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2월 9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3. 2. 9. 08:10

2023년 2월 9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옳은 말이다.

어서 돌아가 보아라.

마귀는 이미 네 딸에게서 떠나갔다.”

(마르7,24-30)

 

“Lord, even the dogs under the table

eat the children’s scraps.”

Then he said to her,

“For saying this,

you may go.

The demon has gone out of your daught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며 자신을 낮춘 이교도 여인의 청을 들어주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다음의 상식 퀴즈를 맞혀보세요.

1) 영국은 섬나라인가?

2) 한국 전쟁이 일어난 연도는?

3) 태양계의 행성을 순서대로 말해보라.

요즘 유행하는 상식 퀴즈라고 합니다. 대학생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첫 번째 문제의 정답률은 30%, 두 번째 문제의 정답률은 23%, 마지막 문제의 정답률은 14%였습니다.

‘아니, 이 정도도 몰라? 지성인이라고 하는 대학생의 상식 수준이 이것밖에 안 돼?’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굳이 알 필요가 뭐 있어?’라고 말입니다. 상식이 부족하다고 또 무식하다고 말을 들을 수는 있겠지만, 사는 데 지장이 없다면 굳이 알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요즘 아이돌 가수를 잘 모릅니다. BTS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지만, 솔직히 그들의 이름도 모르고 몇 명으로 구성된 그룹인지도 모릅니다. 젊은 세대가 볼 때, 너무나도 무식한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다지 좋아하는 취향도 아니고, 관심도 없기 때문입니다. 젊은 세대와 공통 주제로 소통하기는 힘들겠지만, 오십 넘어 그들과 굳이 이런 내용으로 소통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지식의 전달이 아닌, 지혜의 전달이기 때문입니다.

상식 부족이라는 이유로 남을 평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보다 그 모습도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가장 중요한 것을 전달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갑니다. 그런데 이 부인은 이교도였습니다. 선민의식이 강한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교도는 구원으로부터 제외된 사람들이라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셨던 것은 당시 유다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지요.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왜 차별의 말씀을 하셨을까요? 정말로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옳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드러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굳은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사람도 절대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상식을 내세워 자기 생각만 옳다고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추는 것.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힘들이지 않고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 없다(데모필루스).

​내가 죽었다고 믿어야만 악에서 해방되는 이유

-전삼용신부-

https://youtu.be/yaPwdk7VT7E

 

2017년 6월 청년 창업 지원과 전통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지자체에서 내놓은 방법은 청년들이 음식을 판매하는 청년몰입니다. 여기는 창업 비용이 거의 들지 않고 임대료도 다른 업소들에 비해서 10분의 1 정도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실패할 일은 없어 보입니다. 게다가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통해 백종원 씨가 여러 가지 솔루션을 주었고 이 방송으로 커다란 홍보 효과를 낳았습니다.

 

지난 2018년 SBS ‘골목식당’에 나온 뒤 손님들이 줄을 이었던 인천 신포국제시장 청년몰. 지금은 문을 연 점포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대전 청년구장의 청년몰 역시 2021년 모두 폐점했습니다. 물론 코로나 여파도 없지 않아 있겠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로 모든 상인이 망한 것은 아닌데도 왜 유달리 청년몰은 전국적으로 다 문을 닫았을까요?

 

백종원 씨는 2019년 청년 구단을 기습 방문하여 청년 구단 대표들을 모아 놓고 정확히는 아니지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장사가 장난입니까? 이렇게 장사하면 다 망해요. 왜 가게 세가 이렇게 낮은데 여러분들은 다른 곳과 같은 가격대를 형성합니까? 내가 분명히 가격 내리라고 했는데. 그리고 왜 다른 업소에서 파는 것을 나도 팝니까? 서로 서로 잘 돼야 하지 왜 나만 잘되려고 합니까? 여러분들은 이것을 통해 장사 경험을 쌓는 학교, 다양한 손님을 접하는 기회가 되는 걸로 족해요. 그런데 서로 자기가 더 매출을 올리려고 하고 있잖아요. 내가 2~3년 안에 망하지 않으면 손에 장을 짖어요.”

코로나의 영향이라고 말하는 대표들에게 네티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망하는 집 이유 있고, 흥하는 집 이유 있다. 15만 원 임대료 내면서 150만 원 임대료내는 프랜차이즈 가게처럼 비싼 가격으로 장사하다니. 팔아주러 갔다가 헛웃음 나오고 오만 정 다 떨어졌다.”

