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3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마태오 5,20ㄴ-26)
if you bring your gift to the altar,
and there recall that your brother
has anything against you,
leave your gift there at the altar,
go first and be reconciled with your brother,
and then come and offer your gif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는 악인의 죽음을 원하지 않으시고, 그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바라신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2010년 심리학자 줄리안 홀트 룬스태드가 동료 학자들과 다음과 같은 조사 연구를 했습니다. 암, 심혈관 질환, 신부전 같은 만성 질환으로 사망한 사람의 비율과 이들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종합 분석한 것입니다. 그 결과 힘이 되는 사회적 네트워크가 있으면 사망 위험성이 50%까지 감소한다는 결과를 발견했습니다. 이는 담배를 끊어서 얻는 효과와 비슷한 수준이었고, 체질량지수(BMI)를 건강하게 유지할 때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효과였습니다.
이렇게 이웃은 나를 지켜주는 지원 체계였습니다. 건강과 행복, 삶의 만족도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좋은 이웃으로 이루어진 양질의 사회적 관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함께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이 세상 안에서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질적 도움 등의 유용한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때, 뇌의 신경화학 물질이 면역계의 효율적인 기능을 촉진하기 때문에 건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건강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바쁜 일상 가운데에서도 운동하고, 또 몸에 좋다는 각종 영양제를 복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나의 영양제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더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당신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이 단순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이 세상 안에서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지금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열심함은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감히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열심한 생활로 그 모습을 통해서도 다른 이의 사랑과 존경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실 그들은 보여주기 위한 열심, 자기만족을 위한 열심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대의 사랑을 실천할 것을 명령하시지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지 않고, 욕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어떻게든 화해할 수 있는 관계,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는 하늘 나라에 절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인 나의 이웃이 이 세상 안에서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늘 나라에도 들어갈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겸손해져라.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가장 불쾌감을 주지 않는 종류의 자신감이다(쥘 르나르).
한 번 화를 내서 주위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열 번 잘 해 줘도 한 번 화를 낸 것을 기억합니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모든 인간의 존재 방식입니다. 그러니 한 번도 화를 내지 않는 일이 중요합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와의 사소한 말다툼으로 자녀와 연을 끊고 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들은 물론이요 손주들도 보지 못합니다. 그렇게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화를 한 번도 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많은 세상의 가르침은 숫자를 세어라, 화가 나는 이유를 종이에 적어라 하는 식으로 연습을 하면 화가 누그러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치유책이 아닙니다. 화는 사실 밖으로 내지 않고 참더라도 화를 낸 것처럼 몸에 좋지 않다고 합니다. 화 자체가 생겨나지 않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알아야 합니다. 화는 ‘마음’에서 올라옵니다. 그러니 마음을 고치면 됩니다. 마음을 고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화가 안 나는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그러면 마음은 누구에게 받는 것일까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게서 받습니다. 아이들은 당연이 부모입니다. 특별히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사람들을 대하는 마음을 자녀에게 주는 존재입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주인공 윌 헌팅(맷 데이먼)은 어렵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윌은 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살아가던 중, 어머니가 자신의 남자친구와 함께 가출을 해버렸습니다. 그 후 윌은 사실상 무가족 상태에서 자랐으며, 어릴 적 상처로 인해 가족이나 친구를 만들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엄청난 분노로 자리 잡았습니다. 자기 또래의 다른 이들이 사랑 받고 좋은 환경에서 자란 것과는 너무 대조되는 자신의 처지가 비참했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좋아서 수학을 잘 하지만 그는 그 능력으로 모든 이들을 조롱합니다.
이때 마지막으로 윌을 도와주는 사람은 숀 맥과이어(로빈 윌리암스)라는 심리학 교수입니다. 그는 모든 이를 조롱하는 그를 진정으로 치유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자책하지 말라고 그를 안아줍니다. 이 영화에서 윌의 아버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 윌이 숀을 아버지로 받아들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숀의 마음으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숀의 말대로 화가 나서 떠나보낸 여인을 찾아 떠나게 됩니다.
영화의 제목이 “좋은 의지 사냥”인 것은 매우 특별합니다. 주인공 이름이 윌인 것도 있겠지만, 삶을 위한 좋은 의지는 내가 찾는다는 뜻입니다. 윌은 그 마음을 숀에게서 찾았습니다. 숀을 사랑하게 되자 그의 마음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장착하니 화가 나는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화가 나는 이유는 태어날 때의 생존만 생각하는 그런 마음을 바꿔줄 대상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아버지로 인정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삼게 됩니다.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서 기요사키는 가난한 생물학적 아버지보다는 친구의 아버지인 부자 아빠를 진정한 자신의 아버지처럼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 그의 삶의 방식을 배웁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친 아버지의 모습이 아닌 친구 아버지의 모습을 지닌 사업가가 됩니다. 누군가를 아버지로 인정한다는 말은 그 사람의 마음으로 산다는 말과 같습니다.
