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9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가16,19-31)
If they will not listen to Moses and the prophets,
neither will they be persuaded
if someone should rise from the dea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하시며,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은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는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난 2월에 갑곶성지 영성센터로 피정을 다녀왔습니다. 피정 중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생활했던 공간, 그러나 이제는 전담 신부가 아닌 피정자로 이곳에 오니 기분이 이상하더군요. 성지를 돌아다니며 옛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특히 갑곶성지를 처음 시작했던 초창기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올려졌습니다.
성당이 없어서 야외에서 비 맞으며 미사를 했던 기억, 자전거 타다가 사고 나서 팔목 뼈 골절로 힘들게 지냈던 기억, 여름이면 땀을 흘리며 야외에서 일했던 기억, 성지를 꾸미기 위한 노력 등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순례객이 늘어났고 그만큼 기쁨의 크기도 컸었지요. 사실 당시에는 너무 힘들어서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하소연하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신부들을 만나면 그 신부들은 저의 하소연을 계속 들을 수밖에 없었지요.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시간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렇게 과거를 떠올리며, 과거가 현재가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인데도 지금 내 머릿속에 가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할 수 있는 과거가 있기에, 지금 이 순간에 큰 기대를 하게 됩니다. 지금 산적한 많은 문제, 그러나 이 문제들도 별것 아닌 일이 될 것임을, 그래서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결코 나쁜 시간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나쁜 시간이라고 스스로 이름 지으며 확정 지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런 섣부른 확정이 지금을 멀게만 느껴지는 시간으로 만듭니다. 현재도 멀게 느껴지는데 어떻게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를 떠올리며, 지금 감사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미래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전해주십니다. 이 세상 안에서 부자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고, 라자로는 개들이 그의 종기를 핥고 있을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죽음 뒤에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고, 라자로는 아브라함과 함께 있으면서 행복을 누리고 있게 된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고 살았다면 부자는 라자로를 비참하게 놔둬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좋아하시고 원하시는 사랑을 베풀어야 했습니다. 이 부자가 자기의 다섯 형제에게 라자로를 보내 경고해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가 생각하는 사랑은 자기 자신과 자기와 연관된 사람을 향하고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처지가 이렇게 뒤바뀔 수 있음을 보면서, 지금 우리의 삶을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비참한 삶이 영원하지 않음을, 그래서 그 순간에도 하느님 뜻에 맞춰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밝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미래는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마하트마 간디).
영화 ‘빅 피쉬’(2003)는 아버지의 인생을 그의 아들이 추적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아들 윌리엄은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아버지 에드워드의 매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야기는 허황된 전설적인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으며, 성장하여 기자가 된 아들에겐 거의 헛소리처럼 여겨졌습니다. 아들이 성장할 때 아버지는 거의 함께해주지 못했으며 집에 가끔 올 때마다 그런 허황된 이야기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아들은 결국 아버지가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했고 그런 아버지와 3년째 대화를 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암에 걸려 생이 얼마 안 남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임신한 애인을 데리고 아버지에게 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이 큰 물고기에게 반지를 빼앗겨 그것을 잡느라고 엄마와 결혼식도 못하고 아들이 태어날 때도 함께 해 주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아들은 화가 났지만, 기자 답게 차근차근 아버지의 기록들을 훑어봅니다. 그랬더니 분명 진실은 아니었지만, 그 이야기들에 진심이 담겨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가 했던 모든 이야기는 결국 사실에 기반하여 1%의 이야기로 각색되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군대에 가시느라 어머니와 결혼식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또 외판원으로 전국을 떠돌아야 했기 때문에 자신과 함께 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미안함을 이야기를 만들어 풀어주었던 것입니다.
