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9일 연중 제7주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마태 5,38-48)
I say to you,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that you may be children of your heavenly Fa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르신다(제1독서). 복음 선포자는 신자들을 위하여 존재하며, 신자들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마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다. 이것이 아버지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하신다(복음).
복수의 미덕
-키엣대주교-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과연 어떤 사람이 ‘거룩하고 완전한 사람’입니까? 사람들은 보통 성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성인은 세상 일에 초월하고 기도만하는 수행자라고 생각하기에 존경은 하지만 나는 성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인은 ‘말과 행동에 있어서 하느님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선인과 악인, 의인을 구별하지 않고 그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유덕하고 거룩한 사람은 미움을 품지 않고 항상 사랑 가운데 사는 사람이며, 나와 가까운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이런 사람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성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거룩한 사람들을 배척하는 사회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고 있습니다. 가족과 친구,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끼리도 서로 배척하며 편을 가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에 따라, 신분에 따라, 이념에 따라 서로를 구분짓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항하며 이것이 세상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십시오. 아이의 싸움이 가족의 싸움이 되고 한 마디 욕을 하면 다른 사람은 두세마디의 욕으로 갚아줘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시리아 내전, 21세기 가장 큰 지진이라는 참혹한 불행 앞에서도 이념으로 갈라 선 세계, 그들의 세계에는 성인은 없습니다. 세상은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갈등과 분쟁, 증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는 갈등을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갈등을 악화시킬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과 분쟁을 끝내고 증오를 무력화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사랑’뿐입니다. 적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복수의 미덕’만이 증오를 중화시키고 갈등을 종식시킬 것입니다. 갈등은 한쪽이 패해서 피하거나 양보할 때만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는다는 것’은 약해서, 패배해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느님처럼 거룩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한 남자가 카톨릭 신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들인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비난과 저주를 받으면서도 왜 복수하지 않죠?” 그러자 신자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나약하지도 비겁하지도 않아요. 그들이 혀가 있다면 우리도 혀가 있기에 그들이 욕하면 우리도 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때리면 우리도 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한다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받은데로 돌려준다고해서 갈등과 증오가 해결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비록 피해를 입어도 참는다면 저희가 사는 이 작은 세상만큼은 미움을 해소하고, 정의의 덕목을 밝히고 작은 평화를 이루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되기에 합당하도록 당신이 원하시는 자녀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2. 증오심을 가지고 있을 때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편안했습니까? 아니면 불안해서 안절 부절하고 후회스러웠습니까?
3. ‘완벽한 용서’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의 나눔
1. 우리는 보통 사소하고 작은 일에 서운해하고 화를 내곤합니다. 하루에 한번, 사소한 일부터 참고, 상대방을 용서해주는 주님의 사랑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고등학생 때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을 미술 시간에 선생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빛의 파면을 자유롭게 담아낸 입체파 화가의 놀라운 작품이라고 선생님께서는 설명하셨고, 이 작품의 가치는 어마어마하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한 친구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장난삼아 우스꽝스럽게 그려놓아도 ‘피카소’라는 이름 덕분에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도 말했다.
“내가 발로 그려도 저 정도는 그리겠다.”
미술에 대한 조예가 없으니 이렇게 생각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훌륭한 화가의 그림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비현실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지요. 이런 우리가 피카소를 만나서 “왜 이 따위로 그렸습니까?”, “나는 도대체 당신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라고 따질 수 있을까요?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잘 모르면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면서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완벽하게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족한 우리가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일을 보기에 때로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고통과 시련을 왜 만들어서 사람을 힘들게 하시는지, 왜 내가 청하는 기도는 다 외면받고 있는 것인지, 전지전능하시면 나 하나 부자 만들고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하는 것은 일도 아닐 텐데…. 그래서 계속해서 불평불만입니다.
