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2일 대림 제4주간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루가 1,46-56)
“My soul proclaims the greatness of the Lord;
my spirit rejoices in God my savior.
for he has looked upon his lowly servan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한나는 사무엘을 주님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주님께 기도하여 얻은 아이라며 그를 주님께 바치겠다고 엘리에게 말한다(제1독서). 마리아는, 전능하신 분께서 자신에게 큰일을 하셨다며 주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른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젊은 청년이 카페에 들어갔다가 구석에 구부정하게 앉아 노트북에 푹 빠져 있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한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분명히 노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를 움직이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젊은 사람보다 더 빠른 속도에 감탄하였지요.
‘무엇을 하시나?’하고 노트북 화면을 보니, 요즘 유행하는 최신 게임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더군다나 게임 실력도 수준급이었습니다. 감탄한 청년은 이 노인과 이렇게 대화를 나눴습니다.
“제가 아까부터 어르신을 지켜봤는데 컴퓨터를 정말 잘하시네요. 어떻게 그렇게 잘하세요?”
“그거야 하루에 12시간 이상 게임을 한 덕분이죠. 밖에는 거의 나가지 않고 게임만 하면 이렇게 될 수 있어요.”
“굉장하세요. 그 나이에 정정하신데도 기계도 그렇게 잘 다루시다뇨. 실례가 안 된다면 연세를 여쭤봐도 될까요?”
이 노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스물여덟인데요?”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여기에는 정곡을 찌르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행동이 결과를 결정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자기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바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자기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행동보다 좋은 결과만을 생각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성모님께서 엘리사벳 성녀를 만나시고, 성무일도에서 늘 바치고 있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이 노래의 한 가운데,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9)라고 고백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모습입니다. 사실 예수님 잉태는 처녀의 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의 무시무시한 간음법에 거부하는 것이 맞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모든 일을 전능하신 분의 큰일로 받아들이십니다. 이런 행동이 바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게 된 것이고, 더불어 우리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행동을 잘 떠올려 보십시오. 결과만을 바라보는 삶이 아닌, 자기 행동이 옳을 수 있도록 늘 성찰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분명히 좋은 결과가 따라올 것입니다.
좋은 세상은 고통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세상이다(온유).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는 기쁨의 노래, 마니피캇을 노래합니다. 이 노래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모님께서 아드님을 잉태하셨을 때, 혹은 낳으셨을 때, 혹은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셨을 때가 가장 기쁘셨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때도 기쁘셨습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 기쁨의 노래를 부르신 것은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입니다. 이 ‘때’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성모님의 참 기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선 기쁨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이 기쁨은 존재론적 기쁨입니다. 아이들에게 부모가 없고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그것만큼 큰 고통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를 찾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려 합니다. 그래야 마음의 평화가 오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의 평화가 오게 만드는 것은 부모가 주는 사랑의 증거, 곧 사랑의 선물입니다.
저는 저의 부모가 나의 참 부모임을 믿으려 할 때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주는 사랑의 증거들, 예를 들면 나를 위해 일하셨을 부모의 발에 박인 굳은살을 볼 때 참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때가 천국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잃고 무덤에 홀로 앉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삶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니 기쁨에 찼습니다. 이것이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셨을 때의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지 않으면 기쁘지 않습니다. 다른 기쁜 무엇을 찾아도 일시적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이 계시고 나의 창조자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원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50회에 기괴한 장면이 나왔었습니다. 바로 엄마가 아이 둘을 쌍 수유하는 장면입니다. 여섯 살 딸과 모유를 먹어야 하는 갓난아기 동생을 동시에 모유 수유를 하는 것입니다. 여섯 살 아이는 분명 애정 결핍을 겪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 사랑을 느끼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엄마의 모유를 원합니다.
