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4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
(마르 6,30-34)
His heart was moved with pity for them,
for they were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and he began to teach them many thing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말라며, 이것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책을 읽다가 친구와 전화하는 이런 대화 내용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보세요?”, “응, 너구나. 요즘 어떻게 지내니?”
“좋아, 넌 어때?”, “사실 엉망진창이야.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글쎄 암이라는 거야.”
“그래? 뭐 새로운 소식은 없고?”
설마 이렇게 대화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현대인에게 이런 모습을 어렵지 않게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즉, 남의 말은 전혀 듣지 않으면서 자기 말만 하는 사람입니다. 예전에 어린 학생들과 노래방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이 학생들은 제게 이렇게 말하면서 마이크를 넘겼습니다.
“신부님이 먼저 한 곡 불러주세요.”
노래를 선곡해서 부르는 데, 아무도 제 노래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모두 자기 노래를 선곡하느라 바빴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들어주지 않는 노래를 왜 부르고 있는가 싶어서 정지 버튼을 누르고 마이크를 넘겨주었습니다. 그 뒤 노래를 부르기보다 열심히 학생들의 노래를 들어주었고 열심히 손뼉을 쳐주었습니다.
저의 경우는 남이 노래를 들어주지 않으면 굳이 부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남이 듣든 말든 상관없이 자기만 노래 부르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도 그랬던 것일까요? 들어주지 않는 말의 홍수 속에서 외로워하는 사람이 늘어날 뿐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내가 한 말만 기억나고, 남이 했던 말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나 역시도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인간관계의 시작은 내가 말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남의 말을 들어주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와의 관계를 더 좋게 하시려고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대신 우리의 말을, 어떤 말이든 상관없이 모두 들어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곁에는 늘 많은 사람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요구사항의 말을 가지고 있었지요. 육체적인 아픔을 해결해달라는 말, 마귀를 쫓아 달라는 말, 영적 부족을 채워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 그 밖의 많은 청원의 말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가엾은 마음, 바로 사랑하는 마음에 그들의 모든 말들을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이 모범을 따라, 우리 역시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말만 주저리주저리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말을 잘 경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우리의 사랑 관계처럼, 나의 이웃과도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미래가 있다는 말은 영원하다는 의미로, 황금기가 올 거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바로 오늘을 ‘사랑’하겠다는 허락, 자유, 인내를 뜻합니다(테리 허쉬).
-조재형신부-
엠이 부부들과 멕시코 과달루페 성지엘 다녀왔습니다. 우리를 안내하는 형제님이 깜짝 놀라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성지순례 안내를 오래 했지만 이렇게 형제님들이 많은 순례단은 처음 봅니다.” 그동안 순례를 오면 대부분이 자매님들이었다고 합니다. 40명이 순례를 왔는데 남자는 신부님 포함 2명인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순례는 자매님보다 형제님이 더 많은 유일한 순례라고 합니다. 10부부에 사제인 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쿠르즈나 골프 모임에는 형제님들이 많은 편인데 성지순례에는 형제님들이 적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성지순례에 형제님들이 적은 이유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경제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맞벌이 부부가 많기에 형제님들이 기꺼이 자매님을 위해서 성지순례의 은총을 양보하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우선순위의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자매님들은 성지순례의 기쁨을 잘 알기에 기꺼이 시간을 내고, 기도합니다. 형제님들에게 우선순위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운동과 취미활동일 수도 있습니다. 이번 순례를 함께 하면서 형제님들이 성지순례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결단을 많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형제님들의 우선순위에 성지순례가 맨 위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성지순례의 은총을 양보하지 않고, 우선순위에 성지순례를 먼저 놓았던 형제님들과 함께 했던 성지순례였습니다.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성지순례를 하는 모습도 무척이나 아름다웠습니다. 성지순례 첫날 미사를 드리기 위해서 성당엘 갔는데 그 성당에서 혼배미사가 있었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사 참례에 앞서 부부들은 혼배미사를 드린 신랑과 신부에게 축복을 주었습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부부가 축복을 주었기에 신랑과 신부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리라 생각합니다. 낯선 곳에서 혼배미사를 볼 수 있었던 부부들도 혼인의 첫날을 생각하며 부부의 사랑을 새삼 확인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22년 전에 서품 10주년 기념으로 동창신부님들과 과달루페 성지순례를 했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니 정말 젊고 생기가 넘쳤습니다. 힘과 열정은 있었지만 성지순례의 의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동창들과 함께 있다는 즐거움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성지순례가 우선순위가 아니라 성지순례로 포장된 동창모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22년 시간이 흘러 엠이 부부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니 피정을 겸한 순례가 되었습니다.
