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2월 6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2. 12. 6. 05:41

 

2022년 12월 6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준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마태오 18,12)

 

What is your opinion?

If a man has a hundred sheep

and one of them goes astray,

will he not leave the ninety-nine in the hills

and one of them goes astray,

will he not leave the ninety-nine in the hills

and go in search of the stra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의 삶을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방을 선포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되찾은 양의 비유’로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아는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것인데, 형제님께서 커피를 무척 좋아하셨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 커피를 두 분에게 대접했습니다. 하지만 형제님께서 커피에 손도 대지 않는 것입니다. “커피 좋아하시잖아요? 이 커피 맛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자매님께서 “이이가 속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갔는데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했어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순간 실수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마시지 못하고 있는데 커피를 내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아마 커피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셨을 것입니다.

과거의 경험이나 선입견 때문에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거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데,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에만 맞추는 실수를 얼마나 자주 반복하고 있습니까? 저 자신도 과거와 지금이 완전히 다릅니다. 예전에는 쫄면, 짬뽕, 매운 닭발 등의 매운 음식을 너무나 좋아했지만, 지금은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수학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국어가 더 좋습니다.

저도 이렇게 많이 변하는데 남에게만 변화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큰 욕심일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틀어질 때, 상대방의 변화를 탓하는 것 자체가 큰 오류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인의 격언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모든 만남이 첫 만남이다.”

이 격언처럼 모든 것을 매번 처음인 듯 대하면 후회할 일이 줄어들며, 관계가 깨지는 것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변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주님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해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불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께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도 포기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모범을 본받아 비록 불완전해도 사랑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이사 40,1)이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렇게 당신 백성만을 향한 사랑에 집중하시는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불완전해도 포기하지 않고 완전한 사랑을 닮아가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한 사랑이지만 계속해서 실천해 나갈 때 좀 더 완벽한 주님 모습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이해할 거야’라는 의지를 가진 사람, 나를 알아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우리는 삶을 계속 살아낼 힘을 얻는다(최혜진).

우리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지 못하는 이유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aS78fO9hOsI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비유입니다. 루카 복음에서 양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버려 둔 채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는 것과는 달리 마태오 복음은 매우 교회적이고 사목적입니다. 일단 양들은 ‘산’에 둡니다. 산은 기도하는 장소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양들이 스스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되어서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가 되면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이때를 잘 모르고 산에 있는 양들에게 집중하면 오히려 양들을 잃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저도 본당에 와서 일단 양의 우리를 손보고 양들이 빠져나가지 않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첫 번째로 보았습니다. 일단 그물코가 단단히 이어져 있어야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를 손보는 것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으로 말하면 저희 본당을 산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시스템. 이것은 공동체에 들게 만들어 그 공동체의 친교가 신자들을 잡아 놓고 성장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 방향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내실에 힘을 쏟아야 할까요? 언제 잃은 양을 찾으러 나가야 할까요? 이것이 고민입니다. 만약 너무 이른 타이밍에 양들을 찾아 나서면 지금 있는 양들도 잃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너무 늦은 타이밍까지 내실만 기하려다 보면 쓸데없는 간섭을 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이 타이밍을 아는 것이 지혜인 것 같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서 엄마가 아이를 믿지 못하여 cctv로 감시까지 하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아이는 엄마의 간섭에 ‘새’가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엄마에게 자신은 필요 없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데 간섭하니 잘한 것도 엄마의 공로가 됩니다. 엄마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합니다. 아이는 엄마의 간섭에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거짓말을 합니다. 엄마는 그것이 걱정입니다. 하지만 엄마는 자녀에게 시선을 돌려서 자녀를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믿어주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간섭하는 만큼 아이의 자존감은 추락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정은표 씨 가족은 아이들을 방임하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훨씬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성장합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는 것이라 하셨을 때부터 그래도 나의 인생에 책임을 지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에 가고 크게 엇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마 성당에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이란 사제의 간섭 없이도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영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신자들일 것입니다. 만약 대부분이 단체에 가입해서 그 안에서 성장하고 기도하며 봉헌 생활과 성체를 영하는 정도가 된다면 그때는 시선을 밖으로 돌려야 할 때일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한 단체에 가입하고 감사일기를 쓰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신자 대부분이 이렇게 자신의 힘으로 성장할 수 있을 때 저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갈 것입니다.

