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2월 4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Margaret K 2022. 12. 4. 06:02

 

2022년 12월 4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태3,1-12)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 시대가 다가옴을 알린다. 메시아는 참평화의 시대를 열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태어나신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고 다른 민족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임을 상기시킨다(제2독서). 세례자 요한은 말과 행동으로 회개의 삶을 권고하며 메시아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예언한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난 10월의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이 뵙고 싶어졌습니다. 전화할 수도 없고, 편지를 써도 수신이 가능한 주소도 없습니다. 기도해도 부모님께서는 침묵 중이셨고, 꿈에서도 잘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무작정 운전해서 부모님 산소에 갔습니다. 산소 앞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연도를 바쳤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에 대한 그림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움에 무기력한 마음마저 더해져 우울해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비가 쏟아졌습니다. 쌀쌀한 날씨였는데, 비까지 맞으니 추워서 도저히 산소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미사 가방을 챙기고, 부모님께 인사한 뒤에 차 있는 곳까지 뛰었습니다. 전날 비가 많이 와서 산소까지 차를 끌고 갈 수 없었기에, 한참을 비 맞으며 뛰어야만 했습니다.

 

차에 도착해서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는 순간, 우울한 마음이 사라졌음을 깨달았습니다. 차를 운전하는데 라디오에서 아주 멋진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저를 위로해주고 힘내라며 옆에서 가수가 불러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식당 주인과 직원들이 함께 식사하고 있었습니다. 미안해서 나가려고 하자, 괜찮다면서 주문받습니다. 비 맞은 제 모습이 안돼 보였는지 음식이 나오기 전에, 자기들이 먹는 계란 후라이가 남았다면서 먹으라며 주십니다. 식당 주인의 배려에 감동하며 정말 맛있는 식사를 했습니다.

 

외로움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아서 생겼음을 비 맞으며 뛰다 보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멋진 노래를 듣고, 계란 후라이를 먹으며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많음을 그래서 외롭지 않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늘 함께하는 주님과 나의 이웃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으쌰~”를 외치며 힘차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합니다. 그는 자기만의 구원을 위해 이렇게 외쳤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광야에서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면서 필사적으로 외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미리 알려준 주님께서도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하면서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무기력함과 함께 희망 없는 삶이라며 절망 속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때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즉, 자기 삶을 되돌아보면서 주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또 세례자 요한처럼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 있도록 함께해야 합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행복한가? 그렇지 못한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아리스토텔레스).

가장 큰 사랑은 가장 힘없는 자를 향한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SQOphv10BEE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나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분이었습니다.

