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년 12월 9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마태오 11,16-19)
“To what shall I compare this generation?
It is like children who sit in marketplaces
and call to one another,
‘We played the flute for you, but you did not dance,
we sang a dirge but you did not mourn.’
![](https://blog.kakaocdn.net/dn/HMB6j/btrTbVLBfXV/go710fYKVr02MKEXTopcp1/img.jpg)
![](https://blog.kakaocdn.net/dn/tgzp1/btrS9qlGstW/zUCpJqUOIyyDVpru5vsAW0/img.gif)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계명을 지켜 얻을 수 있는 생명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신다(제1독서).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촉구하였고,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기쁨을 나누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의 말도 예수님의 말씀도 듣지 않는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byHh5R/btrTbVdM7GF/pBTkxiWK5ssZnqhXYXOSxk/img.gif)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면 인생 망친다.”
자기 욕망을 줄이고 자기에게 도움이 될 것을 하면서 살아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 욕망을 완전히 없앤다고 잘 사는 결과를 가져올까요?
어렸을 때, 저는 전자오락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용돈이 생기면 전자오락실로 향했고, 돈이 없을 때는 오락실에서 남이 하는 것을 구경했습니다. 그래도 재미있었고 즐거웠습니다. 어느 날, 학교 담임 선생님에게 오락실 간 것이 들통났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 커서 뭐가 되려고 오락실을 다니는 거야?”
지금 커서 신부가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오락이나 게임을 전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어렸을 때 전자오락실 간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디 한 군데에 빠지게 되면 스스로 헤어 나오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순간의 만족이 영원한 만족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생산성 있는 일에 집중하려고 노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면 인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욕망을 모두 버리고 하기 싫은 것만 하면, 재미없는 인생으로 더 망치게 되지 않을까요?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욕망 안에서도 미래의 나를 만들어줄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분명 기쁨과 함께 더 나은 나로의 변화를 이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욕망은 무조건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원하고, 가장 적절하고,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욕망을 신중하게 선택해서 이를 삶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합니다.
장터에서 노는 아이에 대한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한패는 피리를 불며 잔치 놀이를 하는데 춤추지 않으면 장단을 맞추지 않습니다. 다른 한패는 곡을 하며 장례 놀이를 하는데, 아무도 가슴을 치며 울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놀이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장례 놀이는 세례자 요한이 외쳤던 회개의 외침이고, 잔치 놀이는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의미합니다. 즉, 슬퍼할 때 슬퍼하고, 기뻐할 때 기뻐해야 하는데, 자기 일에만 집중해서 해야 할 모습에서 정반대의 모습을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삶 전체는 모두 중요합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서 생활한다면, 욕망으로 보이는 나의 즐거움 안에서도 큰 의미를 얻게 될 것입니다.
가진 것이 적을수록 즐기는 일들을 할 시간이 생긴다(비 존슨).
![](https://blog.kakaocdn.net/dn/bZ2pL2/btrTaLQk3Wr/d5G8YKxCKVGk9dgXodVLKk/img.gif)
세례자 요한과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꼭 먼져 지녀야 하는 이것은?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ltj3iQ1HC9M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에 꿈쩍도 하지 않는 세대를 비판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
왜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을까요?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원하려면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원하게 만드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9)
사람들은 지혜가 없기에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말하고 아드님께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가고 그분의 말씀에 흔들리고 춤을 추고 곡도 하기 위해서는 ‘지혜’를 갖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혜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것과 같습니다.
영화 ‘킹덤’(2019)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가 배경입니다. 꿈도 희망도 없던 노예 ‘신’은 진나라의 천하대장군을 직접 마주하고는 꿈을 꾸게 됩니다. 바로 자신도 대장군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노예 신분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신은 꿈을 꾸게 됩니다.
저도 죄의 신분에서 벗어나 하느님 자녀가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커다란 자기와의 싸움을 전제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만나는 것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삶입니다.