 

사제가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 신자들의 자존감은 배가합니다. 자신을 믿어주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고 자신들이 잃어버린 양처럼 사제가 목숨을 바칠 정도로 귀중한 존재임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우리 안에서 스스로 성장합니다. 이때를 알지 못하면 큰일입니다. 어느 때부터는 무관심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무관심할 때도 자녀들은 자라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곳이 양 떼를 풀어놓는 산입니다. 그 산에는 데려다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양들이 산에 있어도 내가 믿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산에 있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산에서 스스로 성장해본 적이 있다면 그렇게 하면 스스로 성장할 수 있음을 압니다. 목자는 그래서 언제 양들을 산에 놓아주어야 하는지 압니다.

정은표 씨 부부는 스스로 성장할 줄 알았던 분들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어떻게만 해주면 자녀들이 스스로 성장하는지 압니다. 저는 하.사.시.와 성체조배였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진리를 찾으려 하고 은총을 찾으려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오게 만드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의인은 목자가 없어도 스스로 산에 머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입니다. 그러한 공동체에 속할 줄 아는 자이고, 은총과 진리로 목자가 없어도 스스로 성장할 능력을 지닌 자입니다. 그런 공동체가 형성되면 이제 목자는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이때 양들을 신경 쓴다면 양들은 더 피폐해집니다.

 

신애라 씨는 딸 둘을 입양했습니다. 그리고 그 입양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말해주었습니다. 아이들도 그것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차인표, 신애라 씨 부부가 이 정도면 아이들이 자기들 스스로 클 수 있음을 알았기에 입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것은 친 자녀가 너무나 잘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입양한 딸들이 입양되지 못한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다고 하자 수많은 아이의 엄마, 아빠가 되어주기로 하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녀를 잘 키우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할수록 친 자녀는 부모가 믿어줌을 알아 더 잘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목자의 도움 없이도 잘 자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목자의 자격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언제까지 함께 있어 주어야 하는 줄 알고, 그때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 줄 알며, 또 언제 그들을 떠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가야 하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다시리러 그분이 오신다

-이기우 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6ujIos0hbkA

 

​-조재형신부-

1986년 1월 31일은 제가 군에 입대한 날입니다. 1988년 5월 4일은 27개월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날입니다. 군에 입대 할 때는 한 겨울이었습니다. 군 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요령도 생겼고 말년 병장 때는 나름 지낼 만 했습니다. 그러다 제대의 날이 다가왔고 따뜻한 봄바람과 함께 무사히 전역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그날이 오면 유배가 끝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날이 오면 평등의 세상, 자유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더 이상 아침 점호도 없고, 구보도 없고, 유격훈련도 없고, 상명하복의 계급도 없듯이 그날이 오면 모두가 하느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고 합니다.

 

그날은 군대라는 공간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은 유배지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은 장소의 이동이 아닙니다. 제가 살았던 서울도, 지금 살고 있는 뉴욕도 그날이 아닙니다. 골짜기가 깊다면 서울도 뉴욕도 그날이 아닙니다. 언덕이 높다면 제대해서 복학했던 신학교도 그날이 아닙니다. 골짜기가 메워진다면, 언덕이 평평해진다면 군대에서도, 유배지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날이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분명 골짜기가 있습니다. 학력, 지역, 이념, 직업, 계층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너무 깊어서 넘어가기도 힘들고, 넘어오려는 사람의 손을 뿌리치기도 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듯이 우리의 삶도 짧은데 우리는 골짜기를 메우기보다는 더 깊게 만들곤 합니다. 이런 골짜기를 메우는 길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산과 언덕이 있습니다. 권력, 재물, 명예라는 바벨탑이 있습니다. 바벨탑은 교만, 욕심, 허영, 위선, 가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탑을 낮추어 평평하게 하는 길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착한 목자 이야길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성공도 실패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기쁨과 슬픔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부유함과 가난함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행운과 좌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길 잃어 방황하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시려고 기다리십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은 ‘희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보라,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리라.” 