“왜 이따위로 세상을 끌고 가십니까? 나는 당신의 그 모습이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런 불평불만이 과연 맞을까요? 완벽하지도 않고 전지전능하지도 않기에 우리는 함부로 주님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일을 해주고 계신다는 굳은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깊은 묵상과 기도로 또 그밖에 다양한 방식으로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한 사람은 불평불만보다는 감사의 기도를 더 많이 바칩니다. 주님을 아는 자기 수준이 높아져서 주님을 이해해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오른뺨을 치면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고,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면 이천 걸음을 가 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더 힘든 일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우리 수준을 높이는 것이 됩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주님도 모욕당하시고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완전한 사랑의 하느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아직 수준이 낮아서 그렇습니다. 지금 나의 수준은 어떤가요? 완전한 하느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명랑한 미소를 지어 준 것뿐이지만, 그 미소는 밤을 산산이 흩어지게 하고 그날을 살아갈 가치가 있는 날로 만들어 주었다(스콧 피츠제럴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용서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런 말을 들으면 원수가 있는 사람들은 “당신도 똑같이 당해보면 그런 말은 할 수 없을 거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으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하느님과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기 일가족을 살해한 유영철을 용서한 고정원 씨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또 개신교에서는 대표적인 사례가 손양원 목사입니다. 손양원 목사는 자기 두 아들을 총살한 안재선의 사면을 위해 애썼고 그가 사면 되자 그를 양아들로 삼아 같이 살면서 신학교에 보냈습니다.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원수와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는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러한 용서와 사랑이 어떻게 하면 가능했을까요? 그분이 두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밤새 울며 기도한 다음 나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 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결국 ‘믿음’입니다. 우선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나에게 저지른 일이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수준이 높아져야 합니다. 아기가 누군가에게 자기 장난감을 빼앗기면 그 누군가를 원수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 장난감을 빼앗아 간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건 우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이렇듯 성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장은 이전의 자기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을 가지고 자기를 쫓아오는 길거리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알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죽었소!”
그렇습니다. 용서하려면 이전의 나는 죽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아기 때 빼앗긴 장난감이 나에게 더는 의미가 없는 이유는 그것이 의미 있었던 이전의 자신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로마 6,4)
우리는 세례 때 이미 이전의 자신은 죽어서 묻혔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내 안에서 사실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용서하려면 자기 정체성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 12,19)
복수하는 심판관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라는 것도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전의 내가 죽었다는 믿음은 용서는 할 수 있지만, 사랑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 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로마 12,20)라고 말합니다. 손양원 목사가 자기 아들들을 죽인 원수와 함께 식사했고 그것은 마치 자갈을 먹는 맛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인간이라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인간으로 받은 상처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미 쓸모 없어진 인간의 육체에 상처를 낸 인간들을 용서하실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부모가 자녀를 바라보듯 하느님으로서 인간을 바라보기에 불쌍히 여기시고 원수까지도 사랑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창조자이고 창조자는 부서진 물건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이 되었다는 믿음이 아니면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영화 ‘공공의 적’에서 보험금을 노리고 자신을 찌른 아들의 부러진 손톱을 어머니가 죽어가면서도 삼킨 장면이 나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른 게 아닙니다. 어머니니까.
우리가 하느님이라 믿지 않으면 원수까지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낳은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믿음만이 상처를 잊게 하고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하고 심지어 그런 사람을 사랑하게까지 합니다.
-조재형신부-
넷플렉스에서 ‘몸짱 100’이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몸매와 건강을 자랑하는 100명을 초대해서 게임을 하는 프로입니다. 체조선수, 권투선수, 레슬링선수, 특수부대 군인, 보디빌더, 치어리더, 소방관, 야구선수와 같이 각 분야에서 최고의 몸과 건강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초대되었습니다. 처음 시작한 게임은 ‘매달리기’였습니다. 강한 사람들끼리 모여서인지 다들 매달리기에 자신 있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강한 사람들 사이에도 더 강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가장 강한 사람은 20분가량 매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1분을 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희 때는 대학시험의 한 과목으로 ‘체력장’이 있었습니다. 턱거리, 윗몸일으키기, 오래달리기와 같은 종목이 있었습니다. 저도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이 납니다. 배당 점수가 20점이었기 때문입니다. 몸짱은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크게 아프지 않고 맡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적당한 운동과 규칙적인 식사 그리고 긍정적인 생각이 건강한 몸을 위해서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눈이 먼 사람은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자리에서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물 위를 걸으셨고,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짱’은 아니셨던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3번이나 넘어지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다른 2명은 아직 살아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숨을 거두셨습니다. 성인과 성녀들 중에도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아픈 몸까지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봉헌하였습니다. 평생 수녀원 밖으로 나간 적이 없지만 선교사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오상의 비오 성인은 예수님의 다섯 상처를 지니고 살았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여러분도 거룩해 져야 한다.”입니다. “하느님께서 완벽하시니 여러분도 완벽해져야 한다.”입니다. 거룩함과 완벽함의 기준은 ‘몸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몸짱은 아니셨고, 성인과 성녀들도 몸짱으로 성인이 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룩함과 완벽함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은 4가지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고 기꺼이 도와주는 측은지심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는 수오지심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공로를 앞세우기 보다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양지심의 마음입니다. 옳고 그름을 식별하는 시비지심의 마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완벽함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는 권력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을 구할 수 있는 재물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존경하는 명예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얻기 위해서 지금도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저는 박노해 시인의 “이스탄불의 어린 사제”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어린이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룩한 마음, 완벽한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슬픔 속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을 보았습니다.
