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2월 18일 대림 제4주일

Margaret K 2022. 12. 18. 06:19

2022년 12월 18일 대림 제4주일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 마태오 . 1,18-24)

Behold, the virgin shall conceive and bear a son,

and they shall name him Emmanuel,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의 신자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소개한다(제2독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는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이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믿음으로 당신의 명령을 따르기를 원하셨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종이에서 펜을 떼지 않은 채 4개의 직선으로 9개의 점을 연결하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간단해 보이지만 전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5개의 직선이라면 쉬울 것 같은데, 4개의 직선이라고 하니 하나의 선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정답을 보고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생각했던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우선 정답은 이러했습니다. 경계를 벗어나면 쉽게 풀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점에서 조금도 벗어나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에 문제의 해답을 찾지 못했던 것이지요.

‘틀을 벗어나는 사고방식’은 우리 일상 안에서도 분명 필요로 합니다. 사실 습관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기란 정말로 힘듭니다. 그래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경기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심판의 편파 판정으로 우리나라가 불리하다고 생각할 때가 더 많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가 승리하면 선수들이 잘해서이고, 다른 나라가 이기면 심판의 잘못된 판정과 텃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역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뜻도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요셉이 가지고 있었던 틀이 있었습니다. 의로운 사람, 율법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는 틀이었습니다. 이 틀에 의하면 마리아를 고발해서 공개 심판을 받게끔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틀을 깨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를 복음은 이를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파혼하기로 작정하지요. 파혼하기로 작정한 것은 아직도 틀 안에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합니다.

이 말에 그는 틀에서 완전히 벗어납니다. 고발하지도 또 파혼하지도 않으면서 성가정을 이룹니다. 천사의 명령이니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에서 이루어진 명령입니다. 꿈 꾼 것을 누가 그대로 따르겠습니까?

틀을 깨려고 시도했기에, 꿈을 통해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 틀은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요셉도 마리아를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제대로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장스완).

​나는 언제 임마누엘, 예수님을 원하게 되는가?

-전삼용신부=

https://youtu.be/usFuYEC2G8o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이유는 ‘임마누엘’이 되시기 위함임을 알게 됩니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게 해 주시는 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셔야 우리가 하느님처럼 되는 사실은 너무 명확합니다. 팀 호잇이란 이름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마라톤을 하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아버지는 태어날 때부터 눈만 껌뻑일 수 있는 모습의 아들을 위해 마라톤을 시작하였습니다. 아이가 달릴 때 장애를 잊은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는 이것에 감동하여 아버지의 뜻을 따라줍니다. 그래서 대학도 졸업합니다. 아버지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과 머물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문제는 창조자와 머물면 이전의 나는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달려주면 자신은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올해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내가 진정으로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원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만을 따를 것을 원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원하지 않으면 안 오십니다. 사람의 관계는 서로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이가 엄마보다, 엄마가 원하는 공부보다 스마트폰을 더 좋아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마트폰을 빼앗고 게임을 지우고 엄마를 바라보게 해야 할까요? 물론 그러면 아이는 살아남아야 해서 어느 정도는 엄마를 따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스마트폰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거의 게임 중독이 됩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50회에는 친구가 하나도 없고 오직 스마트폰에만 의지하려 하는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빼앗는 엄마가 나옵니다. 다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아이가 스마트폰을 향한 욕망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때 금지하면 아이에게 게임에 대한 욕망을 더 증폭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부모 먼저 죄와 집착은 고통임을 알아야 이렇게 놓아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질리도록 하게 내버려 두고 부모는 아이를 잠시 떠나는 것입니다.

 

물론 불안하고 무책임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아이가 정말 중독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해야 합니다. 부모인지, 부모가 줄 수 있는 것인지. 아이가 부모가 줄 수 있는 것을 원하는데 그것을 빼앗고 부모와 억지로 머무는 것이 좋은 것임을 강요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 없이 스마트폰만 보는 것이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임을 스스로 느끼게 해야 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제가 신학교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혼하지 못하는 삶을 평생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때 여자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머니가 사제 서품식에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물론 저는 가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홀로 집에 남았습니다. 집에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좋지 못한 비디오를 보며 게으른 짐승처럼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의 모습이 매우 비참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행복해 보이지 않아야 다른 것이 행복하게 보입니다.