하느님 당신 자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우리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양승국신부-

 

갑작스레 기온이 급강하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스산한 저녁, 야외 식당 화목난로에 소나무 장작을 잔뜩 넣어 불을 지폈습니다. 혼자 있기 뭐해서 평소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강아지 두 녀석 한번 화해시켜보려고 난로 옆에 데리고 앉아 기도 중입니다.

 

첩첩산중 시골에서 시골 영감으로 지내고 있자니, 얼마나 힘들고 답답하냐고 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따지고 보니 소소한 기쁨이 사방에 널려있습니다. 어디 있든지,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어디에서든 여기가 꽃자리려니 하고 감사하며 지내다 보면, 그곳이 천국입니다.

 

잠깐 바깥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니, 세상에! 셀 수도 없이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릴 듯합니다. 몇천 년, 몇만 년,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 전부터 저렇게 저 자리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별들을 보니, 인간 만사 참으로 보잘것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업습니다.

 

대림 시기 이사야 예언자는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묵상 주제를 던져주고 있는데, 오늘 독서 말씀은 더욱 각별하고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영원할 것 같은 우리 인간의 권세와 힘, 건강과 젊음, 힘과 에너지는 사실상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한 송이 꽃과도 같음을 강조합니다.

 

오늘 우리가 난다긴다하면서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있고, 틈만 나면 내가 누군 줄 알아? 하고 떵떵거리지만, 돌아서서는 눈물 흘리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이사야 예언자의 외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우리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을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야 예언서 40장 6~8절)

 

대림 시기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이 땅에 강생하신 은혜로운 대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감사하고 묵상하는 가슴 설렘의 순간입니다. 이 시기 동안 우리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우리, 티끌이요 먼지인 우리들의 본래 모습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우리에게 크신 자비와 은총을 베푸셔서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어 주시고, 이 땅 위에 살게 하시며, 사랑스런 인연과 더불어 살게 하신 하느님께 백번 천번 감사드려야겠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우리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분의 축복이 아니었으면, 한순간 솟아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한 줄기 연기요, 안개였을 우리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이영근신부-

참 묘한 일입니다.

나무들은 걸치던 옷들을 다 벗고서 겨울을 나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옷을 겹겹이 덧입고서 겨울을 납니다.

겨울나무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오히려 채웁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자신을 그렇게 채우는 바람에 그분이 들어오시지 못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도 자신을 채우는 게 아니라 자신을 비워야 하지 않을까요?

그 비워진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오늘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에 대한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의 ‘목자’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 인류라는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 그리스도를 표상합니다.

이 비유는 '목자의 기쁨'과 '아버지의 뜻'에 대해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마태 18,10)

그리고 그 이유를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기 때문”(마태 18,1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비록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 할지라도 소중히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목자의 기쁨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아버지의 기쁨’ 입니다.

이는 작은 것 하나마저도 귀중하게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결국, 이 비유의 정점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의 사랑’을 행하심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아버지의 이 지극하신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목숨을 바쳐 ‘이 사랑’을 행하셨고, 바로 그 일을 당신의 기쁨으로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목자이신 당신의 소명이요, 동시에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소명임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이사 40,11)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찾고 계시는 아버지의 음성,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에 귀 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처럼 ‘먼저’ 찾아 나서고, ‘먼저’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작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끌어안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그렇게 작은 모습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보다 우리 자신의 뜻과 기쁨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이제는 냉정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기쁨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대체 어떨 때 기뻐하는가?

나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뻐하는가?

 

 

<오늘의 말 · 샘 기도>

 

“아버지의 뜻”

(마태 18,14)

 

주님!

당신 기쁨이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저를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너 어디 있느냐?”하고 찾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네 형제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먼저 찾아오신 당신처럼, 저도 먼저 형제에게 다가가게 하소서!

제 사랑의 소중함보다 당신 사랑의 소중함을 먼저 보게 하시고, ‘당신 뜻’의 소중함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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