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4일 사순 제1주간 토요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오 5,43-48)
Be perfect,
just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하늘의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국의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사람들은 의사만큼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질병이 만연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모든 직업은 고귀합니다.”
코로나 시대에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의사, 간호사를 비롯한 의료진의 노고가 제일 대단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밖에도 우리의 일생을 지켜 준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택배 기사, 버스 운전사, 음식 배달원, 요양 보호사 등등…. 이들도 코로나의 위협에서 우리의 일상을 지켜 준 고마운 분들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고마움을 생각하기보다 막 부려 먹는 종으로 생각하는지 여기저기서 갑질의 모습이 들려왔고, 실제로 흔치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을 지켜 주는 사람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이 없다면 자기 삶을 지금처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도 소중하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병자는 죄의 결과로 병을 얻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죄인’으로 낙인을 찍고 함부로 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역시 하느님의 자녀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부모가 자녀로 어루만져주듯 하나하나 손을 대 치유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였을 것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 상관없이 모두가 하느님의 고귀한 자녀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당시에도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이 있기는 했지만, 조건이 있었습니다. 이웃을 사랑을 해야 하지만, 원수는 미워했어야 했습니다. 중동지역에서 이스라엘은 늘 약자였습니다. 주변 국가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고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가 만든 성문법 ‘함무라비 법전’에 실려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글귀. '똑같이 보복한다'라는 의미의 동태복수법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따르는 이라면 더 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면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한 사랑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완전한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자녀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소중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 역시 하느님께서 소중한 자녀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불행은 과학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불행은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겐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에머슨).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되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실천법으로 이렇게 하시는 하느님을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느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힘이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곧 죄요,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사랑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이웃 사랑에 대한 실천법입니다. 원수라 여기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을 내가 심판하기 때문인데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려면 심판을 멈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야고 2,1.3-4.8-9)
제가 기억에 남는 대표적인 차별의 예로는 L.A. 흑인 폭동의 원인이 되었던 사건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한 흑인 학생이 도둑이고 그가 총을 꺼낸다고 여겨서 총을 쏴서 살해한 사건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차별한다면 나도 분명 차별 받고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차별하지 않으려면 먼저 내가 차별 받지 않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영화 ‘크래쉬’(2004)는 수많은 편견과 차별 속에서 “어떻게 해야 당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야심한 밤, 도로 한 복판에서 울리는 총성. 젊은 백인 경찰관 핸슨이 한 흑인 청년을 쏴 죽입니다. 핸슨이 흑인 소년과 대화를 나누던 중 그 흑인 청년이 웃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자 위협을 느껴 자신도 모르게 총으로 그 청년을 쏴버린 것입니다. 사실, 그 흑인 청년은 둘 사이에 꽤나 재미난 공통점을 공유하려던 것뿐이었습니다. 흑인 청년이 주머니에서 꺼내려던 것은 단지 작은 성 크리스토포로스 조각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흑인 청년을 쏴 죽인 이 ‘핸슨 결찰관’은 불과 36시간 전의 대낮에는 다소 의외의 모습을 보입니다. 선배 경찰관인 라이언의 인종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상관에게 근무 파트너를 바꿔 달라고 청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을 극도로 차별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차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차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본인이 차별과 편견의 굴레에 살고 있었음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종차별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에게 라이언 경관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네가 누구인지 아는 것 같아? 너는 네가 누구인지 몰라!”
아마 핸슨이 불과 이틀도 안 되어 차별의 굴레 안에서 살인을 저지를 것을 알았던 것일까요? 이 영화에서는 아랍인이라고 인종차별을 받은 한 사람이 멕시코인 열쇠 수리공을 도둑으로 몰아붙이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차별을 받는다고 느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차별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차별하지 않으려면 자신도 차별 받지 않는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차별 받는다고 느끼면 그건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인정 받은 사람은 예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반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영화 ‘히든 피겨스’는 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 천대 받던 시절, 수학 천재 라고 불리던 흑인 소녀가 수많은 차별 속에서 결국 NASA에서 인정받기 까지 있었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6학년인 나이에 대학에서 자신의 뛰어난 수학 실력으로 교수님께 인정을 받습니다. 그 인정받음으로 견디기 힘든 인종차별을 견뎌내며 위대한 업적을 이뤄냅니다. 그때 교수가 백묵을 주며 문제를 풀어 달라는 청을 받은 것처럼, 나사에서도 그를 지지해주는 백인 상관으로부터 백묵을 받아 정부 관리들이 보는 앞에서 문제를 풀어 보입니다.
