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3월 7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3. 3. 7. 07:11

2023년 3월 7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율법학자들과 바리아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오 23,1-12)

 

“The scribes and the Pharisees

have taken their seat on the chair of Moses.

Therefore, do and observe all things whatsoever they tell you,

but do not follow their example.

For they preach but they do not practic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소돔과 고모라를 향하여, 그들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키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아이를 키운 적이 없어서 그 힘듦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이 키우기가 쉽지 않음을 막연하게 알게 됩니다. 이렇게 어려운 데도 나름 최고의 사랑을 주려고 노력하는 부모님의 모습에 큰 존경심을 품습니다. 무한한 사랑으로 아이를 보살피고 더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부모의 자녀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우선 자신감이 넘칩니다. 그리고 밝고 열정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합니다. 부모가 자기를 지켜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갑곶성지에서 만났던 한 어린아이가 생각납니다. 부모와 함께 성지를 방문했습니다. 정신없이 뛰놀았고 또 어찌나 말을 잘하는지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부모가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잘 놀고 있으니 그동안 성물방에 잠시 다녀온 것입니다. 저와 이야기하며 놀고 있다가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립니다. 엄마 아빠를 찾는 것이었지요. 어느 순간 말이 사라지고 대신 눈물을 터뜨립니다. 잘 놀던 아이가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요? 엄마 아빠가 없다는 생각에, 자기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자신감도 사라졌고 신나게 뛰어놀던 열정도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를 보호해 주고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께서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느님께서는 잠시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물건을 사러 슈퍼마켓에 가시지도 않고, 성물 구입을 위해 성물방에도 안 가십니다. 언제나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자신감을 가지고, 또 열정을 갖고 살 수 있습니다. 또 언제나 함께하시기에 계속 조잘거리며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 대화가 바로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껴야지만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는 어떠했을까요? 혹시 말만 하는 기도가 아닐까요?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일,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일에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말만 하는 기도를 통해서는 아무런 감응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열심히 살았습니다. 누구보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고, 좋은 모범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열심히 했고, 정작 함께하시는 하느님과 함께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하느님께 많은 기도를 하고 있다고 했지만, 자신의 열심만 과시하는 기도의 형식을 띤 ‘말’의 나열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기도를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말만 하지 않습니다. 자신감과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힘차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게 됩니다. 진짜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변화에서 가장 힘든 것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니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가지고 있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존 메이너드 케인스).

교만은 자꾸 무언가 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전삼용신부-

https://youtu.be/1FhI0dGcIL4

 

요즘 스타 배우 유아인 씨의 불법 약물 뉴스가 많이 나옵니다. 불법 약물 뉴스는 어제오늘 일도 아닙니다. 미국엔 대표적으로 린즈리 로핸이 있습니다. 그녀는 1986년 7월 2일 뉴욕에서 태어난 가수, 배우, 여성 사업가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연기와 노래에 대한 열정을 가졌으며, 3살 때부터 모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98년 12살 때, 뮤지컬 'The Lion King'에서 나라 공주 역할로 연기 데뷔를 하였습니다. 연기에서 최고의 스타가 된 그녀는 이제 노래 쪽으로 전향합니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에 틴 팝 스타로 대성 하였습니다. 이어 사업도 하였고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일까요? 그녀는 알코올 중독과 약물 중독으로 수천 번의 사고를 냅니다. 2004년에 발표한 데뷔 앨범 'Speak'는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으며, 'Rumors'와 'Over' 등의 곡으로 히트 차트를 석권하였습니다. 이후 그녀는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셀러브리티와 같은 비즈니스 활동도 하였습니다.

 

린즈리 로핸은 만족을 모르고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범죄, 교통사고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로 인해 인생의 곤경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약물 중독으로 여러 차례 입소하여 치료 받았으며, 불법적인 행위와 법적인 문제도 많이 겪었습니다. 그녀는 무면허 운전, 교통사고, 도난, 폭행, 임신설 등으로 인해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결국 음악 활동에서마저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술기운인지, 약 기운인지 자신과 잠자리를 같이 한 36명의 리스트를 작성했고 이것이 언론에 공개되자 난리가 났습니다. 유명 연예인은 물론 유부남들도 있었고 심지어 이름을 거론하면 안 되는 거물들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리스트를 즉시 부인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임신한 채 술과 담배를 하는 것은 기본이었습니다. 결국 30대에 파산의 길로 들어섭니다. 린즈리 로핸은 자기 행동으로 인해 팬들과 대중들로부터 실망과 비판을 받았으며, 그녀의 인생은 인기의 정점에서부터 인간적인 실패로 끝났습니다.

