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19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루카 1,5-25)
“Do not be afraid, Zechariah,
because your prayer has been heard.
Your wife Elizabeth will bear you a son,
and you shall name him John.
And you will have joy and gladness,
and many will rejoice at his birth,
for he will be great in the sight of the Lor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단 씨족 마노아의 아내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었으나 주님의 천사가 예고한 대로 아들을 낳고 삼손이라고 한다(제1독서). 즈카르야 사제의 아내 엘리사벳은 아이를 못낳는 여자였으나 주님의 천사가 예고한 대로 요한을 잉태한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10년 전, 남미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남미 선교사 모임에 참석하기 위함이었지요. 3박 4일의 모임 일정을 마치고, 힘들게 이곳에서 언제 다시 올지 몰라서 같이 갔던 신부들과 페루 관광을 갔습니다. 수도인 리마로 갔다가 다시 쿠스코까지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쿠스코는 잉카 문명의 고대도시인 마추픽추에 가려면 반드시 들려야 할 곳입니다.
쿠스코 공항에 내리는 순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습니다. 머리가 아파서 아무것도 생각하기 힘들었습니다. 오로지 힘들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고산병 증세였습니다. 며칠에 걸쳐 천천히 올라와야 하는 길을 비행기로 단숨에 3,399m 높이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이때 산소의 중요함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평상시에는 산소를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이 어렵지 않아 그 고마움을 전혀 모릅니다. 하지만 산소량이 부족한 곳에 오니 평상시에 느끼지 못했던 ‘산소’가 얼마나 중요하고 감사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 산소가 바로 하느님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평상시에는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하느님께 대해 감사의 마음을 잘 갖지 않습니다. 또 자기에게 중요한 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어렵고 힘든 시간을 겪는 순간 하느님의 부재를 체험하면서 힘든 시간을 겪게 됩니다. 불평불만을 외칩니다. 하느님을 불합리한 분이고, 차별하시는 하느님이시고, 질투의 하느님이라며 원망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 순간이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할 때였습니다. 하느님 없이는 도저히 혼자 살 수 없음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즈카르야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세례자 요한 잉태 소식을 듣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감사하면서 받아들이기보다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라면서 하느님의 능력이 세상의 기준보다 높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보다 세상을 더 믿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즈카르야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믿음 없는 상태에서는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제대로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산소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처럼, 하느님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분입니다. 이렇게 꼭 필요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면서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힘겨운 상황에 처했을 때 부정적 결정을 내리지 마라. 침울할 때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마라. 기다려라. 폭풍은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봄이 올 것이다(로버트 슐러).
-조재형신부-
대부분의 성당에는 그동안 있었던 신부님들의 사진이 액자로 걸려있습니다. 제가 미사를 도와주는 퀸즈 정하상 바오로 성당에도 신부님들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정욱진 토마스 신부님, 안상인 요셉 신부님, 김인성 요한 비안네 신부님, 서상봉 다니엘 신부님, 이가별 가브리엘 신부님’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지금은 김문수 엔듀류 신부님이 있습니다. 내년이면 본당 설립 50주년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초대 신부님은 공동체의 씨를 뿌렸습니다. 서울교구 신부님들은 공동체에 물을 주었습니다. 잠시 머물렀던 예수회 신부님은 공동체에 거름을 주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 신부님들은 공동체가 꽃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를 이끄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제가 있는 신문사에도 사진이 걸려있지는 않지만 홈페이지에는 역대 신부님들의 명단이 있습니다. 신부님들이 모두 헌신적으로 신문사를 위해서 일하셨고 신문사는 창립 35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문사를 이끄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세종대왕은 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다른데 글은 중국 글자를 사용하니 백성들의 고충이 많다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말을 우리의 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글’을 창제하였습니다. 그것을 ‘여민락(與民樂)’이라고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 또한 ‘여민락’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던 마노아의 아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삼손’이며 태양의 힘을 가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이는 그 힘으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절망과 좌절 중인 여인에게 희망을 주었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즈카리야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가질 수 없던 아내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질 거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요한’이며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많은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새로운 길을 준비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자라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고, 주님보다 앞서서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성탄 무렵에 많이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천사라는 뜻입니다. 저는 저의 세례명을 참 좋아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왕이면 좋은 뜻을 전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때로 날개 잃은 천사가 되어서 방황하기도 하지만 저의 세례명처럼 주님의 뜻을 전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미주 가톨릭평화신문에서의 일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저의 세례명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이 이룬 일로 정해지는 이름도 있습니다. ‘독재자’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과 욕망에 따라서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독재자의 폭력에 의해서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선구자’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이름입니다. 밤을 새워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류는 그런 사람들이 밝힌 길을 따라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며 살았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목적은 세상의 명예와 세상의 성공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길은 바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초는 자신을 태울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듯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를 태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이 또한 ‘여민락’의 삶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측면의 결핍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양승국신부-
대림 시기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기여한 여러 인물들을 소개하며,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그들의 덕행을 본받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크게 기여하신 분은 마리아요 요셉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곧게 닦은 세례자 요한의 기여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의 부모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표현에 따르면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하느님 앞에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약점이랄까 아픔이 있었으니, 노년에 이르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불가능이란 없는 법, 그분께서 두 노인에게 크신 자비를 베푸시어, 상상을 초월하는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갖게 해주셨는데, 당시 그 사건은 엘리사벳과 즈카르야 당사자들은 물론 주변 사람들 모두가 ‘설마? 그럴 리가?’하고 고개를 저을 정도로 경천동지할 일이었습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인생역전의 예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듯이, 우리가 하느님을 제대로 만난다면 그 어떤 기적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우리가 단1 퍼센트도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축복과 은총이 생겨납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난다면, 세속적, 인간적 축복도 큰 은총이지만, 종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 그로 인한 구원이라는 선물이 뒤따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온몸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헛된 삶의 방식’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헛된 삶의 방식이란 공허하고 의미없는 삶, 허영심 강하고 천박한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종종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 여기고 살아갑니다. 때로 자신도 모르게 지극히 비인간적인 규범과 틀에 사로잡혀 그릇된 것을 참이라 여기고 목숨 걸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때로 어이없는 규정 혹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틀에 갇혀 허우적거리며 살아갑니다. 지나친 율법 지상주의, 과도한 완벽주의, 지나친 자기 비하와 죄책감이 그러합니다.
때로 구원이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놓은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헛된 규범, 엄격 주의, 완벽주의, 자기혐오, 죄책감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일 수도 있습니다.
조만간 새롭게 탄생하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우리의 속박과 굴레를 풀어주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엄격함도 원치 않으십니다. 지나친 자기 비하나 학대도 결코 바라지 않으십니다. 매사에 자유로워지기를, 모든 대상으로부터 편안해지기를 바라십니다.
비록 다양한 측면의 결핍과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현실 안에서 이 세상을 만끽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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