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1월 12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3. 1. 12. 06:26

2023년 1월 12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하시자

그는 곳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마르1,40-45)

A leper came to him

and kneeling down begged him and said,

“If you wish, you can make me clean.”

Moved with pity, he stretched out his hand,

touched the leper, and said to him,

“I do will it. Be made clean.”

The leprosy left him immediately,

and he was made clea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시고,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국의 정신과 의사 토마스 해리스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태도에 따라 인간관계의 유형을 다음과 같은 4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첫째는 “I’m Ok, You’re not Ok.”(나는 괜찮지만 너는 하찮다)

자기중심적인 자기애 성향자의 마음 자세를 뜻합니다.

둘째는 “I’m not Ok, You’re Ok.”(나는 하찮은데, 너는 괜찮다)

열등감을 지닌 사람의 태도를 말합니다.

셋째는 “I’m not Ok, You’re not Ok.”(나나 너나 모두 하찮은 존재이다)

비관적인 또는 허무적인 태도를 뜻합니다.

이 세 가지 태도 모두 건강할 수 없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일까요? 가장 바람직한 태도를 이렇게 말합니다.

“I’m Ok, You’re Ok.”(나는 괜찮고 너도 괜찮다)

건강한 자기 존중감은 자신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소중하게 여길 때 생긴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도 소중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만 괜찮기를 바라면, 자기 존중감이 높아질 것 같지만 건강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괜찮다”라고 서로에게 말해 줄 때, 모두 건강하게 주님 뜻에 맞게 살 수 있습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보통은 “저를 고쳐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 나병 환자는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치료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 앞에 감히 나설 수도 없는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처분만 기다리는 가장 불쌍한 상태, 자존감이 거의 없는 “I’m not Ok.”의 상태인 나병 환자를 “You’re Ok.”로 바꿔주신 것입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당신 사랑으로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를 “I’m Ok, You’re Ok.”로 만들어 주시려고 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따르며 건강한 자기 존중감을 갖고, 나의 이웃 역시 자기 존중감을 가질 수 있도록 사랑으로 다가설 수 있어야 합니다. 제1독서의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히브 3,13)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좋고 나쁜 것이란 없다. 다만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이다(윌리엄 셰익스피어)

​감사의 은총을 잃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전삼용신부

https://youtu.be/BSrMjZLNEMc

오늘 복음에서 한 나병 환자가 주님의 은혜로 깨끗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예수님께 이득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받은 은총을 널리 퍼뜨렸습니다. 덕분에 예수님은 박해 받는 신세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만지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건 예수님은 외딴 곳에 머무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치유된 나병환자는 다시 예수님을 만나러 올 수 있을까요? 죄송해서 예수님을 다시 만날 용기를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결국엔 망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을 고쳐주신 주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감사는 정말 중요합니다. 하지만 결국엔 예수님께 피해를 줬습니다. 이렇게 되면 감사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감사가 중요한 것은 너무나 잘 압니다. 감사한 만큼 보답하고 싶고 그러면 내가 그분이 원하는 대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 감사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매 미사 때 진리의 말씀을 주시고 생명의 양식을 주십니다. 하지만 감사가 잘 나오지 않고 여전히 청하기만 합니다. 문제는 오늘 나병 환자처럼 감사가 지속될 수 없게 만드는 우리 행동에 있습니다.

 

한맥 투자 증권은 1991년 진로 그룹 계열사로 설립되었습니다. 그런데 2013년 12월 12일, 한 직원이 작은 실수를 하게 됩니다. 옵션 가격의 변수인 이자율을 ‘잔여일/365’로 입력해야 했는데 ‘잔여일/0’이라고 잘못 기입한 것입니다. 이에 모든 상황에 이익 실현이 가능하다고 본 프로그램이 막대한 양의 거래를 체결해버렸습니다.

 

물론 직원은 자신의 실수를 곧바로 알아차리고 전원 코드를 뽑았습니다. 하지만 143초 동안 3만 7천 900여 건의 거래가 이뤄졌고 이로 인한 손실이 462억 원이었습니다. 다음날 정규직 45명, 계약 직원 100명 등 임직원 총 157명 중 120명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감당하지 못한 한맥 투자 증권은 파산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회사에 감사하고 봉사하고 싶어도 회사에서 금지된 일을 하게 된다면 그 감사와 봉사가 지속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감사하려 해도 잘 안되는 가장 큰 이유는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는 불순종입니다. 그리고 불순종의 시작은 교만입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교만에서 불순종이 시작되고 그것이 죄입니다. 이러한 불순종은 하느님으로부터 받던 은혜를 일순간에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따라서 내가 교만해졌는지, 그렇지 않은지 자주 살펴야 합니다.