회개란 ‘나’를 바라보는 것에서 또 다른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회개는 희랍어로 메타노이아라고 하는데 메타노이아는 방향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파라오로 상징되는 자아를 의지하는 삶에서 ‘나는 나’라고 하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이렇게 할 때 나오게 되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광야는 나를 의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해야 하는 극도의 자기 무력화를 해야 하는 곳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광야에 살았습니다. 그는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습니다. 낙타 털은 죽은 낙타가 썩어서 남겨놓은 것입니다. 길쌈을 한 것이 아닙니다. 가죽 띠는 동물의 거친 육체를 절제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메뚜기와 들꿀은 경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메뚜기는 잡기도 어렵습니다. 날아오면 먹고 없으면 굶어야 합니다. 들꿀도 마찬가지입니다. 발견도 어렵지만, 벌들이 허락해주어야 합니다. 왜 위대한 사제인 즈카르야의 아들이 그런 삶을 선택했을까요?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기를 의지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통장 액수’에 의존하는 삶입니다. 통장 액수 때문에 마음이 편해지거나 불안하다면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자아, 곧 파라오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돈이 있건 없건 이집트 안에서는 돈의 노예로 살아가야 합니다. 노예는 고통스럽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삶에서 벗어나라 외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만 모든 것을 마련해주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저도 사제가 되면서 통장 액수를 어느 정도선에서 제안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한 달 생활할 돈만 남겨놓고 다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사제만큼 철밥통이 있을까요? 죽기까지 먹고 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액수를 유지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 돈을 모으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시 통장 액수 줄이기를 실현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점점 저 자신을 믿는 이집트로 회귀하는 삶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삶으로 나아가려면 작은 신앙 체험들이 필요합니다. 광야는 나의 힘을 뺄 때 주님께서 힘을 주시는 곳입니다. 파라오에 의지하지 않을 때 만나와 물을 주십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살아도 샌들이 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굶기지 않으십니다. 일론 머스크는 한 달을 30달러로 살아보고는 가진 재산을 다 투자할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의탁하기 위해 나를 믿는 마음을 포기하고 그것으로 인해 주님께서 우리를 챙겨 주실 수밖에 없는 분이심을 체험할 때 조금 더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사회복지를 하시는 한 수녀님을 도와 주시는 두 봉사자분이 저를 찾아오셔서 함께 식사하였습니다. 그 수녀님은 노숙자들, 탈북자들, 독거노인들, 결손가정 아이들 등을 정신없이 도와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돈이 떨어져서 고기반찬도 올리지 못하고 멸치를 주시는데 작은 멸치도 못 사고 큰 멸치, 그것도 똥도 빼지 못해 쓴 멸치를 반찬으로 내어놓아야 하는 처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은 “어머, 걱정하면 안 되는데….”라며 주님께 의탁하려고 노력하신다고 했습니다. 끊임없이 나의 힘이 아닌 주님의 힘에 의지하려 광야에 머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저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 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겨울이 찾아오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써 달라고 얼마의 돈을 맡기신 분이 계셨습니다. 저는 그분이 그것을 왜 안 쓰냐고 할까 봐 ‘어디다 써야 할까?’ 고민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에 두 봉사자분이 오서서 그런 말씀을 하니 제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정말 기뻤습니다. 그리고 그 수녀님이 깜짝 놀랄 액수를 드렸습니다. 물론 수녀님은 깜짝 놀라셨습니다.

 

이것이 자기 힘을 빼고 광야로 나온 이에게 주님께서 가지시는 마음이 아닐까요? 물론 저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마음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부터 도와주십니다. 하느님께 더 맡길 줄 아는 사람부터 당신 모든 것을 쏟아주십니다.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신앙은 무엇일까요? 기다리고 기다리던 ‘십일조’입니다. 통장 액수는 내 힘으로 사는 상징입니다. 내가 주님께 십일조를 바치려고 할 때 나는 광야에 살게 됩니다. 돈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살펴보면 선악과를 바쳤을 때의 에덴동산에 머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다 챙겨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올바른 마음으로 바치는 사람은 결코 내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선으로 당신 창고의 문을 그 사람을 위해 여실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약을 통해 가져야 하는 가장 큰 교훈입니다.

저는 내년부터 초등학생부터 시작하여 모든 신자분에게 각자의 교무금 통장을 만들게 할 것입니다. 각자가 신앙 고백을 하는 만큼 광야로 나올 수 있고 그래야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피부병이 들어 털이 다 빠지고 먹지 못하여 죽어가는 강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아지를 사랑하는 한 사람이 그 죽어가는 강아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동물보호소에 맡겼습니다. 강아지는 치료받았지만, 털이 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 강아지를 입양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누가 입양했겠습니까?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자기에게 의탁하지 않으면 죽었을 바로 그 대상입니다. 그를 발견한 이가 그 강아지를 입양했습니다. 그에게는 이미 반려견들이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 강아지는 자신이 아니면 또 외로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강아지입니다. 조금만 사랑이 있어도 양심상 그런 강아지를 그냥 버려둘 수 없습니다.

 

이런 예는 아주 많지만 ‘뼈만 남은 채 버려져 죽어가는 개에게 다가간 여성이 한 일’이란 ‘개감동이야’ 유튜브 채널을 시청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의 ‘피아’ 씨가 그 주인공입니다. 피아는 ‘자비롭다’라는 뜻입니다.

