 야구, 농구, 체조 등의 스포츠를 즐겼고 마당에서 트램펄린을 타고 곡예 동작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기점으로 그녀는 전문적인 텀블링을 습득하며 일리노이주 챔피언 텀블러가 됩니다. 이후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을 보고 체조에 큰 관심을 두게 된 그녀는 미국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도미니크 모체아누(Dominique Moceanu)를 동경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체아누는 자신의 친자매였습니다. 그녀는 모체아누에게 진심 어린 편지를 보내 그녀와 만날 수 있게 되었고, 패럴림픽에서 메달을 쟁취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월드투어를 하며 퍼포먼스 공연을 선보이고 있고 최근에는 30m 높이의 실크 로프에 매달려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행위예술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상의 마지막 예로 카일 메이나드(Kyle Maynard)도 나옵니다. 카일은 세계적인 동기부여 강사이고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크로스핏 체육관장, 레슬링 선수권 대회 챔피언, 종합 격투기 선수, 역도 세계 기록 보유자이자 5,895m의 킬리만자로 정상에 오른 것도 모자라 1,000m 더 높은 아콩카과 산 정상에 오른 이 남자의 기록은 놀랍게도 팔다리가 없이 이루어낸 업적입니다.
그러면 그의 부모는 그를 어떻게 대했을까요? 장애인으로 대했을까요? 당연히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믿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신체적 장애가 있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고 병원에서조차 낙태를 제안했으나 낙태는 선택 사항이 아니며 심지어 고려조차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카일의 생애 첫해는 평범한 아이와 같이 자랐지만, 한 해가 지나며 카일의 삶은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카일은 설 수 없었고 걸을 수 없었으며 손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몇 년 동안이나 밥을 먹여줘야 했는데 언젠가는 아들이 스스로 살게 될 것을 미리 걱정한 그의 아버지는 더 이상 가족들에게 카일의 밥을 먹여주지 말자고 했고 카일은 살려면 스스로 밥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할머니와 부모는 그를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대했습니다. 놀이터로 데리고 나가 친구들과 어울리게 하였고 카일의 친구들은 카일에게 친절했습니다. 카일의 할머니는 카일이 손과 발이 없다는 것을 깜빡깜빡하며 설탕을 꺼내달라고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카일은 말합니다.
“수백, 수천 번을 실패하였습니다. 단지 꼭대기까지 설탕을 퍼 올릴 수 있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포기하려니까 지금까지 시도한 수백, 수천 번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딱 한 번만 성공하면 그다음부턴 식은 죽 먹기라는 생각이 들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카일은 결국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 성공의 경험은 카일의 손재주와 집중력을 늘리는 데 놀라운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강한 의지력까지 선물했습니다. 그는 유소년기에 미식축구에 도전했고 레슬링에 도전해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을 상대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심지어 MMA 종합 격투기까지 도전하게 된 것입니다.
카일의 아버지는 말합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제야 이 세상이 카일을 위한 세상이 아니란 걸 깨달았습니다. ‘너무 엄했던 날 용서해주렴. 하지만 네가 처한 상황에서 무엇인가 할 수 없을 때마다 포기한다면 앞으로도 네가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성공을 이뤄낸 사람들이 믿었던 것은 불가능한 일은 없다는 것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준 대상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그의 부모입니다. 만약 우리가 무언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 아버지가 하느님이 아니시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 안에서도 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젠 브리커의 양부모처럼 “절대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마라”라는 규칙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면 그것 자체가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믿음은 불가능이 없다는 것이었고 이 믿음이 수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유튜브 채널 ‘스터디언’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이것을 생각하세요’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일본의 한 초등학교에서 뜀틀 대회가 열렸습니다. 교사들은 엄청난 높이까지 뛰어오른 한 아이에게 가장 높은 10단 높이까지 시도해보라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자기 키보다 훨씬 높은 뜀틀은 마치 높은 담장과도 같았습니다. 몇 번을 실패하며 눈물을 흘렸지만, 교사들은 믿어주었습니다. 결국 포기하려 할 때 반 아이들이 나와서 그를 둘러싸고 응원을 해 주니 가뿐하게 뛰어넘습니다.
