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2월 1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2. 12. 1. 06:57

 

2022년 12월 1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마태오7,21,24-27)

 

Everyone who listens to these words of mine

and acts on them

will be like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on rock.

The rain fell, the floods came,

and the winds blew and buffeted the house.

But it did not collaps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을 길이길이 신뢰하라는 노래가 유다 땅에서 불릴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행복의 문을 여는 193가지 이야기’라는 책에서 불행한 사람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완벽주의는 불행하다. 그는 모든 걱정을 껴안고 인생을 살아간다.

 

2) 항상 남과 비교하려 한다.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경쟁심은 평안을 앗아간다.

 

3) 자기 자신만이 가장 옳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늘 고독하다.

 

4) 작은 일에 신경을 집중시킨다. 이런 사람의 표정은 항상 불만과 우울함으로 가득 차 있다.

 

5) 매사에 의심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며 상대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6) 이웃을 위해 절대로 사랑과 물질을 베풀지 않는다. 한번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밖으로 나올 줄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더 많은 것을 간직하면서 풍요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는 ‘풍요로움’ 대신에 ‘빈곤함’만 가득하게 됩니다. 사실 그들의 이런 행동은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과 함께하는 행복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혼자만 남게 되고, 그래서 힘든 시간을 계속해서 간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기도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어려움만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주님, 주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나만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만의 사랑이 아닌, 우리 모두를 향한 사랑. 그래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솔직히 이런 사람이 세상 안에서 많은 손해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손해를 보면서까지 남을 향한 사랑을 실천해야 하냐고 항의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자기만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면 무너지고 맙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실행하면서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석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사람이 되어서 어떤 시련과 고통도 거뜬하게 이겨내게 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늘 나라의 영광을 얻게 됩니다.

 

앞선 불행한 사람의 공통점이 나의 모습이 되지 않도록 정반대의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의 영광을 차지하게 만드는 열쇠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둘도 없이 귀중한 것인데도, 우리는 언제나 어떤 것이 생명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가진 듯이 행동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이란 무엇인가? (생텍쥐페리)

신앙이 쉬비게 무너지는 사람의 특징

-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pKo3LjnywDI

오늘 복음은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모래 위의 집처럼 무너진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이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많은 신자가 냉담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오늘 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냉담한 이들은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뜻, 곧 사랑의 실천에 목적을 둔 신앙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목적은 더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희 어머니 이야기를 자주 해서 죄송스럽기는 하지만, 어머니가 고생하며 자란 집들은 다 천주교 신자의 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머니를 형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용했고 그래서 어머니는 한 집에서는 탈출해야 했으며, 또 한 집에서는 집사람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왜 한 불쌍한 길 잃은 아이를 그렇게 이용하고 차별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어머니가 가족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길에 쓰러진 강도를 만난 사람이 형제로 보였다면 사제나 레위인이나 그냥 지나갈 수 있었을까요? 오직 사마리아인만이 그를 형제로 보아주었습니다. 형제로 보이지 않으면, 가족으로 보이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휴가 때 놀러 가다 체험했습니다. 저도 아픈 사람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사고가 났다고 신고는 해 주었지만, 그분과 함께 있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만약 그 사고를 당한 사람이 가족으로 보였다면 그렇게 했을까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강론을 수백 번 해도 실제로 그런 상황이 닥치면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지를 않습니다. 가족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JTBC ‘재벌집 막내아들’은 이상한 설정으로 시작합니다. 한 재벌가를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충성하던 주인공이 그들에게 배신당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렇게 죽게 된 주인공은 죽는 순간 다시 과거로 돌아가 그 재벌 집 셋째 아들의 손자가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은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미래 일을 알기에 많은 돈을 벌고 재벌에 복수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할까요?

 

주인공은 I.M.F. 때 아버지가 정리 해고되어 어머니가 그 충격으로 사망하게 된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 상관도 없는 옛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갑니다. 가족들은 주인공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압니다. 이전 생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부모였음을. 그는 가진 재산 전부를 내어놓으며 망해가는 아버지 회사를 매입하려 합니다. 이것이 복수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기억만으로 지금은 남의 식구가 되어있고 아무 상관도 없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버리는 주인공의 선택은 우리 모두의 공감을 얻습니다. 누구나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나의 부모였다는 기억이 이렇게 소중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모든 사람이 가족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무엇을 통해서겠습니까? 이 드라마처럼 ‘기적’을 통해서 입니다. 그 기적은 미사 때 ‘성체성사’로 일어납니다. 성체성사를 믿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를 둔 한 형제들이 됩니다. 말로만 형제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진짜 형제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창조자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 또한 나의 형제들이 됩니다. 그분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성체성사가 아니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십계명이 지켜질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했다면 성체가 아니면 이는 불가능함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코로나를 이유로 냉담을 한다면 이는 그동안 신앙생활의 목적이 사랑의 실천이 있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다 자칫 사랑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빠질 위험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정치적으로 누군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발언을 해서 큰 파장을 일으킨 성직자도 있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사실 우리 신앙의 목적이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런 신앙의 길로 빠지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 신앙을 사랑 실천이라는 암석 위에 세웁시다. 그러면 우리가 짓는 신앙의 집이 결코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모래위의 바빌론, 반석 위의 예루살롐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NHxDhqGvJAc

기도 생활, 영적 생활에 충실했다면, 반드시 열매가 필요합니다!

-양승국신부-

 

갑작스러운 한파가 닥쳐왔습니다. 제가 몸 담고 있는 공동체는 바닷가 언덕 위에 위치해 있는지라, 강력한 해풍까지 불어오니, 체감온도가 만만치 않습니다.

