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8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헤로데는 권력을 유지하려고 자신의 정적들을 살해하는 잔인한 임금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 무렵 왕권에 위협을 느껴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 2,16). 이때 억울하게 죽은 아기들의 희생을 교회는 오래전부터 순교로 이해하고 기억해 오다가 중세 이후에는 더욱 성대한 축일로 지내 오고 있다. 아기 예수님을 대신하여 죄 없는 가운데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끓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오 2,13-18)
A voice was heard in Ramah,
sobbing and loud lamentation;
Rachel weeping for her children,
and she would not be consoled,
since they were no mor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우리는 죄를 지으며 살아가지만, 빛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신다(제1독서). 요셉은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간다. 자신의 왕권이 불안한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근처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린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중학생 때, 등하교를 같이했던 동네 친구가 있었습니다. 집이 가까워서 학교까지 함께 걸어갔고, 집에 올 때도 같이 걸어왔습니다. 아마 중학생 때 제일 친했던 친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날, 함께 걸어오면서 학교의 반 친구 흉을 제가 말했습니다. 이 친구는 자기 공부만 하고, 너무 이기적이라는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말을 들은 친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네가 더 심해.”
이 말에 기분이 좋지 않아 인상을 쓰자, 착한 친구는 “농담이야.”라면서 얼버무렸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저를 떠올리면서 흉을 봤던 친구보다 분명히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아이가 바로 저였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며, 당시에는 왜 이렇게 남에 대해 흉을 많이 봤나 싶습니다. 사실 남 험담하는 사람이 공통점은 자존감이 낮다고 하지요. 자신에게 불만이 많고 열등감이 심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 험담하게 된다고 합니다. 제가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흉이 흉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은 부메랑이 되어 다시 저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주는 대로 받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칭찬은 칭찬을 낳고, 험담은 험담을 낳습니다. 때로는 여기에 이자가 붙어서 돌아오기도 합니다.
적대감을 가지고 하는 부정적인 말과 행동이 아닌,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이 가득 담긴 긍정적인 말과 행동이 우리의 말과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이자까지 더해서 더 좋은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기념합니다. 갓 태어나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린 헤로데 대왕은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요? 어린아이를 죽인 것은 자기 권력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서였지요. 하지만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로, 절대 적지 않은 나이였습니다. 실제로 이 악행을 저지르고 얼마 못 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못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끝까지 행복할 수 없었던 헤로데 대왕이 만약 사랑으로 아기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늘 나라에서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렸을 것입니다.
우리도 끝까지 나의 욕심과 이기심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며 말과 행동에 늘 사랑을 가득 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가진 소중한 것은 나의 현재다. 현재는 나의 전부이고, 모든 것이다(로시 조앤 헬리팩스).
-조재형신부-
2000년 전입니다. 헤로데 왕은 동방박사들이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이 태어났다는 ‘메시아’의 소식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헤로데는 보고를 받은 후에 이렇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2살 이하의 어린아이는 모두 죽여라.’ 동방박사에게 ‘메시아가 태어난 곳을 알려 주시면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라고 했던 말과는 전혀 다른 결정을 내렸습니다. 헤로데의 결정으로 예루살렘에는 아이를 잃은 부모님들의 통곡소리가 가득했습니다. 이제 막 아이를 출산한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요셉과 함께 이집트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마태오는 이런 일들이 성경에 예언된 사건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사후약방문’이었을지 모릅니다. 만일 헤로데가 2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모두 왕궁으로 초대했으면 어땠을까요? 그래서 성대한 잔치를 열어주었으면 어땠을까요? 그러면 마태오 복음사가는 또 다른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하느님의 구원이 시작되었다고 했을지 모릅니다.
지난 10월 29일에 158명이 숨지는 ‘참사’가 있었습니다. 사고의 책임자를 찾아서 문책하는 것도 참사의 수습방법입니다. 다시는 그런 참사가 생기지 않도록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세우는 것도 참사의 수습방법입니다. 특별수사본부가 엄정하게 수사를 하는 것도 참사의 수습방법입니다. 국회에서 국정조사를 통해서 진상을 밝히는 것도 참사의 수습방법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가슴에 품고 하늘나라로 떠나보내야 했던 유족들의 아픔 마음과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그분들의 슬픔을 위로하면 좋겠습니다. 참사의 책임규명과 진상규명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린 유족들의 슬픔을 대신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공감하고, 함께 위로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언젠가 역사는 그날의 사건을 기억하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날의 아픔을 우리는 함께 공감했다. 비록 슬픔이 컸지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어떤 분이 고통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아이가 뜨거운 것을 못 느낀다면, 아이가 추위를 못 느낀다면, 아이가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이는 어른으로 성장하기 전에 신체장애를 얻을 것입니다. 고통은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몸을 위험으로부터 피하게 만들어 줍니다. 고통은 소중함을 알게 합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자녀들을 더욱 소중하게 여깁니다. 이는 출산의 고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가에게는 자신의 쓴 작품들이 무척 소중할 것입니다. 그런 작품을 쓰기 위해서 수많은 날을 고민하고 갈등했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공동체를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소방공무원이 위험을 무릅쓰고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태석 신부님께서 저 멀리 아프리카에 가서 모든 것을 내어 주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도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인생이 기쁨과 즐거움만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탄의 기쁨은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도 아닙니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축복을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이 참된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철저한 섬김이요, 나눔이었습니다. 권력을 지녔지만 사용하지 않았고, 섬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할 길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무고한 사람, 억울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이 기나긴 어둠 속의 방황이 끝나면, 우리로 하여금 밝은 햇빛 아래로 걷게 하십시오!