아들은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이냐고 묻는 아버지의 질문에 작가 답게 맺어줍니다. 바로 자신이 아버지가 만났던 동화 속 모든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서 아버지를 강물에 담가주니 아버지가 커다란 물고기가 되어 다시 강으로 돌아간다는 결말입니다. 아버지는 자기 이야기에 동참해주는 아들에게 흡족해 합니다.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장차 태어날 자신의 아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줘야할지 상상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다 허황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어떤 것들은 진실은 아닐지라도 하느님의 진심이 담겨있습니다. 교회 전통적인 성경을 읽는 법은 ‘읽기(Lectio)-묵상하기(Meditatio)-기도하기(Oratio)-관상하기(Contemplatio)’의 4단계입니다.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아버지의 말씀은 읽기입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아버지의 삶을 조사하며 그 이야기들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찾아내는 과정이 묵상입니다. 그런 다음 아버지의 이야기를 완성 시켜가는 단계가 기도입니다.
기도는 거의 ‘봉헌’과 같은 의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으니 감사한 마음이 들고 그것에 내가 가진 것을 보태드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미사로 치면 성경을 읽는 것이 읽기이고 강론을 듣는 것이 묵상이며 봉헌을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관상을 무엇일까요? 아버지가 한 것처럼 나도 자녀에게 하는 것입니다. 곧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알아가든, 하느님을 알아가든 이 네 단계를 거스르거나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대표하는 부자는 묵상과 기도의 단계는 뛰어넘고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곧 라자로를 부활시켜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분명 우리 입장에서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면 믿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이야기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그 표징을 이해할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무서워서 부활한 라자로에게 물건을 집어던지게 될 것입니다. 먼저 그 부활의 상징에 접근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동조한다는 의미로 나도 무언가 보태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헌입니다. 말씀의 전례는 봉헌으로 이어져야 하고 봉헌 없는 성체는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부활을 믿지 못하는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말씀부터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성경을 가슴 뜨겁게 해석해 준 것에 고마워 음식을 대접해드리기 위해 자신들의 집에 초대했을 때 그들은 부활의 표징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루카 24,13-35 참조). 엠마오의 제자들은 성경을 잘 알았습니다. 이미 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묵상을 시켜 봉헌하게 하셨습니다. 그제서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톨릭 교리서는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라고 가르칩니다. 곧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분께 봉헌하지 못하면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도 하느님처럼 된다는 것을 좀처럼 믿기 어렵습니다. 내가 봉헌하는 것을 그분이 받는 것을 보아야만 그분이 나와 다른 차원의 존재가 아님을 믿게 됩니다.
그런데 그 봉헌은 감사해야 나옵니다. 감사하려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평일 미사 때 거의 봉헌을 하지 않습니다. 봉헌하지 않으면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다시 성체 안에서 표징을 발견하고 믿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여 감사한 봉헌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복음의 부자처럼 될 것입니다. 미사 때 봉헌의 의미를 다시 되살리는 사람들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체는 끝까지 의미 없는 형식에 머물게 됩니다. 말씀을 다시 살려냅시다. 그 증거는 빅 피쉬의 이야기를 끝낸 아들처럼 감사의 봉헌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2020년 8월에 부탁을 받고 부르클린 한인 성당 미사를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3달만 도와주려고 했는데 어느덧 3년이 되었습니다. 한국으로 치료차 간 신부님은 몸이 아파서 돌아 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도 코로나 팬데믹으로 신문 홍보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인연이 되었고, 저는 ‘Part time priest’로 임명을 받아서 미사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교우들도 다른 대안이 없으니 저를 본당 신부로 대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셨으니 지난 3년을 무탈하게 지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은 시작이 있으면 마침이 있기 마련이니 언젠가 저도 신문사 임기가 마쳐지면 부르클린 미사도 다른 신부님이 오시리라 생각합니다. 돌아보면 부르클린 한인 성당은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제가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LA에 신문 홍보를 하면서 저와 비슷한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미국에 공부하러 왔는데 본당 신부님이 몸이 아파서 3개월간 미사를 도와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본당 신부님이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고, 신부님은 교구로부터 임명을 받지는 않았지만 계속 미사를 도와주고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신부님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신부님의 따뜻한 마음이 공동체에 위로와 기쁨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교황님께서 사순시기 담화문에서 ‘부자와 라자로’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부자에게 라자로는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내준 선물을 소중하게 간직하듯이, 우리는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선물로 알고 잘 도와 드리고, 그분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부재로 미사를 못 드리는 성당이 있습니다. 