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요한 1,1-18)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구원하신다고 한다(제1독서). 구약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지만, 신약 시대에는 당신의 아드님을 통하여 말씀하신다(제2독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느님이시다. 이 말씀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셨다(복음).
하느님의 말씀이신 아기 예수님
-키엣 대주교-
‘아기 예수님은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당신 사랑을 보여 주셨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허름한 베들레헴 구유에서 몸으로, 눈빛으로 사랑을 전하는 아기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보십시오.
베들레헴은 히브리어로 ‘빵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을 위해 빵이 되신 예수님은 영혼을 돌보는 신성한 양식을 주셨습니다. 점점 더 풍요로워지고 화려한 사회 속에 정작 나의 마음은 비어가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욕구는 늘어나고 빈곤감도 커지고 있습니다. 문화에 대한, 위로와 나눔에 대한, 그러나 무엇보다도 부족한 것은 영혼에 대한 갈망입니다. 영적 갈망과 허기짐을 채워주시는 빵, 영혼의 굶주림을 채워주시기 위해 작게, 아주 작게 쪼개지시는 영혼의 양식,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진실된 사랑은 겸손한 사랑입니다. 사랑하기에 스스로를 낮출 수 있습니다. 겸손함으로 높고 넓은 온 우주에서 가난하고 작은 마굿간의 한 모퉁이만을 가지셨습니다.
사랑은 먼저 다가가는 것입니다. 언제나 먼저 찿아가는 사랑을 하신 주님이십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고 사람들이 죄를 뉘우치기 전에 먼저 용서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아버지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먼저 사람들을 찾아 내려오셨습니다.
먼저 찾아가고 먼저 다가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 인간과 같은 나약한 인간이 되셨고 고난과 고통 속에 죽음에 이르셨습니다. 한 겨울 차가운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은 모든 희생을 받아들일 만큼의 사랑이 없다면 그 무엇도 필요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아주 작은 어린아이로 구유에 누워계신 표징을 보고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그분을 알게되었습니다. 구유에 계신 아기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가까이 다가와 당신 목소리를 들으라고... 그리고 마음을 열어 깊고 넒은 사랑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사랑만이 미움과 분노, 이기심으로 가득한 세상의 어둠을 거둬내고 밝은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내 마음 속의 미움과 분노, 이기심을 버리고 내 영혼 깊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드리십시오. 마음속의 어둠을 버려야 주님 사랑의 빛을 가득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작은 밝음이 세상의 어둠을 거둬드리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의 빛이 다시 이웃과 사회를 비추고, 주님 사랑의 말씀이 온 세상을 밝게 비추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빛으로 가득한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아기 예수님께 어떤 말을 듣고 싶습니까?
2. 내가 원하는 그 말씀을 들었습니까?
3. 주님 사랑의 메신저가 되기 위해 아기 예수님이 전하는 진실된 사랑, 겸손한 사랑, 먼저 다가가는 사랑의 의미를 되새겨 보십시오.
말씀의 나눔
1. 성탄절에 많은 사람들이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을 보며 기도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소리에 익숙한 우리들이기에 침묵의 소리를 알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꼭 아기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이웃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해주십시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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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ry Christmas~~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기쁘고 행복한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기쁜 오늘,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에이미 커디 교수는 여러 실험을 통해 첫인상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발표했습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의 모든 부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단지 첫인상을 통해 좋고, 나쁨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인상을 좌우하는 두 가지 요소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따뜻함과 유능함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따뜻함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따듯함으로 먼저 신뢰를 얻어야 유능함에 대한 평가도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첫인상이 좋다, 나쁘다는 ‘따뜻함’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는가를 결정합니다. ‘따뜻함’이란 무엇일까요? 배려하고, 인정하고, 지지해주는, 바로 사랑의 말과 행동이었습니다. 이 첫인상이 영원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꽤 오랜 시간을 첫인상이 결정하는 것을 볼 때 ‘따뜻함’을 간직하고 표현하는 삶은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 됩니다.
이렇게 누구나 원하는 ‘따뜻함’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은 그 중요한 ‘따뜻함’을 간직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었을까요? 나를 낮추지 못하고 높이려고만 할 때, 남을 이해하기보다 나만 이해받으려 할 때, 남과 나누기보다 나의 것을 더하는 데에만 온 힘을 쏟고 있을 때, 내 안에서 ‘따뜻함’이 과연 보일까요?
오늘 주님께서 이 땅에 강생하셨습니다. 난방이 제대로 되어 있는 화려한 궁전이 아닌, 가장 초라한 마구간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며 똥오줌도 가리지 못하는 너무나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탄생에서 ‘따뜻함’을 간직하게 됩니다. 우리를 지배하러 온 힘 있는 군주가 아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취하신 사랑 그 자체이심을 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서 당신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 사랑으로 당신과 함께할 수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따뜻한 사랑을 우리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 모범을 따라 따뜻한 사랑으로 이웃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안에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선택은 나의 성장과 행복에 직접 관련돼 있다(빅터 프랭클).