자비로운 자의 사랑은 가장 힘없는 자를 향합니다. 하느님은 자비 자체이십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해 보려는 사람은 제쳐 놓으시고 가장 힘을 뺀 이를 먼저 찾으십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로 가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이 회개를 내년부터는 십일조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조재형신부-

우리 민족의 시작을 알리는 ‘단군신화’는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지낸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동굴을 나왔지만 곰은 끝까지 참았고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 바람, 구름을 다스리는 책사와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은 인간이 된 웅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단군왕검입니다. 하늘세계에서 사는 환웅은 아무런 조건 없이 인간세계를 위해서 내려왔습니다. 마치 하느님의 아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람이 되신 것과 비슷합니다. 환웅이 제시한 조건은 호랑이에게는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 육식동물인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은 먹기 힘들었습니다. 잡식동물이 곰에게 쑥과 마늘은 먹을 만했습니다. 겨울잠을 자지 않는 호랑이에게 캄캄한 동굴에서의 생활은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겨울잠을 자는 곰에게 동굴에서의 생활은 편안한 집과 같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평등하지 않고, 공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라는 말은 단군신화의 세상에도 쉽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태어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인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단군신화는 환웅이 이 세상에 온 이유를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고 하였습니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시천주(人乃天侍天主)의 동학사상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난과 고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까지도 품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미국에서의 노예해방에 서명한지 100년이 되었지만 흑인들에게는 여전히 기회는 공평하지 않았고, 과정은 공정하지 않았고, 결과는 정의롭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흑인목사 마틴루터 킹은 1963년 8월 28일에 ‘I have dream'이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습니다. 연설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어려움과 좌절의 순간이 있었지만 아직도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옛 노예의 자손들이 옛 노예 소유주의 자손들과 함께 형제애의 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4명의 자녀들이 언젠가는 그들의 피부색으로 판단되지 않고 그들의 인품에 의해 판단되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울리게 할 때 하느님의 모든 자손들인 흑인과 백인, 유태인과 이방인들, 신교도와 구교도가 손에 손을 잡고 옛 흑인영가 ‘마침내 해방되었도다! 마침내 해방되었도다! 전능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라. 우리는 마침내 해방되었도다!’를 노래 부를 수 있게 될 날을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환웅의 꿈과 마틴루터 킹의 꿈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오늘 복음은 바로 그러한 세상이 곧 다가올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은 4강의 신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Dreams come true!" 20년 이 지난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은 기적과 같이 16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환인의 꿈, 마틴루터 킹의 꿈, 이사야 예언자의 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현실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꿈은 혼자서 간직하면 꿈으로 머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꿈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마침내 현실이 될 것입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rh15KcQ0lJw

 

맑은 정신으로 늘 깨어 기도했던 광야의 대 예언자, 세례자 요한

양승국신부-

 

예언자로서의 삶, 말만 들어도 왠지 그럴듯해 보입니다. ‘있어’ 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어 보입니다. 가는 곳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내 앞으로 몰려들겠지요.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품위 있고 장엄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는 하늘을 찌르겠지요. 추종자들은 늘 나를 큰 스승으로 떠받들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세례자 요한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전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위해 밤샘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참 전달자로 계속 존재하기 위해 부단히 화려한 도시를 떠났습니다. 황량하고 고독한 광야로 계속 깊이 들어갔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보십시오. 그의 나날은 그야말로 ‘초근목피’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주식은 날아다니는 메뚜기였습니다. 음료수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들 꿀이었습니다. 그가 걸치고 있었던 의상을 보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무슨 원시인입니까? 낙타털 옷에 가죽 띠입니다. 그는 대체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였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결한 영혼을 계속 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확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온통 만연해 있는 세상의 죄악과 타락 앞에 당당히 맞서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끝도 없는 자기 비움의 삶, 뼈를 깎는 자기 통제의 연속, 자아 포기, 자기 연마, 자기 부정의 나날이 세례자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목숨 걸고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철저한 겸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예언자로서의 삶, 어쩔 수 없이 고독합니다. 원치도 않았는데,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예언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시는데, 때로 죽기보다 힘든 숙제입니다.

