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14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1542년 스페인 아빌라의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을 체험한 요한은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하다가 사제가 되었다. 이후 ‘아빌라의 성녀’로 잘 알려진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영성 생활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 1591년 세상을 떠난 그는 1726년에 시성되었고, 1926년에는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인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가르멜의 산길』, 『어두운 밤』, 『영혼의 노래』 등은 영성 신학의 고전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루카 7,18ㄴ-23)
Are you the one who is to come,
or should we look for ano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어느 책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습니다.
“첫째는 부모의 자랑이고, 둘째는 부모의 사랑이다.”
첫째를 낳았을 때는 자신도 부모가 처음인지라 아이가 예쁘다는 것을 느낄 여력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둘째는 여유와 인내심을 가지고 대하다 보니 너무 예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는 부모의 사랑이랍니다.
첫째는 부모의 자랑이 되어 많은 기대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첫째에게는 많은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고, 물질적인 풍요도 동생과 비교하면 많이 받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의 자랑이라는 기대감이 너무 부담된다는 첫째의 하소연을 많이 듣습니다. 또 동생에게 양보하고, 동생을 돌보기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둘째는 고충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둘째 역시 힘듭니다. 첫째가 쓰던 것을 물려받고, 교육의 혜택도 첫째만큼 못 누립니다.
첫째든, 둘째든, 막내든, 외동이든지... 자기 자리에서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어떤 처지에서도 자신이 짊어질 무거운 짐 한 두가지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힘들게 하는 짐만이 보입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 짐은 자기 짐보다 너무 가볍다고만 생각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가 있을까요?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칭호에 대해 의심하면서, 믿음에 대해 불필요한 감정의 소비라고만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삶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를 주님께 보내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루카 7,19)라고 묻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이심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가 에인카렘에서 만나셨을 때, 즉 뱃속에서 이미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보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 그가 의심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자기 제자들이 직접 예수님을 뵙고 알아볼 수 있도록 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의 나약함 때문입니다.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늘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그 완벽해 보이는 세례자 요한까지도 말이지요.
자기 짐을 바라보면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짐이 무겁다면서 불평불만 속에 있으면 당연히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내 곁에서 볼 수 없기에 행복할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의심을 품지 말고 주님과 함께하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충격적이고 독특한 것을 주려고 애쓰지 마라. 그냥 따뜻하고 좋은 것을 주면 된다. 좋은 것만이 영원히 남는다(팀 페리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책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습니다.
“첫째는 부모의 자랑이고, 둘째는 부모의 사랑이다.”
첫째를 낳았을 때는 자신도 부모가 처음인지라 아이가 예쁘다는 것을 느낄 여력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둘째는 여유와 인내심을 가지고 대하다 보니 너무 예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는 부모의 사랑이랍니다.
첫째는 부모의 자랑이 되어 많은 기대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첫째에게는 많은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고, 물질적인 풍요도 동생과 비교하면 많이 받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의 자랑이라는 기대감이 너무 부담된다는 첫째의 하소연을 많이 듣습니다. 또 동생에게 양보하고, 동생을 돌보기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둘째는 고충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둘째 역시 힘듭니다. 첫째가 쓰던 것을 물려받고, 교육의 혜택도 첫째만큼 못 누립니다.
첫째든, 둘째든, 막내든, 외동이든지... 자기 자리에서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어떤 처지에서도 자신이 짊어질 무거운 짐 한 두가지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힘들게 하는 짐만이 보입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 짐은 자기 짐보다 너무 가볍다고만 생각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가 있을까요?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칭호에 대해 의심하면서, 믿음에 대해 불필요한 감정의 소비라고만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삶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를 주님께 보내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루카 7,19)라고 묻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이심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가 에인카렘에서 만나셨을 때, 즉 뱃속에서 이미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보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 그가 의심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자기 제자들이 직접 예수님을 뵙고 알아볼 수 있도록 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의 나약함 때문입니다.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늘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그 완벽해 보이는 세례자 요한까지도 말이지요.
자기 짐을 바라보면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짐이 무겁다면서 불평불만 속에 있으면 당연히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내 곁에서 볼 수 없기에 행복할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의심을 품지 말고 주님과 함께하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충격적이고 독특한 것을 주려고 애쓰지 마라. 그냥 따뜻하고 좋은 것을 주면 된다. 좋은 것만이 영원히 남는다(팀 페리스).
