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17일 대림 제3주간 토요일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마태오 1,1-17)
The book of the genealogy of Jesus Christ,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Jacob the father of Joseph, the husband of Mary.
Of her was born Jesus who is called the Chris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야곱은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자 아들들을 불러, 유다에게서 훗날 왕권을 차지할 후손이 생길 것이라고 말한다(제1독서). 신약 성경의 첫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시작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구약에서부터 예고된 메시아이심을 말하려는 것이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리나라 국민의 절반 이상이 코로나 확진이 되었다는 보도 내용을 보면서, ‘왜 나는 확진되지 않을까?’를 자주 생각했습니다. 신부로 많은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는데도 확진되지 않음은 진짜로 슈퍼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늘 조심했습니다. 마스크를 반드시 썼고, 사람과의 만남도 늘 최소한으로만 했습니다. 하지만 두 달 전 어느 날, 두통이 너무 심했고 몸살 기운을 느꼈습니다. 여기에 목의 통증도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순간 ‘코로나 확진된 것이 아닐까?’ 싶어서 자가 진단키트로 검사해보니, 두 줄이 선명합니다. 확진된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의 자가 격리가 시작되었습니다. 미사를 비롯한 모든 성지 업무는 함께 사는 신부에게 부탁했고, 평화방송도 한 주일 연기했습니다. 사무장에게 연락해서 지시사항을 전달한 뒤, 단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과로는 너무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바빠서 제대로 쉬지 못했는데 푹 쉴 수가 있었고, 그동안 밀렸던 글쓰기, 강의 준비 등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몸은 아주 불편했지만, 마음은 너무나 편안했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저를 배려해주시다니….
우리 삶 안에 주님의 손길은 계속해서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이기에, 일상 삶 안에서도 철저하게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문제는 자기 마음을 주님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정적 마음으로 긍정적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배척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배척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과 같다면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증언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을 때, 사람들은 열광하며 따랐지요. 세례자 요한 안에 구원의 길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증언이 있음을 이야기하시지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일과 말씀들은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셨음을 의심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미움과 단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박해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려면 우리 마음부터 바꿔야 합니다. 일상의 작은 상황에서도 주님의 일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만이 희망, 기쁨, 행복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용기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즉, 두려움이 없으면 용기도 없다(에디 리켄베커).
-조재형신부-
오늘부터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야기가 아닌,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의 탄생을 묵상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기 위해서 ‘깨어 있음’을 묵상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기 위해서 ‘회개’를 묵상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니 ‘기쁨’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다시 오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오셨음을 오늘부터 전례는 말씀을 통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감사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모든 예언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려 주었고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그분을 품어 주셨으며 요한은 오실 분을 미리 알려 주고 이미 와 계신 그분을 가리켜 주었나이다.” 그렇습니다. 나침판은 언제나 같은 방향을 알려주듯이, 예언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로 오실 것을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순명했던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예수님을 품어 주셨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미 오셨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들 역시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예언자는 위선과 가식을 버려야 합니다. 예언자는 허위와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위선과 가식을 가지고 있다면, 허위와 욕심을 가지고 있다면 거짓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불의와 거짓에 맞서야 합니다. 예언자는 탐욕과 욕망에 맞서야 합니다. 불의와 거짓을 일삼는다면, 탐욕과 욕망에 젖어있다면 거짓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합니다. 예언자는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예언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는 동정 성모님의 ‘순명’을 배워야 합니다. 순명의 반대말은 불순명일 수도 있지만 교만입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사람은 하느님께 순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원죄는 ‘교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의 교만은 죄를 잉태하였지만, 동정 성모님의 순명은 구세주를 잉태하였습니다. 법대로 살았던 요셉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였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나자렛의 성가정은 모두 ‘순명’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순명’의 삶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는 ‘넷째 왕의 전설’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는 원래 4명이었다고 합니다. 4번째 동방박사는 굶주린 이들에게 가져간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가져간 보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4번째 동방박사는 아기 예수님께 드릴 보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4번째 동방박사는 시간이 흘러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4번째 동방박사는 어쩌면 세례자 요한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와계신 구세주를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4번째 동방박사도 이미 와 계신 구세주를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이미 와 계신 구세주를 알아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 족보!
