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7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마르 8,34─9,1)
“Whoever wishes to come after me must deny himself,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For whoever wishes to save his life will lose it,
but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and that of the Gospel will save 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사람들이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우고 이름을 날리려 하자, 주님께서 사람들의 말을 뒤섞어 놓고 온 땅으로 흩어 버리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며,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크론시타트의 요한 성인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성인께서 어느 날 기도하고 있는데 악마가 찾아와서 이렇게 속삭이며 말했습니다.
“이 위선자야! 어떻게 감히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느냐? 내가 너의 생각을 다 읽었다. 너는 더러운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자 성인께서는 악마에게 별 상관없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종종 “저 같은 사람이 감히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라면서 자격 없음을 들어 이야기하십니다. 겸손해 보이는 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인의 말씀처럼 그렇기 때문에 더 기도해야 했습니다. 사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입으로만 자격 운운하고 있을 뿐, 어떻게든 용서해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믿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유혹이 있어도, 또 때로는 온갖 분심으로 가득해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창 신부와 전화 통화할 때면 보통 30분에서 때로는 1시간을 훌쩍 넘기기도 합니다. 특별한 대화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이 즐겁고 마음도 편안해집니다. 주님과의 대화도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벗으로 오신 주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벗으로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니, 주님과의 대화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에 이분을 절대로 떠나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종 커다란 착각에 빠집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 대신 짊어진 키레네 사람 시몬(마르 15,21 참조)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하지 않으면서 따를 수 있을까요? 주님과 전혀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서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의 삶을 살면서 주님을 따르고, 또 주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영웅은 보통 사람보다 용기가 많은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5분 정도 더 오래 용기를 지속시킬 수 있을 뿐이다(에머슨).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당신 뒤를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만이 결국엔 목숨을 구하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그 말씀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예는 ‘순교’라 할 수 있습니다. 순교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배척당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히고 세상의 힘에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의 힘에 의지하지 않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신일덕 기장이 조종하는 사이판행 대한항공 725편 비행기에는 신혼부부 61쌍을 비롯한 165명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이렇게 종교적으로 안내 방송을 하였습니다. 출발하는 김포공항은 하늘이 높고 푸른 전형적인 가을 날씨를 보여 주었습니다.
“일생에 처음 가는 신혼여행이 알찬 여행이 되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비행이 되셨으면 합니다. 부디 하느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철저한 불교 신자였던 부기장은 이런 기장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기내 방송을 마치고 비행기를 무리 없이 조종해 가고 있었습니다. 비행 도중 하와이 관제탑에서 사이판 기상이 너무 나빠 천둥이 치고 장대비가 내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아열대성 기후는 예측하기 어려워 날씨가 변덕스럽지만, 염려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착륙 15분 전에 문제가 생겼다는 기관사로부터 다급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기장님, 하이드롤릭이 새고 있습니다.”
하이드롤릭이란 비행기가 바퀴를 올리고 내리는 장치에 사용되는 유압입니다. 이것이 빠져나가면 바퀴를 자동으로 내릴 수가 없습니다. 보고 받자마자 조처하였지만 내부 압력이 워낙 강하여 즉시 관이 파열되어 유압이 모두 새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수동으로 조작할 수밖에 없는데 몇 번을 시도해도 수동 장치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괌 관제소에서는 착륙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자 이상히 여겨 연락이 왔습니다.
“KE5725, 여기는 괌 컨트롤. 무슨 일인가?”
“괌 컨트롤. 여기는 KE5725. 랜딩기어 하이드롤릭이 모두 샜다.”
