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3월 11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3. 3. 11. 07:17

 

2023년 3월 11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루카. 15,1-3.11ㄴ-32)

While he was still a long way off,

his father caught sight of him, and was filled with compassion.

He ran to his son, embraced him and kissed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미카 예언자는, 주님께서는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고 돌아온 아들을 맞아 주는 아버지의 비유를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에비앙 생수 광고에 이런 문구가 있다고 합니다.

“자랑하고 싶은 매끈한 피부. 에비앙 천연 광천수를 하루에 1리터씩 추가로 마신 사람 가운데 79%는 피부가 눈부시게 부드럽고 촉촉해져 결과적으로 더 젊어 보이는 효과를 경험했다고 보고합니다.”

이 문구를 보고 나서 에비앙 생수와 우리나라 생수 중에서 무엇을 손에 쥘까요? 과학적 연구 결과에 관심을 가지면서 기왕이면 피부가 좋아진다는 에비앙 생수를 선택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이라도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다른 생수라도 하루에 1리터씩 마시면 에비앙 광고와 똑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은 에비앙 광고를 보고서는 이런 다른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런 착각 속에서 살 때가 많습니다. 다양한 길이 있음에도 하나의 길만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도 정말로 다양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는 방식과 다르다고 상대의 방식을 “틀렸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좋아하는 기도방식이 있습니다. 조용히 침묵 속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에서 큰 기쁨을 얻습니다. 영화를 보면 쉽게 잠듭니다. 아무리 시끄러운 영화라도 집중하지 못하고 졸고 있습니다. 눈으로 그리고 귀로 들어오는 정보가 많아지면 잠드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신나게 찬양하는 성령 기도는 조금 힘듭니다. 그렇다고 성령 기도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는 분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기도회에서 강의를 요청하면 시간이 허락한다면 무조건 갑니다.

다양한 길이 항상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이를 이해하는 길이 생기게 됩니다. 단지 나와 다른 길을 갈 뿐인 것을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 길에도 주님께서는 함께하십니다.

되찾은 아들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착한 아들은 누구일까요? 분명히 큰아들입니다.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착한 아들만 자기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였습니다.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아들이 왔다고 살진 송아지를 잡으면서 잔치를 벌이십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행동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버지는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상관없이 큰 사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랑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우리 모두에게 큰 희망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관점에서 쉽게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심지어 하느님께도 원망의 목소리를 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칭찬해주는 사람이 되자. 그러면 그만큼 당신의 잠재력이 개발될 것이다(데일 카네기).

자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꿈을 결정해줘도 될까?

-전삼용신부-

https://youtu.be/vu3hbN45F7s

 

​테니스 선수인 세레나 윌리엄스(Serena Williams)는 그랜드슬램 대회 23회 우승(여자 단식), 올림픽 금메달 4회, WTA 투어 우승 73회, 더블스 23회 우승을 하였고, 언니 비너스 윌리엄스(Venus Williams)는 그랜드슬램 대회 7회 우승(여자 단식), 올림픽 금메달 4회, WTA 투어 우승 49회, 더블스 14회 우승을 하였습니다. 두 자매가 나란히 세계 랭킹 1위와 2위를 유지하였습니다. 특히 세레나 윌리엄스는 여자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는 한 집안에서 두 명의 모차르트가 태어난 것과 같은 일이라고 합니다.

 

이 두 위대한 자매를 키워낸 아버지가 리차드 윌리엄스입니다. 리처드는 두 자매가 태어나기 전부터 위대한 스포츠 스타로 만들 꿈을 가졌습니다. 자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래도 되는 걸까요? 심한 인종차별을 겪고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던 리처드는 자신은 그렇지 않겠다고 두 딸을 믿고 둘 다 최고의 선수로 키워냈습니다. 이는 인종차별에 막힌 흑인들에게 자신의 딸들이 희망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렇다고 역 인종차별자라 볼 수 없습니다. 두 자매가 승리를 거듭하며 자신들이 이긴 백인 선수들을 조롱하자 아버지는 엄하게 야단칩니다. 그리고 항상 겸손을 강조하고 두 자매가 경쟁하되 서로 가족임을 잊지 않도록 교육합니다.

 

두 자매의 지금 심정은 어떨까요? 자신들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테니스를 시킨 것에 후회하고 있을까요? 자신들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엄청난 부와 명예, 그리고 모든 흑인들에게 희망이 된 두 자매는 자신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런 꿈을 꾼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할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인생을 선택하여 살았다면 지금처럼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도 아버지에게 보이는 존경과 사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자신의 개인적인 영광을 위해 딸들을 이용하였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자신처럼 힘들게만 살아야 할 것이라고 여기면 더 나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들이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을 믿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테니스라고 정한 것은 큰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세 자매를 모두 위대한 체스 그랜드 마스터로 키운 아버지 라슬로 폴가의 예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천재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이들 아버지의 자녀에 대한 꿈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은 뒤로 미뤄두고 싶습니다. 적어도 자녀들은 아버지의 믿음대로 큰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판단하지 않는 것 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믿어줘야 합니다. 그것이 방향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어쨌거나 자녀를 인도해줘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무시하면 자녀는 올바르게 클 수 없습니다. 이는 부모가 잘못된 표지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는 자녀를 판단하지 않고 자녀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더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잘못된 표지판이 있는 도로보다는 표지판 없는 도로가 낫지만, 표지판 없는 도로보다는 제대로 된 표지판이 있는 도로가 낫습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종교도 자녀들에게 자유를 주어 자녀가 커서 선택하게 하겠다는 부모의 입장에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의 믿음은 어쨌거나 자녀의 표지판입니다.

