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2월 13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2. 12. 13. 06:19

2022년 12월 13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루치아 성녀는 로마 박해 시대에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순교 사실을 전하는 5세기의 기록에서 부분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심 깊은 부모의 영향으로 일찍 세례를 받은 루치아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딸의 신변을 염려한 어머니의 주선으로 귀족 청년과 약혼하였다. 그러나 동정을 결심하고 있던 그는 한사코 혼사를 거절하였고, 이에 격분한 약혼자의 고발로 결국 300년 무렵에 순교하였다. 루치아(Lucia)라는 이름은 ‘빛’ 또는 ‘광명’을 뜻하는 라틴 말에서 유래되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마태오 21,28-32)

 

“Amen, I say to you,

tax collectors and prostitutes

are entering the Kingdom of God before you.

When John came to you in the way of righteousness,

you did not believe him;

but tax collectors and prostitutes di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스바니야는, 주님께서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시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고 예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믿지 않았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요한을 믿은 세리와 창녀들이 그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봉사팀이 티베트 오지 마을로 봉사활동을 갔습니다. 그곳 어린이에게 방한용품, 의류, 생필품 등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지요. 그런데 물품을 준비하던 중에 한 여학생이 막대사탕을 사자는 것입니다. 팀원 모두 반대했습니다. 그 돈으로 다른 유용한 물건을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결국 이 여학생은 사비를 털어 막대사탕을 사서 갔습니다.

이 오지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분명히 의류와 생필품, 그리고 방한용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여학생이 사비를 털어 준비한 막대사탕이었습니다. 의류, 생필품, 방한용품을 받고서는 커다란 반응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막대사탕을 받아 사탕 껍질을 벗기고 입에 넣을 때까지 계속 웃고 있는 것입니다. 막대사탕으로 추위를 피할 수도 없고 또 굶주림을 해결하지도 못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큰 행복을 주는지는 모든 봉사자는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필요한 것만 있으면 그만일까요? 여기에 더 중요한 것은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필요한 것만 있으면 되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행복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행복을 통해 계속해서 우리가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두 아들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맏아들은 포도원에서 일하라는 말에 싫다고 하고서는 마음을 바꿔서 일하러 가고, 다른 아들은 가겠다고 해놓고 가지 않았습니다. 이 둘 중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했냐고 하면 당연히 맏아들입니다. 그러면서 맏아들 같은 이가 세리나 창녀라는 것이지요. 그들의 처음 모습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을 돌려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당시 종교 지도자인 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로만 할 뿐 행동으로는 전혀 따르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뿐 아니라 행동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만 주시는 하느님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참 행복을 주시는 하느님을 찾고, 그분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강조하신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맏아들의 모습인가요? 아니면 다른 아들의 모습인가요? 세리나 창녀의 변화된 모습인가요? 아니면 변하지 않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인가요? 지금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늘 명심하라. 해내고 말겠다는 너의 결심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단 사실을(에이브러햄 링컨).

​세례자 요한이 가르친 '의로운 길'이란?

-전삼용신부-

https://youtu.be/nUNeWaFv_JI

 

오늘 복음은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 둘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맏이는 싫다고 했지만, 마음을 바꾸어 일하러 나갑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엔 좋다고 했지만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지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31-32)

 

여기서 예수님은 요한이 알려준 ‘의로운 길’을 믿고 안 믿고에 따라 하느님 뜻에 순종하고 순종 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느님 뜻을 그냥 따르면 되지 굳이 요한을 만나서 그가 알려주는 방법을 믿고 따라야만 할까요? 그 이유는 인간 스스로는 하느님 뜻을 따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요한이 알려준 ‘의로운 길’이 무엇일까요?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스도께 이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어린 양입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피를 흘려 문설주에 발라져야 하고 살이 먹혀야 하는 운명입니다. 곧 이스라엘 집과 살과 피로 하나가 되는 운명을 말합니다. 이것으로써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하신 말씀과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된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을 묵상합시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19-20)

 