-조재형신부-
신학생 때입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청소는 알아서, 스스로 했습니다. 학년별로 맡아 청소하는 구역도 있었습니다. 낙산 오솔길, 테니스 장, 운동장, 학교 정문, 식당, 체육관, 빨래방, 교수관 등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아침 식사 후 동료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가끔씩 생활지도 신부님들께서 청소상태 점검을 하였습니다. 학년별로 맡은 구역도 하지만, 개인 방을 점검하기도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의 점검은 청소상태만 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규정에 위배되는 물건은 없는지도 보았습니다. 신학생의 품위에 어긋나는 것들은 없는지도 보았습니다. 신부님들의 점검이 있을 때면 알아서 버릴 것들은 버리고, 감출 것들은 감추기도 하였습니다. 4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군대에서도 내무반 별로 청소하는 구역이 있었습니다. 내무반은 물론 각자의 관물대도 청소해야 했습니다. 신학교보다 점검하는 방식이 엄격했지만 방식은 비슷했습니다. 군대의 규정에 어긋나는 것들은 알아서 감추거나 치웠습니다. 이런 점검이 부담이 되었지만, 이런 점검을 통해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동료 신부님 중에 한 분은 별명이 ‘보물선 선장’이었습니다. 신부님 방에는 물건이 많았습니다. 신부님이 쇼핑을 하기도 하고, 선물을 받기도 하고, 전부터 가지고 있던 것들도 있습니다. 바쁘기도 하지만, 정리하는 습관이 익숙하지 않아서 가끔씩 신부님의 방을 가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밭에 보물들이 묻혀있는 것 같았습니다. 한번은 동료 신부님들이 보물을 찾아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기꺼이 신부님들의 방문을 환영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각자 필요한 물건을 찾아냈고, 보물선 선장 신부님은 대부분은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신부님은 방 정리를 하였고, 다른 신부님들은 각자가 원하는 보물을 찾았습니다. 저는 신부님처럼 보물선의 선장은 아니지만 가끔씩 서랍과 사무실의 수납장을 정리하곤 합니다. 유효기간이 지난 것들을 버리기도 하고, 필요가 없어진 서류들을 정리하기도 하였습니다. 가끔씩 보면 동네에서도 창고 정리하는 광고를 봅니다. 예전에는 필요했지만 지금은 필요 없는 물건들을 싼값에 이웃들에게 파는 행사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들의 마음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걱정, 불안, 시기, 질투, 분노, 원망은 가끔씩 정리해서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들어오면 온유, 인내, 친절, 나눔, 희생과 같은 것들은 자리를 빼앗기기 마련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면서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마치 신학생들이 생활지도 신부님께 ‘저희가 청소를 잘 했는지요?’ 라고 묻는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요한은 군중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에게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군인들에게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이는 없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크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세상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복음을 사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우리들 마음의 밭을 깨끗하게 정리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요한 사제의 눈은 언제나 개혁과 쇄신을 향한 불꽃으로 이글거렸습니다!
-양승국신부-
하느님과 교회, 세상 앞에 장엄하게 청빈 서약을 한 수도자로서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과연 나는 오늘 진정으로 청빈한가? 라고 자문해보니, 너무나 부끄러운 나머지 할 말을 잃습니다.
더 이상 가난하게 살지 않은 동료 수도자들의 한심한 모습이 안타까웠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한탄 조로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청빈은 우리 축성생활자들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방벽입니다. 고급 승용차에, 최첨단 기기를 장착하고 살아가는 사제, 수도자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자전거를 쌩쌩 타고 다니시는 비서 신부님의 모습이 정말 멋져 보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1542~1591)가 살아가던 중세 시대나 지금이나 물질과 안락한 삶에 대한 애착은 수도자들에게 있어 큰 유혹꺼리로 작용했던가 봅니다.
당시는 수도 생활의 부흥기를 지나 일종의 쇠락기에 접어든 시기였습니다. 더 이상 수도자들에게 있어 완덕에 대한 열망이나 하느님 중심의 삶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타성에 빠진 수도자들의 얼굴은 냉랭했고, 게을러빠진 수도자들은 자꾸만 회칙을 완화시켰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충실하고 올곧은 가르멜 수도자 요한은 원칙대로! 를 강조하며 고난과 형극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안토니오 수사를 비롯한 마음이 맞는 수도자 몇 명과 더불어 엄격한 금욕과 극기, 기도와 고행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안락하고 쾌적한 대 수도원 건물을 뒤로하고 다리를 뻗기도 힘들고 서 있기도 힘든 작은 방에서 함께 생활했는데, 여기저기 비가 새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얼굴로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외출을 할때는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녔습니다. 이러한 쇄신된 삶을 살아가면서 끝끝내 회개하지 않는 동료 수도자들을 회개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자연스레 얼굴과 뱃속에 기름이 가득한 게을러빠진 동료 수도자들에게 미운털이 깊이 박혔습니다. 자신들의 비행이나 과오는 덮어둔 채, 갖은 방법으로 요한 사제를 괴롭혔습니다.
총회가 개최되자 요한 사제를 오해한 총장은 그를 톨레도 수도원의 깊은 지하 감방에 가두었습니다. 그가 총회에 나타나서 어떤 행패를 부릴지 몰라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 사제는 갖은 학대와 모욕을 묵묵히 견뎌냈습니다. 사악하고 매정한 동료 수도자들을 향해 일언반구도 항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바꾸었습니다. 부족한 내게 겸손의 덕을 쌓게 하는 은인!