사제에게 그런 본당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선물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도와주면 됩니다. 연금을 낼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료보험료를 지급할 형편이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그런 분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이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몇 년째 아파서 누워계시는 가족도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선물입니다. 직장을 얻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자녀도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선물입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 3수를 하는 아들도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선물입니다. 원망하고, 무시하고, 짐으로 여기면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서 무척 서운해 하실 것입니다. 감싸주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면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서 그런 우리를 보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오늘의 복음 환호송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부자와 라자로’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라자로는 현실의 삶에서는 병들고 가난하게 살았지만 죽어서는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반대로 부자는 현실의 삶에서는 부유하게, 편안하게 살았지만 죽어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부자가 라자로를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선물로 알고 기쁜 마음으로 도와주었다면 부자도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을 얻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재물의 십일조, 노력의 십일조, 봉사의 십일조, 재능의 십일조, 시간의 십일조를 생각합니다. 이것은 결코 내가 가진 것을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결코 썩거나 상하지 않는 하늘나라의 곳간에 우리의 마음을 쌓아 놓는 것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그 선물을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재물의 양면성 앞에서
-양승국신부-
부(富)는 사실 좋은 것입니다. 어느 정도 재물이 있어야 인간적인 품위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궁핍한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봉사활동을 하는데 있어서도 어느 정도 돈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 그리고 건전한 방법으로 축척한 재물은 주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전한 재물로 인생을 즐기는 것도 참 좋은 것입니다. 내가 매일 땀 흘려 모든 돈으로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은 취미생활도 하고 삶을 만끽하는 것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은 재물에 대한 과도한 집착입니다. 돈이면 다, 돈이 최고라며 돈에 모든 것을 거는 그릇된 신조입니다. 재물을 주님이나 신앙보다 더 위쪽에 두는 황금만능주의를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돈 좀 있다고 해서 없는 사람 업신여기는 부자들, 가까운 동료 인간들이 저리도 경제적 어려움 앞에 저리도 힘겨워하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하는 부자들,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측은지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부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는 강력합니다.
“애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주님께서 오늘 부자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다리 하나를 놓는 것입니다. 부자들의 세상과 가난한 사람들의 세상을 갈라놓은 구렁 그 위에 다리는 하나 놓은 일입니다. 사랑의 다리, 관심의 다리, 나눔의 다리, 측은지심의 다리...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여겼는데 천국에서 주님 품에 안겨 호강을 하고 있는 라자로,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다고 확신했던 부자는 지옥불의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영원불변의 진리를 떠올립니다.
주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방식과 인간의 방식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말씀을 듣고 걱정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선이라야 부자라고 할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나름의 부를 축척하고 계신 분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지탄받고 저승에서 영원한 고통을 겪을 부자는 조금도 나눌줄 모르는 인색한 부자였습니다. 지척에서 고통받고 있는 동료 인간을 향한 자비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향한 갑질과 횡포, 고성과 폭력이 일상인 분들, 지금이라도 지난 부끄러운 삶을 성찰하고 회심하며, 새 삶을 시작할 때, 늦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도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극단적인 두 인물의 대조된 모습을 통해, 불신과 재물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우리를 하느님의 말씀에로 초대합니다.
이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루카 16,20)
부자는 가련한 라자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자신과 라자로 사이에 골짜기를 파놓고 분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이승에서 파놓고 건너가지 않은 그 분리의 골짜기는 저승에서도 그가 건너갈 수 없는 분리의 골짜기가 되고 맙니다.
