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2월 7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2. 12. 7. 06:05

2022년 12월 7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암브로시오 성인은 340년 무렵 로마인 가문에서 태어나 트레비리(지금의 독일 트리어)에서 자랐다. 일찍부터 법학을 공부한 그는 변호사로 활동하였고, 로마에서 공직 생활도 하였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주교가 된 암브로시오는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정통 그리스도교를 옹호하였다. 그는 특히 전례와 성직의 개혁을 꾸준히 실행하는 한편, 황제의 간섭을 물리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암브로시오 주교의 훌륭한 성품과 탁월한 강론은 마니교의 이단에 깊이 빠져 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교회로 이끌었다. 397년에 세상을 떠난 그는, 예로니모 성인과 아우구스티노 성인, 그레고리오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회 학자’로 칭송받고 있다.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오 11,28-30)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meek

and humble of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selv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은 모두 당신께 오라고 하시며, 안식을 주겠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고등학생 때, 한 여학생을 짝사랑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얀 피부, 언제나 밝게 웃는 모습, 그리고 말도 얼마나 예쁘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귀고 싶다’라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연애 경험이 전혀 없는 저에게, 또 남 앞에서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저에게, 무엇보다 신부가 되겠다고 예비신학생 모임에 나가고 있는 저에게, 그 여학생에게 다가갈 용기는 전혀 없었습니다.

문득 그때 그 여학생에게 고백하고 정말로 사귀게 되었다면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지금보다 더 행복할까요? 신부가 아닌 신랑의 삶에 더 만족스러워하고 있을까요?

확실한 사실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불확실함을 받아들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스스로 만들어야 자기 삶을 행복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람은 어떤 동물보다도 적응력이 뛰어납니다. 그래서 불확실한 세상에서도 편안하게 즐기며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현실을 고통과 시련으로 받아들여서 좌절하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불확실한 현실을 힘차게 사는 것이 바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라고 말씀하십니다.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바로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께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스스로 멍에를 메셨습니다. 멍에는 소나 나귀 등의 목에 얹어 쟁기나 수레를 끄는 목제 도구입니다. 또 전쟁 포로나 노예의 목에 씌우는 굴종의 도구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을 스스로 선택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면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멍에를 편하게 해 주셨고, 짐을 가볍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가득한 것으로 보이는 불확실한 현실에서 용기를 내어 다시 희망을 간직해야 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 반드시 주님께 가야 합니다.

변화에서 가장 힘든 것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가지고 있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존 메이너드 케인스).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내 마음일 뿐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uGgWfRw6y2s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안식’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면 안식을 누린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면 안식이 없다는 뜻입니다.

