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2월 11일 연중 제5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3. 2. 11. 06:08

 

2023년 2월 11일 연중 제5주간 토요일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마르코 8,1-10)

 

“My heart is moved with pity for the crowd,

because they have been with me now for three days

and have nothing to ea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엾이 보시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축복하신 다음 나누어 주시어 사천 명을 먹이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여러분의 주변을 보면, 남을 잘 설득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남을 잘 설득할 수 있을까요? 말을 잘하기 때문일까요? 대부분 자신의 언어 능력이 부족해서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로 상대를 설득하는 사람은 진짜가 아닙니다. 아마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진짜로 설득을 잘하는 사람은 ‘내가 먼저 도움을 줄 수 있는 이가 누구일까?’ 를 늘 먼저 묻는 사람이었습니다.

대체로 ‘상대방이 내게 어떤 도움이 될까?’ 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이 먼저 도움 줄 것을 생각한다면, 이런 사람을 사람들이 좋아할까요? 싫어할까요?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편인 사람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라보기에, 그 사람 말에 설득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도움과 지지를 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자기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는다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내가 나만을 생각하면서 도움받기만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도움을 줄 수 있는 이가 누구일까?’를 자주 물으며 주변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습 역시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에 많은 이가 모여듭니다. 그 숫자가 자그마치 사천 명가량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 요구사항이 있었지요. 병을 고쳐달라, 마귀를 쫓아내 달라, 삶의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 하느님에 관한 말씀으로 희망을 갖게 해달라 등등…. 사실 빵의 기적을 베풀어달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흘 동안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굶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를 곧바로 알아채십니다. 사람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 사랑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 마음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 곁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설득되어서 그들은 예수님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으리라는 결심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마음은 생각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사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사랑의 마음은 이렇게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받을 사랑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또 입으로만 외치는 사랑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바라보고 직접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 안에서 주님께서는 함께하시고, 우리 안에서 커다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어떤 선택을 할지는, 자기 자신만이 안다. 그러니 내면의 소리를 따라가면 된다. 설령 눈앞에 있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 아닌 것 같아도 열심히 노력하며 현재를 살면, 누릴 것을 반드시 누리게 된다(위웨이).

​너 어디 있느냐?

-이기우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acEsx74VGP8

 

​-조재형신부-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의 대화는 신선하고, 달달합니다. 너무 달달하다 못해 닭살이 돋기도 합니다. 멀리 출장을 떠난 연인에게 “자기 어디에 있어!”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어떤 대답이 정답일까요? ‘응 난 늘 자기 마음에 있어’가 정답이 아닐까요? 연인은 사랑하는 사람이 출장을 어디로 간 것이 궁금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디에 있어도 사랑이 변치 않기를 바랄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마음에는 사랑하는 이가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가브리엘 너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그 정답은 “저는 뉴욕에 있습니다.”는 아닐 것 같습니다. 정답은 “저는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둘이나 셋이 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은 ‘성체성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체의 모습으로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셔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담아 너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아담아 너는 무슨 일을 하였느냐?”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질문에 아담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변명을 합니다. “제가 알몸이라서 숨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묻습니다. “네가 알몸인 것을 어찌 알았느냐?” 아담은 또 변명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짝으로 주신 이 여인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열매를 먹고 나니 제가 알몸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인에게도 묻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열매를 먹었느냐?” 여인도 변명을 하였습니다. “뱀이 저 열매를 먹으면 하느님과 같아진다고 해서 먹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변명을 하는 아담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그리고 땀을 흘려 노동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변명을 하는 여인에게도 책임을 묻습니다. 그리고 출산의 고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며칠 동안 먹지 못해서 굶주린 백성들을 측은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가진 것이 있느냐?”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보리떡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묻습니다. “몇 개나 있느냐?” 제자들은 대답합니다. “일곱 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중풍병자도 걷게 하셨습니다. 죽은 아이도 살리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무엇을 가졌는지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질문은 “너희가 가진 보리떡 일곱 개를 기꺼이 나눌 수 있느냐?”가 아닐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꺼이 자신들이 가졌던 보리 떡 일곱 개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보리떡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굶주린 백성 4000명이 충분히 먹고도 일곱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이 체험이 아주 강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이 충분히 먹고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고도 했습니다. 보리떡이 몇 개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몇 명이 충분히 먹었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몇 바구니가 남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눈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분열과 갈등을 키우는 것은 자신의 책임을 미루고, 남에게 전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아담이 책임을 하와에게 미루지 않았다면, 하와가 책임을 뱀에게 돌리지 않았다면 하느님께서는 용서해 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회개를 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용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같은 잘못을 반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눔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주는 인생의 나침반입니다. 나눔은 나뿐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내비게이션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비움의 삶, 나눔의 삶이셨습니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처럼 천국에서 빛을 내는 모든 성인 성녀들은 바로 ‘비움의 삶, 나눔의 삶’을 사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변명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나눔입니다. 변명에는 책임이 주어지지만 나눔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하느님 백성의 중심에 병자들이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오늘은 세계 병자의 날이자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오래전 루르드에 들렀을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성모님의 극진한 환대가 온몸으로 느껴졌습니다. 동시에 병들고 지친 제 육신과 영혼을 따뜻이 어루만져주시는 성모님의 손길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당시 루르드에는 전 세계에서 치유의 은혜를 구하러 온 수많은 환자들로 붐볐는데, 저 역시 환자의 한 사람으로 그들과 나란히 서서 간절히 치유를 청했습니다. 주님과 성모님께서는 절박하게 기도하는 저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치유에는 일련의 단계가 있더군요. 먼저 진지한 성찰과 처절한 회심, 그 후 선물처럼 다가오는 잔잔한 마음의 평화, 보물 같은 깨달음, 완전히 내려놓음, 그리고 보너스로 주어지는 육체의 치유.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병고로 사무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측은지심의 주님과 우리의 고통을 결코 지나치지 않으시는 성모님께서 세상의 모든 환자들을 가련히 여기시어 내적, 외적인 치유를 선물로 주시길 간절히 청합니다.