-양승국신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자질이나 덕성이 심각하게 결핍된 리더,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리더로 인한 폐해는 언제나 무고한 사람들에게로 돌아갑니다. 특히 한 나라의 지도자가 그러할 때 폐해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히틀러가 그랬습니다. 네로 황제가 그랬습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우리나라 역사 안에서 쉽게 그런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고,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 역시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습니까? 그 한 사람의 그릇된 생각,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역시 마찬가지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을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즉흥적이고, 또 얼마나 포악한지, 얼마나 앞뒤 생각 않고 행동하는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그는 동방박사들에게 속은 것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머리 뚜껑이 활짝 열리다 보니 이성을 잃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해서는 안 될 명령을 내렸습니다.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은 이유도 묻지 않습니다. 말도 필요 없습니다. 다짜고짜 애지중지, 금지옥엽, 키우고 있는 사내아이들을 부모가 보는 앞에서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갑작스럽게 생떼같은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들의 통곡 소리가 하늘에 닿을 지경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랄 일이며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무고하게 학살당한 그 어린아이들의 영혼을 당신 사랑의 품 안에 거두시어 큰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께서는 죄 없이 죽어간 아기 순교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무엇인가를 원하시리라 믿습니다.
개념 없는 지도자, 정신 나간 리더들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움직이는 것, 불의 앞에 침묵하지 않는 것,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 참 정의, 참 진리의 길을 따라 움직이는 신앙인이 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을까요?
뿐만 아니라 더 요구되는 행동이 있습니다.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희생자들을 치료하기, 통제 불능인 자동차를 멈추게 만들기...
이 무서운 시절의 소란이 끝나면
우리에게
확신의 시절을 주십시오.
이 기나긴 어둠 속의 방황이 끝나면,
우리로 하여금
밝은 햇빛 아래로 걷게 하십시오.
거짓의 굽은 길이 끝나면,
우리에게
당신 말씀의 길을 열어주십시오.
그리고 당신께서 우리의 범죄를 씻어주실 때까지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견디게 하여주십시오.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기념하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축일'은 무죄한 이들의 고통의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이 ‘죄 없는 아기들이 학살당한 일’은 겉으로는 헤로데의 잔인한 학살을 드러내지만, 실상은 메시아가 태어났음을 알려줍니다.
곧 그들의 죽음은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가 메시아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메시아가 나타나심에 대한 지상의 왕의 두려움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헤로데의 죄 없는 아기 학살을 두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레미아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라마에서 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 2,18)
이는 예레미야가 아들을 잃은 야곱의 아내 라헬의 통곡을 들어 예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마리아를 신약의 ‘새로운 라헬’이라 칭합니다.
곧 라헬이 일생동안 고통을 겪고 죽음의 고통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면, 마리아 역시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루카 2,35) 십자가의 고통을 겪음으셨던 ‘고통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또 라헬이 예레미아서에서 ‘이스라엘의 어머니’(예레 31,15)라 칭해지듯이, 마리아는 요한묵시록에서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을 가리켜 메시아 어머니의 “후손들”(묵시 12,17;12,1-6 참조)이라 칭하기에 전체 ‘교회의 어머니’라 칭해집니다.
그리고 라헬이 하느님 앞에서 지상의 자녀들을 위해 슬퍼하며 울음으로 전구했듯이, 마리아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장 유력한 ‘기도의 전구자’가 되십니다.