희랍어로 안식은 ‘아나파우시스’, 곧 ‘쉼’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면 우리 마음은 쉬지 않습니다. 파라오의 압제에서 일한 것처럼 계속 일하고 지쳐갑니다. 하지만 사탄은 그렇게 피곤한 것이 외부의 요인이지, 나의 마음 때문임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학대 받고 비참하게 버려진 채 발견된 개는 며칠 동안 벽에 머리를 박고 식음을 전폐합니다. 뼈가 드러날 정도의 앙상한 몸, 피부를 장악한 옴, 온몸에 묻은 오물까지 심한 학대를 견뎌왔음이 확실시되었습니다. 개는 세상을 등졌고 사람을 등졌습니다. 사람이 주는 것은 아무것도 먹으려 하지 않고 그냥 벽만 바라보았습니다. 녀석은 지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심지어 우는 것도 할 수 없는 끝없는 충격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 개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언어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을 불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녀석의 마음의 문을 열어줄 열쇠는 의외의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클리프라고 이름 붙인 이 개와 비슷한 처지의 유기견을 발견하여 데려온 것입니다. 이 녀석도 돌봄을 받지 못해 굉장히 야윈 상태였지만 비교적 씩씩했고 그래도 인간을 믿고 따르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엔젤은 클리프를 보자 구석에서 나와 녀석을 반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꼬리를 신나게 흔들며 녀석과 함께 뛰놀았습니다. 구조단체는 클리프가 엔젤과 피부색, 나이가 비슷하다는 점, 그리고 둘의 사이를 보곤 엔젤의 형제견이라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따르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클리프는 엔젤에게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존재들’이란 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엔젤은 조금씩 클리프에게서 이 마음을 받아들였고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맡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바라보고 사람들이 주는 음식을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6개월쯤 지나서 엔젤은 이제 완전히 자기 껍데기에서 벗어나 클리프의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고 맛있는 음식도 즐기게 되었습니다. 건강한 몸을 되찾았고 곱디고운 빛깔의 털을 맘껏 뽐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원망하며 자신의 마음을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파라오의 종살이였습니다. 힘들고 지치면서도 이것이 행복이라 여겼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마음을 바꿔줄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으셨다면 지옥도 행복이라 여길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면서도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란 마음을 넣어주셨습니다. 그 마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이제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리고 그분은 좋으신 분이란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믿음은 마음의 영역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그 마음은 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제가 성체를 영할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다’가 그분의 ‘마음’임을 압니다. 그분의 마음을 받으면 이제 무거운 짐이 사라집니다. 휴식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야곱은 에사우의 옷을 입었습니다. 에사우라고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멍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멍에가 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라 믿으면 그분의 마음이 나에게 장착됩니다. 엔젤이 자신도 클리프처럼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결코 클리프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영원히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갈망합시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갈망하면 그리스도처럼 살게 되고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가 됩니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나무꾼이 그러했습니다. 나무꾼은 따듯한 심장을 가지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그렇게 행동하게 되었고 나중에 그의 마음 안에 이미 따듯한 심장이 생겨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갈망합시다.’ 그러면 내 안에 그분의 심장이 생성됩니다. 그러면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마음이 참 차갑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따듯한 심장을 원했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마음이 따듯해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도 마치 엔젤처럼 예수님과 사귀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을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렇게 읽은 책이 하.사.시.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예수님 마음을 닮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확신합니다. 그분의 마음을 장착할 때 나의 마음은 사라지고 그렇게 덜 피곤하게 되고 비로소 휴식이 찾아온다는 것을. 그래서 제 사제서품 성구가 오늘 복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나의 마음이 나를 쉬지 못하게 만들고 피곤하게 하는 유일한 원인임을 깨달읍시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합시다.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 심장을 주시고 우리는 뱀과 파라오, 사탄의 괴롭힘에서 벗어나 참된 휴식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하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들에게 안식을 주시는 하느님

-이기우 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E37b0gIh5vw

 

​-조재형신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도 물으셨습니다. 갈릴래아에 혜성같이 등장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하느님나라’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고, 그분의 말씀에는 새로운 권위가 있었습니다.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아픈 사람을 치유시켜 주셨고, 마귀를 쫓아내셨고,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고,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었던 세례자 요한이 살아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야가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궁금했던 것만큼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생각도 달랐습니다. 기존의 권위를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체제를 전복하려는 위험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감추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심판자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외롭고, 병들고, 아팠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었습니다. 저도 가끔은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를 ‘예스 맨’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좋아요’라고 말을 한다고 합니다.

 