왜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율법을 지키려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할까요? 그 이유는 그래서는 율법, 곧 하느님 뜻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 살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뜻입니다. 요한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자기 힘으로 하느님 뜻을 실천하면 안 되고 그리스도가 되어야만 하느님 뜻이 실천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행위를 중요시하는 유다인들은 요한을 믿지 않았지만, 오히려 죄인들이 요한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믿음으로 구원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스윙 댄스의 대표 주자인 김잔디 씨 이야기입니다. 스윙 댄스는 재즈 음악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음악이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뜻을 내 몸으로 담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작정 배우면 될까요? 김잔디 씨는 처음에 남성들과 경쟁하는 업체에서 상도 많이 받고 잘나가는 직장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여 몸이 안 좋아졌습니다. 친구는 몸치, 박치였던 잔디 씨를 믿어주며 “얘는 챔피언이 될 애예요”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거의 남성 혐오증에 시달리던 잔디 씨는 남성들과 땀을 흘리며 손을 잡고 춤을 추어야 하는 스윙 댄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누군가의 믿음, 또 자신도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3년 동안 댄스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챔피언이라는 증명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직장을 때려치우고 영어 한 마디도 못 하며 미국으로 건너가서 스윙 댄스 대회에 참가합니다.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복장도 있어야 하고 준비된 음악과 남성 파트너, 그리고 잘 짜여진 안무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자신과 파트너가 되어주겠다는 키다리 아저씨를 만납니다. 그 미국인은 김잔디 씨가 어떤 복장의 옷을 입었는지, 그가 어떤 박자를 원하는지 딱 두 개만 묻습니다. 그리고 청바지를 입으면 안 되는 규정이 있음에도 자신도 청바지를 입고 키 작은 김잔디 씨를 자기 코트 안으로 들어오게 한 다음 무작정 무대로 던져버립니다. 얼떨결에 무대로 튀어나온 김잔디 씨는 어떻게 춤을 추었는지에 대한 기억도 없이 무아지경으로 춤을 춥니다. 그리고 첫 국제 대회에서 1위를 수상합니다.

 

재즈 음악을 춤으로 표현하려면 먼저 내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체력장 5급 받은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세례자 요한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의 친구가 그랬고 처음 자신에게 용기 있게 춤을 춰 달라고 해도 믿어주고 함께 맞춰주었던 키다리 아저씨도 그러했습니다. 10년 차 때 돈이 안 되는 이 춤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90세가 넘은 스윙 댄스의 전설인 노마 밀러라는 키 작은 흑인 댄서의 말도 그녀를 다시 일어서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말로만 하느님 뜻을 따르겠다고 하며 따를 수 없는 이유는 자기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믿음을 주는 사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이 없으면 무아지경, 곧 나를 버리고 노마 밀러가 되어 춤을 출 수 없습니다.

교회가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면 하느님 뜻을 따르는 사람은 교회에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2017)에서는 토르는 헬라라는 엄청난 힘을 지닌 여왕과 싸웁니다. 헬라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토르를 압도합니다. 토르는 망치의 신이었습니다. 하지만 헬라가 망치를 부수어버립니다. 토르는 망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망치 없이는 이길 수 없다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너무 자기 망치에 의지해왔기 때문입니다. 헬라는 말합니다.

“나는 죽음의 신이다. 너도 무슨 신이긴 했었지?”

그런데 돌아가셨던 아버지가 나타나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망치의 신이었냐?”

 

토르는 사실 천둥과 번개의 신입니다. 망치는 그저 그 힘을 제어하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분명 그분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떤 도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은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힘은 내 안에 계신 바로 그분에게서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은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은총으로 나와 하나가 되시는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은총으로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잉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성모 마리아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신 것처럼 우리도 믿음을 주는 누군가를 만나야만 합니다. 그것을 각성하게 해 주는 누군가를 만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습니다.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하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도구를 찾기보다는 내가 가능한 존재임을 믿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은총은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믿음을 가지게 만드는 도구일 뿐입니다. 내가 말씀이 되어야 하느님 뜻이 나를 통해 이뤄집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은총이 가득하신 채로, 하지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지 않으신 채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다면 엘리사벳에게 어떤 도움이 되셨을까요? 인간적인 도움을 되실 수 있지만 하느님의 도움, 곧 성령으로 가득 차게 만드시는 그런 도움을 주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둘째 아들이 노력으로 하려고 하다가 포기하는 상징입니다. 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된다는 사실을 그저 자기 암시로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야곱은 레베카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말씀에 순종 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감당할 능력이 있음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 개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따르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하느님의 말씀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느님 말씀에 순종 할 수 있는 존재는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나를 통해 일하게 할 때 내가 그 말씀에 순종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운 길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먼저 되어야만 하느님 말씀에 순종 할 수 있습니다.

​빛은 동방에서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XrWaELZ4rs4

 

