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9일 주님 세례 축일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7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태.3,13-17
After Jesus was baptized,
he came up from the water and behold,
the heavens were opened for him,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and coming upon him.
And a voice came from the heavens, saying,
“This is my beloved Son, with whom I am well pleas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선택하신 이는 성실하게 세상에 공정을 펴리라고 예언한다(제1독서).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셨다고 강조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려온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연구소에서 실험 참가자들에게 다섯 종류의 초콜릿을 주고 얼마나 맛있는지 평가하도록 했습니다. 한 집단에는 “여기 다음 초콜릿이에요.”라고 말하며 초콜릿을 주었고, 실험 참가자들은 어떤 초콜릿이 마지막 초콜릿인지 모른 대 초콜릿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집단에는 먼저의 집단과 똑같이 말하면서 초콜릿을 주다가, 맨 마지막 초콜릿을 주면서 “여기 마지막 초콜릿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먹고 있는 초콜릿이 마지막 초콜릿인 것을 알게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떤 초콜릿이 가장 맛있었는지를 평가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네 번째 초콜릿까지는 두 집단이 비슷하게 맛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다섯 번째 초콜릿에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임을 알고 다섯 번째 초콜릿을 먹은 사람이 훨씬 더 맛있게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초콜릿을 알고 먹은 사람들은 이 실험을 더 재미있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이 주는 힘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마지막이다’라고 생각되면 더 소중하게 느껴지고 재미있게 누려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이렇게 마지막은 우리 삶을 더 의식하게 만들고, 깨어있게 만듭니다. 그리고 특별한 날로 만들어줍니다.
오늘을 삶의 마지막이라 생각하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똑같은 삶이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 아닌, 마지막으로 보내는 지금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특별한 삶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모범을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대충 사는 삶이 아닌 최선을 다하는 삶이었습니다. 자신의 편함과 안식을 위한 것이 아닌, 우리 구원을 위해 고통과 시련도 피하지 않는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세례 축일을 맞이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처럼, 요한이 주님이신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반대로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당시의 세례는 회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신 예수님은 회개할 필요가 없지요. 그렇다면 왜 세례를 받으신 것일까요? 우리 모두 구원의 길로 가기 위한 모범을 당신이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도 세례를 받는데, 피조물인 인간이 세례를 피해야 할까요?
단 한 명도 제외하지 않으려는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라는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보며, 우리는 지금을 어떻게 사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더 많이 사랑하고, 더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성 예로니모).
-조재형신부-
미국에서 지내는 시간이 어느덧 4년이 되었습니다. 미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사회보장번호(SSN)’가 있습니다. 이것을 받아야 다른 것들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운전면허증’이 있습니다. 국내선 비행기를 탈 때도 필요하고, 운전면허증은 신분증의 역할을 하기에 있으면 좋습니다. ‘은행계좌’를 개설합니다. 은행계좌를 통해서 급여를 받기도 하고, 신용카드 결제를 합니다. 미국교회에서 사목하기 위해서는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한국에 속한 교구로부터 ‘사제증명서’를 받아야 합니다. 저는 부르클린 교구로부터 사목에 대한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문사의 일도 하지만 다른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언론인으로 등록하여 5년 동안 있을 수 있는 비자를 받았지만 본당에서 사목하는 신부님들은 30개월만 비자를 받기에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서 한국엘 다녀오기도 합니다.
어제는 ‘주님 공현 대축일’이었습니다. 동방에서 온 3명의 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 드렸습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유대인들만의 구세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구세주로 오셨음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주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딸도 고쳐주셨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도 칭찬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율법학자가 물어보았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유대인인 레위나 사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이스라엘을 넘어서 한국까지 전해 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의미는 무엇일까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주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제가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대학은 논문을 통과한 사람에게 학위를 수여합니다. 대학은 학위를 수여할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그러나 때로 대학은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합니다. 생전에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추기경님께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 추기경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추기경님께 학위를 수여한 대학에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교황님께서 신학교에서 미사를 집전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교황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학교 기쁨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오히려 세례의 품격이 높아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습니다.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단순히 회개를 촉구하고, 영혼을 정화하는 과정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제 세례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그래서 사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가브리엘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두 가지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는 지난 날 모든 죄를 사함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오늘 주님의 세례 축일을 지내면서 내가 받은 세례의 축복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세례 받은 신앙인으로 충실히 살도록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하늘의 소리로 주님의 말씀이 사람들 가운데 계심을 믿게 하셨나이다. 또한 비둘기 모양으로 성령을 보내시어 주님의 종 그리스도에게 기쁨의 기름을 바르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나이다.”
주님 세례!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 인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시겠다는 표현!
