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6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잔칫집에 온 신랑 친구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단식을 할 수 있겠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럴 수 없다.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 조각에 켕겨
더 찢어지게 된다.”
(마르2,18-22)
As long as they have the bridegroom
with them they cannot fast.
No one sews a piece of unshrunken cloth
on an old cloak.
If he does, its fullness pulls away,
the new from the old, and the tear gets wo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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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게서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로 임명되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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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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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는데 자신과 대통령이 같은 고향으로 잘 아는 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어렸을 때의 일을 이야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연락하세요?”라고 묻자, 바쁘신 분인데 어떻게 연락이 되겠냐고 하십니다.
종종 지위 높은 사람과 친분이 있으면 마치 자신이 높은 사람이 된 양 행동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 친분이 현재에는 전혀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과거의 인연을 내세워서 허세를 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 친분이 그를 높여줄까요? 허세만 부린다면서 오히려 멀리할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렸을 때 신부님 옆에서 복사 섰었다는 이야기부터 본당 봉사활동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지금은요?”라고 물으면, “요즘은 바빠서 미사에 나가지도 못하네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주님과 전혀 가깝지 않은데, 과거의 인연으로 주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요?
과거에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바로 지금 알아야 합니다. 과거의 신앙생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라고 하면서, 늘 새롭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새로운 마음으로 담아야 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당시의 사람들 역시 새로운 예수님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단식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모습에 실망만 하면서 오히려 예수님께 적의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큰 죄를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묵상 글을 통해 ‘쓰담쓰담 묵상집’의 마지막 장을 적습니다. 오늘부터 저는 교구장 주교님의 인사 명령에 따라 갑곶성지를 떠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 내일부터 제 후임 신부가 이 묵상집을 이어서 쓸 것입니다.
2003년 12월에 와서 3년 동안, 그리고 2015년 1월에 와서 7년 동안을 갑곶성지에서 살았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너무나 많은 저였지만 순교자들의 보살핌으로 과분한 사랑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이제 갑곶성지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헌 포도주 같은 저는 떠나고, 새 포도주와 같은 신부님께서 이곳을 맡아주십니다. 저보다 훨씬 더 훌륭한 신부님이시기에 아무런 걱정 없이 안심하며 떠나겠습니다. 아무쪼록 새롭게 갑곶성지를 운영하고 발전시키실 신부님께도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1월 16일부터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에서 사목을 시작합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주시길 청합니다.
고민해도 소용없는 고민으로부터 자기를 해방시켜라. 그것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가장 가까운 길이다(데일 카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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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추운 겨울 아침 산보 길에는 필요한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따뜻한 물을 담은 보온병, 손을 따뜻하게 하는 워머(충전식이라서 편합니다.), 모자, 장갑, 소소한 물건을 담아 어깨에 메는 가방 그리고 손수건이 있습니다. 겨울철에는 산보하면서 콧물이 나기 때문에 손수건은 도움이 됩니다. 손수건에 대한 기억이 생각납니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하면 앞가슴에 하얀 가제 손수건을 달았습니다. 그때 겨울은 유난히 더 추웠던 것 같습니다. 중, 고등학교 때는 색이 들어간 손수건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예쁜 그림이 있는 여학생들의 손수건도 있습니다. 손수건은 수건돌리기라는 게임의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전쟁터에서 하얀 손수건은 항복의 표시가 되기도 했고, 위생병들에게는 평화의 표시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얀 손수건은 헤어지자는 이별의 표시가 되기도 했습니다.(하얀 손수건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손수건은 사랑하는 이를 환영하는 표시가 되기도 했습니다. 오랜 동안 방황하던 남편이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만일 나를 받아준다면 고향 마을에 노란 손수건을 매달아 달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 나무 가지에 노란 손수건을 가득 매달았습니다.