 

주말 피정을 앞두고 할 일은 태산인데, 바깥으로 나가기가 망설여졌습니다. 그래도 가슴을 딱 펴고, 마음 단단히 먹고, ‘가자!’ 하고 나가보니, 추위 그거 별것 아니더군요. 열심히 일에 집중하니, 강풍이니 체감온도니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살아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마음 독하게 먹고 뛰어들면 극복 못 할 역경은 없습니다. 고통이나 시련, 추위나 더위, 열악한 환경이나 악천후, 그 어떤 도전들이 다가와도 우리 내면에 주님께서 굳건히 자리하시면 넘어서지 못할 도전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우리 안에 든든한 반석 하나 마련해야겠습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 흐뭇한 든든한 반석 위에 우리 영혼의 집을 지어야겠습니다. 엄청난 폭우나 태풍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미동도 하지 않는 반석 같은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반석 같은 신앙인은 어떠한 사람인지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오 복음 7장 21절)

 

강의를 하러 가 보면 주 고객이 어머님들이십니다. 그래서 가끔 우스갯소리 반, 진담 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드리곤 합니다.

 

“기도 생활, 영적 생활에 충실했다면, 반드시 열매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이웃 사랑, 특히 가장 가까운 이웃을 대상으로 하는 이웃 사랑이라는 결실을 맺어야만 합니다.

 

매일 새벽 미사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례하신다면, 그 정성, 그 마음으로 영감님 진짓상을 차려드려야 마땅합니다.

 

오늘 이 강의 들으시고 집에 돌아가셔서, 현관문을 딱! 여는 순간,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의 그분, 티비 리모컨을 보물처럼 꼭 움켜쥔 채, 소파에 드러누워 졸고 계실 그분을 마주칠 텐데, 오늘은 어제와 다른 얼굴로 그를 대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를 연민과 측은지심의 눈, 더 나아가 사랑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조재형신부-

 

저의 성격을 생각하면 강한 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유부단한 편입니다 논리적이거나 직관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성적이고 상황에 따라서 결정하는 편입니다 그런 성격이기에 큰 결정을 해야 할 때면 당황하곤 합니다. 음식점에서 메뉴를 정할 때도 ‘아무거나’라고 하거나 남들이 시키는 걸 따라합니다 그래서 주관적이고 논리적이고 직관적인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더러는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포트워스에 갔을 때입니다 신부님이 선물로 카키색 모자를 사주었습니다. 저는 별 생각 없이 고맙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은 모자의 색이 마음에 안 든다고 다른 걸로 사주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현지에서 유명한 클럽을 가자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별 생각 없이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모자를 원했던 신부님은 입장료를 내면서 갈 필요가 있냐고 자기 의견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했지만 클럽에서는 이야기도 많이 하고, 재미있게 즐겼습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할 생각을 못 했습니다. 어떤 성격의 사람이 험난한 세상에서 더 현명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거인들의 발자취라는 책에서 각기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역사에 함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드럽고 약간은 우유부단했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면 정든 고향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도 하느님께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면 그렇게 하였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동생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였습니다. 섬세하고 욱하는 성격이었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습니다. 모세는 욱하는 성격에 사람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부르셨지만 소심한 성격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겁이 많아서 예수님을 3번이나 배반했던 베드로 사도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그런 베드로가 복음을 선포하니 세례를 받은 사람이 3,000명이나 되었습니다. 논리적이고, 직관적이었던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였지만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리와 신학은 바오로 사도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타고난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삶의 환경에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성격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성격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 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 발이 그것을 짓밟는다. 빈곤한 이들의 발이, 힘없는 이들의 발길이 그것을 짓밟는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하고, 세상의 어두운 곳, 소외된 곳, 가난한 이, 병든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이기도 합니다. 타고난 성격이 내 신앙의 반석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 내 신앙의 반석입니다.

 

오늘의 영성체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현세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고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이영근신부-

 

우리는 외형의 집인 가정 혹은 수도원을 ‘육신이 거처하는 집’으로, 그리고 하느님을 ‘마음이 거처하는 집’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의 육신이 거주하는 '성읍'에 대한 이야기이고, 복음은 마음의 '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성읍과 집이 세워진 기초, 곧 '반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노래합니다.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이사 26,1-4)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고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마태 7,21)

 

독서에서는 '하느님이 영원한 반석'이라 하고, 복음에서는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 위에 집을 지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이란 영원한 반석’ 위에 집을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실행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하늘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버지의 뜻'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분을 직접 보고 들은 분, ‘그분의 뜻’을 받들어 그분으로부터 오신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이 아니고서야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배우고 그 실행 방법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시고,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8) 라고 말씀시고, 온몸을 바쳐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신뢰하고 사랑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놓음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혹 어떤 것이 ‘아버지의 뜻’인지 잘 모를 때는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자신을 내어놓는 쪽, 곧 자신이 손해 보는 쪽을 택하면 될 일입니다.

곧 '십자가'가 있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처럼 어리석음과 무력함을 택하는 일, 곧 이해되지 않아도 먼저 용서하고, 오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쓰고, 부당함을 당하고도 그를 감싸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하루 제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양식으로 삼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게 하소서!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

(마태 7,21)

 

주님!

제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말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말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라면 이해되지 않아도 인정하고, 어긋나도 침묵으로 감싸며, 먼저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알면서도 손해 볼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오해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대림 1주 목요일-신앙인이 되다 만.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12월 2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생활 성서 듣는 소금 항아리 : https://www.youtube.com/@83bible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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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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