 

교만은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 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망칩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고 그 이후 모든 인간이 그랬습니다. 이 교만을 꺾어줄 그리스도께서 오기까지는 이 원죄에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닮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며 그것으로 스승이라 불리고 선생이라 불리고 아버지라 불리기를 원합니다. 사실 제가 미사 때마다 외우게 하는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입니다.”는 이들과 같지 않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켜 ‘스스로의 힘으로’ 그런 명예를 얻으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 하느님이 되었습니다.

 

은총은 하느님의 피이고 진리는 하느님의 모범입니다. 하느님의 피를 받은 이들은 자신이 그리스도라 믿으면서도 남들이 스승이라고 하면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그것이 분명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 내 안의 그리스도를 두고 하는 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덕분으로’ 무언가 됩니다. 그래서 남들이 나를 치켜세워주면 가만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교만한 이들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지 못합니다. 믿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에서는 칭찬 받기 좋아합니다. 하지만 겸손한 이들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남들이 칭찬할 때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면 그것이 교만입니다.

나를 낮추려 하지 말고 나를 무언가 되었다고 말할 때 그것에 내가 반응하는지 보아야 합니다. 교만한 자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무언가 되려고 하기에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으면 안 됩니다. 반면 겸손한 이들은 하느님의 살과 피가 아니면 내가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없음을 알기에 칭찬에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누군가가 “어머, 하늘을 날고 계시네요. 정말 대단해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인간을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 칭찬에 으쓱할 수 없습니다. 겸손하여지려면 하늘을 날아야 합니다. 그래야 칭찬에 으쓱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열등한 자신을 끌어올리려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다가 추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이미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면 교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겸손합니다. 내 힘으로 될 수 없는 수준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이기우 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hLx7cKhpSDM

 

​-조재형신부-

사제가 되면 요구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겸손해야 한다. 강론을 열심히 준비해야 한다. 어른들에게 공손해야 한다. 미사를 성심껏 봉헌해야 한다. 재정에 투명해야 한다. 수도자들에게 잘 해야 한다. 이렇게 요구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은 그런 요구사항을 채우지 못하는 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교 오솔길에는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상’이 있습니다. 그것을 매일 읽고 마음에 새기라는 뜻입니다. 사제에게 요구되는 것들 중에 연습해서 잘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판단력’입니다. 의견이 분분할 때 교우들은 사제의 의견을 묻곤 합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사제의 판단을 존중합니다. 세상의 일이 무를 쪼개듯이 확실하면 좋은데 그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덧셈과 뺄셈처럼 딱 떨어지면 좋은데 미분과 적분처럼 복잡할 때가 많습니다. 관계의 문제는 수학의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감정의 문제는 이익과 손해의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이념과 사상의 문제처럼 전부가 아니면 전무의 방식이기에 죽거나 살거나 입니다. 그곳에는 이해와 화합이 자리 잡기가 어렵습니다.

 

제게 의견을 물었던 때가 몇 번 있습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중고등부 여름 신앙학교를 천마산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과 천마산으로 답사를 갔습니다. 저녁에 식사를 하는데 비가 내렸습니다. 교사들의 의견이 둘로 나뉘었습니다. 비가 더 내릴 것 같으니 안전한 곳으로 장소를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을 것 같으니 그냥 지금의 자리에 머물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신학생인 저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하면 좋은지 의견을 물었습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안전을 위해서 자리를 옮기자고 했습니다. 시흥 5동에서 본당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태풍 곤파스로 성당 뒷산의 토사가 밀려와 아파트의 옹벽이 무너졌습니다. 서울시장이 방문했고,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뒷산의 높이를 깎아 내자고 했습니다. 시장도, 구청장도 저의 의견을 존중했고 뒷산이 9m 정도 낮아졌습니다. 덕분에 성당에 마당이 생겼습니다. 사목위원들의 의견이 둘로 나뉘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돈이 들더라도 마당을 좀 더 넓히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지금 정도의 마당도 거져 생겼으니 이쯤에서 만족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본당신부인 저를 보면서 어떻게 하면 좋은지 의견을 물었습니다. 저는 책임을 지더라도 조금 더 마당을 넓히자고 하였습니다.