-양승국신부-
살아생전 제 선친께서 마치 보물단지 모시듯 애지중지하시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족보책이었습니다. 총 두 권이었는데, 엄청 두꺼웠습니다. 족보는 언제나 황금빛 보자기에 고이 싸여 장롱 속 제일 안전한 곳에 보관하셨습니다.
연이은 사업의 실패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이곳저곳 거처를 옮겨다닐 때 마다 선친께서는 다른 것은 다 처분하셨지만, 족보만큼은 제일 먼저 챙기셨습니다.
명절 때마다 제사가 끝난 다음 선친께서는 저희를 앉혀놓은 다음, 족보를 꺼내 드시고 일장훈시를 하셨습니다. 우리 남원 양씨가 얼마나 대단한 성씨인지, 우리 가문에서 얼마나 많은 위인들을 배출했는지, 그러니 가문에 먹칠을 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하루는 선친께서 하도 강조하셔서 족보 첫 장부터 쭉 넘겨본 적이 있습니다. 족보 안에는 시조가 되는 분부터 시작해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조상들의 이름이 빼곡이 적혀 있었습니다. 과거 시험에 합격해 높은 공직에 오른 사람들은 따로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족보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존중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 사가 역시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까마득한 옛날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예수님에게 이르기까지 수많은 조상들의 이름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그저 낯설고 발음하기도 힘든 이름들만 쭉 나열되어 있는 예수님의 족보를 자신의 복음서 제일 첫머리에 소개하고 있는데, 대체 무슨 의도로 그랬을까,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의 족보상에 등장하는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은 곧 이스라엘의 산 역사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 축복과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흥망성쇠, 기쁨과 희망, 고통과 상처의 흔적이 곧 예수님의 족보인 것입니다.
물론 족보 안에는 감추고 싶은 이스라엘의 흑역사, 오점을 남긴 이름들도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없이 나약하고 죄 많은 우리 인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시기 위해 우리 인간 세상 안으로 온전히 들어오신 것입니다. 완벽하게 인간 세상 속으로 육화강생하신 것입니다.
그냥 편하게 고상하게 계셔도 아무 문제 없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굳이 사람이 되셔서, 때로 구질구질하고, 때로 상처투성이, 오물투성이인 인간 세상 안으로 완벽히 진입하셨다는 표현이 예수님의 족보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 1)
-한상우신부-
우리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는 하느님
탄생의 역사입니다.
모든 역사는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시듯
모든 역사를
우리들에게
개방하십니다.
믿음의 역사는
실수와 허점까지도
감사하게 하는
은총의 역사입니다.
새로운 역사의
창조는 어두울수록
빛을 발하는
빛의 탄생과도
같습니다.
빛은 우리
신앙의 발자취를
모두 비추어 줍니다.
충실과 불충실
부끄러움과 회개
죄와 구원을
우리 역사 안에서
가르쳐 주십니다.
새로운 삶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지 않습니다
기억하며 새롭게
교훈을 찾습니다.
구원과 완성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이며
하느님의
뜻이십니다.
하느님의 뜻
구원의 절정은
다름아닌
하느님의
탄생입니다.
하느님의 탄생은
믿음의 탄생이기도
합니다.
거룩함과 완전함은
하느님 탄생의 역사를
받아들이듯 우리 역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조건과
신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에게
열려져 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기적은
모든 시간의
구원입니다.
새로운 시작은
무엇보다도
우리 역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어떤
상황속에서도
반드시
이루어내시는
하느님의
구원입니다.
저마다의
역사를 통해
우리를
믿음으로 이끄시는
하느님 탄생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섭리(攝理)와
선물(膳物) 사이에
역사가 있고
탄생이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느님 탄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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