괌 관제소에서는 “자갈밭으로 된 보조 활주로에 동체 착륙하라”라는 긴급 지시를 내렸습니다. 연로는 얼마 남지 않았고, 비는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신 기장은 조종관을 부기장에게 맡기고 기관사와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비행기에 벼락이 내리 꽂히며 전기가 나가 비행기 안은 암흑으로 가득 찼습니다. 탑승객들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기장은 부기장의 조롱 섞인 말에도 일어서서 기도하였습니다. 피를 말리는 기도는 울부짖음이었고 절규로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울부짖으며 기도하는데, 갑자기 하늘로 신 기장의 몸이 붕 뜨는 듯하며 황홀한 환상 속에서 세미한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이사 41,10)
그 사이 객실 사무장은 비상 착륙을 대비해 비상 착륙 시 행동 요령을 승객들에게 교육하고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신 기장은 용기를 내어 기관사에게 한 번 더 수동 착륙 장치를 돌려보라고 지시했습니다. 기관사는 포기한 듯 핸들을 돌리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노력해도 돌아가지 않던 핸들이 돌아가고 바퀴가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기적이었습니다. 조정실에서 신 기장은 소리쳤습니다.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역사하십니다.”
신 기장은 다시 한번 마이크를 잡고 승객들에게 이렇게 방송했습니다.
“승객 여러분, 저는 기장입니다. 모든 바퀴가 정상적으로 내려왔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이 비행기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역사하십니다.”
그는 모든 승객에게 감격에 떨며 이렇게 방송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의 소원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큰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드립니다.”
그는 이 놀라운 은혜를 승객들에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기내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의 눈물은 비행기가 착륙해 계류장으로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멈추지 않고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기장의 얼굴을 보고 내리려는 승객들을 하나하나 다 인사하며 내려주고는 조종실로 갔습니다.
불교 신자였던 부기장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고 신 가장은 하느님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힘들게 들어온 대한 항공에 사표를 내고 미국에서 신학 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대한 항공 수석 기장으로 30년을 근무한 그의 한결같은 기내 인사에서도 그가 믿음의 사람임을 짐작게 하고 있습니다.
“이 비행기는 하느님이 동승하고 계십니다. 편안한 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면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신 기장이 월남전에서 비행기 조종할 때도 그랬습니다. 미군을 태우고 폭격을 나갔다가 밑에서 쏘는 포에 맞아 비행기 동체에 불이 붙었습니다. 미군들은 뛰어내릴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 기장은 조종관을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미군들은 이제 기장이 두려움에 미쳤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번개가 치는 듯하더니 이런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이사 43,1)
신 기장은 불이 타는 비행기를 몰고 기지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불이 다 꺼져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때 미군 39명이 신 기장이 양쪽 가슴에 넣고 다니는 작은 성경을 사 달라고 하였고 39명 모두 한 명도 전사하지 않고 미국으로 돌아가 다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세상에서 1만 명을 전도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합니다.
신 기장은 가슴에 항상 성경을 넣고 다닙니다. 덕분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주일간 구금 당하고 입국이 금지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은 박해가 따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죽는 법입니다. 세상은 자기를 믿지 않는 이를 싫어합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는 이를 비웃습니다. 하지만 보란 듯이 기도한다면 많은 이를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8)
우리는 지나친 개신교의 전도 덕분으로 조용히 전도하는 게 좋다는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드러나게 성호를 긋고 사람들을 함께 기도하자고 이끌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언제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일까요?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아는 척하지 않는 것입니다. 창피해서 그렇습니다. 부모가 나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느낄 때, 그래서 부모가 옆에 있어도 외면할 때 그것이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할 수 있는데 하느님께 청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하느님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그러면 하느님도 나를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세상에서 대놓고 기도하는 좋은 예가 김연아 선수에게 세례를 주게 되는 계기를 만든 하늘 병원의 ‘조성연 요셉’ 원장입니다. 그분은 아침부터 다른 일을 제쳐 놓고 믿는 직원들과 함께 묵주 기도를 하며 시작합니다. 그때는 기도가 아니면 누구도 원장실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성호경을 긋고 하는 기도의 힘을 보여 줍시다. 우리가 기도하면 세상에서는 박해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보고 박해 하여도 상관없이 대놓고 기도하는 것, 이것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목숨을 잃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세상에 기도의 힘을 보여 줍시다. 하느님 아버지를 ‘능력’ 없는 분으로 만들지 맙시다
-조재형신부-