라 형성됩니다. 어렸을 때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자녀는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의 환경은 정글과 같게 됩니다. 정글에 살면서 착해질 수는 없습니다. 피해 받지 않으려고 움츠러듭니다. 일단 모든 사람을 나의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으로 봅니다. 누군가 그의 환경을 바꿔주지 않으면 그 사람이 착해지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MBN 특종세상 290회에 ‘서울 도심 폐가에 홀로 사는 수십억대 부자’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내용이 있습니다. 70대 초반의 한 어르신이 서울 금싸라기 땅 한 복판에 시가 70~80억 되는 땅에 세워진 폐가에서 쥐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내용입니다. 그분의 일상은 새벽에 나와 지하철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무료 급식과 약간의 돈을 받아 밤에 폐가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렇게 사는 데는 자신의 땅이 자기 것이 아니라 누나들 것으로 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누나들이 자신들의 명의로 다 찢어 놓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누나들도 재산 때문이었는지 동생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나서 정신병원에 집어넣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누나들은 다 이민을 가서 법적으로 그 땅을 동생에게 넘겨준 상태입니다.
이 상처가 사람과 담을 쌓게 했고 충분히 많은 땅을 보유하고도 자신이 땅을 팔면 누나들이 빼앗아 갈까 봐 쥐가 들끓는 전기와 물도 안 들어오는 이 집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안 그럴까요? 이분에겐 어머니가 전부였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자신에게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람은 환경에 자신을 맞추어갑니다. 사람이 환경입니다. 이분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신뢰입니다.
방송에서는 이 동네에 오래 살았던 누님과 같은 분이 밤늦게까지 기다렸다가 과자를 주고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어르신은 고마움을 느끼고 할머니가 사 오신 과자 중 하나를 도로 주며 100세까지 사시라는 말까지 전합니다. 이렇게 조금씩 신뢰가 쌓이면 어떨까요? 그동안 자기 피만 빨아먹으려고 덤볐다고 믿는 사람들 틈에서 조금은 편안한 세상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받아들이는 사람, 내 안에 있는 사람이 나의 환경이 됩니다. 그리고 그 환경에 따라 내가 형성됩니다. 누가 독사가 들끓는 정글에서 평안을 유지하고 살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원죄로 살기에 다 모기로 태어납니다. 아무리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고 해도 세상이 그렇지 못하니까 자기 환경을 에덴 동산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한 가지 방법, 에덴 동산에서 오신 분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모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어주는 어머니도 함께 계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 합니다. 아드님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구원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며 우리 환경을 에덴 동산으로 바꿔주시려고 합니다.
나는 지금 정글에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에덴 동산에 살고 있습니까?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에덴 동산을 정글로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쁜 사람, 곧 나 뿐인 사람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생명 나무가 있다는 것 자체, 그것으로 내가 에덴 동산에 살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을 선악과를 바치는 것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그러면 착한 사람으로 조금씩 바뀝니다. 이것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사람이 하느님 사랑을 바로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먼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인간부터 받아들이게 해야 합니다. 인간을 통해 오는 사랑의 맛을 받아들이면 이제 하느님의 사랑까지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변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이웃에게 해야 합니다.
영화 ‘아일라’는 6.25 전쟁 때 한 터키 병사가 부모를 잃은 아이를 아일라(달)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아버지처럼 잘 대해주며 지내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지만, 60년 만에 다시 재회하는 실화를 다루었습니다. 아일라는 전쟁 통에도 이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에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잘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산타클로스가 되는 일이 바로 이런 일일 것입니다. 산타클로스는 성 니콜라우스 주교의 별칭입니다. 성 니콜라우스 주교님도 아이들에게 주님께서 보이지는 않지만 함께 계심을 느끼기 위해 몰래 선물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환경을 변화 시켜주는 일이 가장 큰 고통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행복임을 오늘 보여주셨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산타클로스가 됩시다.
-조재형신부-
지난 10월 부르클린 한인성당 교우들과 미네와스카 주립공원엘 다녀왔습니다. 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퀴즈를 내고 맞히면 상품을 주었습니다.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고 재미있는 문제였습니다. “허수아비의 아들 이름은? 허수, 계절에 관계없이 사시사철 피는 꽃은? 웃음꽃, 아이 추워의 반대말은? 어른 더워, 사람이 몸무게가 가장 많이 나갈 때는? 철들 때, 라면은 라면인데 가장 달콤한 라면은? 그대와 함께라면” 돌아오는 길이 자칫 지루했을 텐데 웃으면서 오니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조재형’이라는 이름으로 삼행시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삼행시도 있었습니다. ‘조재형 신부님은 재미있는 강론으로 형광등처럼 밝게 한다.’ 오늘은 주님 성탄 대축일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가 가득한 날입니다. 오늘 ‘예수님’이라는 이름으로 삼행시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히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오늘 하루,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에 진리의 빛으로, 구원의 빛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깊고 길어도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믿음과 희망이 담겨있는 성탄입니다. 그분께서 내 마음에 진리의 빛으로 머물러 계신다면, 그분께서 내 마음에 구원의 빛으로 오신다면 매일 매일이 바로 성탄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둠 속에 있다면, 내가 희망을 버리고 절망을 가슴에 품고 산다면 1년 내내 12월 25일이라 해도 성탄은 그냥 지나가는 하루일뿐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며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의 체험입니다. 제자들의 고백입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였고, 그들이 체험한 것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셨음을 말과 행동으로 증언하는 분들을 보곤 합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는데 십리를 가주는 사람,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 현실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밝게 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분들은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그분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말없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들이 이 땅에 다시금 찾아오는 동방박사들이고,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였던 목동들입니다.