 

누가 망하고 싶을까요? 하지만 사람이 함께 살아가다 보면 그래도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살아남으려면 천상 남을 이겨야 합니다. 그러니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은 비단 작은 청년몰의 경우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한 나라가 그러하고, 전 세계가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악이란 것이 외부의 영향이 아닌 자기 자신들 안에서 나온다고 하십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23)

 

예수님은 이러한 나쁜 생각들과 행동들이 나쁜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사람의 마음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없는 세대가 오면 세상이 멸망하게 될 이유입니다. 우리라도 나쁜 생각이 아닌 좋은 생각이 나오게 해야 합니다. 그들은 백종원 대표의 말을 들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말을 물리쳤고 결과는 함께 망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김여환 의사의 『천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에 ‘임종 전 죽음을 예고하는 다섯 가지 증상’이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어떤 증상들이 있을까요?

1. 먹고 마시고 싶은 생각이 사라집니다. 삶의 의욕을 더는 붙잡고 있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잠자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3~4일을 내리 자다 문득 일어나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다시 긴 잠에 빠지기도 합니다.

3. 몸이 편안해집니다. 고통이 덜해지며 구토감이 없어지고 더는 기침도 나오지 않습니다.

4.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합니다. 이렇게 말하신 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오후에 내가 시내에 마지막으로 볼일이 있거든. 외출을 허락해줬으면 좋겠어.”

5. 갑자기 기운을 차려 가족들에게 추억 거리를 얘기하거나 덕담을 건네기도 합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이러한 증상들이 나타나면 사실 가족들보다 본인이 더 자신이 마지막 때임을 느낍니다. 곧 죽는다고 느끼면 이렇게 육체적인 욕망도 사라지고 집착도 사라집니다. 그러니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러다 보니 몸도 편안해지고 나를 위해서가 아닌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해지는 이유는 살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몇 번이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백 대표의 말은 함께 살기 위해 자기를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백 대표의 말을 받아들일 겸손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 오늘 복음의 여인은 예수님께서 그녀를 거의 죽이다시피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마르 7,29)라고 하십니다. 겸손한 이에게는 마귀가 발을 붙일 수 없습니다. 겸손이란 죽은 상태입니다. 겸손은 말 그대로 땅을 상징합니다. 땅은 모든 죽은 생명들의 마지막 상태입니다.

 

‘삼사라’란 영화에서 자기 육체의 욕망을 없애고자 몇 년 동안의 고행을 했지만, 결국 사라지지 않아 파계한 스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살다 보니 다시 도망쳐 스님으로 살고 싶어집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이미 죽은 사람처럼 살 수 있습니다.

호스피스에서 돌아가시기 얼마 안 남으신 분들은 이미 자신이 죽었다고 믿습니다. 믿음의 효과는 마치 플라시보 효과처럼 내가 그렇다고 믿어버리면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었다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죽었습니다. 믿으면 효과가 나타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다고 합니다. 믿으면 효과가 생겨납니다.

 

죽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기 힘으로 죽으려고 하는 것이고 그 말 안에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믿음이 존재합니다. 그러면 절대 못 죽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끌어안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도 죽은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분은 정말 우리 인성을 끌어안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이미 죽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 안에서 악이 솟아나지 않습니다. 임종 직전의 환자처럼 좋은 것만이 나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라는 믿음의 효과가 이것입니다.

​가정의 십자가를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길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_8RSrU89RGU

 

​-조재형신부-

일을 잘 하는 사람은 머리가 좋아서 인 경우가 있습니다. 성실해서 인 경우도 있습니다. 운이 좋아서 인 경우도 있겠습니다. 제가 볼 때는 ‘우선순위’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북한산에 가기로 했으면 북한산에 대한 자료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설악산에 대한 자료를 본다면 시간을 많이 내서 일을 했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이 오면 당황하게 됩니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 명예, 권력’이 우선순위입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영광, 영원한 생명, 이웃사랑’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들의 모범이 되신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성인으로 품에 올린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능력, 재능, 업적이 뛰어나서 신앙의 모범이 되고, 성인품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모두들 하느님의 영광, 영원한 생명, 이웃사랑을 삶의 우선순위에 놓았던 분들입니다.

 

