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2월 2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2. 12. 2. 06:23

 

2022년 12월 2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은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마태오 9,27-31)

 

Then he touched their eyes and said,

“Let it be done for you according to your faith.”

And their eyes were open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야곱 집안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야곱이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두 사람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들의 믿음을 확인하신 다음,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고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하시며 눈을 열어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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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너무나 행복한 지네가 있었습니다. 친구도 많았고, 자기가 있는 곳은 지네에게 쾌적함을 가져다주는 최고의 장소였습니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 그리고 먹을 것도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항상 “행복해~~”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두꺼비가 행복하다고 말하는 지네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행복한 지네야, 너는 어느 발 다음에 어느 발을 내딛는 거니?”

 

그 순간 지네는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궁리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많은 발을 가지고 있었고, 그동안 어떻게 걸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발이 꼬여서 도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그 많은 발을 가지고도 발이 꼬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지네에 모습에 이런 글을 지었나 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런 모습이 자주 엿보입니다.

 

평상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문을 품으면서 가장 쉬운 걷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 될 수 있게 된 지네처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자주 체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냥 평소대로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살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의문을 품는 순간, 그가 하는 말과 행동에 의심이 생깁니다. 똑바로 함께 걸어갈 수 없습니다. 관계가 꼬여 넘어지고 맙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의심을 버리고 믿는 삶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하고 있나요? 주님께 불평불만 하면서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그들의 이 외침은 믿음 없는 자가 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만이 자신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단 한 번의 고민도 없이 곧바로 “예, 주님!”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믿는 바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주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어려움을 해결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분명했고, 최고의 결과로 앞을 볼 수 있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늘 의심과 의문으로 믿음의 생활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과의 관계가 꼬이고, 주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나의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계속해서 꼬였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어렵지 않습니다. 평상시 우리의 삶이 믿음의 삶이었다면, 마치 땅을 걷는 것처럼 편안함을 갖게 될 것입니다.

 

가장 적은 것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이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소크라테스).

​능력을 발휘하는 법: 주님께서 우리를 응원하시게!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AY6Eq7LbSxs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눈먼 이가 눈을 뜨는 경위는 이러합니다. 처음에 그가 원해야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 9,27)

그 다음엔 자신이 청하는 대상, 곧 그리스도께서 그러할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마태 9,28)

눈먼 이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 다음 눈을 뜰 능력이 자신 안에 있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으로 눈을 뜨게 해 주시지 않고 눈먼 이가 믿는 대로 되라고 하십니다. 만약 눈먼 이가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서는 주님의 역할은 우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를 믿게 만드는 일을 하시는 것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발휘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논문 발표를 할 때였습니다. 10여 년에 이르는 노력이 열매를 맺어야 하는 날이 다음 날로 다가왔습니다. 사실 발표하는 날 잘못되어 학위를 받지 못하는 일도 있기에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주님께 의탁했습니다. 성당에서 기도하기 위해 앉았습니다.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금방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밤새 성당에서 잤습니다. 기도를 드린 시간은 30분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세 시간은 성체조배하고 자려고 했으나 깨어보니 바로 준비해서 나가도 빠듯한 시간이었습니다. 황당했습니다.

그래도 주님과 함께 잠을 잤다는 뿌듯한 마음은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막상 발표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전혀 떨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교수님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발표하는 자리에 앉아서 오신 신부님들과 수녀님들께 이것저것 공지 사항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발표는 엉망이었습니다. 질문하시는 교수님들의 말에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편했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논문 발표를 논문 방어라고도 불리는데 그런 질문들에 수긍하는 것은 박사 학위를 받으려는 사람에게는 부적절한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몰랐습니다.