성탄 선물로, 새해를 시작하는 선물로 제가 아는 시를 하나 나누고 싶습니다.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게 해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의 교만이 반성될 수 있습니다.
아들, 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남편이 미워질 때도 있게 하시고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인간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데 힘겹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눈물로써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허탈하고 허무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영원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니까요.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의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성탄입니다. 지금 내가 고통 중에 있다면 그것을 주님께 봉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가 기쁨 중에 있다면 그것도 주님께 봉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성탄입니다. 올 한해를 돌아보면 아쉬움도 있고, 부끄러움도 있고, 또 가슴 뿌듯한 일도 많을 겁니다. 주님의 성탄을 맞이해서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마음모아 축하하고, 그분의 삶을 본받도록 합시다. 주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Merry Christmas Happy New Year!
아기 예수님께서는 번뇌와 슬픔, 고독과 상처로 가득한 우리 삶 속에 태어나십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의 성탄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성인이 한 분 계십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자신의 한평생 화두로 삼았던 예로니모(AD 340-420) 성인이십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히브리어나 희랍어로 된 구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인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고행중의 고행이었던 성경 번역 작업에 아주 기쁜 마음으로 임했는데, 그 작업은 바로 아기 예수님 탄생지로 추정되는 예수 탄생 성당 옆에 있는 동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로니모 성인께서 예수님의 성탄과 관련해서 신앙의 후배들인 우리들에게 남긴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아무리 성탄이 수백 번 계속된다 해도 여러분 각자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정말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주 서울 갈 일 있어 고속 터미널 근처를 지나갔었는데, 정말 대단했습니다. 번쩍번쩍, 시끌시끌, 와글와글, 캐럴송이 크게 울려 퍼지고, 구세군의 종소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 안에, 우리 가정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지 않으신다면 다 헛것입니다. 그저 세상의 상술에 우리까지 덩달아 놀아나는 것뿐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의 말씀처럼 이 예수님의 성탄 전야, 가장 중요한 것, 가장 핵심적인 것, 가장 본질적인 것은 우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는 일입니다.
잠깐만 우리 마음 안을 한번 같이 들여다보실까요? 태어나실 아기 예수님을 위한 공간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확인해보면 좋겠습니다. 의외로 우리들 내면이 너무 많은 것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어서 공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어떤 분 마음을 살펴보면 자신에게 심한 상처를 안겨준 그 누군가를 향한 분노의 마음으로 꽉 차 있습니다. 어떤 분 마음속에는 오로지 자식들에 대한 걱정을 비롯한 다양한 걱정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위해 조금 비집고 들어오시려고 해도 워낙 잡다한 것들로 가득 차 있어서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탄생하지 않으십니다. 더 이상 요란한 광란의 성탄 파티에서 탄생하지 않으십니다. 더 이상 휘황찬란한 도시 한 가운데서 탄생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우리 각자의 영혼 안에, 번뇌와 슬픔, 고독과 상처로 가득한 우리 각자의 상처받은 인생 안에 탄생하고자 우리 옆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 14)
-한상우신부-
기다림 뒤에
성탄이 옵니다.
떠나지 않고서는
하느님
성탄의 참뜻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너무나 크면
성탄으로
사랑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 자신을
우리에게
건네십니다.
하느님께서
드디어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우리를 위하여
우리 삶의 자리에
구원자가
태어나셨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우리가
큰 빛을 봅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우리는
맛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믿지 않는다면
성장과 부활도
없습니다.
성탄은
하느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참된
사랑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시간이
이 땅에서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살아볼만한
삶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제발
하느님으로부터
왔음을 부정하지
않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소식을 먼저
전하십니다.
말씀을 믿고
말씀을
받아들였을뿐인데
가장 좋은
성탄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하느님을 믿습니다.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느님께
이 마음을
내어드립니다.
사람의 본성 안으로
하느님께서
탄생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구유에
탄생하심으로
모든 마음은
희망의 길이
되었습니다.
평화의 성탄이
춥고 아픈
이웃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성탄이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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