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마르6,1-6)
They said, “Where did this man get all this?
What kind of wisdom has been given him?
What mighty deeds are wrought by his hands!
Is he not the carpenter, the son of Mary,
and the brother of James and Joseph and Judas and Simon?
And are not his sisters here with us?”
And they took offense at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많은 이가 못마땅하게 여기자, 예언자는 제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아는 지인이 있는데, 이분의 차는 늘 상처투성입니다. 차 옆에도 또 뒤에도 어디에 긁힌 자국이 보이고, 어디에 부딪혔는지 찌그러져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차는 소모품이라서 잘만 굴러가면 그만이라는 말씀만 하십니다. 얼마 전에는 새 차를 뽑았다고 하는데, 또 얼마 못 가서 벽에 부딪혀서 또 큰 수리를 해야만 하셨습니다. 운전경력이 30년 넘었음에도 왜 이렇게 운전에 미숙할까요?
이에 대해 차량 전문가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운전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차를 사랑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차를 사랑한다면 함부로 운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그만큼 귀하게 여깁니다. 정말로 아끼는 물건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소중하게 다루고 혹시라도 상처가 날까봐 더 조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얼마나 그 사람을 귀하고 있었습니까? 혹시라도 상처를 입지 않을까 싶어서 귀하게 대하고 자기 말과 행동에 있어서도 조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내 배우자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또 내 자녀, 부모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친한 친구와 회사 동료에 대해서는 어떠했습니까?
귀하게 여겨야 사랑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내 뜻만을 내세우고, 상대방이 변화되기만을 바라는 마음은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아닙니다. ‘있음’ 자체로 귀하게 여길 수 있는 마음, 그때 사랑이라는 소중한 감정이 내 안에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영 좋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의 신분, 직업, 그리고 가족을 이야기하며 못마땅하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귀하게 여기지 않는 곳에 사랑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랑이 없으니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도 없었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예수님을 귀하게 여깁니까? 가장 가까운 나의 이웃도 귀하게 여기지 않으니, 주님도 귀하게 여기지 못하면서 매일 같이 ‘무엇을 달라.’, ‘남보다 더 잘 살게 해 달라.’, ‘편하게 살 수 있게 해 달라.’ 등의 요구만 하면서, 마치 주님을 나의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종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날그날이 일생을 통해서 가장 좋은 날이라는 것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라(에머슨).
-조재형신부-
뉴욕에는 국내선을 주로 운항하는 라과디아(LGA) 공항이 있습니다. 제가 있는 곳에서는 차량으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공항입니다. 공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상영하는 대표적인 뮤지컬의 홍보물을 볼 수 있습니다. “알라딘, 라이언 킹, 위처드, 팬텀오브 오페라”입니다. 직원들과 함께 보기도 했고, 서울에서 손님이 오면 보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후배 신부님과 ‘팬텀오브 오페라’를 보았습니다. 화려한 무대와 강열한 음악이 관객을 압도하는 뮤지컬입니다. 처음 본 것은 2006년 토론토였고, 그 다음은 2010년 서울에서 였습니다. 그리고 2023년 1월에 뉴욕에서 다시 보았습니다. 남자 주인공은 외모 때문에 뛰어난 실력이 있음에도 무시당하고, 외면당했던 에릭입니다. 여자 주인공은 에릭으로부터 노래를 배우는 크리스틴입니다. 뮤지컬 초반에 에릭과 크리스틴이 함께 부르는 노래는 ‘압권’입니다. 뮤지컬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는 크리스틴의 따뜻한 마음을 에릭이 받아들이면서 끝이 납니다.
