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1월 11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3. 1. 11. 06:52

2023년 1월 11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마르코 1,29-39)

He cured many who were sick with various diseases,

and he drove out many demons,

Rising very early before dawn,

he left and went off to a deserted place,

where he pray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시고,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 주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예전에 교구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비신학생을 보면서 과연 신학교에 보내는 것이 맞느냐는 생각을 들게 하는 아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선 가장 큰 장점은 ‘착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점도 ‘착하기만 하다.’는 것입니다. 성적도 낮고, 자기 주관이 없고, 또 자존감도 너무 낮았습니다. 이 상태로 어려운 신학교 공부를 해나갈 수 있을지, 또 자존감 없이 신학교 기숙사 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습니다. 그래도 성소자가 매우 부족하고, 또 신학교에 들어가서 바뀌지 않을까 싶어 추천했지만, 신학교 입학한 학생 대부분은 결국 사제가 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는 것이었습니다. 착하기는 엄청 착한데, 왜 사제가 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둘까요?

이런 고민을 하던 중, 스페인 성지순례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빌라에서 데레사 성녀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수도자가 너무 착하고 온순해서는 내적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내적으로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착해 보이지 않고 또 온순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내적으로 강한 사람만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십니다. 또 병든 이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새벽이 되면 다른 이웃 고을로 이동하셨습니다. 바쁜 전교 활동의 일과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늘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기도하러 외딴곳에 가신 예수님을 찾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당신 뜻을 세워 다른 고장으로 가십니다.

악에 휘둘리지 않고, 세상에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만약 착하기만 한 점을 보였다면, 마귀들이 말하는 것도 경청해주고 당신을 찾고 있는 사람도 만나주면서 그 고장에 더 머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는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하느님 뜻에 맞춰 사는 내적으로 성장하는 삶이 아닐까요?

좋은 일을 생각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 나쁜 일을 생각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온종일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것의 조합이다(조셉 미피).

​치유와 구마 기적은 오늘날에도 가능할까?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DS0m4TFuwUE

 

-조재형신부-​

영화 아바타(물의 길)에서는 인간이면서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한명은 나비족과 함께 살면서 나비족의 철학과 가치를 배운 제이크입니다. 다른 한명은 나비족이 되었지만 인간의 가치와 철학을 간직한 마일즈입니다. 제이크는 나비족의 여인과 결혼해서 자녀를 낳았고, 자연을 사랑하며 가족들 돌보는 나비족이 되었습니다. 마일즈는 몸은 나비족이 되었습니다. 큰 키와 강한 힘을 지녔지만 그 힘으로 나비족을 탄압하고, 나비족의 마을을 불살랐습니다. 마일즈가 나비족이 된 것은 자연을 사랑하고, 가족을 돌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판도라 행성의 자원을 빼앗고,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제이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겉모습이 닮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겉모습과 함께 내면의 모습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질책하시면서 무엇이 깨끗한 것인지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정하게 하는 것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들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부정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탐욕, 분노, 질투, 음탕, 시기, 교만, 게으름, 원망’이 우리의 마음에서 나와 우리의 몸을 부정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상석에 앉으려하는 사람, 자신의 십자가를 남에게 전가하는 사람, 단식한다는 표시를 드러내는 사람, 율법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부정하셨기 때문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죄에 물들었기 때문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례의 품격이 높아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는 하느님의 아들이 무슨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셨습니다.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이 세상의 품격을 높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세례도 품격이 높아졌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면서 우리들 또한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우리의 썩을 몸도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예수님의 치유가 여러 마을에 전해지는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들 또한 겉모습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보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우리의 삶으로 온전히 전하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Go and Stop!

양승국신부-

 

어촌의 겨울은 무척이나 황량합니다. 꽁꽁 얼어붙은 바다에 나가봐야 별 소득이 없습니다. 그리도 우글거리던 우럭이며 놀래미, 쭈꾸미나 낙지가 귀신처럼 사라져버립니다. 강풍까지 불어오면 체감온도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다 아무도 찾는 이마저 없다면 쓸쓸 허전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이며, 피정객이며 방문객들로 왁자지껄하면 분위기는 사뭇 달라집니다. 공동체 전체가 활기를 띱니다. 다들 바쁘게 움직입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이른 새벽 눈뜰 때부터 늦은 밤 잠자리에 들 때까지 잠시도 쉴 틈이 없으니 몸이 천근만근입니다. 그러나 사목자로서 참으로 행복한 순간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도 아마 그러셨을 것입니다. 그분의 일상은 말씀의 선포, 치유와 구마,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인격적 만남, 그리고 그들을 위한 기도 등등으로 눈코뜰새 없이 바빴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께서는 홀로 떨어져 지내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가난한 백성들, 죄인인 인간들 사이에서 굳건히 현존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길어봐야 3년! 마음이 초조해지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강도 높은 사도직 활동이 끝나면 한 며칠 만사 제쳐놓고 휴가도 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지친 몸을 이끌고 또 다른 고을로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깃을 붙들었습니다. 제발 이곳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여기서 우리와 함께 계속 머물러 달라고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안타깝지만 결연한 표정으로 다음 고장으로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코 복음 1장 36절)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의 행적에는 또 다른 독특한 측면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은 ‘Go and Stop!’ 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무작정 무턱대고 앞으로 나아가지만 않으셨습니다. 적당한 순간 멈출 줄 아셨습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아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코 복음 1장 35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지닌 모든 역량과 에너지, 카리스마와 능력을 총동원해서 사도직 활동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 결과 수 많은 병자들이 치유되었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죄인들이 회개했으며 구원의 길로 돌아섰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갈채가 요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쭐대는 법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요란한 함성을 뒤로하고 또다시 한적한 것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서 하느님 아버지와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며 지친 심신을 달랬고, 원기를 충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이영근신부-

예수님의 공생활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곧 기도 생활과 활동 생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활동 생활은 다시 말씀의 선포 활동과 치유 구마 활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3중 직무, 곧 예언직과 사제직과 봉사직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 가지 내용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첫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에게 봉사하시는 장면이요, 둘째 장면은 새벽에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며 아버지와 친교를 이루시는 기도하시는 장면이요, 셋째 장면은 이웃 고을로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시는 장면입니다.

첫째 장면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마르 1,31)라는 구절입니다.

이는 손을 잡자 열이 내려가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곧 치유를 받아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으켜지자 치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치 산고의 아픔이 다해야 아기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가 탄생하면 산고의 아픔은 사라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치유가 믿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치유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34)라는 구절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이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믿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라고 고백하지만, 결코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고백은 할지라도 믿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되고, 아는 바를 믿고 사랑하며, 믿고 사랑하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장면에서는 예수님의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와 일치’에 당신 삶의 중심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기도와 활동의 삶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곧 기도는 활동이 되어야 하고 활동은 기도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곁을 떠나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려줍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마르 1,38)

이는 예수님께서 “기쁜 소식”, 곧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선포하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나시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도 합니다(마르 16,15).

오늘 우리는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고, 먼저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총과 사랑을 입은 이들로서, 예수님의 이 사랑을 우리의 소명으로 받은 이들임을 명심해고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마르 1,38)

 

주님!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당신 뜻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알고 실행하는 것이 제 삶이 되게 하소서!

제 뼈 속에 갇힌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