신앙인에게 특별히 생각나는 손수건이 있습니다. 바로 베로니카의 손수건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로니카는 오랫동안 하혈하던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면서 하혈이 멈추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 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 드렸습니다. 또 다른 여인은 세리 자캐오의 아내였다고 합니다. 자캐오의 아내는 세상의 것에만 빠져있는 남편을 걱정하였습니다. 그런 어느 날 남편은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왔습니다. 남편은 예수님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그리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빚진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밖에 모르던 남편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집과 가족이 구원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자캐오의 아내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고,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의 길 6처에서 베로니카 성녀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렸음을 묵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입니다. 새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입니다. 새 포도주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새 부대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어린 아이의 콧물을 닦아 주는 손수건과 같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과는 결별한다는 이별의 손수건과 같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노란손수건과 같아야 합니다. 주님께 순명한다는 하얀 손수건과 같아야 합니다. 전쟁터에서 부상병을 돌보는 위생병이 보여주는 손수건과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리는 베로니카의 손수건과 같아야 합니다.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가장 헐벗은 이들에게, 가장 굶주린 이들에게,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이방인들에게 내미는 사랑의 손수건과 같아야 합니다. 우리들도 손수건과 같은 삶을 살아서 주님을 모시는 새 부대가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느님에게서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로 임명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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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리 별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걸며 아등바등 살아왔는지...
-양승국신부-
단식과 관련해서 오늘 예수님께서 건네시는 촌철살인의 한 말씀이 제게 얼마나 큰 기쁨이요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마르코 복음 2장 19절)
예수님과 함께 하는 우리 시대는 슬픔과 비탄의 시대가 아니라 기쁨과 축제의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네 하루하루가 만만치 않다 할지라도, 끝도 없는 시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축제를 만끽해야겠습니다.
아무리 백세 시대, 장수 시대라 할지라도 우리네 인생 참으로 빠르게 지나갑니다. 가끔 제 나이를 떠올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제 치과 치료 갔을 때도 간호사 선생님께서 “아버님 이쪽으로 들어오세요!”라고 할 때 화들짝 놀라며 당황해했지만, 즉시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오면서, 나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남은 날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날수를 따져봐도 남은 날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돌아보니 하루하루가 소중한 나날들, 보물처럼 아까운 순간들이었습니다. 설렁설렁, 흥청망청 무의미하게 흘려보냈던 그 순간들이 안타깝습니다.
순간순간이 감사의 순간이요 축제의 순간이었는데, 왜 그리 인생을 심각하게 살아왔는지. 왜 그리 별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걸며 아등바등 살아왔는지. 왜 그리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보냈는지...
얼마 남지 않은 날들, 눈물 대신 미소를, 비탄 대신 축제 향유해야겠습니다. 매일 주님의 존귀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 매일 그분의 현존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일 매 순간은 축제의 순간이어야 마땅합니다.
슬퍼할 일이 있다 할지라도 즉시 마음을 바꾸어먹어야겠습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이런저런 원치 않은 병고가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고, 갖은 시련과 고통이 우리 삶을 휘감는다 할지라도, 거듭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고 생각을 바꿔나가야겠습니다.
순간순간 주님 자비에 의탁하고, 거듭거듭 우울감을 떨치면서 우리 삶을 찬양과 축제의 삶으로 엮어나가야겠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그날 마지막 순간까지 어여쁜 꽃 한 송이 피워 나가야겠습니다.
미운 사람들, 정말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 상처만 남긴 사람들 생각일랑 흐르는 강물에 모두 모두 떠나보내고,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들과 더불어 그리 오래 남지 않은 세월, 감동과 축제의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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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단식 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신랑이 와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지 않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마르 2,19)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장(29-31)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1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때”가 아님을 말씀하시며, 그 이유를 밝혀주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요한 3,29)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오늘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는다.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 2,21-22)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천’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이는 당신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단식의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곧 구약의 속죄와 정결을 위한 단식이 아니라, 신랑이 떠나간 후에 있게 될 새로운 단식입니다.
그래서 단식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연결되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고 그 사랑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단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때입니다.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랑은 ‘이미’ 와 있고 혼인잔치가 열렸습니다.
신랑 없이는 열릴 수 없는 잔치입니다.
참으로 기뻐해야 할 때입니다.
‘새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새 시대’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 2,22)
주님!
새 부대가 되게 하소서!
제 마음이 당신의 새 부대이오니, 당신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취해, 기뻐 흥겨오리이다.