 

최근에 저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일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명분과 실리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입니다. 왕은 남한산성에 피난을 갔습니다. 대신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명분을 택한 신하들은 끝까지 항쟁하자고 하였습니다. 오랑캐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겨울이 깊어지고, 먹을 것은 없고 왕도 신하들도 궁색하였습니다. 실리를 택한 신하들은 쿨하게 청나라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왕은 궁궐로 돌아갈 수 있고, 전쟁도 끝나니 백성들도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하들은 왕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역사는 왕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도 명분과 실리에 때문에 의견이 둘로 나뉘었던 일을 보았습니다. 명분을 택하면 조금의 손해를 감수 할 수 있었습니다. 실리를 택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분과 실리 이전에 감정이 있었습니다. 명분과 실리 이전에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풀어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감정의 골이 채워지면, 오해가 풀리면 명분도, 실리도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사랑과 겸손이 만나면 명분과 실리는 봄에 눈이 녹듯이 사라질 것 같습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자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 ‘스승’으로 대우받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곧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둘째, “그들이 하는 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곧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셋째, “그들은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

곧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가 참된 스승인가?

첫째, 그는 가르치되, 언행불일치하는 이가 아니며, 남에게 짐 지우지 않는 이입니다.

곧 언행일치, 실천궁행하는 이, 곧 말씀을 성취하는 이요, 타인에게 짐을 지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이 타인의 짐마저 짊어지는 이입니다.

둘째, 그는 일하되, 표리부동과 위선이 없는 이입니다.

곧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아닌 자신을 보낸 분을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 이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의 아버지께 일을 바치는 이입니다.

셋째, 그는 사람들 가운데 있으되 자만과 허영이 없는 이입니다.

곧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이요, 섬김을 받으려하기보다 섬기는 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 것일까를 물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지만, 스승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인생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니, 그들에게 머리 굽히지를 못하기 때문에 오늘도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혹은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기보다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지가 들추어지면 감사하기보다 상처를 받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된 스승이 있는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인가?'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이제 다시 ‘자리’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스승’으로 대우받고자 하였는데, 나는 지금 누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섬김의 종이신 예수님의 자리인가?

 

그리고 섬김을 배우는 제자의 자리인가?

아니면 섬김을 받고자 하며, 가르치며 스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23,11)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권력이 아니라 권위다」

-반영억신부-

살아가면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런 인간의 욕구입니다. 그런데 높아지려고 하다가 하루아침에 낭패를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만족시켜 주면 줄수록 그 요구가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높아지려다가 오히려 푹 떨어지게 됩니다. 그들이 ‘높’자를 거꾸로 하면 ‘푹’자가 된다는 것을 생각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옛말에 권력의 끝자락에서 ‘동문 밖에서 개를 데리고 산보를 하는 것이 좋았을 것을!’하고 후회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욕심을 부리면 결국은 후회하고 맙니다. 공자께서도 “남의 선생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 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망친다고 합니다. 그러니 높아지려고 애쓰며 남을 가르치려 하기보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스승이요, 지도자로 행세하고 남들이 그렇게 인정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권위는 자기가 내세우기보다 남들이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권력과 권위는 분명 다릅니다. 권력을 가졌어도 권위는 살 수 없고, 권력의 힘은 없으나 권위를 가져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2-3).고 하셨습니다.