“폭설이 쏟아져 내리는 이스탄불 밤거리에서
커다란 구두 통을 멘 아이를 만났다.
야곱은 집도 나라도 말글도 빼앗긴 채
하카리에서 강제이주당한 쿠르드 소년이었다.
오늘은 눈 때문에 일도 공치고 밥도 굶었다며
진눈깨비 쏟아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작은 어깨를 으쓱한다.
나는 선 채로 젖은 구두를 닦은 뒤
뭐가 젤 먹고 싶냐고 물었다.
야곱은 전구 알같이 커진 눈으로
한참을 쳐다보더니 빅맥, 빅맥이요!
눈부신 맥도날드 유리창을 가리킨다.
학교도 못 가고 날마다 이 거리를 헤매면서
유리창 밖에서 얼마나 빅맥이 먹고 싶었을까!
나는 처음으로 맥도날드 자동문 안으로 들어섰다.
야곱은 커다란 햄버거를 굶주린 사자새끼처럼
덥석 물어 삼키다 말고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담배를 물었다.
세입쯤 먹었을까
야곱은 남은 햄버거를 슬쩍 감추더니
다 먹었다며 그만 나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창 밖에는 흰 눈을 머리에 쓴
대여섯 살 소녀와 아이들이 유리에 바짝 붙어
뚫어져라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야곱은 앞으로 만날 때마다
아홉 번 공짜로 구두를 닦아주겠다며
까만 새끼손가락을 걸며 환하게 웃더니
아이들을 데리고 길 건너 골목길로 뛰어 들어갔다.
아, 나는 그만 보고 말았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몰래 남긴 햄버거를
손으로 떼어 어린 동생들에게
한입 한입 넣어주는 야곱의 모습을
이스탄불의 풍요와 여행자들의 낭만이 흐르는
눈 내리는 까페 거리의 어둑한 뒷골목에서
나라 뺏긴 쿠르드의 눈물과 가난과 의지와 희망을 영성체처럼
한입 한입 떼어 지성스레 넣어주는
쿠르드의 어린 사제 야곱의 모습을”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는 큰 사랑!
-양승국신부-
우리 삶의 지침이자 길잡이이신 예수님께서는 요구도 참 많으십니다. 때로 ‘바보가 되라는 건가? 이거 너무하신 것 아냐?’ 하는 의구심마저 품게 합니다.
우리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만족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의 생활 준거는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그저 법대로입니다. 특히 동태복수법이 강조됩니다. 누군가가 내게 잘못해서 내게 피해를 끼쳤다면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고 꼭 그 만큼을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혈육들, 가족, 친척, 친구들, 다시 말해서 이웃들은 당연히 사랑을 실천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원수들, 이방인들, 큰 피해와 상처를 준 사람들, 우호적이지 않은 다른 민족들은 늘 경계의 대상입니다. 그들은 사랑의 실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 안 그래도 노는 물이 다른 종족, 더럽혀진 사람들로 여겼는데, 그들이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자 제자들도 즉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스승님 저들을 그냥 둬서 되겠습니까?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버릴까요?
제자들은 아직도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전통적인 가르침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구약시대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가족이나 동족들에게는 뜨거운 사랑을 베풀지만 나를 냉대하고 피가 다른 이민족들은 사람 취급도 안했습니다. 그저 그들은 물리치고 이겨내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도래로 인해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래 인간이 지니고 있었던 사랑의 개념을 더 크게 확장시킵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웃들에게만 한정시켰던 사랑의 실천을 나와 무관한 사람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넘어 나를 박해하고 나를 위협하는 원수들에게까지 확장시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오 복음 5장 44절)
내 사랑이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생각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사랑이 보다 큰 사랑, 보다 이타적인 사랑, 보다 신적인 사랑으로 넓혀나갈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거룩함과 완전한 사랑’ 곧 ‘성덕과 완덕’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고 하시고,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7)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고 하십니다.
