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2. 12. 15. 06:10

2022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간 목요일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루카 7,24-30)

 

“What did you go out to the desert to see ?

a reed swayed by the wind?

Then what did you go out to see?

Someone dressed in fine garment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는 만군의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가엾이 여기시어 퇴박맞은 젊은 시절의 아내인 양 다시 부르신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한 아이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아이는 밥 먹을 때 입으로 들어가는 밥은 겨우 반이고 나머지는 다 바닥에 흘려요.”

이 어머니의 입장에 서서 아이 반응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사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음식을 낭비하고 있잖아. 엄마 화났어.”

“먹고 싶은 것만 먹고 안 먹고 싶은 것을 버리다니. 왜 멋대로 행동하는 거야?”

“널 위해 힘들게 식사 준비했는데 함부로 흘리다니, 엄마의 가사노동을 무시하는 거야?”

이런 부정적 생각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먹고 싶을 때는 먹고, 먹고 싶지 않을 때는 먹지 않고, 우리 아이는 주관이 확실해.”

“얼마나 맛이 없으면 먹으면서 버릴까? 그래도 참고 먹느라 고생했어.”

“밥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떨어뜨렸구나. 아이는 밥도 장난감이 될 수 있다니까.”

밥을 먹는 행위로도 다양한 해석과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석하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기분이 달라집니다. 앞서 부정적 생각을 했을 때는 화와 분노가 나오고, 긍정적 생각을 했을 때는 사랑의 마음이 나옵니다. 화, 분노가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긍정적 생각으로 나의 마음을 바꿀 수 있도록 한 번 더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로, 주님의 앞길을 잘 닦아 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나가 사람들이 회개의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 지도자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는 세례자 요한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세례받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는 부정적 생각으로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활동도 부정적으로 생각해서, 사회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미치광이처럼 판단합니다. 전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하느님의 뜻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해서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특히 사랑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더 가까이에 계심을 발견할 것입니다.

스스로 삶의 주인공이 되는 방법은 하나다.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인답게 일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성장한다(이정현).

요한의 세례란? 나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전삼용신부-

https://youtu.be/isdTNZ8L1_k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성령 세례 이전에 이미 요한의 세례에서 구원이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요한 7,29-30)

 

이 말씀에 따르면 요한의 세례는 곧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뜻’이라고 번역한 원문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스어로 ‘불레’라는 이 단어는 “계획, 의도, 목적”의 의미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바라시는 뜻이 아닌 ‘이전에’ 세상을 향한, 혹은 나를 향한 계획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임이 곧 세례자 요한의 세례입니다.

 

신학교에 들어오면 첫 피정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역사를 생각나는 것부터 쭉 써보라고 합니다. 저는 왜 그런 것을 쓰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첫 기억부터 쭉 쓰면서 깨달은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처음부터 부르고 계셨다’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사제가 되기로 한 가장 중요한 책이 하.사.시.였다고는 하지만, 사실 저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부러웠습니다. 그 부러움에 사제가 되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결심하게 된 이유는 저의 모든 판단의 기준은 ‘행복’이었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들어와서도 밖이 더 행복하게 보이면 바로 나가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란 선택의 기준은 바로 저의 첫 기억인 할머니의 돌아가심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처음부터 행복을 찾게 하시고 그 행복을 통해 제가 사제가 되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이 ‘예정설’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 따르면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라고 나옵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인간이 물리칠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면 나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계획이 더 행복하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만들어진 이, 곧 피조물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느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심을, 항상 옳은 분이심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이승복 박사는 미국으로 유학 가서 체조 선수라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지만 척추 손상으로 올림픽 금메달의 꿈은 물론 손가락도 움직이기 어려운 장애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것도 다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는 것입니다. 분명 하느님께서 당신을 좋은 일에 쓰시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믿을 것인지, 안 믿을 것인지는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그는 그 말을 믿었고 최고의 재활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체조선수의 꿈은 딸이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창조자이십니다. 창조자는 항상 ‘의도’를 가지고 무언가를 만듭니다. 이 의도가 ‘불레’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그 안에도 하느님의 의도가 분명히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하늘과 땅은 두 상반되는 극과 극을 상징하는 도구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하늘이시라면 인간은 땅입니다. 하느님은 죄를 지은 인간에게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의 벌입니다. 만약 죄를 짓지 않았다면 먼지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듯, 죄를 짓지 않았다면 하늘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땅이 어떻게 하늘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늘의 것을 받아들이고 하늘에 순종하면 됩니다. 인간의 몸 안에 산소가 없으면 인간은 죽습니다. 그 산소는 하늘의 것입니다. 인간은 공기를 마시며 그 공기 속에서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땅이 하늘의 것을 받아들이고 하늘 안에 머물면 땅도 하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된 여자의 몸에서는 난자가 만들어집니다. 그 난자는 여자의 몸 밖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짧은 한 달의 주기를 끝으로 죽고 맙니다. 난자가 더 오래 사는 법은 밖에서 자신을 초대하는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것이 정자입니다. 정자를 받아들인 난자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 여자의 몸 밖에서 살게 됩니다. 그것도 아주 오래 살게 됩니다. 땅과 하늘이 하나가 되는 방식은 다 이렇습니다.