이번 뮤지컬을 보면서 저 자신이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자 주인공 역은 주로 백인이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는 여자 주인공 크리스틴 역을 흑인 배우가 하였습니다. 노래도 연기도 무척 잘 하였는데 처음에 제가 받은 느낌은 능력보다는 배우의 피부색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연에 몰두 할 수 있었고, 주인공의 연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살고 있지만 불과 2세기 전만 해도 세상은 엄격한 신분과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였습니다. 능력과 재능으로 존중받는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먼저 신분과 계급을 타고 나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였습니다. 민주화된 사회에서도 여전히 이민자에 대한 차별이 있고, 종교에 대한 차별이 있고, 피부색에 대한 차별도 있습니다. 신앙은 직분과 직책은 존중하지만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소중한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일과 모래는 서울대교 부제, 사제 서품식이 있습니다. 멀리 있지만 부제와 새 사제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32년 사제생활을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저를 이끌어 주셨고, 교우 분들을 저를 이해해 주셨고,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성사를 정성껏 집전하지 못한 적도 많았습니다. 기도를 소홀히 한 적도 많았습니다.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제게 필요한 사람을 만난 적도 많았습니다. 몇 번 넘어졌지만 성모님의 전구하심과 부모님의 기도가 있어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하고 싶었고, 사제라면 당연히 해야 할 직무를 새 사제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제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의사는 환자의 아픈 곳을 정확히 진단해야 올바른 처방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시대의 징표는 사색, 독서, 경청을 통해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꾸준한 독서가 필요합니다. 사제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교회의 서적, 가르침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은 강론을 통해서 선포되기에 강론 준비를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셨고, 말씀이 하느님이 되셨습니다. 사제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여유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기도는 꾸준히 해야 합니다. 기도는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제는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사제는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셨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행동하는 사제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많은 기적을 보여주지 못하였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우 분들이 마음을 열어도 시대의 징표를 모르는 사제가 있다면,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사제가 있다면, 기도에 게으른 사제가 있다면, 행동하지 않는 사제가 있다면 복음의 꽃은 피기 어려울 것입니다. 새 자세들이 가는 새로운 임지에서 복음의 꽃이 활짝 피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서 성령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만나서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제와 교우가 만나서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꽃피고, 희망이 열매 맺으면 좋겠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도 또 다른 예수님께서는 이런저런 모습으로 변장하시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양승국신부-
성모님의 동정성과 관련해서 개신교 신자들이 자주 공격하는 소재로 활용되는 성경 구절이 있는데, 바로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르코 복음서의 내용입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겨 살고 있지 않는가?”(마르코 복음 6장 3절)
그렇다면 과연 성모님께서 예수님 이외에 또 다른 자녀들을 요셉과의 사이에서 출산하신 것인가요?
장로교와 일부 개신교 종파에서는 이 복음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수용합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요셉과의 사이에서 예수님 외에도 4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낳았다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동방 정교회는 해석이 좀 다릅니다. 요셉은 전처와 사별하고 마리아와 재혼했다. 여섯 명의 자녀들은 요셉이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무염시태, 평생 동정 교리를 굳게 믿고 선포하는 우리 가톨릭교회는 이 성경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해결합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이 부분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성경을 사랑했고, 성모님도 극진히 사랑했던 예로니모 성인의 해석을 따릅니다.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형제’라는 단어는 굉장히 폭넓게 사용되었다고 이해합니다. 형제! 하면 단순히 한배에서 태어난 친형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촌 형제, 오촌 형제, 팔촌 형제도 형제라고 칭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교회 공동체나 수도 공동체 안에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서로를 형제요 자매라고 칭하지 않습니까? 그런 언어 관습 안에 해석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마을 사람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지혜와 경륜이 묻어나는 말씀을 당당하게 선포하시자, 다들 긴가민가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가깝다는 이유 하나로 자신들의 눈앞에 등장하신 메시아 하느님을 몰라보고 인정하지 않는 중대한 과오를 범한 것입니다.
오늘도 또 다른 예수님께서는 이런저런 모습으로 변장하시고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 눈앞을 스쳐 지나가십니다.
우리의 둔감함과 완고함, 불신앙과 폐쇄성으로 인해 우리에게 찾아오신 메시아를 몰라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나와 고향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워했습니다.’(마르 6,2)
그러나 받아들이지는 않고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르 6,3)
그런데 그들은 왜 예수님을 놀라워하면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긴 것일까?
사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그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 6,2) 하고,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사실은 자신들의 ‘무지’, 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동시에 자신들이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앎’을 내려놓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우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마르 6,3)
이처럼 그들은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 곧 자신들의 고정관념, 선입관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곧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생각이 바로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안다고 여기는 생각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1사무 15,23)
그렇습니다.