 

완전 귀 먹은 백성들을 향해, 이미 물 건너간 사람들을 향해, 다시 돌아오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합니다. 거듭되는 외침에도 사람들의 몰이해, 그로 인한 박해는 계속됩니다. 결국 외로운 투쟁을 거듭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과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이 땅 위에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인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란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데 예언자들이 흘린 피는 소중한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한 존재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 소멸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일이 이제 우리에게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 안에 생명의 불꽃을 간직한 사람들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비록 육체는 이 세상에서 자취가 사라지지만 영혼은 더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대림 2주일입니다.

그리고 인권주일이고 사회교리주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대림 1주일에 ‘그분이 오시니, 기뻐하고 깨어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다가온 주님을 맞이할 채비를 서둘러라 하십니다.

곧 그분을 맞이하는 데 합당한 자가 되라 하십니다.

 

동시에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가 기다리는 분이 “주님의 영이 머무르는 분”(이사 1,2)으로 소개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오신 그분이 “할례 받은 이들의 종”(로마 15,8)이 되셨음을 말합니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분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마태 3,11)

 

첫째 증언은 그분께서는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선포되고 있는 것은 사실 '뒤'가 아닌, '지금' 입니다.

시기적으로는 '뒤'지만, 시점으로는 '지금'입니다.

 

이는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그분이 ‘드디어 오신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분이 지금 ‘막 오고 계신다’는 긴박한 상황을 강조해 줍니다.

곧 그분께서 미래가 아닌, ‘지금’ 오신다는 선포입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우리의 관심을 자기 자신이 아닌, ‘지금 오시는 분’에게로 집중시킵니다.

자신은 단지 그분의 ‘길을 닦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의 자세입니다.

‘주님을 주인 되게 하는 일’ 일입니다.

자신을 주변으로 밀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지금 바로 여기에 우리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둘째 증언은 그분께서는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곧 '종'될 자격마저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인격을 만납니다.

사실 타인을 자신보다 더 능력 있는 이로 인정해준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자신보다 어리고 후배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종’의 자격마저도 없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영웅적인 겸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신원을 정확히 알고 깨달은 데서 나오는 겸손입니다.

 

그래서 셋째 증언에서 요한은 그분께서는 당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여기에서 세례자 요한과 그분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곧 ‘신원의 차이’와 ‘사명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습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단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준비를 시켰을 뿐입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은 만들 수 있었지만,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말은 그분께서 ‘용서할 수 있는 분이요,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그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대림 제2주일을 맞으면서,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세례 때 이미 받은 '새로운 생명'과 '용서'를 선포하고 증거하고 전파해야 할 사명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알렐루야 환호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이는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준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곧 이 세상과 이 시대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는 외침입니다.

 

이를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시편 72,7 참조)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마태 3,3)

 

주님!

사방이 탁 트여 어디 하나 숨을 곳이 없는 곳, 발가벗겨진 광야로 불러내어 제 실상을 보게 하소서.

회개의 영을 불어 넣으시어 굽은 데를 곧게 하소서.

낮아지고 작아지고 무력해지고 가난해지는 당신의 길을 걷게 하소서.

당신을 위하여 걷고 당신과 함께 걷게 하소서.

아멘.

「본능대로 살지 아니하고 영성으로 살아야」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태초부터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분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흔들렸지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시간 영원한 하느님의 사랑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하며 당신의 숨, 영을 불어넣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제 우리는 본능으로 살지 아니하고 이성으로 삽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갖고 한 차원 더 나아가 영성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 1독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보면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쩌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이사11,6-7).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사자나 늑대는 사나운 이빨을 가지고 있고 난폭합니다. 양과 염소, 송아지는 그들의 먹이가 됩니다. 더군다나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이 말씀은 사자나 늑대가 사나운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지만 제 본능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난폭한 습성을 버리고 오히려 양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36,26). 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언제 이루어졌느냐 하면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다음 수백 년이 지나서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는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신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삶이 변했습니다. 몸을 파는 창녀가 제 습성대로 살지 않고 깨끗하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왔을 때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져라.”하셨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둘 다 떠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짓지 마라.” 그는 더러운 습성을 버리고 주님의 자비를 입었습니다. 은총이 충만했습니다.