 

아이가 뜨거운 것을 만지려고 할 때 엄마는 아이의 손을 살짝 데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거부만 한다면 아이는 그것에 대한 환상을 계속 품습니다. 그리고 그 환상을 키워나갑니다. 만약 그 환상이 믿음이 된다면 고통스러워도 자기 믿음을 바꿀 마음이 없어서 중독되면서도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일찍 일찍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고통임을, 심지어 부모를 잃어버리게 됨을 알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미지근한 사람을 뱉어버리십니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하늘과 땅의 중간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게 만듭니다. 법을 통해서입니다. 원하지도 않는데 다가와서 명령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죄를 짓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완전히 주님과 머물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더 신앙을 갖기 어렵게 만듭니다. 지옥까지 갔다 오게 해야 합니다. 무책임한 것 같지만 이것이 하느님께서 쓰시는 방식입니다. 그 지옥에 있는 이들만, 그 어둠에 있는 이들만 빛의 소중함을 압니다.

 

저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 초등학교 때 술과 담배를 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술은 쭉 하고 있고 담배는 그때 맛을 보고는 맛을 느끼지 못해서 피우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유였습니다. 그때부터 하고 싶은 것을 다 했습니다. 이렇게 일찍 놓아주면 아이들은 큰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참기 더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초등학생이 술과 담배를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부모님이 그것을 말렸다면 저는 지금도 술 주정뱅이와 담배에 찌든 사람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그 맛의 향수를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술도 마시지만, 과음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담배는 절대 피우지 않습니다. 피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어렸을 때 술과 담배였지만, 이것이 결혼이나 돈을 버는 것과도 연관됩니다. 아이들은 압니다. 하나를 실컷 해 보면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임을, 별 게 없음을, 그래서 최대한 이른 나이에 아이들이 자기 뜻대로 사는 것과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을 찾는 것,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다행히 저는 하.사.시.를 통해 저를 이끌어줄 스승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 말씀이 더 믿어졌기 때문에 사제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혼을 해 보지 않아도 술과 담배를 피우는 것과 그때 생각한 결혼의 환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으라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죄와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아주 끝장나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그 죄의 쓴맛을 톡톡히 보는 게 좋습니다. 그렇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이 돌아올 수 있는 한계 내에서 그렇게 하지 책임질 수 없는 상태로 막 나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위에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할 때 반발 심리로 돌아올 수 없게 됩니다.

 

네덜란드는 매춘과 대마초와 같은 마약이 합법입니다. 술집에 들어가면 대마초 냄새가 코를 찌르고 길을 지나가면 빨간 불 밑에 아가씨들이 유혹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세계에서 범죄율이 거의 최저인 나라가 네덜란드란 것입니다. 오히려 합법화 시키니 그것을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매춘이 불법이기는 해도 네덜란드보다 성범죄가 훨씬 많습니다.

네덜란드는 마약, 매춘, 동성애, 안락사, 공원에서 성관계 허용 등을 합법화해서 그것을 통제 못 하면 범법자가 아닌 아픈 사람으로 여기고 치료해줍니다. 그것을 한다고 범법자로 만들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 아픈 사람임을 깨닫고 치료를 받게 해야 합니다.

 

범죄자에서 갱생하는 것이 어려울까요, 아니면 아픈 사람이 치료 받으러 오는 것이 어려울까요? 당연히 자신을 범죄자가 아닌 환자로 여기는 사람이 갱생할 확률이 높습니다. 부모가 자꾸 자녀에게 무언가를 금지하는 것은 자녀를 아픈 사람이 아닌 범죄자로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갱생이 더 어렵습니다.

놓아주고 풀어주고 믿어주고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스스로 부모와 머물기를 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방식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죄의 지긋지긋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언젠가 돌아올 것을 믿게 됩니다. 죄가 싫고 나로 사는 게 싫어졌다면 이제 비로소 그리스도를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요셉의 믿음, 그 깊이와 높이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7DPHxBsZfkE

 