요즘 우리는 창세기의 ‘천지창조’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신 과정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빛을 만드시고, 해와 달 그리고 별을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바다와 육지를 만드시고, 그 위에 많은 생명을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명을 다스리기 위해서 하느님을 닮은 ‘모상’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보호하고, 돌볼 수 있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닮은 모상인 사람에게는 ‘짝’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생명이 아닌 하느님을 닮은 모상인 사람에게서 ‘짝’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짝을 보고 사람은 이렇게 감탄하였습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하느님을 닮은 모상인 남자와 여자는 이렇게 부부가 되었고,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하느님의 우선순위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천사보다 못하게 만드셨지만 존귀함을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전에 감동적인 신문 기사를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한 여인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6년 동안이나 간호해서 의식을 되살려낸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의사들도 회복할 수 없다고 포기한 남편을 기적적으로 소생시켰습니다. 그녀는 항상 "그는 환자가 아니다. 내 남편이다."라고 스스로 다짐하였으며 하루에도 수십 차례 의식 없는 남편과 대화를 나눴다고 합니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남편을 아기처럼 껴안고 뽀뽀도 하였으며 남편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고 했습니다. 도저히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이 그 남편은 6년 만에 부활하여 첫마디를 "아멘"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남편들을, 아내들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모든 부부는 분명히 결혼식에서 '비가 오나 바람 부나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병들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항상 사랑할 것을 맹세'한 신랑 신부였습니다. 그 자매님에게 우선순위는 ‘남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남편은 이 세상에서 ‘부활’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 아니었던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솔로몬처럼 지혜가 크지도 않았습니다. 저처럼 사제생활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 여인에게 우선순위는 병중에 있는 ‘딸’이었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겸손함을 보시고, 그 믿음을 보시고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능력, 지혜, 업적, 지위를 모두 모아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겸손과 모든 것을 내맡기는 믿음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 삶의 우선순위가 하느님의 영광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이웃사랑으로 드러나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심연의 밑바닥에 있다 할지라도 끝까지 희망해야 하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악령은 아닐지라도 이런저런 병고나 상처, 심각한 문제 성향, 사이비 종교 등에 빠진 자녀들 때문에 항상 울고 다니시는 부모님들을 자주 접합니다. 그분들이 겪고 계시는 몸과 마음의 고통은 필설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녀, 선물이요 보배, 분신이요 삶의 의미요 전부인 자녀가 그리도 고통을 겪고 있으니 부모의 마음은 찢어질 정도입니다. 그 어떤 위로의 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함께 울어주는 수밖에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방인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악령에 들려 비참한 죽음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태도를 보면 놀랄 정도입니다. 딸을 위해 불 속이라도 뛰어들 태세입니다. 딸을 위해서라면 대신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딸만 치유된다면 자신은 개가 되어도 좋다는 심정입니다. 어머니의 모습에 깊이 감동 받으신 예수님께서 기꺼이 치유에 응하십니다.

 

그녀는 비록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지니고 계셨던 신성(神聖)과 전지전능하심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분을 향한 강한 신뢰심과 굳은 신앙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태도로 딸의 치유를 청했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코 복음 7장 28절)

 

거듭된 예수님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간절하다 못해 집요하게 매달린 결과, 그녀는 즉각적인 딸의 치유라는 큰 은총과 축복을 선물로 받습니다.

 

더이상 비참할 수 없었던 이방인 여인의 수직 상승은 오늘 우리에게 큰 교훈 하나를 선물로 주고 있습니다. 잘 나갈 때일수록 더욱 겸손해져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심연의 밑바닥에 있다 할지라도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지방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정결법’에 대한 시비와 논쟁이 있은 뒤에, 그곳을 떠나 티로라는 이방인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이방인 시리아페니키아의 한 어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이 이방인 어머니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자녀들을 배줄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고 박절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자녀를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어머니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매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냥 거절한 것이 아니라 ‘개’로 취급되는 지독한 모욕과 경멸감을 느끼게까지 합니다.

참으로 당혹스럽고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간청이 단순히 거절당한 것만이 아니라 멸시와 모욕을 당하고 배신감마저 들면, 말할 수 없는 큰 상처와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순간이 한편으로는 믿음이 흔들리고 좌절되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신뢰와 믿음을 깊은 곳으로 이끌어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어머니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마르 7,28)

박절한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간절하게 청하는 이 어머니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어옵니다.

이 어머니는 자신을 “개”로 취급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진정으로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개” 취급을 받는 이방인이지만, 그래서 메시아가 베푸는 구원과 생명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주님의 무한한 자비의 부스러기를 입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한층 더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를 간청합니다.

마치 백인대장이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태 8,8)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믿음으로 겸손하게 자비를 청합니다.

 

그것은 마땅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구원의 손길이 이방인에게도 번져갑니다.

사실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개’로 여기던 선민사상을 파괴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가 드러난 일이었습니다.

이는 가히 혁명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두고, 20세기를 빛낸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하느님의 진정한 뜻이 드러난 계시 사건”이라 말합니다.

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감히 하느님의 백성을 죄인과 의인으로 나눈 것에 대한 일침을 가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마르 7,27)

 

주님!

거절당하고 무시당했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때가, 부르심의 순간임을 알게 하소서!