우리는 종종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단 하나의 공통점은 자신의 입장을 무조건 이해하고 받아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댈 언덕을 제공한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그 사람의 인생은 180도 바뀔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이미 그것을 할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우리 한계를 뛰어넘을 때 사람들은 우리만이 아닌 우리에게 그런 믿음을 준 대상을 믿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의 방법입니다. 이러한 표징이 없다면 아무리 주님을 믿으라고 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가 우리 한계를 뛰어넘도록 믿고 계십니다. 제발 믿음이 있다면 제발 “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하느님을 부정하는 말임을 잊으면 안 됩니다. 성모 마리아의 믿음을 공경한다면 우리도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습성을 버리고 다 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말하면 믿게 됩니다. 믿어지면 결국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을 증명하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신의 지문’으로 잘 알려진 그레이엄 헨콕은 넷플렉스를 통하여 ‘고대의 아포칼립스’를 제작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기원전 12,800년경에 지구에는 대재앙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구 곳곳에 ‘대홍수’에 대한 신화와 설화가 있는 것은 당시 대재앙에 대한 인류의 기억이라고 합니다. 그때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문명이 있었는데 대홍수와 해수면의 상승으로 그 문명은 바다 속으로 사라졌거나, 없어졌다고 합니다. 다만 대재앙의 혼란 중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식과 문명을 당시 신석기인들에게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레이엄 헨콕은 고대의 아포칼립스를 통하여 당시 문명인들이 남긴 유적을 찾아서 보여 주었습니다. 대표적인 유적들은 “멕시코 촐룰라, 인도네시아 구눙 파당, 마이애미 대홍수 흔적, 고대의 거석문화, 튀르키예 지하 도시 데린쿠유, 괴베클레 테페’ 등이 있습니다. 그레이엄 헨콕은 고대 문명인들이 하늘을 관측하기 위해서 높은 사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인류의 문명이 직선으로만 발전하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35억년 지구의 역사에 최소 5번의 멸종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류의 문명 또한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선형으로 발전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고고학, 천문학, 유전공학은 고대의 문명을 찾는 학문이 되고 있습니다. 신화, 설화는 고대 문명이 우리에게 남겨준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또 다른 표징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여러 가지 이정표를 남겨 주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바라보면 보이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머물고 사는 지구는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정표입니다. 온 우주에 우리가 머무는 지구처럼 아름다운 별은 없습니다. 불, 땅, 공기, 물은 아름다운 자연에 생기를 넣어줍니다. 구름, 꽃, 새, 나무, 강, 바다, 산은 하느님의 엄위하심과 사랑을 느끼게 해 줍니다. 예술가들은 노래, 미술, 건축, 연극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였습니다. 흐르는 강물에 빛이 여울지는 걸 보면 참 아름답습니다. 산들바람에 단풍이 흔들리는 걸 보면 아이가 노래에 맞추어 춤추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은 도와주려고 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는 매주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라는 지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신문의 내용을 보시고 많은 분이 후원해 주십니다. 지금 힘들고, 아프고, 외로운 이들의 이웃이 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업적과 능력을 드러내기보다는 숨어서 향기를 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날의 허물과 잘못을 뉘우치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청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도 좋지만, 넓은 바다처럼 모든 것을 품어주고 받아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양심이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이정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언자는 철학, 사상, 문학, 예술, 종교를 통해서 정의와 공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앞날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우리가 지구별에 왔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성찰하게 해 줍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 줍니다. 처음부터 길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언자들의 뒤를 따라가니 길이 되었습니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조금씩 동이 트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스름하지만 칠흑 같은 밤은 지나가고, 여명이 시작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새벽을 밝히는 여명이었다면,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이정표를 약속하십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이젠 이정표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거라 말하고 있습니다. 여명은 사라지고, 붉은 태양이 떠오르면 천지 만물이 환하게 보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느 시간과 장소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는 지금 이곳이 하느님 나라가 되는 겁니다. 드디어 복음(福音)의 시대가 열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참된 자유, 참된 평화, 참된 행복이 시작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기쁜 소식은 마리아의 응답으로 현실이 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능력, 업적, 재능, 권력, 재물, 명예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마리아처럼 우리가 응답하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됩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 천사의 아룀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시어 성령의 빛으로 주님의 성전이 되셨으니 저희도 동정 마리아를 본받아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나자렛의 마리아처럼 그저 일어서라면 일어서야겠습니다. 떠나라면 떠나야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정말 부끄러운 일인데, 대체 왜 그랬는지, 과거에 제가 그랬습니다. 입만 열면 불평불만이 폭포수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취미가 뒷담화요 특기가 놀려먹기, 돌려까기였습니다.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왜 하필 나만? 왜 꼭 나야여만 하는가?
