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16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요한. 5,33-36
I have testimony greater than John's.
The works that the Father gave me to accomplish,
these works that I perform testify on my behalf
that the Father has sent me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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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민의 절반 이상이 코로나 확진이 되었다는 보도 내용을 보면서, ‘왜 나는 확진되지 않을까?’를 자주 생각했습니다. 신부로 많은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는데도 확진되지 않음은 진짜로 슈퍼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늘 조심했습니다. 마스크를 반드시 썼고, 사람과의 만남도 늘 최소한으로만 했습니다. 하지만 두 달 전 어느 날, 두통이 너무 심했고 몸살 기운을 느꼈습니다. 여기에 목의 통증도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순간 ‘코로나 확진된 것이 아닐까?’ 싶어서 자가 진단키트로 검사해보니, 두 줄이 선명합니다. 확진된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의 자가 격리가 시작되었습니다. 미사를 비롯한 모든 성지 업무는 함께 사는 신부에게 부탁했고, 평화방송도 한 주일 연기했습니다. 사무장에게 연락해서 지시사항을 전달한 뒤, 단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과로는 너무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바빠서 제대로 쉬지 못했는데 푹 쉴 수가 있었고, 그동안 밀렸던 글쓰기, 강의 준비 등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몸은 아주 불편했지만, 마음은 너무나 편안했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저를 배려해주시다니….
우리 삶 안에 주님의 손길은 계속해서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이기에, 일상 삶 안에서도 철저하게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문제는 자기 마음을 주님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정적 마음으로 긍정적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배척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배척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과 같다면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증언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을 때, 사람들은 열광하며 따랐지요. 세례자 요한 안에 구원의 길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증언이 있음을 이야기하시지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일과 말씀들은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셨음을 의심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미움과 단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박해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려면 우리 마음부터 바꿔야 합니다. 일상의 작은 상황에서도 주님의 일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만이 희망, 기쁨, 행복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용기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즉, 두려움이 없으면 용기도 없다(에디 리켄베커).
예수님께서 오늘 당신이 하늘에서 오신 분임을 증언하는 것은 요한뿐만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늘은 특별히 당신이 하시는 일이 당신을 증언한다고 하십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6)
당연히 하늘의 사람과 땅의 사람은 하는 일이 다릅니다. 완전히 땅에 붙어있는 것들을 생각해볼까요? 식물들이 대표적일 것입니다. 그 식물들은 오로지 자신이 살려고만 합니다. 자기가 살려고 땅의 영양분을 빨아 먹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벼를 키우려고 심어도 피와 같은 것들이 날아와 자랍니다. 밭에는 잡초들이 자랍니다. 땅에 속한 것들의 일은 ‘생존’뿐입니다.
동물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무리 생활하기는 하지만 그 목적 역시 생존입니다. 물론 관계 안에서 오는 소속감이나 행복은 어느 정도 식물이나 미생물, 모기와 같은 존재와는 차이가 납니다. 동물들은 그래서 약간은 땅에서 하늘로 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높이 하늘로 오를 수 있는 존재는 인간입니다. 인간은 어느 정도까지 하늘에 사시는 창조자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바로 부모입니다. 부모에게 자녀는 모기와 같습니다. 부모를 통해 자기 생존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부모는 그런 자녀를 위해 자기 살과 피를 내어주며 자녀들을 살립니다. 부모는 창조자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자는 하늘이고 하늘에 속합니다. 하느님은 완전히 하늘에 속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늘에서 오셨다고 말씀하실 때 이렇게 증언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 7,22-23)
예수님은 온전히 당신 자신을 내주셔서 인간을 회복시키시고 살리십니다. 완전한 양식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부모이고 그래서 하늘에 속하십니다.
저도 스물다섯 살까지는 제가 살려고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당에 다녀도 나의 생존을 위해 다닌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오면서는 다른 이들의 생존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물론 잘 안되었습니다. 내가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먼저 필요했던 것이 ‘믿음’이었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지체 장애인 아빠가 택시 운전대를 잡는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로 온전히 걷지 못하는 아빠가 있습니다. 소아마비를 앓는 아내와 같이 두 아이를 낳았습니다. 장애 때문에 쉽게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던 이 부부는 나라에서 나오는 보조금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딸이 놀이터에서 아이들에게 말할 때, “우리 아빠는 매일 집에서 논다”라고 말하는 것을 아내를 통해 듣게 됩니다. 이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아빠가 양 발을 쓸 수 없어도 다른 집처럼 일하기를 바랐습니다.
아빠도 아이들을 위해 일을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그는 양 발 없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택시 운전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운전면허 시험을 보았습니다. 일곱 번이나 낙제하였지만, 여덟 번째는 성공합니다. 그리고 택시 운전을 하다 보니 사람을 만나기를 좋아하는 그 성격대로 아이들도 좋아하고 아내도 좋아하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이분의 마음 안에는 ‘아빠라면 그래야 한다!’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아빠임을 잊는다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창조자라는 믿음만이 나를 하늘에 속하게 합니다.