그 순간이, 당신께서 저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임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에, 믿음과 사랑을 더 깊게 끌어당기심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의 자비를 믿고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아멘.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

-반영억신부-

‘가톨릭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시너지 리더십’이라는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강사 진형기교수는 “신자는 신부의 손님이다. 그리고 신부는 신자를 다스릴 수 없다. 다스리려 하면 실패한다.”라고 말씀하시며 신자들에게 대접받고 사는 성직자의 현실을 지적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말씀과 실행, 이론과 실제가 일치된 리더, 후계자와 인재 양성에 중심을 둔 리더, 서비스 마인드가 충만하신 리더, 팀웍을 중요시한 리더, 현실을 통찰하고 비전을 세우신 리더, 관계를 중시한 리더, 관용과 용서로 실패를 재기의 기회로 삼도록 격려하는 리더, 모든 사람을 소속감을 가지게 하는 리더, 고난을 극복하면서 자신을 성숙시키는 리더, 사람들의 경제 생활을 보살피신 리더, 소외된 자들을 정성껏 끝까지 돌보신 리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행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열매가 맺어지도록 하는 리더’로 소개하셨습니다. 그중에 몇을 닮았는가 생각하니 부끄러움만 큽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이교도 부인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7,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7,28). 하고 끈질긴 믿음으로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결국 마귀는 떠나갔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선적인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불신과 시기로 배척하고 있으므로, 믿음을 가진 이방인에게 구원의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의 혜택은 유다인 또는 이교도라는 외적인 관계보다 철저한 믿음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원칙만 고수하시는 완고한 분이 아니라 열려있는 분이십니다.

 

이교도 여인은 어떻게 보면 강아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시험이었습니다. 여인은 복음의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간절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놀라운 믿음을 보시고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마침내 여인의 딸에게서 더러운 영이 떠나갔습니다. 믿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외면하고 감추어 계신 분처럼 보일 때, 더 큰 신뢰로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5,6). 바리사이들의 경건과 신앙이 ‘표면적’ 믿음이었다면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이교도의 믿음은 ‘속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헛배가 부른 신앙인이 아니라 떨어뜨린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소외된 사람을 끝까지 돌보시는 리더’로서 다가오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인생여정 안에서 이러저러한 어려움들에 직면하게 됩니다. 어쩌면 좋은 일보다 어려운 일이 더 많은 듯합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난관들 안에서 주님께서는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함께하시어 기운을 북돋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앞에 있는 ‘험한 산을 치워주지는 않으시지만, 그 산을 넘을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자녀들, 강아지들』

-송영진신부-

2월 9일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떤 이교도 여자를

‘참 신앙의 길’로 인도해 주신 이야기입니다.

(여자의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신 일은 ‘부수적인 일’입니다.)

이 이야기를, ‘여자의 믿음’을 부각시키는 이야기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자는 믿음이 없는 상태로 왔고,

예수님을 만난 뒤에야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해석할 때

여자의 ‘우상숭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또 묵시록을 보면, “개들과 마술쟁이들,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거짓을 좋아하여 일삼는 자들은

밖에 남아 있어야 한다(묵시 22,15).” 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개들, 돼지들, 우상 숭배자들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우상 숭배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2월 9일의 복음 말씀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얻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스스로 우상 숭배를 버리면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믿는 대로 살면 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마르 7,24-26).”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제자들의 휴식을 위해서, 또는 제자들의 교육을

위해서 잠시 군중에게서 떨어져 있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앞의 6장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마르 6,31-33).”

지금 티로 지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애타게 예수님을 찾은 것은 여러 가지로 절박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일 텐데, 티로 지역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여자도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다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여자의 딸이 ‘더러운 영’이 들렸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마귀 들린 상태’가 아니라,

아마도 어떤 중병에 걸린 상태를 나타내는 말일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8).”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딸의 병을 고쳐 주신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티로 지역, 이교도,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라는 말은,

그 여자가 우상 숭배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인이 미신과 우상 숭배에 빠지는 것은 십계명을 위반하는

큰 죄를 짓는 일이지만, 하느님도 모르고 십계명도 모르는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에 속해 있는 것은

그냥 어둠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여자는 딸을 고치기 위해서 자기가 섬기는 우상에게

간절하게 빌었을 것이고, 다른 우상들도 찾아다녔을 텐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절망 상태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 여자가 들은 ‘소문’은 “예수님은 무슨 병이든지 고치시는 분이고,

무슨 마귀든지 쫓아내시는 분”이라는 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마르 7,27-30).”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려면

먼저 하느님만 믿는 자녀가 되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여자의 믿음을 시험하는 말씀이 아니라,

그를 믿음의 길로 인도해 주신 말씀입니다.>

신앙은 절대적인 것이고, 유일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여러 신들 가운데 한 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1코린 8,5-6ㄱ).”

여자의 대답은,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느님만 믿겠다고 서약한 말과 같습니다.

“지금부터 하느님만 믿겠습니다.

그러니 우선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

간절함이 계기가 되었지만, 어떻든 여자는 원하던 은총도 얻었고,

청하지 않았던 은총도 얻었습니다.

즉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 은총이 더 큰 은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