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11일 대림 제3주일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마태 11,2-11)
"Are you the one who is to come,
or should we look for an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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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백성이 시온에 모여 기쁨과 즐거움으로 환호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야고보 사도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제2독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였지만(요한 1,34 참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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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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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사람 몸에 0.2mg(70kg 사람 기준)의 금이 들어 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대부분 혈액 속에 함유되어 있다는데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몸에 금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탄소, 산소, 수소, 구리, 아연 등이 몸 안에 함유되어 있었습니다.
혹시 자기 몸에 금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요? 구리나 아연은 느끼십니까? 단 한 명도 이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몸 안에 이런 성분이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삶에 어떤 긍정적 요소가 없다면서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런데 앞서 금, 구리, 아연 등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데, 부정적 요소나 긍정적 요소는 온전하게 느낄 수 있을까요? 그냥 부정적으로 단정 짓는 잘못된 마음에서는 나오는 것뿐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성분이 자기 몸 안에 있는 것처럼, 자기에게 없다고 생각했던 긍정적 요소도 차고 넘칩니다. 기쁨, 희망, 사랑, 행복 등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주 적은 긍정적 요소라도 발견하게 되면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이 되어, 올바른 길로 자신을 인도해 줄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요한이 제자를 보내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라고 묻게 합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세례를 직접 주었으며, 세례받으실 때의 사건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어떤 의미일까요? 확신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약간의 의심이 생긴 것이 아닐까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거짓 증언으로 세례자 요한도 혼란을 겪게 된 것입니다.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사람을 고쳐 준다는 이야기, 안식일 법을 비롯해서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는다는 이야기 등등….
세례자 요한의 감옥 생활이 절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지금처럼 인권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햇빛도 비추지 않는 캄캄한 감옥에서 이런 부정적인 말까지 더해지니 의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당신이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래서 의심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상태가 아닌, 어렵고 힘들 때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의심을 지우고 굳게 믿는 사람은 행복하게 됩니다.
시간의 걸음걸이에는 세 가지가 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F.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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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입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
당연히 요한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의심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명확하게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 알려주었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위함입니다. 감옥에 갇혀 죽기 직전 자신의 마지막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믿음이 부족한 존재로 여겨지면서까지 제자들을 당신께 보낸 요한을 칭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그런데 이 말씀에 덧붙여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사람 중에서 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는데 어떻게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도 요한보다는 클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개 중에 가장 훌륭한 개는 인간 중에 가장 작은 인간보다 귀한 존재일까요? 당연히 인간의 본성을 지닌 이 중 가장 작은 이도 개의 본성을 지닌 모든 존재보다 클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은 한 인간의 본성을 지니며 자기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본성, 곧 하느님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나도록 보낸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은 결국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가 되는 것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을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본성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혼자 태어날 수 있는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파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꿀벌이 될까요? 만약 파리가 꿀벌이 되었다면 그 중간에 꿀벌로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만 합니다.
‘투머로우랜드’(2015)란 공상 과학 판타지 영화가 있습니다. 여기에 아테나란 여자아이가 나옵니다. 주인공 남자는 그 여자아이가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갑니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은 아주 먼 미래입니다. 아테나는 시간 여행을 시켜줄 수 있는 여자아이였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미래로 인도할 수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미래로 가는 것은 본성을 바꾸는 일만큼 어렵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이미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미래에서 왔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느님으로 태어나지 않고 하느님의 본성으로 사람을 만들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하늘 나라에서도 가장 큰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하늘 나라의 본성을 가진 이를 태어나게 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영화 ‘킹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노예 소년이 대장군이 되기로 결심하고 노력한 결과 그냥 싸움 잘하는 노예가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구해 준 이가 왕이 되자 그의 지위는 그대로 머물 수 없습니다. 내가 낳는 이의 본성이 왕이면 자신도 그와 대등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도 제자들을 새로운 본성으로 태어나게 만들기에 그 본성에 합당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한 거지에게서 그리스도를 봅니다. 이태석 신부는 돌아가셔서도 아이들을 의사로 키워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면 한 거지를 그리스도로 볼 수 없고 믿어줄 수 없습니다. 내가 의사가 아니면 의사로 키워낼 수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본성을 바꿔주는 일입니다. 만약 나를 통해 하느님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하느님의 본성을 지녔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역할을 사제직이라고 하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사제들의 나라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낳을 수 있는 성모 마리아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실까요? 