사실 이 부자는 특별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재물을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고, 타인에게는 무관심하고 인색했습니다.
곧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대문 앞에 누워있는 가난한 라자로를 무시하고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할 바를 다한 것이 아니라, 선행과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곧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
(야고 4,17)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죄임을 말해줍니다.
그가 심판받은 것은 그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하지 않은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마시되 자신의 혀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자비를 입어 부자가 되었으니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죽어서 아브라함에게 한 말, 곧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6,24)라는 간청은 ‘제가 자비를 베풀게 해주십시오.’ 라는 간청으로 바뀌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부자가 대문 앞에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로 누워있어도 못 본 것은 자신의 호사스러움과 즐거움, 탐욕과 인색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형제들 사이에, 또 가난한 이들과의 사이에, 냉대와 무시와 무관심의 골짜기를 파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곧 저승에서의 골짜기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라자로’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라자로가 구원을 입은 것이 그의 가난하고 고통 받은 삶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과 자비를 입은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의 호의와 사랑을 입고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그렇습니다.
라자로가 은총을 입은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승에서 처지가 뒤바뀐 부자는 자기 형제들에게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루카 16,29)
부자는 이승에 살고 있는 자신의 형제들의 회개를 위해서 라자로를 보내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브라함은 이승에서는 이미 하느님의 말씀이 있으니,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덧붙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카 16,31)
사실 우리가 당신을 믿지 못함은 기적을 보지 못했거나 듣지 못했거나 체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듣고 보고 체험하고도 받아들이지를 않는 완고함 때문일 것입니다.
곧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에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복되다.”
(루카 11,28)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루카 16,20)
주님!
마음의 눈을 열어 타인의 처지를 볼 줄 알게 하소서.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고, 자신의 혀만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게 하소서.
재물을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않게 하시고, 탐욕에 빠지지 않고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악을 저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시고,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천국 본향에 대한 믿음」
-반영억신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은 어떠한 시련의 십자가도 이겨낼 힘을 줍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본향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세상과 타협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희망은 온갖 환난을 이겨내는 힘이며 능력입니다. 현세의 이익과 행복을 뛰어넘는 고달픔을 차지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세상을 소중히 여기지만 결국은 관리를 하다가 하느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매순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해야 하고 그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부와 가난을 견주어 ‘복이 있는 사람’, 복이 없는 사람, 혹은 ‘팔자가 좋은 사람,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은 그 생각을 바꾸도록 안내합니다. 부자는 잠시 호화로운 삶을 즐기다가 영원한 고통을 안게 되었고 반면 라자로는 잠시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특별히 어떤 잘못을 범했다거나 선행을 하여서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살다 보니까 한 사람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한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하느님께 간절히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이렇게 다릅니다. 부라는 것이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5).
잠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분명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혹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에 겨워 이웃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너무 힘들어 절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고 살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관심이 죄입니다.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누구의 가르침도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6).
지금 힘든 이들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그리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요한12,24). 그리고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10,22). 그러므로 시련을 만나게 될 때 하늘을 바라보며 신뢰를 다져야 하겠습니다.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는 말씀을 기억하시죠. 라자로는 이름이 드러나는데 부자는 이름이 안 드러나네요.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시련도 유혹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유익한 것입니다.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됩니다”(집회2,5). 예기치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깨어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한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천국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지금 여기서 주님의 마음에 들게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보다 세상을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앵무새를 키우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앵무새도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고 따라했습니다.
젊은이는 살기가 너무 힘들어 신부님을 찾아 상담하기로 작정하고 앵무새를 안고 사제관으로 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사제관에도 앵무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젊은이의 앵무새가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제관의 앵무새가 답례를 하였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 “내 힘들다!”고 낙심하지 말고,
거꾸로 “다들힘내!”라고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라고 가르치시자(루카 16,13),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루카 16,14).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루카 16,15)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을 꾸짖기 위해서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그래서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일차적으로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을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재물을 섬기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드러나게 표시 나는 죄는 짓지 않으면서,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겉으로만 자선을 실천하는 위선자들입니다.
