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2월 12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2. 12. 12. 06:43

2022년 12월 12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마태오 21,23-27)

 

The chief priests and the elders of the people

approached him as he was teaching and said,

"By what authority are you doing these thing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발라암은 눈을 들어 지파별로 자리 잡은 이스라엘을 보며,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는 하느님의 신탁을 선포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무슨 권한으로 성전에서 가르치는지 묻는 이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인지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 물으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새벽에 묵상하다가 제게 기적 같은 일이 정말로 많았음을 깨닫습니다. 성직자로 살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제가 20년 넘게 사제로, 또 사람들로부터 “잘살고 있다”라는 평을 들으며 사는 것이 기적입니다. 형제들 간의 우애에 금이 가서 남보다 못하게 사는 가족도 많은데,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어도 형제간의 우애는 변함이 없는 것도 기적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성지가 힘들다고 하는데, 제가 있는 갑곶성지는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발전하는 것 역시 기적입니다.

이 밖에도 기적 같은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문제는 기적에 감사의 기도를 바쳐야 하는데, 이를 마치 당연한 것으로 또 내가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앙드레 지드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인간이란 항상 있는 기적에는 별로 놀라지 않는다.”

작은 것에 감탄하는 사람은 순간순간을 허투루 살지 않습니다. 작은 것도 주의 깊게 바라보며 자기에게 다가온 놀라운 기적을 체험합니다.

주님의 손길이 반드시 커다랗게만 다가올까요? 돈 많이 벌고, 승진에 성공하고, 앓던 병이 말끔하게 치유되어야만 주님의 손길을 받은 것이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길가에 핀 작은 꽃에서도 기적을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매 순간 주님과 함께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근처에 기적에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슨 권한으로 가르치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 실현을 위해 가르침과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불신의 마음이 가득해서, 깜짝 놀라야 정상인 상황에서도 또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이 분명한데도 권한 타령만 하고 있습니다. 만약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권한에 관해 묻기만 할 뿐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일상 안의 기적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금만 천천히 그리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기적의 기쁨을 쉽게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있는 기적에 매 순간 놀라며 기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성공과 실패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잣대는 단 세 마디 핑계로 표현될 수 있다. “난 시간이 없었어.”(로버트 J.헤이팅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소서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OgciMUmWig

 

​-조재형신부-

‘거꾸로 읽은 세계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세계사는 권력을 중심으로 구성되곤 합니다. 그래서 왕조를 중심으로 배우기도 했습니다. 사건을 중심으로 구성되곤 합니다. 종교가 들어온 년도, 전쟁이 일어난 년도를 배우기도 합니다. 세계사는 승자들의 관점에서 기록되곤 합니다. 그러나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봅니다. 가난한 민중들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사건들의 진실을 전하기도 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장에서 신대륙의 발견을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바라보면 우리가 모르고 지나갔던 새로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카이스트 이광형 총장은 텔레비전을 거꾸로 본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자막을 읽기도 어렵고, 어지러웠는데 지금은 거꾸로 보는 것이 익숙하다고 합니다. 바지를 입을 때도 오른쪽 다리부터 넣지 않고 왼쪽 다리부터 넣는다고 합니다. 대학의 조직표도 거꾸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총장이 맨 아래에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총장은 맨 아래에서 마치 장작에 불을 붙이듯이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서 불쏘시개가 되는 것 같다고 합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거꾸로 바라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의 교회는 피라미드와 같은 조직이었습니다. 평신도, 수도자, 사제, 주교는 피라미드처럼 맨 아래에 평신도가 있었고, 중간에 성직자와 수도자가 있었고, 맨 위에 주교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주교를 통해서, 성직자와 수도자를 통해서 평신도에게 전해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000년 동안 당연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교회의 언어는 ‘라틴어’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의 전례는 라틴어로 진행되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이고, 세상의 것들이 교회로 들어오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교회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단죄하였고, 다른 종교와 화합하거나 일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기존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창문을 활짝 열도록 하였습니다. 교회는 위계제도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교회는 조직이기 전에 성사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전례의 언어는 라틴어가 아닌 자국의 언어로 바꾸었습니다. 교회는 항상 쇄신 되어야 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권한은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예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을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신들의 권한과 지위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권한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힘이었습니다. 권한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힘이었습니다. 권한은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지키는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권한이 없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권한은 어디에서 왔는지 물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권한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면 세례자 요한의 권한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권한이 사람에게서 왔다면 자신들의 권한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권한이 어디에서 왔는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권한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권한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섬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겸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십자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권한은 어떤 권한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측량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의 육화 강생의 신비 앞에 그저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릴 뿐입니다!