 

성자께서는 하늘에 속한 분이시지만 직접 땅의 인간이 되셔서 어떻게 하늘의 인간이 될 수 있는지 보여 주셨습니다. 보여 주어야 인간이 따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을 당신 안에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39; 마르 14,36; 루카 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느님도 하늘에 아드님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심으로써 땅의 육체를 지닌 인간도 하늘에 살 수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원리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하늘에 사시고 인간은 땅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하늘은 남자로 땅은 여자로 봅니다. 신약 성경에 와서는 그리스도가 신랑으로, 교회가 신부로 표현됩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오신 분으로서 하늘로 들어갈 수 있는 하늘의 말씀을 지니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요한 1,12)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은 마지막 때에 하느님의 어린양과 혼인하게 됩니다(묵시 21,1: 9-10 참조). 교회는 진정 “흠 없는 어린 양의 흠 없는 신부”(796항)입니다. 머리로서 그리스도를 신랑이라 부르고 몸으로서 자신을 신부라 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796항 참조).

 

이렇게 교회와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가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의 혼인이 완성되고 그때가 창조의 마지막 시간이 될 것입니다(묵시 21장 참조). ‘하늘과 땅’의 창조로 시작된 역사는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의 결합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것이 주님 창조의 계획입니다. 다만 하늘에서 오는 말씀에 ‘순종’할 줄 아는 사람만이 ‘하늘에 속한 땅’이 됩니다.

 

하느님은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실 때부터 흙으로 된 모든 인간을 하늘에 속하게 하시기 위해 계획하셨습니다. 그 계획은 분명 하늘의 씨,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것에 순종 하는 일로 성취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주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기들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행동으로 하느님처럼 되려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에 가치를 두는 일이 하느님을 의롭지 않은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만드신 분은 만든 것에 책임을 지십니다. 자녀가 자녀가 되는 것이 자녀의 행위에 달리지 않았습니다. 만들어진 것은 만드신 분의 계획에 따름이 가장 행복하고 좋은 일이고 생명을 지속하는 길임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요한의 세례를 받음입니다. 우리가 피조물임을 인식하고 창조자의 계획이 있음을 믿고 매 순간 나를 향한 주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물으며 살도록 합시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Yd1thDSLaa0

 

​-조재형신부-

학교에 다니면서 늘 부담되는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주시는 숙제도 있지만 가장 큰 부담은 ‘시험’입니다. 시험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있습니다. 사제가 강론만 없으면 지낼 만 하다는 농담이 있듯이, 시험이 없으면 학교에 다닐 만 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군대에서 훈련이 없으면 기강이 해이해지고, 전투에서 승리하기 어렵습니다. 학생에게 시험은 군인에게 훈련과 같습니다. 시험은 그동안 배운 것들을 확인하는 방법입니다.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이고, 모르는 것은 무엇인지 확인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강론은 사제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특권입니다. 사제는 강론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선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좋은 강론은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보여 줍니다.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위로를 줍니다. 나약해진 이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분노한 이들에게 평화를 줍니다. 죄를 지은 이들은 용서를 청할 수 있도록 회개의 기회를 줍니다. 잘못한 이들을 용서할 수 있는 자비의 마음을 줍니다.

 

오늘은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에 대해서 중간 점검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탄생을 준비하는지, 대림시기 주일의 전례는 어떤 의미를 지지고 있는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주님의 탄생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다시 오시는 주님의 재림을 합당한 방법으로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대림은 2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앞으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림 제1주일은 ‘깨어 있음’을 전합니다. 내가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10처녀의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깨어 있는 것입니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별을 보고 예수님께 경배 드리러 왔던 동방박사들은 깨어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을 축복했던 시메온과 한나도 깨어 있었습니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듯이 깨어 있는 사람이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습니다.