 

많은 경우 “교만한 사람은 감사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치유된 나병 환자는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뭐라도 주님께 도움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감사만으로는 교만이 발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감사헌금을 하면서 더 감사한 일이 많이 생기게 해 달라는 청을 드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는지, 내 생각이 옳다며 순종하지 않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느님께 엄청난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왕의 권위를 벗어나 사제만이 할 수 있는 일까지 벌인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그를 내치십니다. 교만은 항상 내가 더 옳다고 믿게 만들기 때문에 하느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합니다. 감사하면서도 불순종하면 그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교만은 파멸로 이끕니다. 불순종하는 대상에게 감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가 더 높고 더 많이 준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겸손해지는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작은 계명부터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부터 시작할까요? 선악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십일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에도 나오고 예수님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는데 왜 우리는 안 해도 된다고 믿을까요? 또 안식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전쟁 때도 총을 들지 않아 몰살당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겸손해지는 길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며 겸손해지려 하고 감사하려 한다고 될까요? 안 됩니다. 먼저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이 없으면 겸손이 없고 그러면 은총이 끊겨 멸망만 남습니다. 솔로몬이 지었다는 잠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파멸에 앞서 마음의 오만이 있고 영광에 앞서 겸손이 있다.”(잠언 18,12)

 

불순종은 은총이 끊기는 가장 완전한 길입니다. 먼저 십일조와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것에 순종합시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거나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아야 한다는 계명도 지키려고 합시다. 먼저 이런 것들을 지켜야 은총에 감사가 지속될 수 있고 그 감사가 나를 하느님처럼 변화하게 합니다.

불순종은 이미 교만을 선택한 것이기에 겸손에서 나오는 감사는 생겨날 수 없습니다. 감사 없는 변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물을 넣지 않고 쌀만으로는 밥을 지을 수 없는 것처럼, 순종 없는 감사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십일조 계명에 먼저 순종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감사의 지속 조건은 순종입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거든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V9issy3dy3I

​-조재형신부-

좋은 글은 마음을 포근하게 합니다. 오늘은 며칠 전에 읽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어려서 이모부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이모부는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소금기가 가득한 황무지를 개간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인택이 미친놈’이라고 하였습니다. 황무지를 개간해서 벼를 심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몇 년 시간이 지나고 여전히 마을 사람들은 ‘인택이 미친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몇 년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황무지에서 알곡이 풍성한 볏단이 나왔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인택이 미친놈’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모부는 그렇게 개간한 땅에서 돈을 벌어 방직공장을 세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모부의 방직공장에서 일하였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인택이 미친놈’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인택 이는 난놈이여’라고 하였습니다.” 좋은 길, 편한 길이 있지만 그 길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길이 희망의 길이 되었고, 그 길이 생명의 길이 되었습니다.

 

200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목수의 아들 예수님은 사람들이 가지 않았던 길을 갔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이라는 ‘틀’을 과감하게 벗어버리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죄인이라며 손가락질 했던 ‘세리, 이방인, 창녀, 소경, 중풍병자, 나병환자’들을 따뜻하게 대하였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 명예, 성공, 재물’을 찾아서 땀을 흘리면서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겸손, 희생, 나눔, 가난’을 찾아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 사람은 미쳤다.’라고 손가락질 하였습니다. 바람 따라 들리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누가 나의 어머니이고, 나의 형제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나의 어머니이고, 나의 형제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했습니다. 미친 사람이란 소리를 들었고,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셨지만 우리는 그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부릅니다. 그분이 가신 길이 구원의 길이 되었습니다.

 

2023년 새로운 한 해를 시작되었습니다. 저 역시 제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매일 새벽 기도와 묵상으로 하루를 여는 겁니다. 매주 발행하는 신문의 지면을 알차게 채우는 겁니다. 미주 지역 가톨릭 한인 공동체의 소식을 전하는 겁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전하는 겁니다. 지치고 힘든 이웃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이야기를 전하는 겁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마음으로 신문 홍보를 하는 겁니다. 성지순례를 가려 합니다. 매일 함께 미사하고, 순례하고, 기도하면서 신자들과 함께 하려합니다. 눈 덮인 길을 걸어갈 때면 발걸음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금 나의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걸어가는 길이 부끄럽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처음의 결심을 끝까지 굳건히 지니는 한 그렇습니다.” 주님만 바라보면서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가면 좋겠습니다.