재밌는 것은 엄마가 때가 지난 아이에게 모유를 수유하면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엄마는 엄마로 자녀에게 사랑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게 기쁩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끊지 못합니다. 사실 아이보다 엄마가 더 기뻐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엄마도 부모로부터 애정 결핍의 감정이 있고 자녀에게 애정을 듬뿍 주면서 그 결핍을 채우려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117회에서는 더 기괴한 장면이 나옵니다. 모유 수유와 변을 닦아주는 것은 물론이요, 여섯 살 짜리 딸을 엄마가 업고 다닙니다. 엄마는 젖을 떼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도 엄마가 자신의 엄마에 대해 애정 결핍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받았던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보아 주지 않은 상처를 자녀에게 주지 않으려는 행동입니다. 자녀는 엄마에게 업히고 젖을 먹으며 편안함을 느끼겠지만, 그렇지 못한 순간에는 불안함에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참 기쁨은 부모로부터 사랑 받는다는 느낌을 넘어서야 합니다. 사랑 받아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모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친교를 이루고 선교 할 때 더 완성된 기쁨을 느낍니다. 기도 안에서 관상까지 도달하여 주님의 사랑을 느낀들 무엇 하겠습니까? 그것이 이웃에게 전해지지 않으면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시간은 불안함에 휩싸입니다. 결국 내가 느낀 그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부모와 같은 존재가 되었을 때 부모의 사랑을 가장 확신하게 됩니다. 부모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니 자녀에게도 참 사랑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젖을 떼지 못하는 것입니다.
개와 같은 짐승들은 때가 되면 단호하게 젖을 떼게 합니다. 더 큰 기쁨으로 새끼들을 보낼 줄 아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는 것보다 그 기쁨을 전하는 것이 더 큰 기쁨입니다. 기쁨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기도만 하는 것보다 그 기도한 것을 전할 때 더 큰 기쁨을 느낍니다.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인사를 건넸을 때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하였고 태중의 아기도 기뻐 뛰었습니다. 곧 성모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해 주셨을 때 가장 기쁘셨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셨을 때보다, 성령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하였을 때 가장 기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는 것보다 성령을 흐르게 할 때 기쁨이 완성됩니다.
항상 기뻐해야 하는 것이 하느님 뜻입니다. 내가 성령으로 기쁨으로 충만하고 다른 이를 성령으로 기쁘게 한다면 그게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울증에 자살 직전이었던 어떤 자매가 마더 데레사에게 상담을 요청하였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그 여인에게 상담해 주지 않고 자신의 봉사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한 달 만에 우울증이 가셨습니다. 성령님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힘으로 봉사하는 이들이 느끼는 기쁨입니다.
이런 대표적인 인물이 닉 부이치치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우울증은 타인을 기쁘게 해 줌으로써 극복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요한복음 9장을 읽으면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태생 소경이 다 하느님 뜻이 있어서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팔다리가 없이 태어난 이유가 있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먼저 성령을 받아들이고 그 성령의 기쁨을 타인에게 전할 때 기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배우고 가야 할 유일한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관행(慣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어도, 더러 잘못된 점이 있어도 예전부터 해오던 일이니 그냥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병환자,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중풍병자, 세리, 창녀, 이방인은 그렇게 태어났으니 불평하지 말고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어서 그리 된 것이라고 체념하고 살라고 합니다. 천동설은 당연한 관행이었습니다. 아침에 태양이 뜨는 것을 보고, 저녁이면 태양이 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태양은 지구보다 훨씬 작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관행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런 관행에 의심을 품는 사람은 단죄를 받았습니다. 관행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재물을 가진 사람에게는, 명예를 가진 사람에게는 자신들이 가진 것을 지켜주는 보호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관행은 가난한 이에게는, 아픈 이에게는, 이방인에게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수 없게 만드는 족쇄였습니다.