죄와 싸우려면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을 각성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림을 그리려면 흰 도화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있으려면 우리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정신이 맑아집니다. 배부를 때는 정신이 혼미합니다. 어떤 것도 그릴 수 없는 상태입니다. 배고플 때는 정신이 맑습니다. 그러면 그림을 그릴 준비가 된 것입니다. 배고플 때는 밥 생각밖에 안 나기에 정신이 맑은 것입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와서는 죄와 싸웠습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잠을 잘 때도 딱딱한 판자 위에서 자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킹덤’에서도 그는 이룰 수 없는 꿈을 위해 쉼 없이 자기와의 싸움에 돌입합니다. 다들 헛된 꿈을 꾸며 고생하는 신을 어리석게 봅니다. 유다인들이 요한의 삶을 보며 어리석게 보는 것과 같습니다. 저도 처음엔 왜 단식하고 금주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꿈을 꾸는 이들이 필연적으로 하는 고생입니다. 지혜를 지닌 이들은 세례자 요한을 만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킹덤’에서 신도 깨닫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 노비의 신분은 벗을 수 없음을.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 줄 당시에 쫓기고 있었던 왕을 만납니다. 그는 그 왕이 왕권을 회복하게 도와줍니다. 결국 신분을 올려줄 대상을 만나야 대장군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숨을 바쳐 왕을 위해 싸우고 왕이 왕권을 회복하자 그는 대장군의 지위를 받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꿈도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왕권 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고서는 이뤄질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까지 알아야 지혜입니다. 그리고 지혜는 그렇게 죄에서 벗어난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으로 그 옳음이 증명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이겨보려고 스트레스 주는 것은 그저 흰 도화지를 준비하는 것뿐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결국 죄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욕망이 사라져야 죄를 이길 수 있는데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으니 그런 욕망이 솟아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즐기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가 이뤄 놓는 일입니다.
지혜는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도 만나게 해 주지만 그리스도도 만나게 해 줍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죄를 이기려는 자는 육체를 절제하다가 결국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지혜란 바로 죄를 이기기 위해 육체를 절제하려 하게 만드는 믿음입니다. 곧 죄를 이겨야만 행복할 수 있음을 혹은 내가 힘든 이유는 죄를 짓기 때문임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로운 이들과 어울리는 이는 지혜로워지고 우둔한 자들과 사귀는 자는 해를 입는다.”(잠언 13,20)
우리는 당연히 죄와 싸워야 함을 알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죄 안 짓고 어떻게 사느냐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자들이 단식하고 절제할 때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고 또 신자들이 먹고 마실 때는 어떻게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흥청대느냐고 말합니다.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를 이겨야 행복할 수 있다는 지혜가 있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pePYq/btrTaBUUSry/RnUdVUmr8Jg00LEqtPvwmk/img.gif)
![](https://blog.kakaocdn.net/dn/q7XE1/btrTc7dIraX/ztkMGxyxLFVGefB0KpIlW0/img.gif)
-조재형신부-
군에 입대하면 똑같은 훈련을 받지만 능력이나 재능에 따라서 ‘주특기’가 주어집니다. 운전면허가 있거나, 재능이 있으면 수송주특기를 받습니다. 체격 조건이 좋고, 강인하면 헌병 주특기를 받습니다. 사무능력이 있거나 컴퓨터를 잘 다루면 행정 주특기를 받습니다. 신학교에 다니거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군종 주특기를 받습니다. 그밖에도 의무, 정보, 시설 등의 주특기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필요한 인력이 있는 곳으로 가기도 합니다. 2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배치를 받기도 하고, 부대의 필요에 의해서 배치를 받기도 합니다. 저는 신학교에 다녔기에 군종병이 되었지만, 능력이 부족해서 행정병으로 옮겼습니다. 3년 동안 주로 예비군 담당 행정병으로 지냈습니다. 전방 부대에서 철책 근무를 하는 것도, 후방 부대에서 행정 업무를 하는 것도 제대하는 것과는 큰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군에서 주어지는 주특기도 중요하지만,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지내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같은 날 사제서품을 받았지만 교구의 필요에 의해서 주어지는 사목의 분야가 다양하게 정해집니다. 인재양성 위원회의 선발에 의해서 유학을 가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교구청에서 사목하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사회사목, 경찰사목, 병원사목, 청소년 사목, 복지기관, 선교사목, 교포사목, 빈민사목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부님들은 본당사목을 하게 됩니다. 사제는 순명서약을 하기에 교구의 인사이동에 따라서 당연하게 새로운 임지로 가게 됩니다. 저는 보좌신부로 8년, 본당신부로 8년 있었습니다. 교구청에서 11년 있었습니다. 3년은 캐나다에서 연수를 하였습니다. 1년은 안식년으로 지냈습니다. 어디에서 근무하는가도 중요합니다. 생각해보면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했던 것처럼 사막에 샘이 흘러넘치게 하는 사목도 있고, 사목에 꽃이 피어 향기가 나게 하는 사목도 있습니다. 언제나 감사하고, 늘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제에게는 어디에서 있느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많았습니다. 부족한 제게 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있다면, 시기와 질투가 있다면 어디에 있어도 늘 ‘가시방석’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일만 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외면하려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된 밥에 재를 뿌리듯이 공동체를 갈등과 분란으로 몰고 가곤 합니다. 하느님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흙 속에서도 꽃이 피듯이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물을 탓하지 말고 내 마음의 바가지를 잘 가꾸어야 합니다. 새는 곳이 있다면 새지 않도록 고쳐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그리고 화답송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위선과 가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https://blog.kakaocdn.net/dn/brKlXz/btrS9QLxyLN/wEPYaJHDk3mGgg0nxjhwsk/img.gif)
이런 하느님이 너무 좋습니다!