 

당신도 환자인 관계로, 더욱 환자들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올해 세계 병자의 날 담화문을 발표하셨는데, 우리 모두 귀담아 들어야 할 소중한 말씀입니다.

 

질병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고립되고 버려진 채로 질병을 겪는다면, 돌봄과 연민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질병은 비인간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혼란과 질병과 쇠약함을 체험하는 것은 인간 여정의 일부입니다. 이는 우리를 하느님 백성에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 관심의 한가운데로 데려갑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이시며 이 여정에서 당신 자녀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기를 바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버리는 문화에 저항할 수 있는, 참으로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가 되는 법을 그분께 배웁시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질병에 거의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이 듦을 인정조차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취약함에 겁먹고, 만연한 능률만능주의 문화는 취약함을 숨기라고 우리를 다그치며 인간의 약함이 설 자리를 남기지 않습니다.

 

온 교회가 참다운 ‘야전 병원’이 되려면, 질병 안에서도 착한 사마리아인의 복음적 모범을 잣대로 삼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특히 우리 시대의 역사적 상황 안에서 돌봄의 실천을 통하여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약하고 힘없는 이들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멈추어 서고 가까이 다가가며 치유하고 일으켜 주는 법을 아는 연민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아픈 이들의 고난은 마치 형제도 자매도 없다는 듯 자기 갈 길만 가는 사람들의 무관심을 깨고 들어가 그 발걸음을 늦추는 부르심입니다.

 

기능을 잘하는 것과 생산적인 이들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하느님 백성의 중심에 병자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이가 소중하고 아무도 버려지거나 소외되지 않는 인류의 표징으로서 병자들과 함께 나아갑니다.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 있느냐?”>

-이영근신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마르 8,2-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청하지도 않는데도 이미 먹이셨고, 미처 바라지도 않는데도 이미 용서하셨고, 가엷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 있느냐?"

그러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마르 7,5)

그렇습니다.

빵은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일깨워주시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빵이 이미 “일곱 개”나 있었습니다.

‘일곱’은 완전함의 숫자입니다.

곧 이미 차고 넘치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빵”이 없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있는 것’을 없다고 여기는 것이 무지요, ‘있는 것’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 어리석음일 것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보지 못하고 또한 찾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무지요 어리석음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그 “빵”이 있습니다.

“말씀의 빵”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은총입니다.

 

이 ‘있는 것’을 보는 눈이 곧 감사의 눈이요, 관상의 눈입니다.

우리가 이 빵의 가치를 진정으로 안다면, 벅찬 감격에 까무러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빵”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름 아닌 ‘우리에게 있는 바로 그 빵’으로 감사드리셨고, 제자들은 그 빵을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이 “빵”을 먹었습니다.

성찬의 전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먹을 뿐만 아니라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먹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 에제키엘처럼 ‘말씀의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에제 3,3).

그런데 우리가 먹고도 먹은 줄을 모른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말씀을 나누는 일, 곧 복음 선포가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성경을 풀이해 주는 것은 빵을 떼어 주는 것과 같다.”

 

 

<오늘의 말·샘 기도>

 

“저 군중이 가엾구나.”

(마르 8,2)

 

주님!

속 깊은 곳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말도 다 들으시니, 제 마음 안에 당신의 빛을 비추소서.

제 가슴 속에 가엾이 보는 눈과 마음을 주소서.

약한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연민과 배려」

-반영억신부-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말씀도 듣고 치유의 은혜도 입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거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군중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려고 하였습니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하시며 걱정을 하십니다. 굶주린 백성을 향한 연민이 가득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마르8,4)하고 말하였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을 생각은 하지 않고,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빵이 몇 개인지, 물고기가 몇 마리인지 물으시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고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습니다. 사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주님의 손을 거치면 풍요로워집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먼 옛날이 아니라 오늘도 지속됩니다. 주님께서는 미사 안에서 말씀과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를 배 불리시고 영적으로 풍요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주 성경을 읽고 영성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성자로 불리셨던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에게 어떤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지구상에 가난한 사람은 왜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가난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수녀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면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항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비라도 베풀면 세상은 덜 냉랭해지고, 한결 따뜻하고 올바르게 될 것입니다.” 많고 적고를 떠나서 물질이든 영성이든 서로 나누어서 풍요로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재료를 사용하였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함으로써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또한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신 행위를 통해 모든 것은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과 당신이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 있음을 말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사성제를 통하여 하느님의 연민을 통하여 생명의 빵을 건네주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먼 데서 온 사람들의 염려와 걱정을 통해,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배려에서 배제되지 않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유다인 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풍요롭게 해 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모시고 있음을 기뻐하고 언제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큭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