예전에 ‘미운오리 새끼’라는 동화를 읽었습니다. 오리 새끼들 중에 유난히 키도 크고, 털의 색이 다른 새끼가 있었습니다. 물 위에 비친 모습이 다른 새끼들과는 달랐습니다. 엄마 오리는 다른 새끼들과는 다르지만 똑같은 정성으로 키웠습니다. 어느 겨울 미운오리 새끼는 호수로 날아온 백조를 보았습니다. 미운오리 새끼는 자신이 오리가 아니라 백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백조들과 함께 힘찬 날개 짓으로 하늘을 날아올랐습니다.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는 만화도 읽었습니다. 실력은 있지만 타고난 성격 때문에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선수들이 함께 모여 지옥 훈련을 하였습니다. 모난 성격들이 다듬어지고 외인구단은 뛰어난 성적을 올린다는 만화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미래에 대한 이상을 가진 사람은 ‘미운오리 새끼’ 취급을 받곤 합니다. 거짓과 욕망으로 출세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사이에 나눔과 겸손으로 영원한 생명을 꿈꾸는 사람은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작년에 ‘줌으로 하는 신앙특강 기획팀’이 발족하였습니다. 보스턴, 탬파, 버지니아, 토론토에 사는 분들이 열정과 신념으로 함께 모였습니다. 일상적인 신앙생활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이상과 열정으로 신앙의 차원을 높여보려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이 ‘줌으로 하는 신앙특강’을 개설하였습니다. 좋은 강사를 섭외하고, 홍보하고, 강의를 개설하였습니다. 개인 자격으로 하는 이분들에게 지도 사제가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고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있으니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유리처럼 반사하는 성격이 아니라 스펀지처럼 받아들이는 성격인 저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줌으로 하는 신앙 강좌 기획팀’이 발족했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뉴욕에서 모여 단합대회를 하자고 하였습니다. 숙소를 구하고, 함께 미사하고, 맛있는 식사를 하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기획팀은 다른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피정의 집을 선택하였습니다. 미사를 하고, 신앙체험을 나누고, 신앙기획팀이 나갈 방향을 모색하였습니다. 제가 볼 때는 ‘미운오리 새끼’처럼 보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벨탑’의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우화가 생각납니다. 많은 애벌레들이 아무런 이상도 없이, 목적도 없이 다른 애벌레들을 따라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앞서가는 애벌레는 끌어 내렸습니다. 따라오는 애벌레는 떨어트렸습니다. 그리고 오직 강한 애벌레들만이 앞으로 앞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허무였습니다. 그 끝은 타는 목마름이었습니다. 출세,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신기루를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애벌레들은 ‘나비’를 보았습니다. 나비는 측은한 눈빛으로 애벌레에게 그 길로 가지 말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애벌레들은 나비의 눈빛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줄무늬 애벌레는 나비의 말을 듣고 욕망이라는 ‘탑’을 오르기를 포기하였습니다. 누에가 된 애벌레는 시간이 지나면서 ‘노란나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얀 나비와 함께 하늘을 날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올라가야 할 탑은 욕망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올라가야 할 탑은 증오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겸손의 누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사랑의 누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으니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가는 사람을 끌어 내리는 탑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을 밀쳐내는 탑을 말씀하시 않으셨습니다. 동료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탑을 말씀하십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탑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가지 않는 길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우리를 영적인 갈증을 풀어 주는 샘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만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를 체험하고, 죽어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변에 미운오리 새끼가 있다면 무시하지 말고 그들의 꿈과 이상을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주변에 공포의 외인구단이 있다면 그들의 꿈과 이상을 격려하면 좋겠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모습이 있다면 그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면 좋겠습니다. 누에가 되지 않는 애벌레는 결코 나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은총은 바로 십자가 신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양승국신부-
여러모로 미성숙했던 젊은 수도자 시절, 틈만 나면 제가 몸담고 있던 공동체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입만 열면 공동체가 이게 대체 뭐냐고 투덜거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사실 교회 공동체의 근본적인 속성 가운데 두드러진 속성 하나는 ‘죄인들의 모임’이란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면면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면 너나 할 것 없이 다 부족합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나약하고, 오늘 비록 우리가 상처투성이이고, 오늘 비록 우리가 이토록 형편없지만, 하느님 사랑에 힘입어 천천히 성화와 완성의 길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하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 교회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공동체의 미성숙 앞에, 때로 생기는 스캔들 앞에, 이기심 앞에, 세속성 앞에 너무 당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문제성 많은 우리를 늘 기다려주셨듯이 우리 역시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교회 공동체를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느님을 보다 가까이 따르면 따를수록, 복음 정신을 보다 철저히 실천하면 할수록 ‘희한한’ 일이 한 가지 생깁니다.