‘해발 1000미터 정상까지 아들 업고 등산하는 아빠’라는 비디오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빠는 “힘들다. 그런데 해야 한다. 아들 대신 뛰는 거니까!”라고 말하며 아들을 업고 매일 1,000미터가 넘는 산을 오릅니다. 게다가 휠체어를 밀며 마라톤을 하는 아버지도 있습니다. 마라톤을 완주하고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아이는 웁니다. 자기를 위한 아빠의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빠의 피로 자녀의 자아가 죽고 자녀도 아빠처럼 남을 살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다른 게 없습니다. 땅에 속한 존재였다가 하늘에 속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하늘의 일, 곧 생명을 회복하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일은 내가 창조자라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내 힘으로 하려고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도 아버지가 될 수 있다고 믿어야 창조자가 되고 자녀를 살리는 부모가 됩니다. 이 때문에 왜 내가 죽었고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어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조재형신부-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읽고 있습니다. 20세기에 있었던 사건들 중에 인류의 지성과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던 사건들을 선별하여 그 사실을 알려주고, 저자의 해석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 ‘드레퓌스’ 사건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드레퓌스는 현역 육군 대위였습니다. 그는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조국을 배반하고 군사기밀을 독일에 팔아넘겼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본인은 무죄를 주장하였지만 군사법정은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하였고, 악마의 섬이라는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군국주의자, 극단적인 애국주의자, 그에 동조하는 언론, 민족주의자들은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였습니다. 증거는 조작되었고,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이권과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라면 한 사람의 젊은 장교는 희생되어도 좋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진실이 드러나는 것보다 자신들의 잘못이 드러나는 것을 감추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드레퓌스에게는 그의 무죄를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남편의 무죄를 믿는 사랑스러운 아내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서 ‘재심’을 청구하였습니다. 드레퓌스가 무고하게 감옥에 갇혔다는 것을 알았던 군인이 있었습니다. 그 군인은 상부에 드레퓌스의 무죄를 보고하였지만 국방부는 사건은 은폐하려고 하였습니다. 드레퓌스의 무죄를 보고했던 군인은 오히려 직책을 상실하고 아프리카로 전출되었습니다.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깨어있는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공정과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사명을 지녔던 언론사가 있었습니다. 양심을 따라서 진실을 지키려는 지성인이 있었습니다. 당대의 지성인이었던 ‘에밀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통해서 드레퓌스 사건의 부당함을 알렸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거짓과 진실의 싸움이 되었습니다. 권위주의와 자유주의의 싸움이 되었습니다. 군국주의와 민주주의의 싸움이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으로 드레퓌스의 무죄를 선언하였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선봉에 서게 되었습니다. 드레퓌스는 무죄를 선고받았고, 군인으로 복권되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대사에도 또 다른 드레퓌스 사건이 있었습니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사건이 있었습니다. 정권을 유지하려는 정부가 있었습니다. 그 정권의 입맛에 맞도록 기사를 쓰는 언론이 있었습니다. 정권의 앞잡이가 되어서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었던 사법부가 있었습니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고문과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조직이 있었습니다. 나와 나의 가정과 상관이 없다면 불의와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실과 정의를 밝히려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진실한 보도를 하려는 그래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려는 언론도 있었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신념을 가졌던 깨어있는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거리를 가득 메웠던 시민들이 있었고, 그들을 응원했던 넥타이 부대도 있었습니다. 이들의 증언에 동참하는 버스기사와 택시기사들의 경적응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제들이 있었습니다. 명동성당에서 고인을 기억하는 미사가 있었고, 진실을 증언하는 사제가 있었습니다. 자유와 민주를 위한 들불이 타올랐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직선제 민주주의를 되찾았습니다. 박종철의 억울한 죽음도 밝혀졌습니다. 거짓과 불의에 맞섰던 깨어있는 시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진실을 알리려는 언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양심과 정의를 지키려는 지성인과 종교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우리가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 주님의 뜻을 드러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세상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맞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의 뜻을 드러낸다면,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낸다면 ‘임마누엘’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뵐 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양승국신부-
한적한 어촌에 사는 제게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필수품이 성능 좋은 손전등, 랜턴입니다.
해가 떨어지면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오기에 필요하기도 하지만, 해루질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충전식 랜턴이 대세입니다.
지난여름 게가 한창 잡히던 계절, 나름 강력한 랜턴을 들고 물이 완전히 빠져나간 밤바다로 나갔습니다. 여기저기 불빛들이 보이다 보면 마음이 급해져 거의 뛰다시피 해안가로 달려갑니다.
최근 장만한 나름 강력한 랜턴으로 여기저기 바닥을 훑고 있었는데, 저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들고 있는 랜턴의 광채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최신 상품이었습니다. 엄청난 밝기의 최첨단 led 랜턴이었는데, 얼마나 불빛이 강하던지 마치 군용 서치라이트 같았습니다. 그가 랜턴으로 바닥을 비추자 물속이 대낮처럼 밝아졌습니다.