또한 우리는 ‘무죄한 어린이의 희생’을 들으면서 앞서 있었던 모세가 히브인들을 억압하면서 저질렀던 어린 사내아기들을 살해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사실 파라오와 헤로데, 그들은 모두 자신을 지키고자 빛을 두려워한 이들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러한 완고함과 자기중심적인 폭력과 독선과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지 않는지 잘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신의 왕국의 지키기 위해 사랑의 왕국을 저버리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이유를 확고하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마태 2,14)
이는 하느님께서 베푸는 구원의 역사는 그 어떤 어둠에도 방해에도 아랑 곳 없이 반드시 이루지리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죄 없는 아기들이 살육당한 소식을 들었을 때, 아기 예수님의 어머니 마음은 어떠했을까?
살인자 아닌 살인자가 되어버린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분명 죽어가는 아기들의 “울음소리”보다 어머니들의 “애끊는 통곡소리”가 훨씬 더 컷을 것입니다.
아기들의 슬픔은 한 순간이었고 그들의 죽음은 슬픔의 끝이었겠지만, 아기를 잃은 어머니들의 슬픔은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그 죽은 아기 어머니들의 아픔을 마리아는 통째로 짊어지셔야만 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아기가 희생되어 다른 아기들을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토록 그녀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차라리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에 모든 책임을 떠맡아 고통을 받아야 했던 마리아는 또다시 아무런 죄도 없는 당신 아드님 예수님의 죽음을 떠맡아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죄 없으면서도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써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인가 봅니다.
아기 예수님도 훗날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쓰고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혹 ‘무죄하면서도 억울함을 당할 때’가 있다면, 바로 그 일을 순교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주님!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때,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
그 슬픔을 넘어 구속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 2,18)
주님!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아기들이 살육당할 때, 어머니 마음은 미어지셨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아기를 희생시켜 다른 아기들을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토록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을 짊어지는 일인가 봅니다.
그러니 저희도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때,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
어머니 마리아처럼 슬픔을 넘어 구속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순교자의 피」
-반영억신부-
성 예로니모는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순교자들의 희생과 증거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들의 모범을 따라 주 하느님께로 나갑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하며 주님의 품을 찾은 첫 순교자 스테파노, 오늘 기억하는 죄 없는 어린이들의 순교는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열정을 일깨워 주며 또한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 가르쳐 줍니다.
헤로데는 두 살 이내의 아기를 모조리 죽여서(마태2,16). 자기의 권력을 넘보는 싹을 잘라 버리고자 했습니다. 이런 일은 이미 이스라엘이 한창 피어날 때 이집트에서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과 생명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탈출1,22).
이런 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도처의 전쟁도 그렇고, 2021년 2월 18일 실시간 세계낙태 건수는 무려 5,662,422 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낙태 건수는 정부 추정치만 년 3만3천여 건에 이릅니다. 2005년에는 34만 건이나 되었죠. 출생아는 2020년 27만 명을 밑돌았으니 소리소문없이 낙태로 희생되는 생명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보호받아야 할 태아들이 어머니 뱃속에서 죽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부모들의 이기적인 마음과 인간의 이기심이 무죄한 생명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유린하고 있으니 그들의 통곡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어린아이를 방치하고, 방치를 넘어 학대를 일삼은 부모 이야기가 종종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모성과 부성을 잃어가는 세태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 보다, 태아의 생명권이 우선이라는 사실은 양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질투심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요셉은 한밤중에 천사가 전해준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 2,13). 요셉은 그 말씀을 듣고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마태2,14). 온갖 어려움을 감당하며 지체없이 발길을 옮기는 요셉의 태도는 곧 순교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일상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몸에 배어있는 행동입니다. 우리도 언제 어느 때 부름을 받던지 기꺼이 따라나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교는 일상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말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자기 의지를 희생으로 바쳤다면 그 사람을 감히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하느님의 손길과 안배는 언제나 함께합니다.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련과 고통,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분의 손길과 요청에 단호히 응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순교자들이 이 지상에서 소멸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천국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어떤 처지와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의 뜻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무죄한 아기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 18)
-한상우신부-
이 땅에서
아기가
죽어갑니다.
살아야 할
생명이
죽어갑니다.
자신의 죽음도
모르채
죄 없는
아기들이
죽어갑니다.
예수님의
성탄 앞에
살아야 할
아기들의
시간까지
우리가
죽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립니다.
멈추지 않는
아픔과
절규입니다.
뻔뻔함을
멈추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도
아기들의
죽음에 관하여
물을 수 없습니다.
절망 속에서
절망을
위로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아기를 죽입니다.
아기의 죽음은
하느님의
죽음입니다.
아기와
함께할 수 없다면
하느님과도
함께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왕도 사장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중한 생명이
있을뿐입니다.
하느님
성탄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성탄을
찾는 이유는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고싶은 이유입니다.
성탄의 기쁜소식은
아기들을 돌보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성탄의 좌표는
사랑입니다.
죄 없는 사랑을
죽이지 마십시오.
사랑이 전부가
되는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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