외적으로 부모를 닮은 것은 너무 쉽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매를 맞아본 적이 없습니다. 저희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희에게 매를 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결혼하여 자녀를 때릴 수 있을까요? 이는 이율배반적 행동이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구나 부모를 증명하며 부모를 계시하며 삽니다. 그렇지만 그런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떨까요? 화를 제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녀와 등을 지고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기고 사는데 형제에게 화를 낼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성을 내지 않으십니다. 화를 내야 하실 때도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죄를 없애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하느님은 심판하시는 마음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마음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분을 아버지로 삼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분의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그분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란치아노에서 성체가 사람의 심장 조직으로 변한 기적이 있었습니다. 이는 UN에서도 인정한 기적입니다. 왜 심장일까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영할 때 그분의 마음을 받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마음이 아니라 행동만 따르려 했습니다. 그런 의로움으로는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화 자체가 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양식 안에는 부모의 마음이 담깁니다. 그러니 성체를 영하는 우리는 화를 도무지 낼 수 없는 하느님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나뭇잎이 가을에 노랗게, 빨갛게 물이 들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단풍’이라고 합니다. 뉴욕의 가을도 ‘단풍’이 물들면 참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르면 나무는 이제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긴 겨울을 준비합니다. 파란 감도 가을이 되면 빨갛게 익어갑니다. 빨간 홍시는 맛이 별미입니다. 빨간 감이 떨어지면 감나무도 긴 겨울을 준비합니다. 나무는 단풍이 든다고 하고, 감은 익어간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나이가 들면 늙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늙음’을 아쉬워하고, 멈추고 싶어 합니다. 저 역시도 이제 ‘환갑’이 되었으니 예전의 기준으로는 늙어가고 있습니다. 신체의 기능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되었고,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늙음을 익어감으로 받아들이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면 이제 주님께 의탁하며 익어감을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원하였듯이 사람들은 건강한 모습으로 더 오래 살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최근에 과학자들은 진시황제가 원하였던 ‘불로초’를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노화를 방지하는 방법에는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혈액’을 젊은 사람의 것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합니다. 동물 실험의 결과 젊은 ‘피’를 수혈했던 동물이 더 건강하게, 더 오래 살았다고 합니다. 운동 경기에서 ‘젊은 피’를 공급한다는 의미는 신인 선수를 투입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몸도 ‘젊은 피’를 공급하면 더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드라큘라의 전설과 같습니다. 두 번째는 건강한 사람의 대장에 있는 미생물을 나이든 사람에게 주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미생물은 소화흡수가 잘 되도록 돕고, 원활한 배설이 되도록 돕기에 ‘신진대사’가 잘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유전자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포는 재생되지만 그 재생의 숫자는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유전자의 변환으로 재생의 숫자를 늘리면 건강한 몸으로 더 오래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평균수명은 늘어났습니다. 노화를 방지하고, 젊음을 유지하면서 더 오래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은 오래 살고, 가난한 사람은 일찍 죽은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품격보다 자본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신앙의 차원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악인이라 할지라도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주님의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이라 할지라도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젊은 피를 수혈한다고 해도, 좋은 미생물을 주입한다고 해도, 유전자를 변환시킨다고 해도 하느님의 규정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생로병사의 과정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하느님의 규정과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삶의 길이도 분명 중요합니다. 남들이 사는 만큼의 수명을 누리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와 가치입니다. 내가 남들에게 원하는 만큼 남들에게 베푸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강은 바다에 이르듯이,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행복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먼저 형제와 화해하여라.”>
-이영근신부-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회개와 화해를 요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참된 의로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5,20)
오늘 복음은 그 여섯 가지 의로움 중에서 첫 번째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형제를 ‘바보’ 혹은 ‘멍청이’라고 모욕하고 멸시하는 것까지도 ‘살인’에 포함시키십니다.
곧 형제에게 ‘성’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언어폭력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참으로 혀를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집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
(집회 28,18)
또한 이는 “혀”의 살인뿐만 아니라, 죄의 뿌리인 내면적인 면도 살인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1요한 3,1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더 나아가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곧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살인하지 않는 것이 본질인 것이 아니라 화해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화해하면 살인하지 않게 되지만, 살인하지 않는다고 화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 화해하는 일입니다.
먼저 화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바칠 때, ‘먼저 화해하라’ 고 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마태 5,23-24)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니 예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이 곧 예물입니다.