그가 끌고 다니던 수확물 통 안은 이미 큼지막한 게들로 가득했습니다. 장비빨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름 괜찮은 랜턴이라고 어깨가 으쓱했던 저였는데, 그의 랜턴 앞에 즉시 주눅이 들었습니다. 그의 랜턴이 발산하는 강렬한 빛 앞에 제 랜턴의 불빛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보잘 것 없었습니다.
오랜 압제와 고통의 세월을 감내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강력한 카리스마와 포스 탁월한 언변을 지닌 예언자가 등장했으니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존재 자체로 세상 앞에 드러낸 빛은 강렬했습니다. 깊은 어둠 속에 잠들어 있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발산하는 빛으로 인해 다들 서둘러 깨어났습니다.
그러나 사실 세례자 요한은 빛이 아니었습니다. 빛을 증언하러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큰 빛이 나타남을 알리는 서광에 불과했습니다. 빛의 도구요 증언자 세례자 요한에 이어 마침내 참 빛이 등장하셨는데, 이번 성탄에 탄생하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동방박사들은 탄생하실 구세주의 별빛을 쫓아가기 위해 늘 밤길을 걸었습니다. 별빛이 보이지 않는 낮시간에는 동굴이나 바위틈에 머물렀습니다. 어둠이 깔리면 또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우리 역시 구세주의 별빛을 잘 쫓아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집중이 필요합니다. 멈춤과 나섬 사이의 강약조절도 필요합니다. 여러 빛 가운데 어느 것이 참 빛인지를 파악하고 그 별빛에 시선을 고정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뿐만아니라 오늘 우리가 비록 어둠 속에 앉아있다 할지라도, 오늘 비록 내 삶이 멈춰있다 할지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뵐 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유다인들에게 당신에 대한 4중의 증언, 곧 세례자 요한의 증언(요한 5,33-35), 하느님의 증언(5,30-32), 예수님 자신의 일의 증언(5,36), 성경의 증언(5,38-47) 중에서,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예수님 자신의 일의 증언을 들려줍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유다 광야에서 설교하고 있는 세례자 요한에게 사람을 보냈을 때(요한 1,19) 그가 '진리를 증언'을 하였음을 전해주면서, ‘그러한 증언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우리가 구원받게 하려는 것’(요한 5,34) 이라고 밝히십니다.
그리고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요한 5,35)
그렇습니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으며, 그것은 ‘켜서 비추는 등불’이었습니다.
곧 '등불'은 저녁 때 방 안을 밝히기 위해 켜는 등불처럼, 빛 자체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어에는 달과 별과 같은 ‘발광체’를 나타내는 단어(마오르)와 ‘빛 자체’를 나타내는 단어(오르)가 있는데, 여기서 표현되고 있는 '등불'(뤼크노스)은 어두운 세상을 잠시 비춘 ‘발광체’(마오르)로서의 등불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요한 5,36)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이 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요한 5,36)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은 감옥에 갇혀 있단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마태 11,3)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하신 말씀, 곧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6)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그리고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하는 메시아임을 드러내줍니다.
그러나 여전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던 선민으로서의 특권은 그들의 완고함으로 도리어 최대의 정죄 요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올바로 믿고 그분의 뜻을 올바로 깨닫는 것은 어떤 훌륭한 교육적 환경이나 지적 수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믿음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증거를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라야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에페소서는 이렇게 들려줍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에페 2,8)
오늘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인지를 들여다 볼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는 일을 실행을 통해 완수하는 일이요, 바로 지금 하는 일이 그 일이 되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이 있다.”
(요한 5,36)
주님!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 맡기신 일을 하게 하소서.
계산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하게 하시고, 의무에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게 하소서.
바라는 일이 아니라 주어진 일을 하게 하시고,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하소서.
시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수하게 하시고, 일을 통해 내 자신이 아니라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참된 증언의 삶」
“길을 찾아 헤매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길을 물었습니다.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길이 어딜 가다니요? 길은 여기 있고 당신이 어디론가 가고 있지 않소?’”우리가 가야할 길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하느님 나라로 가야 합니다. 하늘은 우리가 온 곳이요, 가야 할 곳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알면서도 다른 길을 찾아 헤매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달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5,3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내가 나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에 관하여 증언하신다”(요한8,1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의 증언에 의해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하시는 일과 하느님에 의해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먼 이들을 보게 하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걷게 하며,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하며, 죽은 이들을 되살리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게 하였습니다(루카7,22).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9,35).하시며 아버지께서 그를 증언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주님께 증언 받아야 할 때입니다. 무엇보다도 행동이 뒤따를 때 입으로 하는 말은 효과가 있으며, 누구에게나 벅찬 감동을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페5,15.20). 또한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야고1,21). 그리고 마침내 여러분의 빛나는 삶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사람들이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십시오(마태5,16).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면 그것을 보고 여러분이 나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듯이 우리도 주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나서야 하겠습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야고2,26)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삶을 통해 주님을 증거 하는 기쁨이 충만하시기 빕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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