 

높이 오르면 더 멀리, 더 많이 볼 수 있고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넉넉해지고 자상한 어른이 되어야 하거늘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부끄러움만 더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지만 나와는 무관한 말씀으로 듣고 살아갑니다. 대접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 길을 서슴없이 가는지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스승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8)고 말씀하신 대로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삶으로 사랑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누가 먼저 인사하기를 바라지 말고 먼저 인사할 수 있는 날, 누구에게 무엇을 시키기보다는 솔선수범하는 날, 무엇을 기대하기보다 먼저 베푸는 은총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어떤 젊은이 자기의 전생을 알고 싶어서 유명한 최면술사를 찾아갔답니다. 최면술사는 최면을 걸고 '자. 지금 무엇이 보이나요?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젊은이가 '네. 사람들이 보입니다.'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나요?' 최면 술사가 물었습니다. 다시 젊은이가 대답했습니다. '네, 모두 저에게 절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쁜 여자가 제 앞에서 춤을 춥니다.' 최면술사가 말했습니다. 네, 됐습니다. 눈을 뜨세요! 하나, 들 , 셋.

최면에서 깨어난 젊은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전생에는 왕이었나 봅니다.' 그러자 최면술사가 대답했습니다. ' 아닙니다. 당신은 왕이 아니라 돼지 대가리였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송영진신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여기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자신들의 말이 아니라,

성경 말씀, 또는 하느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누가 전하든지 간에, 또 어떤 사람이 전하든지 간에,

성경 말씀은 성경 말씀이고, 하느님 말씀은 하느님 말씀입니다.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는 “그들처럼 살지 마라.”,

즉 위선자들의 삶을 본받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는 “그들은 말과 행동이 다른,

또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다.” 라는 뜻입니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을, 말만 하면서

아무것도 안 한다는 뜻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엄격하고 철저하게 율법을 실천했던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실천만 따진다면 그들은 세상의 모든 종교인들

가운데에서 첫 번째로 실천을 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실천을 잘했는데, 그러나 그 실천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실천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실천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가짜 실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계명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는 계명이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22,37-40).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율법 실천에는

‘하느님 사랑’도 없었고, ‘이웃 사랑’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엄격하고 철저하게 하느님을 섬겼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냥 ‘위선’이었을 뿐입니다.

(스스로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라고 자처하면서

자기 만족감, 또는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죄인 취급했고, 이웃의 사정에는

관심도 없이 자기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요했습니다.

사랑 없이 이웃을 대하는 그 태도는 바로 ‘교만’과 ‘이기심’입니다.

<‘위선’과 ‘교만’은 항상 짝을 이룹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늘 위선자이고, 위선자들은 늘 교만합니다.

가끔 겸손한 것처럼 보이는 위선자가 있는데, 그것은 칭찬받을

욕심으로 겉으로만 겸손한 척 하는 ‘거짓 겸손’입니다.>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이다.” 라는 말은,

바리사이들이 했던 말입니다.

우리는 계명과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이고,

하느님 뜻도 ‘사랑’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사랑 없이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위선이 될 뿐입니다.

‘실천’을 강조하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왜” 실천해야 하는지,

그것부터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의 ‘사랑’은 세속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믿음’과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사랑(아가페)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믿음을 증명해야 하고,

믿음으로 우리의 사랑을 완성해야 합니다.>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우리는 사랑을 ‘선’과 ‘사랑으로만’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악을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유욕과 집착을 사랑이라고 우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랑은 선과 사랑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왜 실천해야 하는가?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는 방법은,

또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방법은, 사랑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 23,4-7).”

 

여기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표현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인데,

뜻으로는 “자기들은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 같다.”입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실천이 아니라면,

아무리 많이 하고, 열심히 해도, 한 일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라는 말씀은,

“옷을 그렇게 입으니까 위선자다.”가 아니라,

“입은 옷과 실제 삶이 다른 위선자다.”,

즉 “옷을 그렇게 입었어도 실제 삶은 그렇지 않으니까

위선자다.” 라는 뜻입니다.

입은 옷이 문제가 아니라 삶이 문제입니다.

<예의 없게 아무렇게나 입는 것도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들이 윗자리를 좋아하고 인사받기를 좋아한다는 말씀은,

위선자들의 교만과 허영심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좋아한다는 말에는 자기들이 먼저 요구한다는 뜻도 들어 있는데,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주님이신 하느님께도 요구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위선자들은 자기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 같은 기도를 합니다.

(교만과 허영심으로 바치는 것이니,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빈말’일 뿐입니다.)

그러면서 기도를 안 들어 주신다고 불평만 합니다.

감사할 줄은 전혀 모르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