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8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하시고
사람들을 향하여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하고 말씀하셨다
(마르3,1-6)
Jesus said to the man with the paralyzed hand,
"Stand here in the center." Then he asked them,
"What does the Law allow us to do on the Sabbath?
To do good or to do harm? To save life or to kill?"
But they were silent.
Then Jesus looked around at them
with anger and deep sadness
because they had closed their minds.
And he said to the man, "Stretch out your hand."
He stretched it out and his hand was heal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느냐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리나라 엄마들의 뇌를 분석하는 흥미로운 실험이 방송에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엄마들에게 특정 자극을 준 뒤에 뇌를 분석하는 연구였습니다.
우선 “우리 아이가 90점을 맞았어요.”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엄마들의 뇌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잠시 뒤, “우리 아이는 70점을 맞고, 옆집 아이는 50점을 맞았어요.”라고 했을 때의 뇌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90점보다 낮은 점수가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즐거움과 보상을 담당하는 쾌락 중추가 활성화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실험 결과를 두고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는 자기 개념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제삼자의 시선에 따라 기쁨과 즐거움이 결정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제삼자의 시선에 따라 기쁨과 즐거움이 결정된다는 사실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바라보지 못하고, 남과 비교하면서 남보다 더 나은 나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행복을 찾는 사람은 계속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면서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는 비교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거부의 삶을 삽니다. 마음은 더더욱 완고하게 변하면서 어떤 말과 행동도 좋게 바라볼 수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다가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보게 됩니다. 이 사람의 아픔을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보시지요. 손에 주어지는 고통은 둘째치고, 사람들의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통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벌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사회였기에 더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죄인이라고 단정 지어버렸기 때문에, 그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안식일 법을 어긴 예수님을 고발하면서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하는 마음만 강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것보다 남을 해치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 목숨을 구하는 것보다 죽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어쩌면 우리의 모습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자신의 속 좁은 판단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면서 주님의 자리를 없애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희망은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일어나 옳은 일을 하려 할 때, 고집스러운 희망이 시작된다. 새벽은 올 것이다. 기다리고 보고 일하라. 포기하지 말라(앤 라모트).
-조재형신부-
18살에 억울하게 32년 동안 감옥에서 지낸 ‘흑인청년 보젤라’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보젤라가 사는 동네에 할머니가 잔혹하게 죽었습니다. 경찰은 두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보젤라를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했습니다. 보젤라는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항변했지만 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되었고 그렇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나중에 할머니의 집에서 다른 사람의 지문이 나왔지만 그것도 보젤라를 감옥에서 나오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32년을 지낼 무렵 무죄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단체에서 보젤라를 위해서 변호사를 선임했고 재심 끝에 보젤라는 50세가 되는 해에 무죄를 선고받고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32년 동안 죄를 인정하면 감형해 주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한 번도 죄를 인정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보젤라에게 감옥에 있던 32년은 고통의 시간만은 아니었습니다. 보젤라는 감옥에서 열심히 공부했고 학사학위와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동료 죄수를 면회 왔던 여인을 알게 되어 감옥에서 결혼도 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보젤라는 언젠가 나올 줄은 알았지만 너무 긴 시간이었다고 감회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불의와 거짓이 보젤라를 감옥에 가둘 수는 있었지만 보젤라의 정신과 영혼까지 감옥에 가둘 수는 없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도 감옥에서 27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감옥이 만델라의 몸을 가둘 수는 있었지만 만델라의 정신과 영혼은 가둘 수 없었습니다. 만델라는 긴 감옥에서의 시간을 독서와 명상의 시간으로 보냈습니다. 대통령이 된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과 백인의 인종 갈등을 치유하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사형선고를 받았고, 오랜 시간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죽을 고비도 몇 차례 넘겼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감옥에서 많은 책을 읽었고, 언어를 공부했습니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표어로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은 ‘IMF'의 국가부도 위기를 국민들과 함께 잘 극복하였습니다. 불의한 정권이 김대중 대통령을 감옥에 가둘 수는 있었지만 그의 정신과 영혼은 가둘 수 없었습니다. 구약성서는 우리에게 요셉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억울하게 이집트로 팔려갔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무고하게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비록 몸은 감옥에 갇혔지만 요셉의 정신과 마음은 자유로웠습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정확하게 해몽하였고, 이집트의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긴 형제들을 용서하였고, 가족들이 가뭄을 피해서 이집트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자리에는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손은 멀쩡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오그라드는 것을 넘어 쪼그라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그라든 손으로 평생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사람의 아픔을 보듬어 주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한 예수님을 죽이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마음이 오그라들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절망하는 사람은 비록 몸은 넓은 세상에 있어도 그 정신과 영혼은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이웃의 성공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비록 몸은 넓은 세상에 있어도 그 정신과 영혼은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몸을 가두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영혼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을 두려워하여라.” 저 자신은 보젤라처럼, 넬슨 만델라 대통령처럼, 김대중 대통령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큰 어려움 없이 지금까지 넓은 세상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정신과 영혼은 때로 오그라들었고, 쪼그라들었던 적이 많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있었고, 허영과 교만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저의 정신과 영혼을 쪼그라들게 했습니다.
안식일은 규정과 율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안식일은 내가 있는 삶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있을 수 있습니다. 그곳이 삶의 자리입니다. 편하게 자유로운 세상에서 지낼 수 있습니다. 그곳이 삶의 자리입니다. 비록 몸은 삶의 자리에서 고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삶의 자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정신과 영혼은 어떤 삶의 자리에서도 지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있는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손을 뻗어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들의 오그라든 마음, 뒤틀린 영혼을 곧게 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우리는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몸과 마음이 극도로 경직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 교수 신부님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치르는 구술시험이 있었는데, 교수실 바깥에 대기하고 있노라면, 얼마나 긴장이 되던지 온몸이 경직되곤 했습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종합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다른 검사들을 그럭저럭 견딜만한데, 엄청난 양의 혈액을 채취하기 직전이나, 대장내시경 직전에는 경직되는 것을 넘어 사시나무 떨리듯 온몸이 떨리더군요.
몸이 경직되다 보면 마음도 경직됩니다. 마음이 완고해지다 보면 몸도 뻣뻣해집니다.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가 아니라 함께 가는 것 같습니다. 때로 몸이 경직되는 것보다 마음이 완고해지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가끔 마음이 꽁꽁 얼어붙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렸습니다. 어떻게든 한번 풀어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쌩쑈를 다해보지만, 끝끝내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한탄만 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 아마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겠지요. 예수님을 따라다니기는 다니는데,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추종하려고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여차하면 예수님을 고발하고 그분께 올가미를 씌우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 백만 배 천만 배 더 가련하고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손 오그라든 거야, 그러려니 하고 참고 살아가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오그라들 대로 오그라든 그들은 스스로 구원의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천국으로 향하는 문을 자기들 쪽에서 굳게 잠궈버렸습니다.
이런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크게 슬퍼하십니다. 노기까지 띠십니다. 그리고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향해 외치십니다.
“손을 뻗어라.”(마르코 복음 3장 5절)
“손을 뻗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둘러서 있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요, 동시에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해 건네신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오그라든 마음, 뒤틀린 영혼, 비비 꼬인 정신을 곧게 펴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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