<겉으로 드러나게 표시 나는 죄가 없으니, 그들은 스스로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다.” 라고 자처하고 있고,
속마음은 어떻든지 간에 겉으로는 율법을 잘 지키고 있으니,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경건한 신앙인이다.” 라고 잘난 체
하고 있고, 율법에 정해져 있는 대로 자선 실천도 잘하고 있으니,
“나는 이웃 사랑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다.” 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교만과 위선과 허영과 착각이 그들의 ‘큰 죄’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비참한 상황을 말씀하신 것은,
‘부자의 죄’를 부각시키기 위한 ‘상황 설정’ 같은 것입니다.
그 부자가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는 말은,
날마다 잔치를 했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구약성경 욥기 1장 4절에 나오는 잔치가 연상됩니다.
‘욥’은 ‘동방인들 가운데 가장 큰 부자’였고(욥 1,3),
‘하느님께서 인정하신 의인’이었습니다(욥 1,8).
사람들 가운데에는 욥이 ‘큰 부자’였다는 것만 생각하고,
욥처럼 의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욥기에 언급된 잔치는 욥의 잔치가 아니라 아들들의 잔치입니다.)
라자로가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는 말은, 부자가 오며가며 라자로에게 빵조각을
던져 주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도 아주 조금씩.
부자는 그렇게 하면서 자기는 이웃 사랑 실천을 잘하는
‘착한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사랑 실천이 아닙니다.
개에게 던져 주듯이 빵조각을 조금 던져 주는 행위 자체가
이웃을 모독하는 일이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큰 죄’입니다.
개들까지 와서 라자로의 종기를 핥곤 했다는 말은, 부자의 개들이
라자로를 괴롭혔다는 뜻이기도 하고, 부자가 던져 주는 빵조각을
개들이 빼앗아 먹어버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부자가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그것은 개들이
잘못한 것이지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이중 삼중으로 죄를 지은 일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개들’은 우상 숭배자들을 뜻합니다.
여기서도 그런 뜻이라면, 그 ‘개들’은 부자의 반려견이 아니라,
잔치에 참석한 이방인들(우상 숭배자들)입니다.
그리고 개들이 라자로를 괴롭혔다는 말은, 그자들이
라자로를 조롱하고 업신여기면서 괴롭혔다는 뜻이 됩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비유에 나오는 부자처럼 살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라자로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라자로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만 참아라. 하느님 나라에서 복을 누리게 될 테니.”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실제로 라자로 같은 처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이웃이, 또 공동체가 나서야 합니다.
라자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숙제입니다.
우리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라는
예수님 말씀을 명심해서 실천해야 합니다.
라자로가 곧 예수님입니다.
<내가 지금 라자로 같은 처지에 있다면?
하느님을 원망하지 말아야 하고,
또 끝까지 믿음과 희망을 버리면 안 됩니다.
너무 힘들어서 희망을 버리고, 인생을 포기하고 싶더라도,
절망과 포기도 큰 죄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자가 죽어서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은(루카 16,23),
분명히 사는 동안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
사실 그 벌은 그 자신이 자초한 것입니다.
“나는 잘못한 일이 없다.” 라고 항의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심판 때에는, 지은 죄를 처벌하는 일보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는 일이
먼저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면,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스스로 하느님을 피해서 숨으려고 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 부끄러움이 가장 큰 형벌이 될 것입니다.
회개는 우선 먼저 자신의 죄를 찾아내고,
그 죄를 부끄러워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죄가 없다고 생각하면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위선자들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3년 3월 11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0) | 2023.03.11 |
---|---|
2023년 3월 10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0) | 2023.03.10 |
2023년 3월8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0) | 2023.03.08 |
2023년 3월 7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0) | 2023.03.07 |
2023년 3월 6일 사순 제2주간 월요일 (0) | 2023.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