당신과 같은 비천한 종도 하느님을 낳으셨다면 우리도 모두 그러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실까요? 내가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들어 높일 수 있는 지에 따라 나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우리 안의 뱀은 우리가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 본성에 머물러 있게 만들기 위해 세상 것에 집착하게 합니다.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뱀과 그 말을 따르는 이들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말씀을 받아들인 이는 모두 신이 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마치 난자처럼 정자를 받아들이면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자녀들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어떠한 믿음을 전하고 있느냐에 따라 어떤 존재인지가 결정되고 내세에 어디에 살지, 어떤 위치에서 살지가 결정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제는 누구입니까) 가장 위대한 점을 감히 말하자면, 하느님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하느님이 되게 할 것입니다.”(CCC, 1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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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산보를 하면서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합니다. ‘머리, 허리, 다리’는 우리의 몸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앞의 말은 다른데 끝에 말은 모두 ‘리’로 같습니다. 앞의 말은 우리 몸의 특정 부위를 뜻하는 것 같고 뒤의 말은 그냥 붙이는 접미사 같습니다. 비슷한 말로 예수님, 선생님, 임금님, 사장님의 ‘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달란트와 미나의 비유에서 접미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도 10배, 2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며 접미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사제는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접미사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 또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접미사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지만,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마르고 버려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이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불고, 우산이 없는데 비까지 내리는 경우에 ‘을씨년스럽다.’라고 합니다. 문득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구글에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한다는 내용의 을사늑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됐던 날입니다. 당시 온 나라가 비통함과 울분으로 가득 찼었다고 합니다. 그날은 날씨도 흐리고 추웠다고 합니다. 몹시 쓸쓸하고 어수선한 날을 맞으면 그 분위기가 마치 을사년과 같다고 해서 '을사년스럽다'라는 표현을 쓰게 됐습니다. 그 말이 변형되어서 1957년 국어사전에 ‘을씨년스럽다.’라고 표기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에도 을씨년스러운 날들이 있었습니다.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입니다. 70년에 걸쳐서 4번의 큰 박해가 있었고 만 명 이상이 순교하였습니다. 살아남은 신자들은 깊은 산골로 들어가서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고 교회는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 것처럼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찾았습니다. 순교자들이 묻힌 무덤은 신앙을 증거했던 ‘성지’가 되었습니다. 서울에는 절두산, 새남터, 서소문, 삼성산 성지가 있습니다. 경기도에는 미리내 성지가 있습니다. 충청도에는 해미, 갈매못, 줄무덤 성지가 있습니다. 전라도에는 치명자산 성지가 있습니다. 강원도에는 베론 성지가 있습니다. 경상도에는 한티성지가 있습니다. 그밖에도 많은 성지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선조들이 목숨을 바쳤던 곳에, 우리 신앙선조들이 신앙을 지켜온 곳들이 성지가 되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신앙의 못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4년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여의도에서 103위 성인의 시성식을 집전하였습니다. 30년 후인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광화문에서 124위의 순교자들을 복자품에 올렸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의 여파로 교회에도 을씨년스러운 날들이 있었지만 비가 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해지듯이 교회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새로운 활력을 찾을 것입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 3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을씨년스러운 날들은 지나가고 광명의 날들이 올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께서 을씨년스러운 날을 광명의 날로 바꾸시는 바로 그분이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복음이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복음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의 삶에도 을씨년스러운 날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건강하던 몸이 아프기도 하고, 잘 나가던 사업이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선의를 가지고 했던 말들이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내 마음에 시기와 질투의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이웃의 비난과 비판이 도를 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2 독서에서 야고보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항상 기도한다면, 언제나 기뻐한다면 그리고 이웃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고, 이웃의 슬픔을 같이 슬퍼할 수 있다면 을씨년스러운 날들은 지나가고 광명의 날들이 찾아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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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안에는 하느님 아버지의 신성이 그대로 자리 잡고 계십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의 선구자이자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입장에서 정말 궁금해서 미칠 지경인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요즘 갑자기 등장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인물, 예수님이 과연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일까, 아닐까? 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정말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부여하신 사명 가운데 가장 막중한 것은 아무래도 메시아께서 오실 길을 미리 닦는 일,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사이에 튼튼한 다리를 놓는 일, 결국 백성들에게 저분이 바로 메시아임을 확인시키는 이정표로서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예수님이란 인물이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행동거지가 조금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인류 구원 사업이란 중차대한 사명을 완수하러 오실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에 함께 할 제자들을 뽑는데, 그 면면을 살펴보니 한심하기까지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당대 지도층 인사들과 사사건건 대립하며 의견 충돌을 빚습니다. 목숨처럼 소중한 율법 규정들을 하나하나 깨트립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의 말씀은 종래 다른 지도자들과는 명백히 달라 생명력과 에너지로 넘쳐흐릅니다. 시원한 샘물 같은 그의 가르침에 백성들은 환호하고 박수를 칩니다. 그의 모습은 한없이 겸손하고 소박하지만 때로 당당하고 강력한 포스가 느껴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더이상 갈등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직접 확인해보기로 마음먹습니다. 옥에 갇혀있던 그는 자신의 두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오 복음 11장 3절)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참으로 명쾌합니다. 말이 필요 없습니다. 구구절절 설명이 따로 필요치 않습니다. 그저 행동으로 보여주십니다. 그 자리에서 즉시, 세례자 요한이 보낸 두 제자가 보는 앞에서 메시아로서 당신의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질병과 병고와 악령이 시달리는 사람들을 고쳐주십니다. 눈먼 이들을 보게 해주십니다.