예수님은 차별 받지 않으셨을까요? 성모님은 차별 받지 않으셨을까요?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차별 받는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바로 하느님께 인정받으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당신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과 원수가 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차별 받지 않는데 누구를 차별하겠습니까? 차별하지 않고 차별 받지 않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이미 죽었고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는 수밖에.


-조재형신부-
신학교에는 전설과 같은 교수 신부님들이 있었습니다. 신약학을 가르치셨던 신부님의 성함은 ‘박상래’ 신부님입니다. 학생들은 신부님의 별명을 ‘박살래’로 부르곤 했습니다. 신부님은 신약성서를 아주 엄하게 가르쳤습니다. 신부님은 성서학에 대한 책을 여러 권 번역하였습니다. 그리스도론도 가르쳤는데 ‘예수’에 대한 책도 번역하였습니다. 신부님의 가르침은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와 같았습니다. 신부님께서 번역하신 책은 젊은 신학생들에게는 죽비와 같았습니다. 신부님은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이끄는 모세와 같았습니다. 광야에서 황금 소를 만들어서 숭배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엄중하게 꾸짖었던 모세와 같았습니다. 40년이 지났지만 ‘복음’에 대한 신부님의 강의가 선명하게 생각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셨던 하느님나라였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행하신 표징이었습니다. 복음은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신부님의 강의는 신학생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라틴어를 가르쳤던 허창덕 신부님이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말로만 엄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행동(?)으로 엄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L’과 ‘R’의 발음을 잘 구별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수업시간에 발음을 시키셨습니다. 발음 구별을 잘 못하면 분필이 날라 오기도 했습니다. 발음 구별을 잘 하면 잠시 웃기도 하였습니다. 사제가 될 사람들이 발음 구별도 못하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북간도에서 사목을 하였습니다. 해방이 되어 북한으로 갔다가 공산주의를 피해서 남한으로 왔습니다. 신부님께서 1년에 한번 ‘순한 양’이 되는 때가 있습니다. 신부님의 생일에 신학생들은 ‘선구자’를 불러드렸습니다. 그때는 돌아온 탕자를 따뜻하게 맞이하였던 아버지와 같았습니다. 신부님은 일생의 숙원 과제였던 ‘라틴어 사전’을 만드셨습니다. 질풍노도와 같은 젊은 신학생들도 신부님 앞에서는 모두 어린양이 되었습니다. 수업시간에 해 보라고 하셨던 ‘랄렐릴롤루’가 문뜩 생각납니다.
군대에서 흔히 듣던 말이 있습니다. “훈련 중에 흘린 땀 한 방울은 전투에서 흘리는 피 한 방울과 같다.” 훈련을 충실하게 받은 군인들은 실전에서 부상당하거나 사망할 확률이 그만큼 적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있던 부대는 상급부대였습니다. 저도 주로 행정업무를 보았습니다. 사격훈련도 거의 하지 않았고, 행군도 거의 없었습니다. 9시에 사무실 출근하고 5시에 퇴근해서 내무반으로 돌아오는 일과였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대통령이 부대를 방문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1달 전부터 전방에서 군인들이 와서 외곽 경계근무를 하였습니다. 가끔씩 사병식당에서 전방에서 온 군인들을 보았습니다. 발걸음도, 행동도, 눈빛도 행정업무를 하는 저희 동료들과는 달랐습니다. 배식과정에서 약간의 시비가 있었지만 한마디로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훈련에서 땀을 많이 흘렸던 군인들이었습니다. 전방에서 온 군인들에 비하면 우리는 소위 ‘당나라’ 군인들이었습니다.
신앙은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물에 물 타고, 술에 술 타듯 대충 넘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결단이고, 행동이며 실천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박해와 순교는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보상 받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도 이 신앙 때문에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고,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기도 했고, 노비로 팔려가기도 했습니다. 이 신앙 때문에 만 명이 넘는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우리들 또한 신앙의 선조들이 걸어온 뜨거운 신앙의 열정을 충실하게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후손들이 우리들의 신앙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제2의 그리스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는 사람들!
-양승국시눕-
여러분들 오늘 예수님의 당부 말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해도 해도 너무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오 복음 5장 44~45절)
생각해보십시오. 내 인생을 완전히 망쳐놓은 사람, 우리 가정을 풍비박산 낸 사람, 사랑하는 내 가족을 사지로 몰아넣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내 눈에 피눈물 나게 만든 사람,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가 안 되는 그 사람을 위해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원수 사랑, 말은 쉬운데, 정말 어려운 숙제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상 불가능한 과제라고 여겨집니다.