 

대림 제2주일은 ‘회개’를 이야기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곧게 내러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세리에게, 군인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 하였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세상의 것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한 사람 아흔 아홉도 중요하지만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늘나라에서도 더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회개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대림 제3 주일은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언제가 감사하십시오.’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나의 웃음은 웃음이 되어 나에게 돌아옵니다. 나의 분노도 분노가 되어 나에게 돌아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른다. 사막에 꽃이 핀다. 사자가 어린이와 함께 뛰논다. 늑대가 어린 양과 함께 걷는다.” 신앙은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기쁨이 아닙니다. 그런 기쁨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 기쁨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계속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자비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노아의 물이 다시는 땅에 범람하지 않으리라고 내가 맹세하였듯이 너에게 분노를 터뜨리지도 너를 꾸짖지도 않겠다고 내가 맹세한다.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들이 흔들린다 하여도 나의 자애는 너에게서 밀려나지 않고 내 평화의 계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가엾이 여기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우리가 주님의 탄생을 정성껏 준비한다면, 우리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깨어서 기다린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이 어두워지면 질수록 우리는 위로부터의 빛에 우리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과 마음을 손에 잡힐 듯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깊이 빠진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견디기 힘든 일, 가장 가슴 미어지고 슬픈 일 한 가지는 그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해 시선을 돌릴 때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하느님도 그런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마음과 사랑을 지니신 분. 그래서 우리가 당신이 아니라 다른 대상을 향해 눈길을 돌릴 때면 불타는 질투심으로 분노하시는 분.

 

우리가 당신을 외면할 때, 우리가 당신에게서 등을 돌릴 때, 우리가 당신을 두고 멀리멀리 떠나갈 때, 너무 괴로운 나머지 식음조차 전폐하시는 분, 배신감에 온몸을 부들부들 떠시는 분.

 

그러나 이내 우리를 향한 분노와 적개심을 푸시고, 다시 한번 간절히 우리의 돌아섬을 기다리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런 하느님의 모습이 이사야 예언자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지만, 크나큰 자비로 너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분노가 북바쳐, 내 얼굴을 잠시 너에게 감추었지만, 영원한 자애로 너를 가엾이 여긴다.”(이사야서 54장 7~8절)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의 가련함과 나약함, 우리의 허전함과 쓸쓸함을 못견뎌 하시는 분입니다. 어떻게서든 우리의 기를 살려주시고, 우리 얼굴에 미소를 짓게 만드시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어쩌면 성탄은 우리 인간을 향한 그런 하느님의 마음을 가장 뚜렷하게 표현한 은혜로운 사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분들이 마치 길고 긴 어두운 터널 속을 지나는 듯한 느낌이랍니다. 성탄이 가까이 다가오지만, 많은 사람들이 짙은 어둠 속에 앉아 있습니다.

 

어둠이 짙어갈수록 우리는 더 강렬한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짙은 암흑 속을 걷는 오늘 우리에게 순교자 에디트 슈타인 수녀님의 성탄 메시지는 큰 위로와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 주변이 어두워지면 질수록 우리는 위로부터의 빛에 우리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그가 네 앞에서 그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보낸 제자들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루카 7,19)라는 질문에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의 성취를 통해 당신의 메시아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들이 돌아가자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세례자 요한에 대해 증언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야?

~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 예언자냐? 그렇다.”

(루카 7,24-26)

이는 그가 '예언자'라는 증언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밝히십니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그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루카 7,26-27)

이는 그가 단순한 예언자가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선지자라는 말씀입니다.

곧 메시아에 앞서 와서 길을 닦으러 온 사자임을 밝히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이루신 후에 산에서 내려왔을 때, 제자들이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라고 묻자, 예수님께서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1-12)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루카 7,28)

이는 구속사의 흐름에서 요한이 차지하는 위치를 주지시켜주는 동시에, 그가 구약의 한계에 속한 인물임을 드러내십니다.

곧 ‘그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서는 가장 큰 이’나,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작은 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쌀쌀한 찬 겨울, 우리는 대림을 지내면서 어디에 나와 있는지를 들여다 볼 일입니다.

광야에 나와 있는지, 왕궁에 나와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보러 나와 있는지, 누구를 만나러 나와 있는지를 말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무엇을 만나고 누구를 만났는지, 아니 무엇을 찾고 누구를 보았는지 말입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왕인지, 헐벗은 옷을 걸친 예언자인지, 혹은 세상에서 큰 자인지, 하느님 나라의 ‘작은 자’인지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루카 7,24)

 

주님!

기다리다가 기다림에 끌려 나아갑니다.

오시기에, 오시는 임에 끌려 나아갑니다.

떠나야 당신을 만날 수 있기에, 힘껏 저 자신을 박차고 갑니다.

의심도 흔들림도 화려함도 껍데기도 벗어버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