 

고인이 되신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존귀하신 하느님의 손이 흉측한 인간의 피부에 직접 와닿았습니다!

-양승국신부-

 

한 가련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습니다. 나병 환자는 얼마나 절박했던지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예수님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아마도 당시 주변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차하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고 고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유다 관습 안에는 유유상종의 문화가 철저히 준수되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유다인들끼리, 사마리아인들은 사마리아인들끼리. 율법학자들은 율법학자들끼리, 세리들은 세리끼리, 나병 환자들은 나병 환자들끼리.

 

나병 환자들은 가장 하층민 격에 속했습니다. 하느님께 죄를 지은 결과 나병에 걸린 대죄인 취급 받았습니다. 불경스럽고 부정탄 인간, 상종하거나 접촉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더 나아가서 나병에 걸리면 일종의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병 판명을 받으면 가족과도 생이별을 해야만, 살고 있던 주거지를 떠나 성 밖으로 나가 살아야만 했습니다. 움막을 짓고 들짐승처럼 그렇게 살았습니다. 생사가 궁금했던 가족은 멀찌감치 생필품이나 식료품을 던져놓고, 목이 터지도록 나병 환자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운이 좋으면 겨우 챙겨갈 수 있었습니다.

 

길을 지나가다가 인기척이 느껴지면, 나병환자들은 즉시 목청을 높여 ‘여기 부정 탄 사람 있으니 조심하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준수하려 하셨다면, 당신 가까이 다가오는 나병 환자를 향해, ‘당장 내 앞에서 물러가라!’라고 외치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을 보십시오. 나병 환자의 가련한 모습에 예수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프셨습니다. 자동으로 마음 깊숙한 곳에서 연민과 측은지심의 정이 솟구쳤습니다. 예수님 손이 자동으로 그의 썩어 문드러진 환부에 가 닿았습니다. 이윽고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코 복음 1장 41절)

 

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대사건인지요? 하느님께서 한 가련한 인간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몸을 굽혀 그의 고통과 상처를 바라보십니다. 존귀하신 하느님의 손이 흉측한 인간의 피부에 직접 와닿았습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파격적인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아마 하느님께서는 오늘 이 아침 우리에게도 똑같이 행동하실 것입니다.

 

죄로 욕망으로 잔뜩 더러워진 우리네 영혼임에도 불구하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실 것입니다. 특유의 선하고 그윽한 눈길로 우리의 비참하고 가련한 처지를 바라보실 것입니다. 손을 뻗어 꼬이고 꼬인 실타래 같은 우리네 인생길을 당신 자비의 손길로 펴주실 것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단순한 치유받은 한 나병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치유 받은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나를 치유하신 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그분이 누구신지를 아는 일이고, 그분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사실 구약의 율법규정(레위 13,45-46 참조)에 따르면,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는 접촉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서, 혹시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자’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규정을 제시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예컨대,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 이야기에서도 이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간음한 여인이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이처럼 규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호의를 제시해줍니다.

한편 나병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르 1,40)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스승님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 라는 의탁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바람에 대해 하느님께서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바람에 우리가 응답하는 것에 대한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신 것처럼, “내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는 주인께 속한 이로서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동시에 당신의 치유의 능력, 곧 권능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의 행사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있기에, 주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탁하며, 주님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우리의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희망을 하느님을 통해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로 자신을 내어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마르 1,41)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죄인이기에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주님,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소서.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제게서 이루소서.

당신이 원하니까 저도 원하게 하소서!

아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희망하며 갖가지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 치유의 손길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질병으로 다가온 고통을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고백해도 아픔은 여전하기 때문에 진정 그분이 함께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믿는 이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수 있으시니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이 몸소 함께 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믿음은 시련은 이겨내는 힘입니다.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 받은 모습이요,(레위13,34)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욥기18,13)였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 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13,45-46). 법은 접근을 막을 뿐 나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상의 것이라도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로써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결국 무릎을 끓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분리하고 소외시키지만 주님의 품은 차별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품에 지체 없이 안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합니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릎을 꿇으면 비로소 사랑받는 나 자신을 보게 되고 사랑해야할 이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행동하게 됩니다. 오늘이 그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