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2. 12. 10. 06:10

2022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마태오 17,10-13)

 

Elijah will indeed come and restore all things;

but I tell you that Elijah has already come,

and they did not recognize him

but did to him whatever they pleas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집회서의 저자는,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멕시코 초현실주의 화가인 프리다 칼로의 일대기를 다룬 ‘프리다’(2002)의 주인공은 셀마 헤이엑(프라 칼로 역)입니다. 그녀는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하는 등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면서 사회 안에서 자기 역할에 늘 충실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관계에 대한 말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상처받지 않는다면 그들에겐 아무런 힘이 없는 겁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다른 언어로 욕을 한다면 당신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할 거예요.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바로 ‘당신’이기 때문이에요.”

알아듣지 못하는 욕은 내게 의미로 다가오지 못합니다. 이처럼 내가 상처받지 않으려면 상대의 말과 행동이 나 자신에게 의미로 다가오지 않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대해석해서 더 큰 의미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상처의 크기는 점점 커지고 이로 인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요? 특히 관계 안에서 상처를 주는 의미가 아닌, 힘을 얻을 수 있는 의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욕을 많이 먹는 사람이 있었을까 싶습니다. 절대로 욕 먹을 일이 아닌데도,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를 예수님을 향해 “틀렸다”라며 화를 내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말과 행동은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예전에 댓글 테러를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분명 사실과 다름에도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다가오는데 정말로 끔찍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공간에 정이란 것이 뚝 떨어졌습니다. 그만큼 상처를 많이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에 대해 정이 뚝 떨어지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열정적으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자기 생명까지도 바치십니다. 하느님이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완벽한 인간이시기도 하기에 과연 가능할까 싶은 것입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에 의미를 두지 않으신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상처받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세례자 요한에게 했던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꾸짖으시기까지 하십니다.

주님 뜻과 반대되는 모습에 의미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의미를 두고 힘들어하면 할수록 그 잘못된 말과 행동에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주님께 향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의미 안에서 주님과 함께 기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패배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은 실패의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찰스 케터린).

그 무렵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셨다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Yi5HxpnPDuo

 

-조재형신부-

지난 그리스도 왕 대축일 때입니다. 제의실에서 성전으로 가려는데 복사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다니엘이 ‘오늘은 성당 안으로 입당하자고 제안 하였습니다.’ 그날은 날씨가 춥고 바람이 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복사 중에 가장 나이가 적은 라파엘이 성당 밖으로 입당하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복사들과 독서자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나이가 많은 복사와 어른들은 성당 안으로 입당하자고 하였고, 나이가 어린 복사들은 성당 밖에서 입당하자고 하였습니다. 다수의 의견을 들어서 성당 안으로 입당하려고 했는데 전례분과장님이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니 성당 밖에서 입당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조금 춥더라도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생각하며 성당 밖으로 입당하였습니다. 문득 생각하였습니다. 신앙은 다수결의 원칙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앙은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신앙은 의미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람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험난할 지라도, 비록 그 길 때문에 박해를 받더라도 신앙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참된 신앙의 길을 걸었던 ‘엘리야’를 칭송합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놓고 대결하였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그 수가 많았지만 패하였습니다. 그들은 거짓된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가뭄이 들었을 때 하느님께 청하여 비가 올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봉헌을 칭찬하며 하느님께 청하여 가뭄이 끝날 때까지 기름과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가 보는 중에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엘리야의 삶은, 엘리야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신앙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엘리야가 다시 돌아왔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돌아온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였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점점 작아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알렐루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우리는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예수님의 탄생을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왕이었던 헤로데는 많은 정보와 권력을 가졌지만 예수님의 탄생을 몰랐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알았지만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빼앗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들도 예수님의 탄생을 몰랐습니다. 율법과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는데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위선과 교만으로 눈이 멀어 예수님의 탄생을 볼 수 없었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왔던 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 예물을 드리고 경배하였습니다. 가난한 목동들도 예수님의 탄생을 알아보았습니다. 들판을 달려 예수님께 경배 드렸습니다. 평생 성전에서 기도하던 시메온과 한나도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보았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은 꿈꾸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면 하였을 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하는지 돌아봅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엘리야 예언자의 역할을 더욱 완벽하게 재현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양승국신부- 

 

이사야 예언자 못지않게 역사에 길이 족적을 남긴 대 예언자가 있었으니,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그는 BC 9세기경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예언자였습니다. 엘리야라는 이름이 지닌 의미는 ‘나의 하느님은 주님이시다.’입니다.