-양승국신부-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다양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보이셨습니다. 가장 우세한 모습의 특징은 아무래도 세상 따뜻하고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이겠지요.
뿐만아니라 인정과 측은지심이 철철 흘러넘치는 치유자의 모습도 드러났습니다. 다정다감한 친구의 모습, 관대하고 너그러운 구원자의 모습...
그러나 삐딱한 시선의 소유자들이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눈에 예수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꼴불견이었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오늘 복음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먹보요 술꾼,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신 구세주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그런 칭호를 붙인 적대자들의 배은망덕과 무례함 앞에 입을 다물수 없을 정도입니다. 독성죄도 그런 독성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의 그런 모습이 제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육화강생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멀리 동떨어져 있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산해진미가 차려진 잔칫상 앞에서 결코 체면 차리지 않으셨습니다. 세리 죄인들과 마주 앉아 포도주 잔을 기울이시며 밤늦도록 정담을 나누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정말이지 제 마음을 흐뭇하게 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왕족이나 귀족, 고관대작들과 어울리지 않으시고, 세리와 죄인들, 가장 밑바닥 인생들, 오늘 우리와 같은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신다는 것, 이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로운 일인지요.
오늘도 주님께서는 한없이 부당한 나, 죄인 중의 죄인인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당신 거처를 삼으십니다. 우리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며 우리와 일심동체가 되십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과 은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하느님이 너무 좋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b97zc3/btrS7IUnIfH/gadnlp16IYkI7BI2CKqkD1/img.gif)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이영근신부-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마태 11,16-17)
이 비유의 뜻은 명료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요한의 '회개의 세례의 선포'(마르 1,4; 루카 3,3)에도 회개의 가슴을 치지 않고,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복음의 선포'(마태 4,23; 9,35)에도 기뻐 춤추지 않는 세대를 말해줍니다.
혹 우리도 뉘우침의 눈물도 복음의 기쁨도 없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 무지와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이 없다고 투덜거리거나 바닥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 뿌리에는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완고함’이란 사실을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에 ‘목이 뻣뻣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합니다.
사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아픔입니다.
결국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됩니다.
사랑이 거부당한 아픔입니다.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릴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하신 일은 십자가에 달리시어 자신을 ‘깨뜨려’ 찢고 나누어 건네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예수님의 그 피와 살을 먹고 자신도 ‘부서져’ 쪼개고 나누어져 다른 이에게 건네주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 벌리시는 일은 우리를 ‘깨뜨리는’ 일이요, 진정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가 ‘부서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살아 있으며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의 영께서 오시어 벌리시는 일은 우리와의 교제와 친교로 진리를 깨닫게 하고 새롭게 하여, 변화와 성화로 주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성령께 응답한다면, 다윗이 주님의 계약 궤 앞에서 춤추었던 것처럼 우리도 춤추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과 영을 제 마음에 들게 맞추기보다 제가 꺾이고 부서져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마태 11,17)
주님!
제 마음이 무디어져 있습니다.
아니, 빛보다 어둠에 치우쳐 있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제가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가슴은 가시에 찔리셨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이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울고, 함께 웃게 하소서!
완고함의 벽을 헐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https://blog.kakaocdn.net/dn/dRLSJ7/btrTb2w3WUP/vr89elKReVT6W1BY7paalk/img.gif)
말씀 나누기 - 대림 2주 금요일-어느 장단에 (ofmkorea.org)-
-김찬선신부-
![](https://blog.kakaocdn.net/dn/Isrib/btrTckRT4Kb/ppx8UtD3MVHaxscK1wGRRK/img.gif)
![](https://blog.kakaocdn.net/dn/kFbua/btrTbUsqYnS/ncA4pxVKUzosFgOJWKEOvk/img.jpg)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년 12월 11일 대림 제3주일 (0) | 2022.12.11 |
---|---|
2022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0) | 2022.12.10 |
2022년 12월 7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0) | 2022.12.07 |
2022년 12월 6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0) | 2022.12.06 |
2022년 12월 5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0) | 2022.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