잘못된 믿음, 곧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을 믿게 되면, 참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금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의 표현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줍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안 계십니다.”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는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으로부터 벗어나고, 동시에 ‘자신의 무지’에 대한 어리석음을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고, 완고함은 불신의 씨라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르 6,4)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못한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존경을 겸손의 표지로, 믿음을 응답의 표지로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 아버지께 받았습니다」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악마와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심으로써 정신적, 육체적 죽음에서 구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당신의 고향 나자렛에서는 무시를 당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신분의 예수님이 자신들보다 월등한 능력과 지혜를 지니게 된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편견과 시기, 질투심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듯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나자렛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으로서 훌륭한 가문과 번듯한 학벌을 갖추고 등장하셨다면 그렇게 반응했을까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법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마르6,2)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물론 주님의 능력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왔습니다.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지혜도 역시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실행함으로써 그 능력을 더 얻게 됩니다. 믿음으로 실천한 사람은 그것을 압니다.
집회서 1장 1절 이하를 보면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그분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나누어 주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 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지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사리 판단력입니다. 또한 지혜란 인생의 올바른 방향 감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올바른 방향을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십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생활화합니다. 그렇게 되면 균형과 조화를 통해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배움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놀라운 지혜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소리가 나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경제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균형과 조화는 올바른 사리 판단력과 방향 감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정성 된 노력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전통과 나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내 생각의 틀을 넘어서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새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아는 사람을 유식한 사람, 지식인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문이나 지성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며 슬기롭게 사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지식인은 넘쳐 나고 지혜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하느님의 지혜를 담은 사람들에 의해서 계획되고 해결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하였을 때 서슴없이 “하느님께 받았다.” 하고 고백할 수 있다면 지혜를 넘어 영성적인 사람입니다. 영적인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자렛의 목수』
-송영진신부-
2월 1일의 복음 말씀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사람이신 예수님’만 보지 말고,
그 예수님이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라는 것을 믿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목표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라는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의 복음’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1코린 1,23).”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8-29).”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이 ‘시골의 가난한 목수’ 라는 점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그런 식으로는 세상에 오시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들 같은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신앙인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로 믿은 이유는 단순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았기 때문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믿음은 어떤 이론을 공부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
수행이나 수련을 통해서 얻은 깨달음도 아니고,
생생한 체험을 통해서 갖게 된 확신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처음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몰랐을 때에는
‘높은 자리’를 원하기도 했지만(마르 10,37), 즉 세속에서의 출세와
성공 같은 것을 바라기도 했지만, 나중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완전히 알게 되고 믿게 된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갔고, 영적인 구원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1-3).”
예수님께서 나자렛으로 가신 것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단순히 고향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복음 선포를 하면서 여러 고을을 다니신 예수님에게는,
나자렛은 ‘여러 고을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입니다.
<그곳이 예수님의 고향이라는 점에 너무 특별한 의미를 둘
필요가 없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한 말은,
예루살렘 사람들도 했던 말입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이 말은 ‘나자렛 예수’에게는 메시아다운 ‘신비감’이 없다는 뜻입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요한 7,41-42)”
예수님의 소문이 널리 퍼졌을 때,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애를 썼던 것 같은데, 그들이 알아낸 것은
“예수는 갈릴래아 나자렛 사람이며 가난한 목수” 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이나 직업 같은 것은
상관하지 않고 믿었는데,
안 믿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못 믿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한 말에서,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태어난 것만으로는 베들레헴 출신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잘 알기 때문에 못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요한 7,28).”
출신과 직업을 아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곧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알고 싶다면,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나자렛의 목수 아들이 아니라, 로마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셨다면 사람들이 좀 더 쉽게 믿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알 수 없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더욱 소외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보잘것없는 시골 마을의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나신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없는 것을 선택하셨다.”
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바로 그 뜻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이니,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헛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 종교가, 또는 성직자들이
세속의 특권층처럼 변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것은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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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29일 연중 제4주일 (0) | 2023.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