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9일 연중 제2주간 목요일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마르코 3,7-12)
Even the people who had evil spirits,
whenever they saw him, would fall down
before him and cry out,
"You are the Son of G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라고 한다(제1독서).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지른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극장에 간 지가 거의 8~9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영화 상영 전에 먼저 나왔던 영상이 떠올려집니다. 대한 뉴스? 아닙니다. 광고? 이것도 역시 아닙니다. 그 영상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바로 ‘화재 시 대피요령’입니다. 현재 있는 곳이 어디인지, 이곳의 비상구는 어디에 있는지, 만약 불이 난다면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줍니다.
8~9년 전, 그래도 영화를 종종 봤을 때 계속 나왔던 ‘화재 시 대피요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이 대피요령 영상을 주의 깊게 보지 않았습니다. 영화 시작 전이라고 생각하면서, 옆에 앉은 사람들과 잡담하는 데 더 집중했었습니다. 하긴 극장에 온 것은 ‘화재 시 대피요령’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러온 것이니까요. 그러나 종종 안전사고로 인해서 인명 피해를 보는 것을 보면서, 이러한 ‘화재 시 대피요령’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하지요.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은 사람만이 후회를 줄이면서 기쁘게 지금을 살 수 있기에 중요합니다. 그래서 순간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향해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는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순간의 만족만을 찾으면서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팡질팡하면서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우리 모두 구원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 바로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방해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이 말이 거짓일까요? 아닙니다. 분명한 진리이고 정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귀 들린 사람의 말을 누가 믿을까요? 그들이 거짓 없는 진실을 말하고 있어도, 마귀 들린 사람이라고 판정을 내리는 순간에 그의 모든 말은 믿을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자신의 더러운 입을 통해 예수님께 대한 진실만을 내뱉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삶의 방향을 찾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나 오롯이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 수 있습니다.
건물주인이 깨진 유리창을 그대로 방치하면 이 건물이 무법천지로 변한다. 곧 깨진 유리창처럼 사소한 것들은 사실은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한다(마이클 레빈).
-조재형신부-
‘아름답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중국어로는 '미(美)'라고 합니다. 미는 양(羊)과 대(大)의 합성어입니다. ‘큰 양이 맛있다.’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라는 말에는 맛이라는 말이 어울리기도 합니다. 영어로는 ‘Beauty'라고 합니다. 영어의 아름다움은 그 어원이 사람의 이름에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여성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영어에서 아름다움은 여성의 외모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말의 ‘아름답다.’는 아름과 답다의 합성어입니다. 아름은 ‘나’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답다는 사물의 본질을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말의 아름답다는 자신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맛’이나 ‘멋’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기준은 ‘품격’입니다. 자신의 고유한 품격을 드러낼 때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난향천리 덕향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고유한 품격은 덕으로 드러납니다. 덕의 아름다움은 만리까지 전해지는 것입니다. 측은지심을 가진 사람, 수오지심을 가진 사람, 사양지심을 가진 사람, 시비지심을 가진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사제가 아름답다는 것은 그의 외모나 언변이 출중해서가 아닙니다. 사제의 아름다움은 그가 입은 제의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사제가 아름답다면 사제가 사제의 직분을 충실히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제의 아름다움은 복음을 전하는데서 시작됩니다. 병자를 고쳐주는데서 시작됩니다. 마귀를 쫓아내는데서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금도 없고, 은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야기합니다. 일어나십시오.”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는 아름다운 사제입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교회를 박해했지만 회개했던 바오로는 아름다운 사제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아름다운 사제들이 있습니다. 순교로 신앙을 증거했던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땀의 순교로 신앙을 증거했던 최양업 토마스 사제는 아름다운 사제입니다.
신자가 아름답다는 것은 그의 명예, 권력, 재물이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자의 아름다움은 신앙생활의 연륜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신자가 아름답다면 신자의 직분을 충실히 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보면 아름다운 신앙인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아름답습니다. 재산의 반을 나누어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빚진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했던 자캐오는 아름답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으로 데려갔던 사마리아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뜨거운 믿음을 보여주었던 백인대장은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르고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린 여인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꽃동네의 시작이 되었던 최귀동 할아버지는 아름다운 신앙인입니다. 한센인들의 치료해준 강대건 원장님은 아름다운 신앙인입니다. 요셉의원을 시작한 선우경식 원장님도 아름다운 신앙인입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화려한 건물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당신 자신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에서 부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름다움을 원하신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면 됩니다. 그런 아름다움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추구하셨던 원형 교회는 일종의 노상(路上) 교회, 광야 교회, 이동 교회였습니다!
-양승국신부-
공생활 절정기에 도달한 예수님과 제자단의 모습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장 서시면, 제자들이 그 뒤를 따랐고, 제자들 뒤로 셀 수도 없이 많은 구름 관중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와 운집해있었습니다.
꿀보다 더 달고 천연암반수보다 더 시원한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감동받은 군중은 박수를 치고, 그 자리에서 회개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의 은사를 지니고 계심을 알게 된 병자들이 몰려와 어떻게든 그분 옷자락에 손을 대려고 계속 밀려들었습니다. 밀려드는 사람들의 질서를 잡는 일은 제자들의 주된 임무가 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단이 보인 특별한 행동 방식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안주하거나 정착하지 않는 순례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결코 초대형 성전을 짓지 건립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성전 건립을 위한 모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머물 만큼 머물렀다고 여겨지면 지체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또 다른 고을에도 복음을 선포해야겠기에, 아무런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즉시 떠났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제자들이 추구했던 원형 교회는 일종의 노상(路上) 교회, 광야 교회, 이동 교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시고 어떻게 생각하실까 걱정입니다. 견고하고 안정된 기반을 마련한 교회, 편안하고 안락한 교회, 아무런 걱정이 없는 교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문 꽁꽁 닫아건 교회, 세상의 고통 앞에서도 절대로 꿈쩍하지 않는 교회...
예수님께서 건설하고자 하셨던 참된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진정한 교회는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의 모임입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그 순간까지 쉼 없이 걸어가는 교회, 성장하는 교회, 나아가는 교회입니다.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들은 이들이 온 유다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곳에서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그들이 치유를 받고자 몰려왔지만,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악령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마르 3,11)라고 외쳐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 3,12 참조)
사실 마르코복음 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 뿐만 아니라 치유 받은 이들과 제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며 당신의 신원을 장막으로 가리십니다.
왜 일까요?
당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높이 선포해야 함이 마땅할 터인데도, 오히려 당신의 신원을 꼭꼭 감추십니다.
심지어는 당신의 가르침마저도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2)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야훼 하느님께서도 파라오를 마음이 완고하게 하셨고,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는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10)라고도 하셨습니다.
대체 왜 이처럼 알리지 못하게 할까요?
그것은 ‘때’가 아닌 까닭이었습니다.
곧 당신의 참된 모습이 드러날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어, 아직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진실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곳은 엄밀한 의미에서 딱 한 군데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바로 ‘그때 그곳’에서 비로소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린 그 신원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때’ 입니다.
그때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관상할 때라야 신앙의 눈이 열리고 비로소 당신을 참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면서 그 비밀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곧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듯,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이 부서지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서야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미사 중에 그분의 찢어진 살과 피를 마시며,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님을 관상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마르 3,12)
주님!
저의 무지를 깨우쳐주소서.
당신의 참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열어주소서.
완고함의 장막을 부수고 진정한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당신의 신비를 따라 살며 당신 십자가에 저를 매달고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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