1521년 스페인은 신대륙으로 왔습니다. 원주민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원주민들은 고유의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총과 대포로 그들의 땅을 차지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총과 대포로 그들의 마음을 얻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때 과달루페의 성모님은 원주민 후안 디에고에게 발현하였습니다. 성모님은 후안 디에고에게 성모님이 발현한 곳에 성당을 세우라는 말을 주교님에게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후안 디에고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주교님에게 전하였지만 주교님은 배우지 못한 원주민의 이야기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성모님의 메시지가 맞는다면 ‘증표’를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후안 디에고는 성모님께 주교님의 이야기를 전하였고, 성모님은 장미꽃을 주교님에게 전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12월의 장미는 있을 수 없지만 후안 디에고는 가지고 있던 틸마에 장미를 담아 주교님께 갖다 드렸습니다. 주교님께 장미를 드리는 순간 틸마에 성모님의 성화가 새겨지는 ‘표징’이 일어났습니다. 주교님께서 요구하는 증표를 성모님께서는 성화라는 표징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입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에는 현대과학의 힘으로는 규명하기 힘든 표징들이 있다고 합니다. 먼저 틸마는 선인장으로 만들었는데 길어도 20년이면 삭아서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곧 500년이 되는데 아직도 틸마는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습니다. 저도 순례 중에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를 보았습니다. 틸마에 새겨진 색은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도료가 아니라고 합니다. 나사의 과학자들이 광학 현미경으로 2000배 이상 확대해서 성모님의 눈을 보았더니 그 눈에 사람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가 현대의 과학으로 설명하기 힘든 표징이 있는 것도 신앙의 징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모님의 뜻을 충실히 따랐던 후안 디에고의 뜨거운 신앙입니다. 의심을 버리고 후안 디에고의 말을 믿고 따른 주교님의 신앙입니다. 그 신앙이 열매를 맺어서 800만 명이 넘는 원주민들이 자신들이 가졌던 토착 신앙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총과 대포로는 열수 없었던 마음을 과달루페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이 열어 주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과달루페 성모 성지를 4번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보호자로 과달루페 성모님을 선포하였습니다. 멕시코 인들에게 일생에 한번 쯤 과달루페 성모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진정한 멕시코 인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22년 전 성지순례에도 이런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면 저의 신앙은 더욱 뜨거워졌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늦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다시금 과달루페 성모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쉬셨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복음 선포하는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충전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더욱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를 따로 부르셔서 엠이부부들과 함께 과달루페 성모님을 만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저도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으니 제게 주어진 일을 더욱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기쁨과 희망, 열정과 첫마음을 가득 채워줄 수 있는 에너지 충전소!