-양승국신부-
세례(洗禮)! 말마디 그대로 더러워진 몸과 영혼을 씻는 예식, 죄 사함의 의식이요 전례입니다. 그런데 죄나 오점이라고는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티 없으신 하느님의 외아들, 무죄하신 어린양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요르단강을 찾아오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시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세례받으실 이유가 전혀 없으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한갓 피조물인 세례자 요한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너무나 황송해서 당황스러웠던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오 복음 3장 14절)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오 복음 3장 15절)
오늘 우리는 주님 세례 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세례는 하느님의 지극한 자기 낮춤의 표현인 육화 강생인 성탄에 이어 다시 한번 극단적 자기 낮춤의 명료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듯 우리의 하느님은 임마누엘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죄인인 인간과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느님. 우리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취하신 하느님, 우리의 죄와 타락이 너무나 안타까우신 나머지, 우리의 일상사에 늘 현존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 곧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런 애틋한 마음을 지니신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을 통해서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주님 세례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세상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셨다는 의미입니다.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 인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먼지요 티끌인 우리 인간과 동고동락할 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 여정을 동반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토록 자신을 한없이 낮추셔서 구질구질한 우리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을 낮추어, 우리보다 가난하고, 우리보다 더 고통받고 있고, 우리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이웃들 사이로 들어가야겠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곧 예수님의 ‘두 번째 탄생일’입니다.
신적 생명으로의 탄생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으로서의 탄생인 첫 번째 탄일이 그의 어머니께서 성령을 입은 것을 드러낸다면, 이제 이 두 번째 탄일은 예수님께서 직접 성령을 입은 날입니다.
그러니 오늘이 바로 예수님의 진짜 탄생일인 셈입니다.
우리의 탄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기로 태어났을 때는 부모에게 축복이 내린 것이지만, 세례를 받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축복이 부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례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새 탄생’이요, 신적 생명으로의 탄생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주님의 종의 첫 번째 노래’입니다.
여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주님의 종’은 “내 마음에 드는 이,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을 공정하게 펴리라.”(이사 42,1)고 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을 들려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세례 현장에 무엇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예수님의 세례의 현장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두 가지의 신비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는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셨습니다.
또 하나는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첫 번째 탄생 때는 주님의 천사만 나타났을 뿐이지만, 이제 이 두 번째 탄생 때는 ‘성령’이 나타나시고 ‘성부’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내려오신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창조’ 장면과 연상시켜줍니다.
창조 때 하느님의 영이 물위를 휘돌아 하느님의 전능을 드러내셨듯이, 이제 똑같은 성령께서 요르단 강물 위로 내리고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짐을 알려줍니다.
비둘기 형상으로 내린 성령께서는 노아의 홍수 때 푸른 잎사귀를 물어온 것처럼, ‘새로운 생명’을 물어오고 은총의 때, 곧 죄 사함이 열리고 ‘구원의 때’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이처럼 새로운 탄생인 ‘세례’는 새로운 창조,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가리킵니다(로마 6,4).
그리고 세례를 받은 우리가 새롭게 창조된 새로운 생명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생명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2코린 5,17; 로마 8,9).
그러니 이제 우리 안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살고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지요!
우리가 성령을 선물로 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다니 말입니다(1코린 12,13).
우리가 그리스도의 힘과 성령의 개입으로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다니 말입니다(디도 3,4-5).
이로써 우리는 주님을 옷 입듯이 입고서(갈라 3,27),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되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사시게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합일시키십니다.
곧 세례 받은 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 곧 죽음과 부활이 새롭게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콜로 2,12)
한편, 세례 현장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신비로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들려온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라는 아버지의 선포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2장에서 이스라엘 왕좌에 오르는 왕에게 적용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이 선언은 예수님을 ‘왕’으로 축성하시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세우시는 당신 나라의 ‘왕’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이로써 ‘새로운 세상’인 당신의 아드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위한 또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단지 예수님만이 아니라 우리를 포함한 온 세상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 스스로 이토록 아름다운 구절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고, 당신의 생명을 입었습니다.
성령의 선물로 거룩해지고 의롭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온갖 의로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신다고 스스로 설명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세례와 함께 자신을 낯추어 우리 죄인과 같이 되셨고, 마치 십자가에서 자신을 낮추시어 “반역자의 하나처럼,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이사 53,11-12)셨듯이, 저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바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의 생일인 것입니다.
축하합니다.
축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태 3,17)
주님!
제가 당신 마음 안에서 탄생되었으니 당신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당신 마음을 옷 입었으니 당신의 영으로 살게 하소서.
당신 마음을 품었으니 당신의 향기 품게 하소서.