마치 “야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시고”(창세 4,4) 예물과 예물을 바치는 이를 하나로 간주하셨듯이, 예물을 바치는 이를 바로 ‘예물’로 삼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제단의 예물보다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예물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6,24)
그러니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늦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지체치 말고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비를 가리고 따지기 전에 ‘먼저’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것이 의로움인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루는 것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마태 5, 24)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늦기 전에 얼른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서둘러 하게 하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뿌리를 다스려라」
-반영억신부-
저는 지옥을 갔어도 벌써 몇 번은 갔어야 할 사람입니다. 짧은 생을 살아 오면서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행위를 보거나 접하면서 ‘바보, 멍청이 같은 이라고!’ 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살아있는 것은 분명 하느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덕을 입었으니 이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 고 하였지만, 오히려 말로 상처를 주고 일을 어렵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다재다능하지만,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혀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복됩니다. 말이 많으면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쉽습니다”(알베리오네). 성녀 데레사도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말을 적게 하십시오! 말 많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을 골라서 하고 모든 이에게 후회되지 않을 말을 찾으십시오”(십자가의 성 요한).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4,29). “내가 바라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호세6,6). 다른 사람을 욕하고 미워하면 욕과 미움은 독이 묻은 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혹시라도 뜻하지 않은 말로 상처를 주고 서먹해진 관계가 있다면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서둘러 용서를 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을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마음에 담긴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선하고 거룩한 마음을 지녔으면 선한 것이 나오고, 그렇지 못한 미움과 분노를 담고 있으면 화가 나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호감을 사지만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자신을 삼켜 버립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시작은 어리석음이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끝은 불행을 초래하는 우둔함입니다”(코헬10,13). 아무리 조심해도 마음 한 번 흔들리면 안에 있는 것이 쏟아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초점을 두지 않고 ‘성내지 말고’, ‘바보’, ‘멍청이’ 라고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치료하기보다 뿌리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로 배를 채우고 제 입술이 내는 소출로 배부르게 된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잠언18,20-21). 귀가 둘이고, 눈이 둘인데 입은 하나일까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먼저』
-송영진신부-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여기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섬기는 신심 행위와 신앙생활 전체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은,
‘이웃 사랑’ 전체를 가리키는 말씀이고,
뜻은 “이웃 사랑 실천이 부족했음을 깨달았다면”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상황은, ‘내가 형제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형제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상황입니다.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또 누구의 잘못이 더 크든지 간에,
형제가 나 때문에 상처를 입었고, 즉 ‘내가 형제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 상처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 내가 먼저 나서야 하는 상황입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그쪽이 오해한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정말로 그렇다고 해도, 가서 오해를 풀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나거든’이라는 말 때문에,
생각이 안 나면, 즉 완전히 잊어버렸거나 모르고 있으면
그냥 지나쳐도 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내가 잊어버렸거나 모르고 있어도 형제에게 생긴 상처는 없어지지
않고, 내가 마음 편하게 지낼수록 그 상처는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책임도 없어지지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내 죄는 더욱 커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형제의 고통을 외면하고 마음 편하게 지내는 나에게
‘이웃 사랑 실천이 부족한 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모른다. 그런 적 없다. 생각이 안 난다.” 라는
말만 하면서 피하지 말고, 진지하고 심각하게 성찰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가 나에게 상처 준 일은 오래 기억하면서,
내가 형제에게 상처 준 일은 금방 잊어버리거나
그런 줄도 모르고 살 때가 많습니다.
또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을 때마다,
형제를 용서하는 일이 어렵다는 생각만 하고,
내가 형제에게 용서를 청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왜 항상 나를 ‘선하고 옳은 쪽’에만 두는가?
살다보면 ‘옳지 않은 쪽’에 서 있을 때도 많지 않은가?
왜 항상 ‘용서하는 입장’에서만 생각하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할 일이 정말로 하나도 없는가?>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라는 말씀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라는 말씀은,
이웃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 사랑은 거짓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예수님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먼저’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이기도 하고,
“형제가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네가 먼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두 사랑을 동시에 이루는 방법은,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또 형제에게 먼저 가는 일에 대해서,
“왜 내가 먼저 가야 하는가? 그쪽에서 먼저 와야지.” 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런 말은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낼 뿐입니다.
<언제나 항상, “사랑은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5-26).”
이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고소당한 사람’도 ‘모든 사람들’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소한 자’는 나 때문에 상처를 입은 그 사람일 수도 있고,
그 사람의 수호천사일 수도 있고,
하느님의 법정에서 검사 역할을 하는 천사일 수도 있습니다.
‘법정으로 가는 도중’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입니다.
“얼른 타협하여라.”는 “미루지 말고 지금 회개하여라.”입니다.
회개와 보속은 살아 있는 동안에 해야 할 일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회개를 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습니다.
여기서 ‘감옥’은 연옥입니다.
연옥은 벌을 받는 곳이 아니라 보속하는 곳입니다.
사는 동안 보속이 부족했던 사람들이 보속하는 곳인데,
회개가 부족했다면 그만큼 보속이 더 늘어날 것입니다.
그래도 연옥은 보속을 다 마치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곳입니다.
마지막 한 닢까지 갚는다는 말은,
보속을 완전히 마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대충 적당히’는 통하지 않습니다.
<지옥으로 가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곳은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린 곳, 희망이 하나도 없는 곳,
보속도 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형제와 화해하기를 거부하고,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자기 혼자서 사는 사람은,
그 삶 자체가 지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은 모두 지옥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에, 사랑이 없는 곳은 하느님이
안 계시는 곳이고, 하느님이 안 계시는 곳이라면
그곳은 지옥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도 없이, 또 사랑도 없이 살고 있는 상태 자체가 지옥입니다.
자기 혼자서 마음 편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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