이토록 탁월한 성덕은 오래가지 않아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머지않아 요한 사제의 결백과 인품이 알려졌고, 비오 5세 교황과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은 그의 이상을 추구하는 수도자들을 위한 특수한 가르멜회를 정식으로 인준했습니다.
혈기왕성하던 젊은 시절을 수도회 개혁에 몸 바친 요한 사제의 눈은 언제나 개혁과 쇄신을 향한 불꽃으로 이글거렸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의 삶도 조금 바뀌었습니다. 좀 더 너그럽고, 좀 더 풍요로워졌습니다. 자신을 다스리는 데는 엄격했지만, 타인을 대하는 데는 한없이 관대해졌습니다. 그렇지만 수도회 개혁과 쇄신을 향한 그의 노선을 단 한치도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이영근신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루카 7,19)
“오실 분”은 메시아를 가리킵니다(시 118,26; 다니 7,13;9,25-27; 말라 3,1;사도 19,4; 히브 10,37; 묵시 1,8;4,8).
그런데 요한의 이 의구심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아마도 그는 감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혼란에 빠졌고, 예수님께서 과연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인지 확인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자신이 선포했던 ‘메시아 상’과는 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요한은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가려 쭉정이를 불태울 심판자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쁜 나무를 찍는 도끼의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과 함께 고통당하는 사랑을 말씀하셨고, 죄인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을 구하기 위해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메시아 예수님께 대한 의혹과 혼란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혼란과 의구심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아 상’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이 다급한 물음, 곧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라는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렇다. 내가 그다’라는 분명한 대답을 주지 않으시고, 예언된 말씀의 실행을 통해, 자신이 “오실 분”임을 증언하십니다.
곧 당신이 손수 하신 일을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증언하십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하시는 일을 보고 사람들이 당신이 누구신지를 깨달아 알도록 인도하십니다.
“눈 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걷고,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죽은 이들이 일어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루카 7,22)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루카 7,23)
이는 의심을 품지 말라는 아주 냉혹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자신의 기존 표상과 관념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질책과 경고의 말씀입니다.
자신 안에서 먼저 자기 관념을 깨부수라는 철퇴입니다.
동시에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혼란에 빠지지 않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행복 선언입니다.
곧 자신이 생각했던 메시아의 표상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는 복되다는 진복 선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의심을 품지 않는 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처럼 말씀의 실행을 통해 자신의 신원을 증언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루카 7,23)
주님!
먼저 죽고 나중에 사는 당신의 생명의 길을 가게 하소서.
살기 위해서 애쓰다가 나중에 모든 힘을 다 쏟고 나서 죽지 않게 하소서.
힘을 다 탕진하고 나중에 하는 수 없어서 죽지 않게 하소서.
살려고 옥신각신 하다가 나중에 애를 쓸 힘이 더 이상 없어서 죽지 않게 하소서.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죽으면서 살아가게 하소서.
먼저 떨어져 죽고 나중에 열매 맺게 하소서.
아멘.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예수님」
-반영억신부-
우산 장수인 큰아들과 짚신 장수인 작은아들을 둔 어머니는 늘 걱정 속에 살았습니다. 비가 올 때는 작은 아들을 걱정하고, 맑은 날에는 큰아들을 걱정하니 하루도 걱정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맑은 날에는 작은아들이 짚신을 많이 팔 것이니 좋고, 비가 오는 날에는 큰아들이 우산을 많이 팔 것이라, 생각하니 늘 기뻤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져 보입니다.
여러분은 새소리를 들으면 ‘노래한다’고 하십니까? 아니면 ‘운다’고 하십니까? 같은 소리를 들어도 듣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법입니다. 주님께서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셔도 어떤 이는 감사할 줄도 모르고 불평 불만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마음이 열려있는 까닭입니다. 그는 항시 은총을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있으니 은총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잠에서 깨면서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하루를 시작해 보시면 어떨지요?
사실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을 닮은 사람을 만드시고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하느님의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기뻐해야 합니까? 그 감사와 기쁨을 잊어간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잃어버린 은총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만물을 근본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질병과 비참함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악령을 물리치시고 사람들을 하느님과의 화해로 인도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저마다 본연의 모습을 되찾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르치고 또 이끌어 주셨습니다. 마침내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이사야 예언자가 선언한 그대로입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29,18).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라”(이사35,5-6).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61,1).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11,6. 루카7,23). 스승을 의심하지 않는데 제자의 행복이 있습니다. “내 비록 스승에게 속아서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나는 그의 가르침대로 산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내가 기대하고 그리는 모습이 꼭 일치하지 않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본연의 모습에로 인도하십니다. 당신의 걸작품이 훼손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근심걱정이 있다면 생각을 바꾸어 보십시오. 골치덩이를 통하여 더 큰 것을 예비하시니 미리 감사하고 기뻐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분명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귀한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서도 흔들림 없기를 바랍니다.
‘자살’을 거꾸로 읽어보면 ‘살자’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본연의 모습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나 자신을 의탁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히브11,1)해 주기 때문입니다. 더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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