 

사납게 굴던 마귀 들린 사람이 예수님의 한마디로 온순하게 되었고, 남을 등쳐먹던 세리 자캐오가 자기 습성이나 본능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재산을 내놓았습니다.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네 곱절로 갚았습니다. 서로 미워서 등진 사람들이 사랑하게 되고, 심지어 죽었던 나자로가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고 때로는 기적을 행하시며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은총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힌 일부를 제외하고는 본능이나 습성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신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어부가 그물을 버리고 가족을 놔두고 그야말로 삶의 터전을 떠나 기꺼이 주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본능적으로 살았을 때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박해하고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그가 “나는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 달리고 있습니다.” 하며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은 새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매달린 강도도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여 바로 그 자리에서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3,20).하고 선포하였습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 본능대로 살지 않고 악습대로 살지 아니하며 잘못된 것을 버리고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마음 보따리를 바꾸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얘기를 하면 그래도 봐 줄 수 있는데 남 얘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남이야 상처를 받건 말건, 상대방을 위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온갖 것을 다 떠벌립니다. 그것이 사실이건, 거짓이건 진실성은 사라지고 자기 본능대로 있는 말 없는 말 다 해요. 평상시에는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하고 꽁무니를 빼던 사람도 남을 흉볼 때는 어찌나 그리 말을 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주님을 영접하려면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사자와 늑대, 표범이 사나운 입을 다물고 새끼염소나 송아지와 함께 지내듯 사나운 입을 다물고 절제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 아직도 뒷담화를 하십니까?” 묻습니다. “험담은 무엇입니까? 남의 잘못된 점이나 흉을 들추어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험담은 진실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니며,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험담은 단 하나 상처만 깊게 남길 뿐입니다”(프란치스코교황).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저 신부님께서 누구에게 무슨 얘기를 들으셨기에 저런 말씀을 하실까? 누굴 두고 하는 말씀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누굴 두고 하는 얘기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지요. 자기영혼의 상태를 비추어 보고 고칠 것을 고치면 되는데 남에게 먼저 관심을 두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여라” 하면 나는 쏙 빼놓고 다른 사람만이 죄인인 줄 생각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비를 청하면 되는 것인데 왜 그리 힘이든지요?

 

욕심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먹고 싶은 대로 다 먹고, 쓰고 싶은 대로 다 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폭음과 폭식을 하고는 탈이 나서 고생하는 사람도 있고요, 사촌이 땅을 사서 배 아파하는 사람도 있고, 시기와 질투로 마음고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 열심히 노력해서 그보다 더 넓은 땅을 사면 됩니다. 그런데 노력은 하지 않고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 분노, 적개심...

 

혹시라도 이런 마음이 있다면 오늘 그 본능적인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성령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은 “회개한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사도 26,20)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나의 좋지 않은 습관, 삶의 태도를 한 가지라도 바꿀 수 있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 3장 10절에는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 진다.”고 적혀 있습니다. 도끼가 뿌리에 닿아있다는 것은 결국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은총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내일로 미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작심삼일이 되더라도 지금 좋은 일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선을 이끄시는 하느님께서 좋은 열매를 맺어 주실 것입니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속에 태워버리실 것이다”(마태3,12). 하셨으니 여러분은 부디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곳간을 차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벌써 두 번째 대림초에 불이 당겨졌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만큼 밝아 졌기를 희망하고 준비된 마음 안에 아기 예수님을 낳아드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콜로새서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함으로써 언제나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온갖 좋은 일을 행하여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더욱 잘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2월 8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생활 성서 듣는 소금 항아리 : https://www.youtube.com/@83bible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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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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