온통 젖어 당신 향기 품으오리이다.
제 삶이 당신의 사랑의 잔이오니, 술잔 가득 사랑을 채우소서.
축복과 기쁨, 생명과 진리를 담아 건네오리이다.
남녘땅에서도 북녘 땅에서도 곳곳을 적시는 아리랑의 노래 소리 가득 채운 사랑의 술잔을 쳐들게 하소서!
온 겨레가 화들짝 달구어지게 하소서!
신랑을 맞이한 혼인잔치가 되게 하소서!
사랑과 진리와 생명이 피어오르고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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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
-반영억신부-
그동안 익숙해 있던 생활의 패턴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지켜온 전통과 고정관념이 나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정된 의식의 전환을 통해서 새로움이 주어집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열린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했는데.... 어떤 못된 습관을 관행이라고 합리화시키는 고집을 피워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우리 자신이 변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고(로마12,2) 거기에 나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어주셨고 이 구원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옛 사고방식대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갇혀 있는 만큼 새로운 것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기득권을 내려놓으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할망정 과거로 회귀해서는 안 됩니다. 근본정신을 망각한 과거에로의 회귀는 퇴보이기 때문입니다.
단식하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의 결론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2).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의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단순히 율법의 규정에 따라 단식을 할 때가 아닙니다. 단식하는 이유는 죄를 벗는 속죄의 행위나 회개의 표시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애덕을 실천하는 행위이지 단순히 식사를 절제하거나 육식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몸매 관리나 건강을 위해서 단식을 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금요일 고기를 먹지 않는 금육재를 잘 지킵니다. 그러나 단식을 해서 이웃에게 어떤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는가? 생각해보면 그 단식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마태9,13)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단식에 대해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6,17-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보이기 위한 단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단식이어야 합니다. 단순히 굶는 것을 단식이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기를 소망하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사랑에로, 그리고 이웃사랑에로 초대하십니다. 구체적 이웃사랑 실천이 없는 단식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가진 단식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의미 있는 단식, 알맹이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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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송영진신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르 2,18-20)”
여기서 예수님 말씀의 뜻은, “메시아가 이미 와 있으니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하면 안 된다.”입니다.
당시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아직 오시지 않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 즉 언젠가 오실
메시아를 잘 맞아들이기 위해서 참회하는 단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예수님이 이미 세상에 와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면,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단식할 필요가 없다.”가 아니라, “단식하면 안 된다.”입니다.>
그런 단식을 하는 것은, 이미 오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안 믿거나 믿기를 거부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증언했는데도,
그의 제자들은 왜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했을까?”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데, 아마도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이 메시아일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기대감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흘려들었거나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예수님을 메시아로 안 믿었기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유대인들은 지금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말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이 말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날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을 보면, 사도들이 예수님의 수난 때에
단식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 그들이 바로 음식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루카 24,41-42).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너무나도 큰 충격과 슬픔에 빠져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것이고,
잠도 못 잤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또 그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금육과 단식을 합니다.
2)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말은 우리가 죄를 짓고
예수님을 떠나 있는 때를 가리키는 말로도 해석됩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신랑을 빼앗길 날’은 ‘신랑을 잃는 날’이 됩니다.
죄를 지었다가 회개하고 다시 예수님에게로 돌아갈 때,
우리는 회개와 보속의 의미로 단식을 하게 됩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1-22).”
이 말씀은 “오래된 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라.” 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고쳐서 바로잡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래된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고,
또 새로운 것이라고 해서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명들은 인간의 시간으로는 굉장히 오래된 것들이지만,
절대로 바꿀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7-18).”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율법’은 하느님의 계명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계명들을 잘 실천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여러 가지 복잡한 규정들과 실천 지침들을
만들어서 그것들을 지키는 일에 집착했고,
그러다가 하느님의 계명들과 계명들의 근본정신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잘못된 신앙생활을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6-8).”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9-13).”
버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바로 버리고,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끝까지 잘 지키는 것이 지혜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버려야 할 것은 지키고 지켜야 할 것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도 하고,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옛날의 바리사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에도 그런 모습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잘 지켜야 하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사는 것,
바로 그것이 지혜롭게, 또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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