그것은 바로 그런 노력이 더해짐에 따라 십자가의 무게가 더 무거워진다는 것입니다. 상처받는 일도 많아집니다. 고통도 커져갑니다. 때로 다 벗어놓고 떠나버리고 싶습니다.
그럴수록 복음서를 펼치십시오. 복음서를 읽고 또 읽으십시오. 복음서는 갖가지 고통과 상처, 십자가에 적절한 진단과 처방전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다양한 치료제, 다양한 노하우를 우리에게 전수해줍니다.
새로운 감성으로 다시 읽은 복음서는 갖은 의혹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도와줍니다. 집착에서 벗어나게 도와줍니다. 희망의 길을 열어줍니다.
그러나 결국 최종적인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입니다. 십자가의 신비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입니다. 다름 아닌 십자가를 꼭 껴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용, 자아 포기가 신앙인들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잘 설명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코 복음 8장 34절)
세상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거부합니다. 십자가를 저주합니다. 십자가만 다가오면 기겁을 하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은총은 바로 십자가 신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징표로 보내주시는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순간, 나약하고 비천한 우리의 몸은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변모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의 인생은 언젠가 반드시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영근신부-
마르코복음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본다면, 어제 복음까지는 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오늘 복음에서부터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 곧 제자 되는 길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르 8,34)
이 말씀은 “나를 따르려면”에서,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지를 확인하게 합니다.
그러니 이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것이 참된 것인지,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있는지, 그리고 진정으로 원하는 지를 깨닫는 일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제시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예수님 따르기를 원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표시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려고 하는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두 가지의 표시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버리는 일’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우선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는 집과 가족 곧 소유와 사람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떠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지금 ‘자신으로부터 이미 떠났는지’, 적어도 지금 ‘자신을 버리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릇을 비웠는지보다, 무엇을 채웠는지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릇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곧 보석을 채우고 있으면 보석그릇이 되는 것이요, 쓰레기를 채우고 있으면 쓰레기통이 되듯이, 자신을 버리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채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여 ‘예수님의 그릇’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나는 진정 예수님을 받아들여 따르고 있는가?
사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비울 수가 없으며, 이미 자신을 비우신 그분에 의해서 비워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빋이들이고, 그분께 의탁하여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스스로를 비운다면 그렇게 하고자 하는 자신을 실현하는 꼴이 되겠지만, 그분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는 신앙의 행위로 인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신앙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짊어질 때, 비로소 구원의 십자가가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마르 8,34)
주님!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게 하소서!
고통을 피하지도 않으며,
없애버리거나 해결하려 하지도 않으며,
극복하거나 초월하려 하지도 않으며,
타협하거나 무관심하지도 말게 하소서!
고통과 함께 사랑하게 하소서.
고통 속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고통 가운데 계시는 당신을 통하여 사랑하게 하소서.
죄의 용서를 끌어안고 사랑의 십자가를 품게 하소서.
아멘.
「십자가는 사랑의 보증입니다」
-반영억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흔하게 십자가를 봅니다. 성당이나 교회의 수많은 십자가를 볼 수 있고,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사랑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의 보증입니다.