-양승국신부-

 

외국 한 신경 정신 병원 원목과에서 열정적으로 사목하시는 수녀님의 고백을 잊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아픈 환자들을 향한 수녀님의 따뜻한 미소와 친절, 사랑과 열정은 병원 전체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에서도 유명했습니다.

 

그런 수녀님에게도 가슴 아픈 사연과 혹독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젊은 수도자 시절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는데, 그로 인한 트라우마로 수녀님 역시 꽤 오랜 세월 정신병동 신세를 지셨답니다.

 

가장 심각한 증세는 자신을 지나치게 비하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은 스스로를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은 큰 죄인, 그를 넘어 벌레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인지 수도복은 물론이고 평복도 절대 입지 않았습니다. 억지로라도 입히면 즉시 몸부림을 쳤고,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렸습니다.

 

수녀님을 진료한 전문의들은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포기했습니다.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는 수도회 총장 수녀님에게 저 수녀님은 평생토록 정신병동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소견을 전했습니다.

 

어느 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연세 지긋한 자원봉사자 자매님께서 분홍색 잠옷 한 벌을 사 들고 수녀님 병실을 찾았습니다. 세상 자상하고 따뜻한 성품의 자매님께서는 환한 엄마 미소를 지으며 수녀님 침대 옆에 앉았습니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며 말을 건넸습니다. “수녀님, 얼마나 힘드세요? 제가 수녀님을 위해 매일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하고 있답니다. 제가 오늘 수녀님을 위해 예쁜 잠옷을 한 벌 사왔답니다. 이걸 한번 입어보시겠어요? 정말 예쁠거예요.”

 

자매님은 마치 엄마가 아픈 딸에게 하듯이 수녀님 뺨을 어루만지셨는데, 그 순간 수녀님의 눈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굵은 눈물방울이 쉼 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가 자신의 뺨에 따뜻한 손을 댄 것입니다. 수녀님은 자매님의 따뜻한 손을 자신의 뺨에 꼭 대고 대성통곡을 터트렸답니다. 

 

자매님의 따뜻한 손길이 자신의 뺨에 닿는 순간, 수녀님은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그 오랜 깊은 병고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고 회상하셨습니다. 따뜻한 한 인간 존재의 따뜻한 손길은 그 어떤 깊은 병도 치유할 수 있다는 확신을 지니게 되었답니다. 결국 사랑만이 인간을 치유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 뒤 수녀님은 기적적으로 병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따뜻한 자매님을 통해서 자신에게 다가온 하느님의 사랑에 깊이 감사하고 보답하는 마음으로 정신병동 원목을 자원하게 되었답니다. 지금은 수녀님 자신이 겪었던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동료 환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계신답니다. 

 

또다시 성탄입니다. 성탄이란 그 따뜻한 자원봉사자께서 가련한 한 수도자를 향해 허리를 굽혀 다가간 것처럼, 세상 자상하신 하느님께서 허리를 굽혀 가련한 우리 인간에게 따뜻한 손길을 펼치신 은혜로운 대사건입니다.

 

측량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의 육화 강생의 신비 앞에 그저 감사하고 찬미하고 영광을 드리는 것, 우리 인간 측에서 가장 필요한 노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이영근신부-

성탄이 곧 다가옵니다.

이제 열흘 남짓 남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발라암은 신탁을 통해 선포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민수 24,1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합니다.

곧 예수님의 성전정화에 대한 권한을 따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마태 21,23)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마태 21,25)

그들은 자신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진실하지도 솔직하지도 못하고, 비겁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회피하는 계산적인 평소의 나의 말마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는 오늘도 제 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사실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됩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가 드러나게 됩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속셈이 들통나게 됩니다.

 

결국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됩니다.

사실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진 이는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함과 자신의 속셈과 거짓과 위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이제는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자기 자신을 올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는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자신이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에게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 볼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마태 21,23)

주님!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의 무게를 따지게 하소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가리게 하소서.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진 이는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임을 알게 하소서.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저 자신을 올려놓고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속셈과 거짓과 위선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