이러한 ‘성덕’과 ‘완덕’에 대한 말씀은 루카복음에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로, 요한복음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먼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마태 5,39)
그렇다면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함은 대체 어쩌란 말씀일까요?
무관심하거나 피하거나 대처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곧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는 말씀은 악에 물들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지, 결코 악에 무관심해라는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도피요, 자기 기만이요, 비겁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물론 우리는 약한지라, 때로는 피해 달아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마치 선조 요셉이 포티파르의 아내에게서 겉옷을 벗어던지고 달아났던 것처럼(창세 39,6-23 참조) 달아나는 것이 상책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악은 단지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피한다고 해서 치유되거나 보복심과 복수심이 사라지거나 문제가 나아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억울하고 원망이 깊어지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니 악은 진정한 방법으로 맞서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그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악을 도피하거나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 혹은 그것에 물드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일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선을 행하는 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함은 ‘맞대응하지 마라’는 말씀으로, 같은 방법으로 응하지 마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악 가운데서도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악을 오히려 선의 통로로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악을 악으로 맞대응하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과 맞서 대응하다보면 자신도 악에 물들어버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불을 불로 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불은 물로 꺼야 하듯, 악을 이기는 현명한 방법은 오히려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누가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대는’(마태 5,39) 것이 오히려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보복심이나 복수심을 몰아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기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랑만이 진정으로 악과 맞서는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마태 5,44)
이는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니라 사랑의 대상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아가서,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사랑이 더 필요한 대상임을 깨우쳐주십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하기보다 죄인이기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원수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라서가 아니라 미움이 아름다운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지 우리 자신이 더러워지지 않으려고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곧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실 자비를 베풀면 자신의 영혼이 해를 입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타인도 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 5,44)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손수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5)고 하십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참조),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당하면서도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참조) 말입니다.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비록 악에서는 떠났을지라도 선을 행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을 피하는 것만이 아니라 선을 행할 때 진정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48)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덕의 최고 정점인 ‘완덕’으로 이끄십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 본문을 해설하면서 덕의 아홉 단계를 이렇게 말합니다.
덕의 첫 단계는 불의로 시작하지 않는 것이요, 둘째 단계는 자기가 당한대로 되갚지 않는 것이요, 셋째 단계는 해를 입히는 이에게 똑같은 식으로 대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요, 넷째 단계는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당하는 것이요, 다섯째 단계는 악행자가 빼앗고자 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는 것이요, 여섯째 단계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요, 일곱째 단계는 그런 이를 사랑하기까지 하는 것이요, 여덟째 단계는 그런 이에게 선을 베풀기까지 하는 것이요, 아홉째 단계는 원수를 위해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입니다.
결국 완전한 사랑(완덕)이란, 결코 흠 없는 무결점의 상태나 죄 없는 완벽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완전하기에 자신의 약함과 결함을 통하여 흘러든 자비로우신 분의 사랑에 유대를 맺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밝힌 대로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계신”(1코린 3,16) 까닭에 기능한 일입니다.
결국 거룩한 영이신 성령에 따라 사는 이가 성화를 입고 완덕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성화가 아버지의 뜻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데살 4,3)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 5,44)
주님!
단지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그에게도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가 기도해해주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하고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 나를 힘들어 하고 나의 용서가 절실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용서하시는 하느님」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사랑의 절정은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이고, 아드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시간 그 큰 사랑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하며 우리도 주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상대의 실수를 이해하고 도와줄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용서와 이해가 있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저 불쌍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배은망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그 죄가 무엇이든지 용서를 간청할 때마다 하느님은 기꺼이 용서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결코 지칠 줄 모르고 용서해 주십니다. 용서를 청할 마음이 내키지 않아 우리가 망설이는 것이지 그분은 언제나 기다려 주십니다. 오늘도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은 용서해 주시고 더 많은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적인 잘못을 보지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3,16-17).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루카23,34). 하시며 먼저 당신을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실 때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23,46). 하셨습니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는 사람들이 자기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 돌을 던질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60). 하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스테파노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죽기까지 용서하는 사랑을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스테파노도 반대자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이 용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얻어야 할 구원은 바로 하느님의 용서입니다. 하느님의 용서가 없으면 우리가 무슨 선행, 무슨 공로로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참으로 용서는 사랑의 고귀한 표현입니다. 용서는 우리 사회가 인간다운 사회가 되기 위하여 꼭 필요합니다. 각박한 사회, 미움과 분열의 골이 깊어가는 이 시대에 용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지역, 계층간, 부모와 자식간, 부부간, 형제간 등 상처 난 곳곳에 이해와 양보의 덕이 필요합니다. 그 뿌리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용서는 예수님의 마음이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듯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도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재빨리 판단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험담하기에 앞서 내 자신이 용서받아야 할 잘못이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쉽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에 앞서 내 자신을 먼저 용서하고 또한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주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닮아야 합니다.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랑한 그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랑도 그러해야 합니다. 참사랑은 항구합니다.