​-조재형신부-

오늘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의 두 번째 이야기 ‘사라예보’ 사건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라예보는 탁구의 이 에리사 선수가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유고슬라비아의 도시입니다. 그러나 사라예보는 세계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된 도시이기도 합니다. 사라예보에서 한 청년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태자를 저격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서 당시 세계는 동맹국과 연합국으로 나뉘어서 끔찍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과학기술은 발전하지만 인류의 지성은 진보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1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무기의 시험장이 되었고, 인류는 하느님의 모상을 버리고, 동생을 죽였던 카인처럼 이웃을 향해 총과 칼을 겨누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불씨는 사라예보에서 있었던 한 청년의 총구에서 시작되었지만 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만나서 탐욕과 정복으로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는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고유한 문화는 말살되고, 자원은 수탈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제국주의의 탐욕은 끝나지 않았고, 20년 후에 2차 세계대전으로 인류는 또 한 번 참혹한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오늘은 대림 제4 주일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제국을 만들고, 세계를 정복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탐욕과 욕망으로 식민지를 건설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약소국의 문화를 말살하고, 자원을 착취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이념, 세대, 혈연, 학연, 지연, 종교로 편을 가르고 차별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임마누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복음을 선포하신 분이셨습니다.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할 것이라고 하면서 철저하게 비폭력을 실천하신 분이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분이셨습니다. 가난한 이들, 갇힌 이들, 아픈 이들, 세리, 창녀, 이방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분이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친구의 잘못을 기꺼이 용서하라고 하신 분이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아픈 사람,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사라예보는 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임마누엘 주님이 태어나시는 베들레헴은 하느님의 나라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베들레헴 성전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여행객으로 이곳에 왔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가면 좋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순례자로 이곳에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가면 좋겠습니다.” 임마누엘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거룩한 사람은 신분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은 능력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은 직책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은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가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했던 자캐오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지만 닭이 울자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 사도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던 요셉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대림 4주일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신비’를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부족하고, 죄를 많이 지었고, 별로 잘한 것도 없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권능과 모든 권세를 가지진 분이 아주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쁜 꽃이 그 고운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두운 땅속에서 끊임없이 양분과 물을 찾아 고생하는 뿌리의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건강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기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주님의 성탄을 이렇게 잘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말없이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한 고마운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주님께서 하신 약속들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면,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기쁘게 생활한다면 바로 이곳에도 분명 주님께서는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에 베들레헴으로 오셨던 임마누엘 주님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겸손과 비움의 구유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그 몸에 잉태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가까이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채비를 갖추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준비만으로는 부족한 일입니다.

준비를 넘어서, 이제는 우리의 결정적인 협조를 필요로 할 때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탄생이 우리의 협조를 통해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아기 예수의 탄생도 요셉과 마리아의 응답과 협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이를 잘 보여주는데, 먼저 제1독서에서는 임마누엘의 탄생이 예고되고, 곧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다.”(이사 7,14)라고 예고됩니다.

제2독서에서는 예고된 이 일이 이루어진 다음, 그 은총으로 이루어진 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곧 바오로는 자신의 사도직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총임을 말하고 있습니다(로마 1,1-7).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이 요셉의 협조를 통해 이루어짐을 밝혀줍니다.

이를 먼저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태 1,18)

 

이 소식에 요셉은 무척 당혹했을 것입니다.

약혼자의 임신 사실에 온갖 의혹과 치욕스런 배신감으로 분노와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에 대한 서운함과 불신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남자 없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궁색하고 구차한 변명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약혼녀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사실을 드러내어 재판을 걸게 되면 그녀를 죽음에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그냥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마리아를 집 안에 받아들이는 일도 우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적인 고소를 통해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마태 1,19)

참으로 그는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었습니다.

 

그럴 즈음에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에게서 벌어진 일을 밝혀줍니다.

“그 몸에 잉태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태 1,20)

 

참으로 기이하고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과 자연계의 모든 법칙을 뛰어넘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이 터무니없는 일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그렇지만 그는 ‘의심’이라는 악을 떨치고, ‘신비’라는 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 일이 거룩한 분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믿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 안에 자신을 가두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지혜로 가히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 은총의 법을 따르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은총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아직 뜨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 빛으로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약혼녀 마리아의 성령잉태 사실뿐만 아니라, 요셉에게도 ‘사명’을 부여합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마태 1,21)

 

이처럼 주님의 천사는 그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곧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붙이는 영예를 받았습니다.

비록 아기는 자신의 자식이 아니지만, 그를 보살필 아버지로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마침내 요셉은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분 뜻에 협조자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아내를 맞아들였습니다.'(마태 1,24).

 

참으로 그는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결국 그는 결혼하기도 전에 아내를 포기해야만 했고, 아들을 얻기도 전에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인류를 향한 하느님 ‘구원계획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온 누리에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우리의 협조’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구원의 협조자’가 된다는 것은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는 '그분의 뜻' 안에 머물고, '그분의 뜻'에 따라 협조하여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침묵으로 하느님의 음성에 마음의 귀를 열고, '아버지의 뜻'에 순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분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요셉 성인과 함께 구원의 협조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활동과 거룩한 분의 힘을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의심하기보다 신비를 품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마태 1,20)

 

주님!

의심을 떨치고 신비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의 개입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기이하고 황당하게 보여도 ‘당신의 뜻’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게 보여도 ‘당신의 뜻’을 품고 살아가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뜻’을 세우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