​-조재형신부-

시각과 청각 장애를 겪으면서 살아야 했던 헬렌 켈러는 만년을 술회하기를 “나의 인생은 아름다웠노라.”고 했습니다. 반면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했던 나폴레옹은 말년을 술회하기를 “내 일생을 통해 행복했었던 날은 엿새밖에 없었노라.”고 했습니다. 행복은 능력으로 얻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뇌종양에 걸린 어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수술로 혹을 제거할 수 있지만 시력은 상실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이의 부모님은 신부님을 찾아가서 아이에게 그런 사실을 이야기해주기를 부탁했습니다. 신부님은 어린아이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숨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를 찾아갔고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제 머리에 있는 혹은 없어질 거란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너에게 시력(sight)을 가져가실 거란다. 대신에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통찰력(insight)을 주실 거란다.” 수술이 잘 끝났고, 아이의 부모님은 신부님께 다시 한 번 부탁하였습니다. 아직 붕대를 풀지 않고 검은 안경을 쓰고 있던 아이를 부르자 아이는 신부님께 달려오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부님 하느님께서 제게 시력을 가져가시고 통찰력을 주셨어요.” 아이는 신부님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헬렌 켈러는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불가능이 없다고 자신했던 나폴레옹은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이것을 볼 수 있었다면 너희는 하느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2022년을 보내면서 제게도 몇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차가운 물을 마시면 이가 시렸고, 음식을 먹기가 불편했습니다. 치과에 가보니 어금니 하나가 금이 갔다고 합니다. 60년을 함께 했으니 고마웠습니다. 선생님은 임플란트와 크라운 중에 선택하라고 하였습니다. 함께 했던 어금니가 고맙기도 했고, 가능하면 살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신경치료와 함께 크라운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면역력이 약해졌는지 몸의 몇 군데에 포진이 생겼습니다. 다행히 심하지는 않아서 연고를 바르고 쉬니까 좋아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리하지 말라고 제게 잠시 쉴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산보가 유일한 운동인데 조금 지나쳤는지 발목이 저렸습니다. 매일 일정한 목표를 정해놓고 걸었더니 몸에 무리가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조급한 저의 성격을 아셨는지 적당히 산보하라고 신호를 주셨습니다. 주변에서 신부님들이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데 제가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매일 끼고 다니던 묵주반지를 포진 때문에 잠시 빼 놓았습니다. 다시 반지를 찾으니 보이지 않았습니다. 늘 놓았던 책상에도 없었고, 침대 옆 테이블에도 없었고, 혹시나 해서 침대 아래를 보아도 없었습니다. 신문사에는 없었습니다. 매주 가는 부르클린 성당의 사제관엘 가보았습니다. 그곳 세면대 옆 테이블에서 묵주반지는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되찾은 묵주반지를 통해서 묵상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축일입니다. 루치아는 ‘빛, 광명’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통찰력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우리가 통찰력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다면 우리는 루치아 성녀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었듯이,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눈을 가진 이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주님이 당신 종들의 목숨 건져 주시니, 그분께 피신하는 이 모두 죗값을 벗으리라.”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권한에 대해 논쟁을 마감하신 후에 세 개의 비유, 곧 ‘두 아들의 비유’,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모두 하느님 나라가 왜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는지를 거듭 밝히십니다.

이 세 비유에는 ‘아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올가미를 씌우려고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오늘 복음인 ‘두 아들의 비유’에서는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싫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지만 일하러 간 아들과 “가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서도 일하러 가지 않은 아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석사제들과 원로 백성들에게 묻습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마태 21,31)

예수님께서는 ‘누가 응답한 사람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누가 실천한 사람이냐?’고 물으십니다.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고 물으십니다.

자기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믿는 사람인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완수하는 것을 당신의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요한 4,34)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야고 2,17.26)

예수님께서는 수석사제들과 백성들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마태 21,31-32)

오늘 복음에서 포도밭에서 가서 일하는 것은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가 응답은 하여 포도밭에 오기는 하였지만 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로움을 실천하지 않는 것에 해당하며 믿는 이들의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수도원)라는 포도밭에 들어오기는 했어도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로움을 실천하지 않는 것에 해당할 뿐, 진정한 의미에서 믿는 이들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누가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였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물으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마태 21,31)

 

주님!

당신의 뜻을 제 양식으로 삼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게 하소서.

응답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실행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당신 말씀에 따라 생각을 바꾸고, 당신 의로움을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말을 들어라」

-반영억신부-

 

누구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말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였을 때 말을 들은 사람은 포도밭에 가서 일한 사람입니다. 대답은 하고 밭에 나가지 않았다면 그는 말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그러므로 언제나 삶으로 말하십시오. 사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의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 소위 한자리 하는 사람들에게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고 한 말씀은 충격적인 얘기입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회개하라는 요한의 말을 들었고, 들은 그대로 행함으로써 믿음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소위 내로라하는 사람들,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니 결과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회개의 부름은 주어졌고, 하늘나라의 문이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보잘것 없는 이들은 받아들였고 똑똑한 이들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으며 끝내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아는 게 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루카 7,29-30).

 

아무리 은총이 많아도 담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올바른 길을 걷기를 거부하는 이상 하늘 문은 늘 닫혀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며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들었으면 그대로 실행함으로써 그 믿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루치아 성녀는 하느님께 동정을 서원하고 결혼준비로 장만한 재물을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루치아를 취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귀족은 이것에 분개하여 그가 가톨릭 신자임을 밀고하여 재판정에 서게 하였습니다. 그는 재판정에 서서 “성스러운 신앙을 지닌 순결한 마음속은 곧 성령의 궁전입니다”하며 꿋꿋이 믿음을 고백하며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루치아 성녀의 상본은 ‘쟁반에 두 눈이 담겨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루치아의 이름은 광명, 또는 빛의 의미를 담고 있는 데 그 빛을 말합니다. 루치아가 신앙의 빛이 되었듯이 우리도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영혼의 맑고 밝은 빛이 되기 위해 먼저 회개의 요청에 응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읍시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