사랑을 입었으니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이 시간 세례의 의미를 생각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려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태중교우 입니다. 아무 아무에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생활이 바쁘다 보니 하느님도 잊고 지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다시 시작한다고 하시니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사실 세례를 언제 받았느냐, 누구에게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세례의 의미를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여러 어려움이 있어도 하루끼니를 몽땅 거르고 지나는 분은 없습니다. 혹 그렇게 한다면 몸의 기운이 떨어져,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신앙의 영양을 섭취하는 기도와 미사를 소홀히 한다면 신앙의 맛을 느낄 수 없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밥맛이 없어도 기운을 차리려면 밥을 먹어야 합니다. 그렇듯이 기도가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야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를 하여야 그 무미건조함을 극복할 수 있고 더 큰 은총을 알게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복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제대로 해야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셨지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철저히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래서 죄가 없으신 분이 죄인의 틈에 끼여서 세례를 받으셨고 어둠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사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물로 씻는다’, ‘물에 잠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에 잠긴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욕망에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에 잠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잠겼다가 씻고 다시 나옵니다. 다시 나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나의 과거를 깨끗이 정화해 주시고, 예수님과 더불어 새 삶을 시작하게 해 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3,27).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6,4). 그리고 그 표징으로 우리는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름을 자주 불러 주어야 하고 새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쓰리고를 아십니까?
1. 불러주고(세례명) 이름을 불러주세요, 나 거기 서 있을께요. ‘당신은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세례명을 불러주십시오.
2. 보아주고, 불렀으면 그 사람을 봐줘야합니다. 얼굴을 보면, 눈을 마주치 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잖아요. 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습니 다. 기쁨도 슬픔도!
3. 잡아주고,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등을 토닥여 주고, 손을 잡아주고 위로 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 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서로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어주시길 바랍니 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쓰리고”하니까 놀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육적인 것 에만 마음을 씁니다. 이러한 삶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위로 올라오셨습니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3,17).
이 말씀은 “너는 나의 귀염둥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사랑이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결코 예수님께만 국한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날 때 듣게 된, 그리고 듣게 되는 음성입니다.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 그런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이 우리를 들어 높여 주시고 사랑해 주시며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의 모범을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침으로써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사는 법을 철저히 배워야합니다. 세례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의 은총을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며 고백했습니다. “마귀를 끊어 버립니까?” “끊어버립니다.” “천지의 창조주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받기 이전의 삶과 이 후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정초를 맞이하면 ‘점집’에 드나드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사주팔자를 보러 소위 ‘용하다는 집’을 찾는답니다. 자녀를 이기는 부모 없다고 자녀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면 그런 일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혼사를 위해 길일을 택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녀에게, 가정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하면 마음이 흔들려서 주님을 등지는 일을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떤 이는 점집에 가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에 묵주기도를 하고 있답니다. 이런 양다리 걸치기는 결코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요, 주님을 배반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두는 기쁨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티토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구세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자와 사랑을 나타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슨 올바른 일을 했다고 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이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서 다시 나게 하시고 새롭게 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티도3,4-5). 구원은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시게 될 때 내 삶이 주님의 삶으로 바뀌고, 은총의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오늘 여기서부터 새로 태어나는 삶의 시작이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딸’이라고 선언해 주십니다. 주님 사랑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주님의 물귀신 작전
-김찬선신부-
오늘 주님께서는 세례를 주고 있는 세례자 요한에게 오셔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시는 주님을 세례자 요한이 알아보고 그럴 수는 없다고,
자기가 오히려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세례를 줄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당연하고 저라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제가 본당에서 새 영세자에게 세례를 주고 있는데
느닷없이 주님께서 나타나 그 줄에 같이 서 계신다면
저는 기절초풍할 것이고 왜 이러시나 하고 그 뜻을 몰라 당황할 것입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이 세례받으시는 이유랄까 뜻을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심오한 뜻이 있겠으나
오늘 저에게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우리 같이 힘을 합치자는 말씀 같고,
그래서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 뜻대로 사는 의로움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두가 그 대열에 참여해야 하는데 세례자 요한도 우리도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세례자 요한에게 “우리”라고 하시며
당신 구원사업의 파트너로 초대하시는데, 이는 대단한 신분 격상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초대하시는데
이 또한 우리를 세례자 요한처럼 여기시는 대단한 신분 격상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능력으로만 구원하신다면 말씀 한마디로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느님은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생겨나게 하셨고,
백인대장의 종을 말씀 한마디로 고쳐주실 정도로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셨고,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거룩한 뜻이기에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굳이 이 세상에 들어오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고
그리고 굳이 요르단강 물에도 들어가시어 우리와 똑같이 세례를 받으시는 겁니다.
이는 마치 물귀신 작전 같기도 합니다.
같이 죽자는 물귀신 작전인데 그러나 나쁜 뜻의 물귀신 작전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거룩한 죽음을 같이 죽자는 영적인 물귀신 작전입니다.
사실 세례의 의미가 이것 아닙니까?
죄에 대해서 죽고,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으려고 들지 않으니
당신이 먼저 죽으시며 같이 죽자고 하시는데
오늘 주님의 세례는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이 거룩한 물귀신 작전에 같이 참여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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