대림 시기를 지내면서 이사야 예언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저는 아이라서 말을 못 합니다.’라고 응답했지만,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가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라고 응답했습니다. 예언자는 앞일을 미리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시대의 사명과 표징을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서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유배지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희망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권능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사야 예언자로부터 위로를 얻었고, 용기를 얻었고, 희망을 보았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제게도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장거리 운전할 때도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새 힘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지금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적막감과 외로움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괴로운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분들이 계신다면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에 용기를 얻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닌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에 왔지만, 그 목적과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물처럼 여기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들을 지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욕망이라는 바벨탑을 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이라는 불기둥, 재물이라는 불기둥, 명예라는 불기둥에 뛰어들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만함 때문에 사랑받지 못하고, 열등감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모두 주님께로 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안식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행복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언젠가 적어 놓은 글인데, 누구의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에 와 닿습니다. 신문을 만드는 일, 홍보를 위해서 본당을 찾아가는 일, 강의를 준비하는 것들은 제가 해야 할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을 좋아할 수 있다면 저는 무척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의무감으로 하는 일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을 좋아한다면 우리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기준을 ‘하느님의 영광’으로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은총이요, 모든 것이 축복입니다. 십자가도, 부활의 영광도 다 축복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 죽음을 넘어서지 않는 부활은 없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우리 인생 어떻게 뒤바뀔지 모릅니다!

-양승국신부- 

 

암브로시오 주교님(340~397)은 당대 잘 나가던 인물이었습니다. 법학을 공부해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당대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 제국의 고위직 공무원으로 살았습니다.

 

놀랍게도 암브로시오는 서른살 나이에 이탈리아 북부 리구리아와 에밀리아 주의 총독이랄까 지사 정도 되는 높은 관직에 올랐습니다. 그는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과 타오르는 열정, 다양한 아이디어로 황제의 신임을 톡톡히 받던 사람으로서 전도양양,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암브로시오는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며 끝없는 다툼을 계속하던 아리우스 이단과 정통 가톨릭 사이를 중재하기 위한 중재자로 성당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강단에 서자마자 그의 타고난 인품과 유려한 말솜씨 그리고 탁월한 중재 능력이 즉시 드러났습니다. 그런 모습은 대성당에 운집한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마침 밀라노 주교좌가 공석인 상태였는데, 한참 중재를 진행 중이던 어느 순간 한 아이가 일어나더니 이렇게 외쳤습니다.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그러자 군중까지 합세해서 “암브로시오 주교님! 암브로시오 주교님!” 하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주교단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걸림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 세례도 받지 않았습니다. 성직 특히 주교직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본의 아니게 즉시 세례를 받았고, 주교로 서품되어 교구장이 되었습니다. 주교가 되자마자 세속의 재산을 청산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암브로시오 주교님의 인생 참으로 놀랍습니다. 가톨릭교회 신자가 아니었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군중의 환호와 박수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불과 8일 후에 주교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연륜이 짧았지만, 이 세상 그 어떤 주교보다도 열정적으로 사목활동에 임했습니다. 늦게 시작한 만큼 하루를 일 년처럼, 천년처럼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결과 역사에 길이 남을 불세출의 대성인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주교로서 자신의 결핍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겸손하게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신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연구하고 사목자로서도 충실했습니다.

 

그 결과 암브로시오 주교는 아우구스티누스, 예로니모, 그레고리오 대교황과 함께 가톨릭교회 4대 교부 중 한 명으로 칭송받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우리 인생 어떻게 뒤바뀔지 모릅니다. 관건은 우리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일입니다. 그리고 한번 물꼬를 터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새 삶을 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일입니다.

<“나에게서 배워라.”>

-이영근신부-

삶의 노고와 고생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인 인간 조건이요, 인간의 굴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러한 처지에 있는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시고, ‘참된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이는 인간의 비참을 보시고 절로 흘러나올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연민이요, 자비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참된 안식은 ‘받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곧 안식을 가지신 그분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이요, 자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진정한 쉼, 참된 안식에로 초대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좋으신 주님께서는 그것을 얻는 방법도 가르쳐주십니다.

“나에게서 배워라.”

(마태 11,29)

당신께서는 당신 자신을 손수 스승으로 내어주시는 동시에, 우리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손수 스승이 되어주시는 이 사랑 앞에, 우리 역시 사랑으로 제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제자의 도’, 그것은 당연히 모든 것을 스승에게서 배우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서 배우고 있는가?

한 가지 예를 들어봅니다.

대체 우리는 기도를 누구에게서 배웠는가?

예수님에게서 배웠는가?