-양승국시눕-
예수님과 제자단이 펼쳐나갔던 사도 공동체의 모습은 묵상할 때 마다 감동적입니다.. 신명나게 전개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 선포 활동은 세상 사람들을 크게 매료시켰습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군중들로 인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쉴 틈도 없었으며,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제자들의 피로는 누적되었고, 수면부족으로 인해 건강까지 염려될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걱정되었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코 복음 6장 31절)
밀물처럼 밀려드는 고객들, 양떼들로 인해 힘겨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기중천, 의기양양했던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의 모습, 그런 모습과는 너무 비교되는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청소년과 청년들, 급격한 고령화 현상, 동력을 상실한 공동체의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하는 안타까움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가 그토록 군중들을 매료시킨 비결이 무엇인지 유심히 관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도 그들의 운영 노하우를 배워야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우리 교회로 끌어들일 수 있는 매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돈보스코는 참으로 탁월했습니다. 돈보스코 시대 당시 역시 교회는 급격히 쇠락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대 변혁의 시대에 사람들은 교회로 부터 매력을 잃고 떠나갔습니다. 그런 어려운 시대 주님께서는 돈보스코를 선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돈보스코의 절정기 시절, 발길 닿는 곳마다 수많은 군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많은 신자들, 청소년들, 특히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이 그의 낡은 수단 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가 지니고 있었던 매력은 탁월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짙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았습니다. 그와 함께 생활했던 수많은 청소년들은 그와 함께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았습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기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다시 한번 일어서라고, 다시 한번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라고, 그래서 철저하게도 쇄신되고 거듭나라고 주신 은총의 기회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조금 더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교회를 외면하고 있는 이들, 교회로부터 매력과 흥미를 잃어버린 이들이 눈을 번쩍 뜨고 되돌아올 수 있도록, 더 많은 행복꺼리들 찾아봐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파에 시달려 지치고 힘겨워하는 양떼들에게 기쁨과 희망, 열정과 첫마음을 가득 채워줄 수 있는 에너지 충전소가 되도록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향한 ‘배려의 마음’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향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았던 사도들이 돌아오자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 6,31)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건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세기 2,3)는 창세기의 울림을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쉼”은 하느님께서 창조된 모든 것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음’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쉬게 하고, 그들이 한 모든 일에 복을 내리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쉼’ 안에서 당신이 바로 ‘주님’임을 알게 하시는 일입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
(시편 46,11)
또한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외딴 곳으로 가서”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 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 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6-22 참조)는 호세아서의 울림을 듣습니다.
그러니 “외딴 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입니다.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마르 6,34)
이는 민수기(27,15-17)의 표현을 연상시켜줍니다.
거기서 모세는 하느님 백성이 “목자 없는 양처럼” 되지 않도록 한 사람을 세워달라고 간청합니다(1열왕 22,17).
목자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양떼를 위한 음식을 마련하는 것이고, 모세는 광야에서 만나를 공급하고(탈출 16장), 엘리사는 백 명을 먹이기 위해 빵의 양을 늘렸듯이(2열왕 4,42-44), 예수님께서도 이제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먹을 음식을 마련하기에 앞서, 먼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6,34)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말랐던 것은 바로 ‘진리’인 생명의 말씀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에로 인도하는 이가 바로 “참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어야 합니다.
오늘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진리’인 말씀의 양식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그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서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오, 주님!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
-반영억신부-
사람은 때때로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과 환경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맘먹고 쉬려고 하면 꼭 일이 생기고 맙니다. 그러니 때로는 지금 자리를 떠나는 것이 필요하고,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여 쉬는 것보다 일상 안에서 쉬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하고 있는 일을 즐기는 법을 터득해야 오래도록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20세기 위대한 별이었던 슈바이처는 “현대인이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밤하늘을 쳐다보며 우주를 생각한다면 현대 문명이 이렇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외딴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그리고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니(창세2,2-3) 휴식은 재충전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에 이미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모든 고을 사람들이 육로를 통해 이동하였다는 것은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감당하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을에서 나왔다는 것은 자기들의 삶의 현장을 떠났다는 것을 말해주는 데 그만큼 예수님께는 인기가 좋았습니다. 스스로 내 세워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을 둘러쌌습니다. 바깥에 있으려 해도 사람들이 그분을 중심에 모셨습니다. 그분에게 매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기를 잡아 일시적으로 먹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지내시는 분이 많은 데 사실은 이제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또 부족한 것은 다시 배우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셔야 할 것도 많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너무 고달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이 크시기에 모든 수고로움을 수고로움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백성과 함께할 수 있음이 오히려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외딴곳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습니다(루가6,21). 이른 새벽, 동트기 전 외딴곳에서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셨던 주님을 바라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휴식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내 일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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