며칠 뒤 논문 점수를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점수가 조금은 낮을 줄 알았는데 세 분 교수님 모두 상당히 높은 점수를 준 것입니다. 함께 공부하던 외국 수녀님들이 저의 점수를 보더니 “난 죽어도 저 점수는 못 받을 거야!”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정말 신기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내가 한 일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특별히 도와 주신 일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발표하는 중간에 주님께서 도와 주신다는 것을 느꼈어야 했습니다. 그냥 저는 제가 알고 있는 것보다 조금 못하게 대답해서 실망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감’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 잘 될 것이라는, 왜냐하면 주님과 함께 잤으니까 주님은 그만큼 나에게 보상을 해 줄 것임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하지 못해도 믿어주는 분이 곁에 계신다는 느낌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능력으로도 충분했던 것입니다.

 

부모님이 아이가 걸음마를 하고 말을 하려고 옹알이하는 것을 바라볼 때 어떤 느낌일까요? “넌 능력이 없으니까 내가 도와 주어야만 해!”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네 안에 이미 걸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엄마 아빠는 그것을 믿어!”일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믿는 대로 아이는 그것을 해 냅니다.

 

만약 부모가 믿어주지 않으면 어떨까요? 어떤 마을에서는 자녀들이 두 발로 걷지 못하고 네 발로 걷기도 합니다. 터키 한 가족 중 5남매가 네 발로 걷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걷게 된 것은 처음에는 근친상간으로 결혼한 부모의 탓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유전자 결함 때문에 소뇌에 손상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상 근친상간으로 자녀를 낳은 사람이 많지만 자녀들이 네 발로 걷게 되었다는 예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소뇌가 손상된 다른 형제들은 힘겹지만 두 발로 걷고 있었습니다.

 

결국 ‘습관’ 때문이라는 최종결론이 나왔습니다. 이들의 부모는 아이들이 네 발로 걷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네 발로 걸어도 교정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이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네 발로 걸었던 아이들에게 교정을 시켜주니 어느 정도 두 발로 걸을 수 있었습니다. 부모가 믿어주지 않은 것이고 자녀들은 그 믿음을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교정 평행봉을 만들어주고 간 몇 년 뒤 이 아이들 중 몇 명은 직립보행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부모처럼 믿어주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처럼 할 수 있음을 믿어주는 이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믿어줄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본인이 물 위를 걸어보지 못하고 우리에게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마케팅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조서환 회장이 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장군이 될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장교로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수류탄 사고로 한쪽 팔을 잃습니다. 그리고 그래도 사랑한다는 아내를 만나 학생 나이에 결혼하였습니다. 하지만 국가유공자임에도 한쪽 팔이 없다는 것만으로 아이 둘까지 있는 사람을 취직 시켜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기차에서 뛰어내릴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이때 생각났던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아내입니다. 자신을 믿고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해 준 아내 때문에 그는 다시 면접장으로 찾아갔고 글을 쓸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한 손만 있으면 되는데 왜 자신을 뽑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그의 기백에 결국 합격하게 되었고 장점을 부각하는 방법으로 마케팅계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능력을 갖췄습니다. 하지만 이는 가능성입니다. 씨앗입니다. 그것을 틔워줄 믿어주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처럼 되려면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분은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믿는 대로 되어라!” 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그분을 믿고 내가 그분처럼 할 수 있음을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조재형신부-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한인성당에 신문홍보를 가면서 가까이에 있는 포트워스 한국순교자 성당의 신부님도 만났습니다. 포트워스 신부님은 구역장 모임에 저를 초대하였고, 혹시나 해서 신문과 구독신청서를 가져갔습니다. 신부님은 구역장들에게 본인이 구독료를 내 줄 터이니 신문구독을 하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신부님 덕분에 달라스 성당뿐만 아니라 포트워스 성당에서도 신문홍보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따뜻한 마음으로 신자들과 함께하니 포트워스 한인성당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달라스 한인성당이 깔끔하고, 세련된 서양식당 같다면 포트워스 한인성당은 구수하고, 정감 있는 맛 집 같았습니다. 신부님은 설날에는 세배 온 신자들에게 세배 돈도 넉넉하게 주었고, 주일학교 학생들을 위한 점심 밥값도 내 주었습니다. 땅에 재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재물을 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 같았습니다.