자신들의 스승 세례자 요한을 훨씬 능가하는 메시아로서의 예수님, 세상만사를 자유자재로 마음껏 주관하시는 우주의 지배자 예수님의 모습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깜짝 놀랍니다. 말로서가 아니라, 이론과 설명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자신들의 눈앞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예수님 앞에 입을 닫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완고한 마음, 지나친 오만, 단단히 닫힌 폐쇄성은 끝끝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사람들 눈에 가장 하느님 가까이 있다고 여겨진 사람들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가장 하느님과 멀리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진리와 계명 복잡한 것 같지만 사실 너무나도 단순명료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 아드님을 이 세상에 구세주로 보내셨는데,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느님 아버지의 신성이 그대로 자리 잡고 계십니다. 그를 보는 것이 곧 하느님을 뵙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메시아=그리스도=하느님이란 등식을 굳게 믿는 일 그것이 구원과 새로운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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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이영근신부-
해가 뜨기 전 먼동이 터오듯, 참 빛이신 아기 예수의 탄생이 가까워지면서 세상에 희망의 동이 터옵니다.
이토록 보랏빛 동녘 하늘 타오르는, 오늘은 기쁨 주일입니다.
이 기쁨을 오늘 입당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기쁨을 선포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이사 35,1-2)
오늘 우리는 이 기쁨 주일에 핑크빛 옷을 입고서 설레이는 기다림과 고대하는 기쁨으로 벅차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광야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직도 감옥이라는 광야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이라는 광야는 목을 내밀고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장소입니다.
기다림만으로 온전히 꽉 찬 공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지금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과연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인지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마태 11,3)
요한의 이 의구심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자신이 선포했던 메시아 상과는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가려 쭉정이를 불태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쁜 나무를 찍는 도끼의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과 함께 고통당하는 사랑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불의를 징벌하고 정의를 세우는 심판자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죄인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을 구하기 위해 용서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요한이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메시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이 다급한 물음에, ‘나는 메시아다’라고 분명한 대답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요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들을 통하여/, 신앙고백에 이르러야 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마태 11,6)
이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혼란에 빠지지 않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행복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활동 모습이 자신이 생각했던 메시아의 표상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는 복되다는 진복선언입니다.
동시에 이는 의심을 품지 말라는 아주 냉혹한 경고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기존 표상과 관념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질책과 경고의 말씀입니다.
아니 자신 안에서 먼저 자기 관념을 깨부수라는 철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마태 11,4) 이르시면서, ‘보고 들었던’ 내용을 이사야를 인용하여 표현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마태 11,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보여주셨습니다.
실로 인간 삶의 길과 하느님 생명의 길은 사뭇 다릅니다.
인간 삶의 길은 먼저 살고 나중에 죽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생명의 길은 먼저 죽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항상 살기 위해서 애를 쓰며 모든 힘을 다 쏟습니다.
그러다가 모든 힘을 다 탕진하고 애를 쓸 힘이 더 이상 없으면 죽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살려고 옥신각신하다가 하는 수 없이 죽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먼저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잃은 사람은 살릴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 생명의 길을 따라 자신을 버리면, 진정 행복한 삶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죽고 다음에 살아간다면, 진정 하느님의 생명, 참된 생명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기쁨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 주일인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선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마태 11,6)
주님!
먼저 죽고 나중에 사는 생명의 길을 가게 하소서.
먼저 떨어져 죽고, 나중에 열매 맺게 하소서.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죽으면서 살아가게 하소서.
살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쏟고 난 후에서야 죽지 않고, 죽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쏟고 난 후에서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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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마태오 11, 3)
-한상우신부-
오실 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기다리는 대림의
기쁜 설레임의
시간입니다.
기다림의 응답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보고 듣는 사랑을
전하고
나눌 뿐입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습니다.
의심을 품을 수 없는
행복한 소식입니다.
행복한 만남을
앞에 두고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세례자 요한의
광야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오실 분의
길을 닦는 사람은
고운 옷을 걸친
왕궁의 사람이
아닙니다.
예언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하느님께서
수련을 시킨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세례자 요한도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의 가난과
하느님의 겸손을
바라보고
만날 수 없다면
우리의 기다림은
생명력을 잃습니다.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을 통해
기다림의 본질을
사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본질은
마음을 닦는 것이며
마음을 닦는 것은
자선(慈善)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랑이 빠져버린
기다림은
기다림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기다림은
충만하여지고
기다림으로
사랑은
깊어갑니다.
사랑으로
오실 분을
사랑으로 기다리는
자선 주일입니다.
무엇을 보며
살 것인가 보다
무엇을 나누며
살 것인가가
더 중요한
복음의 삶입니다.
사람의 희망은
사람이며
사람의 기쁨이
소중한
사람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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