그런데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참 과묵한 사람이었는데, 가끔 입을 열면 그렇게 믿음직하고 듬직했습니다. 절대 다른 사람들 흉보지 않았습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아직 어려서 그렇겠지? 참 말을 이쁘게 하더군요.
그를 만나며,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내 모든 속사정을 털어놔도 아무 문제가 없겠구나...그러면서 제 심각한 언어생활을 깊이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가까이 그런 사람 한 사람 있다는 것,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이런 면에서 나자렛의 마리아의 언어는 지나치게 말 많은 우리, 때로 천박한 언어로 가까운 이웃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됩니다.
사실 마리아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구세사 안에서 큰 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복음서 안에 나타난 마리아의 언어는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그것은 그녀가 무척이나 과묵하고 진중했던 여인이었음을 반증하는 표시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다는 어마어마한 대사건 앞에서 두렵고 떨렸겠지요.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도 엄청났을 것입니다. 아직 어린 자신, 한없이 나약하고 부족한 자신 앞에 펼쳐질 하느님 구원의 손길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하는 고민 앞에 근심걱정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진정되고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자 마리아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너무나 엄청난 초대인지라 큰 의구심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용감히 여쭙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복음 1장 34절)
가브리엘 천사가 단칼에 해결해줍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복음 1장 35절)
그러자 마리아는 지체하지 않고 호의적으로 능동적으로 즉각적인 응답을 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복음 1장 38절)
마리아의 신속하고 즉각적인 순명으로 인해 과분하게도 구세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앞으로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겠습니다. 나자렛의 마리아처럼 그저 일어서라면 일어서야겠습니다. 떠나라면 떠나야겠습니다. 받아들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반영억신부-
연말을 맞이하면서 나라의 안녕을 위해 기도합니다. 매스컴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나라의 크고 작은 일들이 우리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남의 탓만 하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아프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인은 맑고 밝은 세상을 희망해야 합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우리의 빛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울타리를 고집하는 이들에게 성령의 역사를 이루시길 소망합니다.
제네시스 수도회 토마스머튼의 평화를 묵상합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당신이 평화라고 생각하는 것을 사랑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당신 생각에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 보다는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십시오! 그것들이 전쟁의 원인입니다. 평화를 사랑한다면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며 욕심을 미워하십시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 안에 있는 그것들을 먼저 미워하십시오."
성모님께서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며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일상 안에 주님의 뜻을 ‘종’으로써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종은 자기를 포기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순종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사실 믿는 이들은 서로에게‘종’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7-8). 그리고 사도들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2고린4,5)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주님의 종으로, 서로의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많은 직책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모든 것을 희생하고 감수하며 다 버리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하신 성모님처럼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성모님을 ‘경청의 달인’이라 칭하시며 성모님을 가득 채운 것은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곰곰이 되새기는 성모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매 순간 삶의 자리에서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천사는“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1,30).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는 내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지만 발견되느냐? 안 되느냐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은총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종 여러분,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두려워하고 떨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현세의 주인에게 순종하십시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기쁘게 섬기십시오”(에페6,6-7). 하고 권고합니다. 서로 섬기라는 간청입니다. 그러나 저는 대접받기 좋아하고 윗자리를 좋아합니다. 겸손하게 남의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가르치려고 하는 마음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신자 한 분 한 분의 마음을 헤아리는 넉넉함과 하느님의 종으로서 행동하는 삶을 새롭게 다짐하며 오시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삶을 살기를 원하오니, 몸으로 응답하는 오늘을 강복하소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년 12월 22일 대림 제4주간 (0) | 2022.12.22 |
---|---|
2022년 12월 21일 수요일 (0) | 2022.12.21 |
2022년 12월 19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0) | 2022.12.19 |
2022년 12월 18일 대림 제4주일 (0) | 2022.12.18 |
2022년 12월 17일 대림 제3주간 토요일 (0) | 2022.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