“국물이 뜨거울 땐 국물 속의 기름이 잘 나타나지 않듯이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편의 단점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물이 식을 땐 국물 속의 기름이 떠오르듯이 사랑이 식을 땐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어떤 이에게 부족함이 보이거들랑 ‘지금은 사랑할 때’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5,46). 우리를 비방하고 아픔을 주는 사람까지도 포용하고 웃으며 인사할 수 있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하였던 이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첫째편지 3장9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도 그 사랑으로 이웃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하느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보이지 않던 이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김인호). 하느님의 사랑은 이웃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 법입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노). 혹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더 많이 사랑해 주지 못했음을 용서 청하고 자비를 간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그 큰 사랑을 받으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왜 그리 좁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희망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방법은 사랑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이 가득하신 하느님, 불완전한 저희는 살면서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릅니다. 제가 저지른 실수를 다른 사람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만큼 저 역시 다른 사람의 실수 앞에서 너그러울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오직 사랑만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고”(예수의 데레사 성녀),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십자가의 성요한). 이니 더 많이 사랑하게 하소서. 다른 사람을 험담하고 깎아내리는 데 쉽게 휩쓸리지 않는 용기를 주시고 사랑이 미움을 이겼다는 확신으로 기뻐하게 하소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별중에 가장 힘든 이별은? 생이별
사랑중에 가장 힘든 사랑은? 원수사랑
「원수를 사랑하여라.」
-송영진신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8-42).”
이 말씀은 “사적으로 앙갚음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이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켜라.” 라는
가르침입니다(로마 12,17-21).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의 일이고, 선을 선으로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인간 세상의 일이고,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라는 교회 격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바로 그 일을
본받으라는 가르침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는 구약시대 율법은
원래는 과잉 처벌을 방지하기 위한 율법이었습니다.
처벌은 죄에 상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율법으로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사실은 구석기시대의 관습 같은 것이었습니다.
진보된 사회에서 사법제도를 제대로 운용하기 전의
낡은 사고방식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법제도를 부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악인의 악행을 처벌하는 일은, 개인이 마음대로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공적인 사법제도에 맡겨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의의 실현’은 외면하고 ‘사랑의 실천’만 강조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약탈당하는 일이 없는 세상,
또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이 악법을 만들어서
횡포를 부리는 일이 없는 세상, 우리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정의가 없는 사랑은 악을 조장하고 방관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악이 됩니다.
<반대로 사랑이 없는 정의는 무자비한 폭력이 됩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는 “악인에게 악으로 맞서지 마라.”입니다.
우리는 악에 맞서야 하고, 악을 물리쳐서 없애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선이어야 합니다.
실제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하느님께서 나를 대하시는 사랑”으로 바꿔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지은 죄’에 대해서 곧바로 처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으로 나를 대하십니다.
‘나의 죄’를 묵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내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심판과 처벌이 내릴 것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3-45).”
구약시대 때의 ‘원수’는,
우상을 숭배하면서 유대교를 박해하는 이방 민족들이었습니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율법은 구약성경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를 미워하라는 가르침은 많이 있습니다.
구약시대 때에 우상 숭배를 미워하라고 가르친 것은
하느님만 섬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는, 우상 숭배자들과 박해자들뿐만 아니라
사적인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원수를 좋아하여라.”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앞에 있는 “악을 선으로 갚아라.” 라는 가르침과
같은 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든 누구에게나 미운 건 미운 거고, 싫은 건 싫은 겁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감정’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신앙인의 실천’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은, 박해자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원수 같은 자들에게 천벌을 내려 달라고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악인에게도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려 주시는 것은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인간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곧바로 천벌을
내리신다면, 아마도 살아남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갑작스럽게 어떤 사고를 당하거나 불행한 일을
겪을 때, 천벌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가끔, 사도행전에 나오는 헤로데처럼
천벌을 받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사도 12,23).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6-48).”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랑에는 차별도, 차이도 없어야 하고, 울타리도 없어야 합니다.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는 일 자체를 하면 안 됩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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