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5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루카 5,17-26)
And some men brought on a stretcher a man
who was paralyzed;
they went up on the roof
and lowered him on the stretcher through the tiles
into the middle in front of Jesus.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As for you, your sins are forgi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시며 그를 고쳐 주시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한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성지 안에 모과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에서 가을이면 많은 모과가 주렁주렁 달립니다. 그리고 하나둘씩 익어 떨어지면 검게 썩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썩으면서도 방향제로 써도 충분한 향기를 내뿜습니다. 이런 모과를 소재로 시를 쓴 시인이 있습니다. 바로 정호승 시인의 ‘모과’라는 시입니다.
가을 창가에 노란 모과를 두고 바라는 일이/ 내 인생의 가을이 가장 아름다운 때였다
가을이 깊어가자 시커멓게 썩어가는 모과를 보며/ 내 인생도 차차 썩어가기 시작했다
썩어가는 모과의 고요한 침묵을 보며/ 나도 조용히 침묵하기 시작했다
썩어가는 고통을 견디는 모과의 인내를 보며/ 나도 고통을 견디는 인내의 힘을 생각했다
모과는 썩어가면서도 침묵의 향기가 더 향기로웠다/ 나는 썩어갈수록 더 더러운 분노의 냄새가 났다
가을이 끝나고 창가에 첫눈이 올 무렵/ 모과 향기가 가장 향기로울 때/ 내 인생에서는 악취가 났다
나이 듦이 어쩌면 썩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내게는 썩어가면서 어떤 냄새를 낼까요? 향기로움일까요? 아니면 악취일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향기인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향기가 풍겨야 우리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그 향기는 믿음, 사랑, 희망을 통해 세상 끝까지 뻗어갑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그 향기를 가리는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남자 몇이 중풍 걸린 사람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사람이 많아 지붕의 기와를 벗겨내서 예수님 한가운데로 내려보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드러납니다.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닌, 병자를 내린 남자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을 무효화시키려고 방해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하느님을 모독한다.”라고 말하면서, 믿음의 향기를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저주의 악취로 가리고 있습니다.
좋은 향기는 어떤 악취로도 가릴 수 없습니다. 특히 그 좋음이 진하면 진할수록 향기로움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병자를 당당하게 고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향기를 품고 있나요? 세상의 어떤 악을 물리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강한 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내가 먼저 용기를 내어 노력하면 결국 가장 행복해지는 건 나 자신이다(박성덕).
조재형신부-
달라스에 홍보를 갔을 때입니다. 예전에 2달 남짓 지냈기 때문에 아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문홍보가 목적이기도하고,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온 것을 알고 제게 연락을 주신 분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만남 중에 한 형제님의 ‘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형제님은 어린 시절 하늘을 나는 조종사가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항공대에 가려고 했는데 그만 자전거를 타다 큰 사고를 당했고, 군대에도 가지 못할 정도로 심한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조종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미국에 넘어와서 항공사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였다고 합니다. 정년퇴임을 한 후에 ‘스쿨버스’ 운전면허 시험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딸이 아빠를 응원하면서 비행기를 운전하지는 못했지만 아이들을 안전하게 등교시키는 스쿨버스 운전사가 되는 것을 축하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3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세계일주 여행을 하겠다고 합니다.
저도 어린 시절 ‘꿈’이 있었습니다. 군인이 되거나 교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군복을 입은 군인의 모습이 멋져보였습니다. 사촌형님이 장교가 되어서 왔는데 그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까지 같은 선생님이 담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모든 과목을 가르치셨습니다. 어린 저의 눈에 선생님은 만물박사처럼 보였습니다. 못하는 것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성당의 친구 중에 사제가 되겠다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저는 신학교에 지원했습니다. 저의 선택이기도 했지만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의 영향이 컸습니다. 31년 사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군복은 아니지만 성직자복과 제의를 입으면서 영적인 싸움에 임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지는 않지만 강론과 교리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미국 대륙횡단을 한번 하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또 다른 ‘꿈’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꿈은 이렇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참으로 멋진 꿈입니다. 절망과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는 위로와 용기를 주는 꿈입니다. 오늘의 화답송은 그러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위선과 가식을 버려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를 없애야 합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합니다. 자비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진리가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사야 예언자의 꿈은 지금 이곳에서 현실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현실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이웃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저는 봉성체를 다니면서 10년 이상 자리에 누워있는 ‘중풍병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본인도 힘들지만, 가족들도 함께 아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풍병자는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가족들과 이웃들이 함께 할 때, 중풍병자는 힘을 얻을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5년 동안 ‘중풍병자’인 아내를 위해서 헌신 하시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말도 하고, 비록 휠체어에 의지하지만 밖으로 나가서 산책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들도 함께하니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꿈과 희망은 혼자일 때는 그대로 꿈과 희망으로 남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함께 할 때면 꿈과 희망은 현실이 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함께하는 우리들의 열린 마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노력을 보시고, 큰 축복을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이영근신부-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루카 5,20)
예수님께서는 ‘함께 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루카 5,21)
참으로 그렇습니다.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그러니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루카 5,24)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루카 5,24-25)
여기서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치유 받았어도 '들것'을 여전히 들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몸이 치료되었다고 해서 몸을 버려두고 다닐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이요, 이미 용서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들것'에 메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상처’에 메여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는 '들것'을 기꺼이 들고 다녀야 할뿐 아니라, 오히려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아버지의 집으로 가야할 일입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 우리의 죄와 인류를 들고 아버지께로 가셨듯이 말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다닙니다.
용서받고 치유 받았음의 표지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를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치유 입었습니다.
이토록 신령스런 주님의 사랑을 말입니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마태 5,26)
하오니 주님!
평상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평상을 들고 가게 하소서.
평상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셨듯이, 저도 십자가에서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루카 5,24)
주님!
당신께서는 치유 받은 이에게 평상이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으나 들것을 가지고 가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지니신 십자가의 상처처럼, 구원의 표시로 들고 가라 하십니다.
하오니, 그 상처를 더 이상은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그 구원의 샘에서 사랑을 퍼내게 하소서.
아픈 이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들것이 되게 하소서.
아멘.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루카 5, 26)
-한상우신부-
우리는 오늘
무엇을 보며
살고 있는지를
성찰합니다.
사방이 꽉 막혀
있으면
지붕의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중풍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내면 됩니다.
상황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참되고 건강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로
내려보낸
그들의 믿음을
예수님께서
보십니다.
믿음을 통해
죄를 용서받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힘들어하는
중풍 환자와
중풍 환자를
내려보낸
이웃들의 마음에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믿음은 마음과
실천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믿음의 실천을
판단하는
마음의 죄에서
먼저
벗어나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더 근원적인 용서가
덜 근원적인 생각에
갇혀 있을 수 않습니다.
언제나
더 근원적인 것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쉽습니다.
더 어려운 것을
선택하고
더 힘든 것을
요구하는
비뚤어진 우리들
신앙입니다.
남들이 잘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중풍환자는
일어나 집으로
걸어갑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권한은
구체적인 변화로
드러납니다.
용서는
우리모두의
변화이며
가장 아픈
이들의 즉각적인
치유입니다.
치유는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믿음과 치유로
이어지는 신기한
오늘입니다.
믿음과 치유를
떠날 수 없는
주님의 오늘입니다.
크게 놀라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우리의 오늘입니다.
많은 일을
체험하지만
더 근원적인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 믿음입니다.
평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듯
믿음으로
돌아가야 할
믿음과 치유의
대림시기입니다.
믿음을 보고
치유를 청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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