사실 십자가는 고대 로마인들이 범죄자들을 처형할 때 사용하던 도구였습니다.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형태의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생각하면 사랑보다는 고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형되고 난 이후 십자가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신성하고 중요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 십자가는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의 용서를 위해 기꺼이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놓으심으로써 인간에게 속죄와 구원을 가져다주셨다는 의미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었지만(1코린 1,23. 갈라5,11) 하느님께서는 패배처럼 보이는 것에서 승리를, 허약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활기 넘치는 힘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은 십자가에 담긴 우리를 위한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멸망할 자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에 담긴 구원의 능력을 알았기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고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에게 이로웠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라2,20).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이제부터 인생의 주인은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십자가는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억지로 질질 끌고 갈 것이 아니라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기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버린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담을 그릇을 준비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빈자리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담을 수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빈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직자 수도자들은 결혼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봉헌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존경도 받습니다. 부모, 형제 친척은 물론 부와 명예를 버리고 주님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외적인 것 못지않게 자기 자신을 얼마나 내려놓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혼자 산다는 핑계로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철저히 자기 울타리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익숙해져 있는 나의 낡은 삶의 양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나를 비우지 않고는 결코 주님께서 거처하실 곳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예수님이 짊어지셨던 십자가를 기꺼이 져야 합니다. 때로는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하고, 때로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우리 안에 건설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누구든지』
-송영진신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ㄴ).”
예수님은 우리를 고생시키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참 해방과 자유와 안식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그 해방과 자유와 안식은 온갖 고생, 걱정,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참 평화와 행복과 기쁨만 누리는 삶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은 “누구든지, 내가 주는 참되고
영원한 해방, 자유, 안식, 평화, 기쁨을 얻기를 바란다면”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감수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제 십자가’ 라는 말은,
‘남의 십자가’가 아니라 ‘나의 십자가’ 라는 것을,
즉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지는 십자가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려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고 자신의 십자가를 받아들입니다.
십자가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방법이고 과정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십자가 너머에 있는 안식과 평화와 기쁨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5-6).”
‘십자가’ 라는 말에서 고통, 고난, 죽음, 슬픔만 연상할 때가 많은데,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얻는 것들을 생각하면,
십자가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고, 고통과 고난이 아니라
평화와 안식이고, 슬픔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십자가의 무게와 크기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는 각자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십자가를 주시고,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지고 갈 수 없는 십자가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는 않으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혹시라도 정말로 힘들어서 못한다면, 예수님께서 함께 지고 가시거나
대신 지고 가시고, 나를 사랑하는 이웃들도 함께 지고 갈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도 중요한 믿음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은
모두 버리라는 뜻입니다.
특히 자기 안에서 생기는 헛된 욕심과 욕망들을 버려야 하고,
몸의 편안함만을 찾게 만드는 유혹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 유혹들은 밖에서도 오지만 내 안에서 더 많이 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
이 말씀은, “현세의 생에 대해서만 집착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 영원한 생명은 그 생명을 얻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그것만을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이 얻게 된다.” 라는 뜻입니다.
인생을 허무하게 끝낼 것인가, 즉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존재로 인생을 마칠 것인가, 아니면 ‘영원’을 향해서 나아갈 것인가,
즉 ‘영원불멸’의 존재가 될 것인가는 각자 스스로 선택할 일입니다.
“인생을 끝내는 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새로운 인생의 시작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영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고,
‘영원불멸’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잃는다.’ 라는 말은, 가지고 있던 것을 잃는다는 뜻이
아니라, 얻으려고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데도 노력하지 않아서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나와 복음 때문에” 라는 말씀의 표현만 보고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느님과 예수님을 위한 생활’인 것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신앙생활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생활입니다.
“나와 복음 때문에” 라는 말씀은,
“내가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르 8,36-37)”
이 세상에서 갖고 싶은 것 다 가지고, 누리고 싶은 것
다 누린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지옥에서 겪는 가장 큰 고통은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임종을 맞이한 사람들 중에는
과거의 삶에 대한 후회 때문에 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표현만 보고서 “살아서는 온 세상을 얻고,
죽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면 정말 좋겠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 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사는 동안 온 세상을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욕심과 미련을 버립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8).”
여기서 “부끄럽게 여기다.” 라는 말씀은,
“관계를 부정하다. 관계를 끊어버린다. 모른다고 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자기 마음대로 막 살다가,
심판대에 선 다음에야 비로소 한 번만 봐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때는 너무 늦은 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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