 

달라스 성당의 신부님은 신자들을 공평무사하게 대하였습니다. 신자들이 많기에 어느 한쪽 편을 들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난의 향이 천리를 가듯이 신부님의 공평무사함은 공동체를 따뜻하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팬데믹 전에는 12시 영어미사는 미국 신부님이 하였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손님 신부님이세요?’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영어미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의 눈에는 손님신부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팬데믹으로 미국신부님이 오지 못하면서 자연스럽게 신부님이 영어미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영어로 강론을 하는 것이 부담이 되었지만 2년이 지나면서 이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신부님에게 다가왔다고 합니다. 팬데믹 때문에 힘든 일도 많았지만 팬데믹으로 주일학교 아이들과 소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듯이 신부님의 진중한 마음은 신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저는 그날이 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다리기도 했고, 그래서 떠나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날은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언제나 기뻐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날은 늘 기도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불평하고, 지금 원망하고, 지금 비관하면 언제나 제가 머무르는 곳은 가시방석입니다. 그러나 지금 감사하고, 지금 기뻐하고, 지금 기도하면 제가 머무르는 곳은 언제나 꽃자리입니다. 넉넉한 마음과 진중한 마음으로 신자들과 함께하는 신부님들에게 그날은 늘 ‘꽃자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이 먼 소경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비록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소경은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소경은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신다는 예수님의 소문입니다. 아픈 이를 치유해 주신다는 소문입니다. 죄인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신다는 소문입니다. 그래서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소경은 주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눈이 먼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갈망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눈이 멀었을지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던 소경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감사할 수 있다면, 기뻐할 수 있다면, 기도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마음을 환하게 열어 주실 것입니다

매일 성체를 모시고, 매 순간 그분을 찬양하는 모든 순간들이 주님의 날이요 구원의 때입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의 육화강생과 인류 구원을 일찌감치 선포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날에 펼쳐진 황홀하고 충만한 광경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광경이 얼마나 은혜로운지...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포악한 자가 없어지고 빈정대는 자가 사라지며,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모두 잘려 나가겠기 때문이다.”(이사야서 29장 19~20절)

 

결코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냉혹한 현실, 더 나아가 암담하고 비참한 현실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얼마나 큰 위로요 기쁨인지 모릅니다.

 

특히 이런 저런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 혹독한 장애나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큰 희망의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날에 대한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은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로 인해 정확하게 성취됩니다. 오늘 복음만 봐도 딱 맞아떨어집니다. 시각 장애로 평생을 고생해왔던 눈먼 사람 둘이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9장 27절)

 

두 사람은 예수님 안에 깃든 신성, 그분의 신원, 그분의 전지전능하심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용기를 내서 큰소리로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용기와 강한 믿음과 절박함은 곧바로 치유의 은총으로 연결됩니다.

 

보십시오. 어쩌면 예수님의 도래 그 자체가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은 3년이란 단기간이지만, 하느님 나라를 미리 앞당겨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 예수님이 사랑을 실천하던 곳, 그곳이 곧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 각자 안에 현존해 계십니다. 우리의 나약함으로 인해 인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분께서는 항상 우리를 바라보시고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고, 구원의 길로 이끌고 계십니다.

 

성체성사를 비롯한 다양한 성사를 통해, 교회 공동체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 안에 적극적으로 현존해 계십니다.

 

따지고 보니 매일 성체를 모시고, 매 순간 그분을 찬양하며 기도하는 하루하루, 모든 순간 순간들이 주님의 날이요 구원의 때입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이영근신부-

 

오늘도 우리는 눈을 뜨며 깨어나고, 눈을 감으며 잠에 듭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이는 것이 있고, 눈을 뜨고도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이가 있고, 눈을 감고도 보는 이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말합니다.

“그날에는 ~ 눈 먼 이들의 눈도 암흑과 어둠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이사 29,17)

 

복음 환호송에서는 노래합니다.