성경에서 배웠는가?

그리고 가르쳐주신 대로 배웠는가?

놀라운 사실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또 성경에서 기도를 배우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곧 계시된 대로 혹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준대로 배우지 아니하고, 여기저기에서 자기 나름대로 모은 왜곡된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는 막상 예수님을 스승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스승이신 예수님에게서 배우지 않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치유 받는 법도, 안식하는 법도, 고통을 받아들이는 법도 예수님에게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반면에 별의별 치유법, 명상법, 여러 기법, 프로그램, 기구, 서적 등 온갖 인간적인 방법들에 의존합니다.

 

이는 필시 스승을 잃은 까닭일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제자도'를 상실한 까닭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스승이신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할 일입니다.

진정한 스승을 모시고도 다른 데서 배우려는 불경을 저지르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아야 할 일입니다.

 

스승 예수님을 충실히 따랐던 성인 암브로시우스는 말합니다.

“당신은 복음 전파의 목소리를 높이도록 그리스도의 물을 받으십시오.”

이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이신 참된 스승께서 주신 ‘사랑의 멍에’를 메고, 그분께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당신께서는 “양순하고 겸손하신 당신의 마음”을 주실 것이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품게 될 것입니다’(필립 2,5).

바로 그 마음 안에서 ‘우리의 영혼이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마태 11,29).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 안에서만이 참된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 안에서의 쉼', 이를 두고 성 그레고리우스는 관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대림은 바로 이미 오신 하느님을 맛들이며 다시 오실 하느님을 사랑으로 바라보는 관상의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마태 11,29)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묶지만 옭아 메지 않는,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

-반영억신부-

몸은 고달프고 힘이 들지만, 본연의 일을 하고 있으면 기쁩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일이 되면 무거운 짐이요, 멍에가 될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 꼭 해야 할 일을 즐기면서 기쁘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11,28). 고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무거운 짐과 멍에를 메고 괴로워했습니다. 무엇보다 억눌리고 고된, 가난의 생활이 짐이 되고 힘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수많은 규정을 지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지키기만 하면 살 수 있는 구원과 생명을 위해 주어졌던 율법(에제키엘 20,13). 을 율법학자들은 수백 가지의 특수한 규정을 만들어 견딜 수 없는 짐이 되게 하였습니다. 법을 만든 그들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을 위한 율법이 아니라 율법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11,28). 하시며 산상 설교를 통해 참된 행복과 율법(마태5장-7장)을 철저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법에 사람을 맞추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위한 법을 확인하셨습니다. 율법은 죄의 심판인 벌을 강조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벌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통해 멍에를 거두어주고 짐을 내려주셨습니다.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1요한5,3).

 

우리 삶의 여정에는 각자가 지고 가야 할 삶의 무게가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한다고 해서 그 짐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홍해를 없애주시는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홍해를 갈라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어렵고 고달픈 삶의 무게를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으로, 연민의 눈길로 보아주시고 함께 걸어가 주십니다. 어렵고 힘들 때 누군가 함께 해 주면 위로가 되고 희망이 살아나듯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한 마음에서 나온 그분의 말씀과 눈길은 매섭고 날카로운 바리사이, 율법학자를 넘어 큰 힘이 됩니다. 사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깁니다. 냉철하고 날카로우며 차가운 율법학자는 부드럽고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짐이 가벼운 이유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달픔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삶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면 내적인 평화와 기쁨,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사실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로마13,10). 주님의 계명을 준수하고 계명의 의미를 살려고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예수님의 멍에는 위로의 원천이 되고 인간적인 욕심을 포기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세속의 멍에를 벗고 예수님의 멍에를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게 하고 주님의 법은 참되어 어수룩한 이를 슬기롭게 하네. 주님의 규정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은 맑아서 눈에 빛을 주네’(시편19,8-9). 고달픈 삶의 여정 안에서도 주님의 멍에를,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짐을 기꺼이 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