요 며칠 백번 천번 생각해도 이해가 불가능한 104주년 삼일절 기념사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성의 없음은 물론이고, 그 내용은 설마 하는 탄식과 함께 눈과 귀를 의심하게 하고, 경악을 금치 못할 표현들로 가득했습니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아랫사람을 극도로 신임하는 것인지? 내용을 읽다 보니, 정말이지 일본 총리의 기념사라고 해도 무방한 내용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지금 일본 내 극우파, 국내 친일파가 극찬하고 있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을 뿐입니다.
조선에 대한 일제 강점의 책임이 야욕과 사심으로 가득 찼던 일본제국주의에 있지 않고, 세계사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우리에게 있었다는 표현은, 일제 강점과 지배를 합리화시키는 그릇된 식민사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저쪽에서는 아직도 우리가 받은 상처와 손해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과도 하지 않고 배상도 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 쪽에서 먼저 일본을 향해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협력 파트너 운운하는 것은, 그들 앞에 먼저 고개를 조아리는 굴종 외교, 종속 외교를 시작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평화롭게 지내던 우리 집으로 옆집 사람들이 담장을 허물고 넘어왔습니다. 집안의 기둥인 듬직한 아들은 꽁꽁 포박해 끌고가 죽였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러운 딸도 끌고가 몹쓸 짓을 하고 팔아넘겼습니다. 집문서 땅문서를 비롯해 쓸만한 가재도구는 다 쓸어갔습니다. 성도 이름도 자기들 것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그토록 끔찍한 만행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고,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는데, 그 피해 가정의 아버지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와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잘못해서, 우리가 힘이 없어서 그렇게 된 일입니다. 이미 흘러간 물입니다. 지난 일 자꾸 되새김질해봐야 좋은 것 하나 없습니다. 그 집 사람들은 이제 아주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제 지난 일 다 잊고 우애 깊은 형제로 지냅시다.”
원수 사랑,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와 만행에 대한 진지한 자기 성찰, 진정성 있는 사과, 다시는 동일한 악행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심, 그에 따른 정확한 손해 배상!
아마도 우리는 지상 생활 내내 근원적 결핍, 근본적 불완전함으로 인해 시달릴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상, 원수 사랑, 진정한 용서는 힘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존재 자체로 불완전하니까요.
언젠가 우리가 지상 여정을 모두 마치고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면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원수 사랑이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그토록 어려워 보이는 원수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느님처럼 완전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도 어제 복음에 이어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여섯 번째의 ‘의로움’인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마태 5,44)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해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똑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며,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만도 아니며,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죄인이기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나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다음에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1코린 4,1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을 넘어 사랑할 때라야 비로소 의로움을 행하게 되고,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소명을 주십니다.
곧 하느님을 본받으라 는 소명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 5,48)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묘하게도, 자신의 결핍을 메울 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비울 때 일어납니다.
자신의 결핍과 한계를 극복하고 채울 때 생기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수락할 때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완전함’이란 그 어떤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있는 채로 완전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기의 결핍을 오히려 타자를 받아들이는 통로로 받아들이는 일이요, 그리하여 부족과 한계를 받아들일수록 온전해지게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부족과 한계는 우리가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선물을 끌어들이는 통로가 되고, 우리의 불완전함은 완전함이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 5,44)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개방할 뿐 아니라 받아들여 수용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변형되게 하소서.
아멘.

「사랑만이 영원하리라」
소공동체 모임의 말씀 나누기에서 나온 얘기입니다. 한 형제님이 “미운 사람을 용서하기가 너무도 힘들다.”그러나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면 자기도 모르게 치유를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분도 그에 공감한다며 “사랑이 중요하다. 사랑을 담아 그를 위해 기도하면 그도 좋아지고 나도 분명히 좋아진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세월이 약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귀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미운 사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어떤 처방을 내렸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5,44-4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원수를 골라서 사랑하라는 말씀도, 원수이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말고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로멘틱한 사랑을 진정한 사랑으로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 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한가할 수 없고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시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참된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따라서 십자의 죽음을 통해 드러내신 사랑,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에 지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 밖에 난 사람에게도 마음을 두어야 하고 허물을 안고 있는 상대방을 보면서 바로 나의 숨겨진 연약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처를 입힌 미운 사람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분명 그의 모습이 곧 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안에도 어둠이 도사리고 있으며 언제든지 걸려 넘어질 수 있으니 그는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는 결국 나를 올곧게 살아가게 하는 빛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감사해야 하고 한편으로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의 허물은 그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이 그를 한순간 이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나를 어렵고 힘들게 하는 사람과 마주치게 될 때 오히려 내 마음의 넓이와 깊이를 확인하는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발점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월이 약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약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결코, 자만하지 마십시오. 방심하면 한순간에 어둠의 세력에 지배당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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