“보라,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주시리라”

 

그리고 복음은 ‘눈 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려 보게 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 먼 사람 둘이 따라와서 집 안에까지 따라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눈이 멀어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비록 눈은 멀었어도 믿음으로 이미 눈 뜬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볼 수는 없었어도 그분에 대해서 들을 수는 있었습니다.

보지 못하면서도 들은 바를 믿었으니, 진정 복된 이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보고도 믿지 못하는데, 보지 못하면서도 믿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이미 눈이 열린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곧 믿음의 눈이 열린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눈 먼 이가 보게 된 이야기가 아니라, 믿는 이가 보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치유해 주실 것을 믿었고, 그래서 그 믿음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불신이요, 그분을 보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습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마태 9,29)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기다리십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믿음입니다.

그분의 이 믿음에 우리의 믿음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러자 눈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손을 대시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말씀하시고, 그들은 말씀을 믿고 눈을 떴습니다.

 

그렇습니다.

눈 먼 이들은 건강하게 되어서 믿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건강해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믿었기에 눈이 열린 것이지, 눈이 열렸기에 믿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바를 믿은 것이 아니라, 믿는 바를 원했던 것입니다.

먼저 믿고, 믿는 바를 청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에서 참된 빛이 오고, 믿음에서 참된 관상이 옵니다.

그들은 길을 가는 동안에는 보지 못한 채 믿음으로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집 안에 들어가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지금은 믿음으로 걸어가지만, 그날이 오면 그분의 집안에서 참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시편 27,1, 오늘 화답송 후렴)

 

아멘.

「믿음으로 눈이 열렸다」

-반영억신부-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생각지도 않게 소망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정성과 사랑을 쏟았을 때 더 큰 기쁨을 누리게 되고 보람을 차지하게 됩니다.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결과에 연연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무엇을 갈망한다면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며 믿고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눈먼 사람 둘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눈을 뜨는 것입니다. 눈을 뜨려면 눈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들은 마침 길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9,27).하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자비를 입어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고, 주님께서는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하시며 그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믿음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소망을 이루었습니다. 앞으로도 믿음으로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매일의 성경말씀 읽기와 미사참례, 성체조배, 개인기도와 묵상을 통하여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성장을 이루고 마침내 주님의 능력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5,15-16). 그러므로 믿음으로 갈망하십시오.“어둠 속에 있어도 믿음과 희망 안에 사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은 당신을 지켜 주시니 말입니다.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요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그림은 밀라노의 어떤 백작의 요청에 따라 3년 동안에 걸쳐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 그림은 예수님께서 중앙에 앉아 계시고 제자들이 양 옆에 앉아서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처음그림은 예수님께서 오른손에 잔을 들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림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한 사연이 있습니다. 다빈치는 작품이 완성될 무렵에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대뜸 “다빈치, 여기 예수님께서 든 잔은 꼭 진짜 같은데!” 하고 말하며 다빈치의 훌륭함을 칭찬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다빈치는 그림을 수정하였답니다. 진짜같이 보이는 잔을 지워 버리고 예수님의 팔이 가만히 탁자 위에 올라가 있는 지금의 모습대로 말입니다. 그것은 그의 믿음이 그렇게 했습니다. 결코,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나이가 43살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무엇을 했나 모르겠습니다.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말같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돈도 벌어야 하고요, 취미생활도 해야 하고요. 친구도 만나야 합니다. 때맞춰 여행도 해야 하고 술도 마셔야 하며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기도는 물론 미사도 소홀히 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보다도 세상 것을 찾고 즐기고 있으니 어찌 보면 우리는 눈뜬장님입니다. 육적인 눈 뿐 아니라 영적인 눈, 믿음의 눈을 떠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9,39). 진짜 봐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보지 않아도 될 것은 더 잘 보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먼저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영적인 시각을 회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말씀 나누기 - 대림 1주 금요일-누구에게나 하시는 질문, 믿느냐?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12월 3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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