 

엘리야 예언자의 성격은 활활 타오르는 불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불처럼 일어섰고,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하늘을 닫아버리고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 보냈습니다.(집회서 48장 1~3절)

 

엘리야 예언자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서 설설 기던 절대 권력자 임금 앞에서도, 난다긴다 하던 고관대작들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전하라는 말씀을 조금의 가감도 없이 전했고, 철퇴 같은 불호령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계약을 재건했습니다. 또한 그는 “율법에 대한 불타는 열성 덕분에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1 마카베오 2장 58절)

 

“그는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집회서 48장 9절) 

 

엘리야 예언자는 예전에 모세가 하느님의 뒷모습을 보았던 바로 그 장소에서 하느님을 목격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그는 모세와 같은 역할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하게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북왕국의 아합 임금은 페니키아 공주이자 시돈 임금의 딸 이제벨과 정략 결혼을 하고 이제벨의 종교인 가나안의 종교를 장려했습니다. 이제벨은 상아궁에서 하느님을 모독하는 계획들만을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제벨은 바알 신전에서 바알 예언자들 수백 명을 먹여 살리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세적 번영과 풍요를 보증하는 가나안 신들과 정의와 검소한 생활을 요구하는 하느님 사이에서 가나안 신들 쪽에 훨씬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마치 천둥처럼, 벼락처럼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시골 출신의 기인(奇人), 길르앗의 엘리야 예언자였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 하느님을 저버리고 가나안의 바알을 섬기는 모습을 목격하자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분노와 격정을 느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카르멜 산에서 하느님의 신비로운 도움에 힘입어 우상 숭배에 푹 빠져 살아가는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존엄성과 권리가 침해받을 때마다 불꽃처럼 일어섰습니다. 날카로운 비난을 퍼부으며 강력히 도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 예언자는 언제나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 편에 서서 사회 정의를 위해 싸웠습니다. 그는 비옥한 땅을 강탈하기 위해 나봇을 살해한 아합 임금을 통렬히 비난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의 역할을 더욱 완벽하게 재현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공생활 기간동안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부여받은 사명을 엘리야의 사명과 연관시킵니다. 나인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기적은 사렙타에서 일어난 엘리야의 기적을 상기시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에게 보복의 불을 하늘로부터 내렸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불타게 하는 성령의 새로운 불을 가져오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또 다른 엘리야 예언자를 더 많이 필요로 합니다. 불꽃같이 자신의 삶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멋진 예언자, 거짓과 불의 앞에 참지 못하고 거룩한 분노를 터트리는 예언자,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닌 사람 앞이라 할지라도 부패한 권력 앞에서는 할 말 제대로 하는 예언자를 더 많이 필요로 합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이영근신부-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후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마태 17,1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마태 17,11)라고 엘리야의 사명을 밝히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마태 17,12)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했음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미 와 있는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한 그들은 이미 와 있는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요한 1,26)

이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듯이, 당신께서도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 받게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결국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함을 말해해주며, 엘리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도 메시아도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을 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특히 성탄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바로잡는 엘리야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는 않아야 할 일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완고함과 비뚤어진 마음과 악의로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하면,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그분을 버림받지 않고 박해받지 않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더 이상은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있기 마련인 고난에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1베드 4,13)

또한 바오로 사도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필리 1,29)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마태 17,12)

 

주님!

제 눈이 가려져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빛을 피하고 어둠을 좋아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제 가슴이 굳어져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함은 진리보다 제 자신으로 꽉 채운 완고함과 오만이었습니다.

하오니,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 12)

-한상우신부-

수난과 고난은

어렵고 힘들기에

길을 찾아줍니다.

버려진 역사 뒤에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의

교만함이 있습니다.

제멋대로 다루는

이 마음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신앙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십니다.

분명하게

회개의 길을

제시하는

예언자의 말도

우리는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이들을

핍박합니다.

신앙은 개혁을

필요로 합니다.

고난을

감수(甘受)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시는

주님의 기다림을

만나는 대림입니다.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는

세례자 요한의

피흘림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십자가와 함께

선포됩니다.

아직도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리들입니다.

십자가로 전달되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보지 않고

제멋대로 다루는

교만함에서 벗어나

참된 사랑을 겸손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길을 닦는

십자가의 시간을

겸손되이 받아들이는

대림의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