‘관습(慣習)’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제게 관습이라는 말이 강하게 다가왔을 때가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행정수도를 옮기는 문제가 쟁점이 된 적이 있습니다. 행정수도를 옮기려는 정부의 의지가 있었고, 행정수도를 옮기면 안 된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2004년 헌법재판소는 행정수도를 옮기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하였습니다. 그리고 판결의 주된 이유는 ‘관습헌법’이었습니다. 서울이 행정수도인 것은 관습헌법이라고 하였고, 헌법에 그리 되어있으니 옮길 수 없다는 판결이었습니다. 수도권에 전 국민의 50%가 넘게 살고 있습니다. 국토의 균형발전이라는 측면에서는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시설이 수도권에 몰려있으니 사람들은 당연히 수도권으로 몰리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속지주의를 원칙으로 교구를 분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동이 적었던 농촌시대와 중세시대에는 합리적인 분할입니다. 그러나 교통이 발전하고, 사람의 이동이 빈번한 현대사회에서는 속지주의라는 관습은 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죽음에 떨어진 인간을 굽어 살피시고 저희를 구원하시려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주셨으니 저희가 구세주의 강생을 경축하며 마침내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죽음에 떨어지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것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는 생명에게 주어지는 관행입니다. 관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관행과 관습을 버리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죽음이라는 관행을 따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관행, 관습, 율법이라는 보호막 뒤에 숨어서 위선과 가식을 일삼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를 비난하셨습니다. 관행과 관습의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새로운 성전을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관행과 관습을 버리고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관행과 관습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러나 관행과 관습이 나의 기득권을 지키는 보호막이라면, 그러한 관행과 관습이 가난한 이들에게, 아픈 이들에게, 이방인에게 족쇄가 된다면 기꺼이 버려야 합니다.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는 그래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마리아의 순명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성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나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보호막이 되는 관행과 관습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따를 수 있다면 매일의 삶이 성탄입니다.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이방인들에게 족쇄가 되는 관행과 관습을 버릴 수 있다면 매일의 삶이 성탄입니다. “주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며, 저승으로 내리기도 저승에서 올리기도 하신다. 주님은 가난하게도 가멸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높이기도 하신다.”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노나니.”>
-이영근신부-
오늘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들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은 자식에 대한 감사의 예배 노래요, <화답송>은 그때 드린 한나의 기도요, 복음의 '마리아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크게 드러내는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운명을 바꾼다는 노래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찬미의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혁명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노나니.”
(루카 1,47)
이는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하바 3,18)는 하바꾹 예언자의 희망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희망이 지금 마리아에게서 실현된 것입니다.
또한 이는 “내 마음은 주님 안에서 강해지고, 내 뿔은 주님 안에서 높여지고~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나이다.”(1사무 2,1-2)라는 한나의 기도요, “내 영혼은 주님 안에서 기쁨을 찾을 것이고 그분의 구원으로 즐거워할 것이다.”(시 35,9)라는 시편 작가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이토록 마리아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그 자비를 찬미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위업을 찬미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아기가 다윗의 '왕좌'에 들어 높여 앉게 되고, 당신께서는 ‘모후’의 '왕'에 올려졌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이라고 노래합니다.
욥처럽,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이루신 “측량할 수 없이 큰 일,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일”(욥 5,9)을 찬미합니다.
이는 막연한 주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큰일을 이루신 주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이러한 구체적인 찬미를 말합니다.
그는 그의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는 것을 하느님의 거룩한 장막 안에 머무는 길로 제시합니다(<수도규칙> 머리말 30).
결국 이는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그분을 찾아 맞아들이고, 그분을 찬미하는 일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만약 오늘 우리가 주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활동을 반겨 맞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요, 우리가 자비롭지도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반겨 맞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성모님은 당신의 노래를 통해, 진정 우리가 자비를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영광을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우리도 주님의 자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불러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분께서 제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9).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루카 1,54)
주님!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찬미합니다.
제 안에 베푸신 측량할 수 없이 큰,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당신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오, 주님!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여 찬미하는 일이 제 삶의 전부가 되게 하시고, 제 삶이 당신 자비의 노래 외엔 아무 것도 아니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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