 

오늘은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의 비유 대상은 이 비유에 나오는 형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상징입니다. 그들은 죄인들의 회개를 보고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부모라면 자녀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자녀는 낮은 자존감으로 살 수밖에 없고 삶도 그 믿음대로 됩니다.

 

우리들도 돌아온 탕자를 정죄하지 않고 인정하시는 아버지를 본받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인정해주시는 분이시지 정죄하지 않습니다. 정죄하는 자는 그것을 통해 자신을 높이려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정죄하지 않음을 넘어서서 아버지처럼 인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까지 부모가 자녀의 삶의 방향까지 정해주어야 하는지는 잘 모를 일이지만, 일찍 시작하면 그만큼 잇점이 있기에 빨리 정해주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한국 남자 스노보드 이채운(17·군포 수리고) 학생이 한국 설상 종목 사상 최초로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런 선수들의 아버지는 어떨까요? 모두 자신보다 자녀가 더 나을 것이란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빨리 캐치하여 자녀를 그 길로 가게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저는 ‘부모가 자녀의 미래까지 결정해 줄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표지판이 잘못된 것보다는 표지판이 있는 것이 낫고 – 이것은 자녀를 심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 또 남들처럼 똑같이 공부시켜 경쟁시키기 보다는 더 명확한 표지판이 되어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아버지의 역할은 판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당신 백성을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소서

- 이기우 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l9_UFxyZGOM

 

​-조재형신부-

LA에서 미술관을 보는 것은 기쁨입니다. 지난번에는 ‘게티 센터 (Getty Center)’ 미술관을 보았습니다. 높은 언덕 위에 있어서 전망이 좋았고, 정원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소장된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게티 미술관은 석유 사업으로 부자가 된 게티가 설립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이룬 부를 예술을 통하여 나눈다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어렵다고 하였지만 이렇게 자신이 이룬 부를 이웃을 위해서 나눌 수 있다면 부자도 쉽게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노턴 사이먼 미술관(Norton Simon Museum)’ 미술관을 보았습니다. 신문에 글을 주시는 부제님과 함께 갔습니다. 미술사를 전공하신 부제님은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보는 만큼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만큼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부제님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면서 작품을 보니 새롭게 보였습니다. 지하에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노턴 사이먼 미술관은 부동산 사업으로 부자가 된 노턴 사이먼이 작품을 기증하면서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기만 한다면 부자도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야기의 구조는 간단합니다. 철부지 아들, 싸가지 없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성실한 큰 아들과 철부지 둘째 아들에게 유산을 똑같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큰 아들은 유산에 상관없이 아버지의 집에서 성실하게 일하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유산을 받아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거지꼴이 되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자비로운 아버지는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줍니다. 옷도 주고, 반지도 주고, 잔치를 벌여 줍니다. 큰 아들은 밭에서 일하다 돌아와서 동생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벌여 준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와는 달리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큰 아들의 불만은 성실하게 일한 자기를 위해서는 잔치를 벌이지 않았던 아버지가 방탕한 둘째 아들이 돌아오니 잔치를 벌여 준다는 것입니다. 큰 아들의 불만도 이해가 갑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큰 아들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을 달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것은 모두 너의 것이 아니냐?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성서를 보면 죄를 지은 이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벨을 죽인 카인은 형제간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말했으니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다윗은 충실한 부하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고, 그의 아내를 취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남용했으니 겸손하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잡혀가는 스승을 위해서 함께 하지 못하였고, 도망을 갔습니다. 정의롭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들의 잘못과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죄를 벌로 다스리지 않으시고,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잘못한 이들이 자신의 잘못을 겸손하게 뉘우치는 것입니다. 카인은 자신의 죄가 크지만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닭이 울자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둘째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머슴으로라도 살겠다고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대하는 큰 아들을 봅니다. 큰 아들의 가장 큰 잘못은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동생을 받아들이고 아낌없는 사랑을 주시는 것, 그와 같은 판단을 하는 분도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 큰 아들처럼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의 기준으로 우리의 잣대로 규정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하느님을 따르면서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하심에 맡겨드릴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두려움의 집에서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복음서 안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비유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대목이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 스토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말이지 단출합니다. 첫째 아들, 둘째 아들, 그리고 아버지입니다.

 

전에는 이 비유를 묵상할 때마다, ‘나는 과연 첫째 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내 안에는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아버지가 동시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죄 없다고 큰소리치며, 돌아온 동생을 손가락질하는 큰아들의 모습과 크게 가슴치며 탄식하는 작은아들의 이미지, 그리고 사랑밖에 모르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동시에 들어있습니다.

 

사실 큰아들은 작은아들보다 더 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판공성사 좀 보라고 외쳐도 ‘나는 아무 죄가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판공성사 본 지가 5년, 10년이 넘었는데도 말입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선량한 이웃들을 큰 궁지로 몰아넣는 패악을 저질러놓고도, 반성하기는커녕 큰소리치고, 의기양양하게 활보하는 적반하장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 큰아들입니다.

 

우리는 부단히 큰아들에서 작은아들로 넘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큰아들에서 작은아들로 넘어온 이후에 또 한 가지 과제가 생깁니다.

 

날이면 날마다 ‘나는 큰 죄인이다.’‘나보다 더 큰 죄인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라고 외치기만 하면서 살아서는 또 안 될 일입니다.

 

이제는 작은아들에서 아버지에게로 넘어갈 순간입니다. 죽을죄를 짓고 돌아왔지만, 두 손을 활짝 벌리고 뛰어나와 맞이하신 아버지의 크신 자비를 온몸으로 느낀 작은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그 한없는 따뜻함, 그 극진한 환대를 이제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용서받은 자로서 이제 밥 먹듯이 용서할 때입니다. 치유 받고 구원받은 자로서 이제 틈만 나면 치유와 구원의 손길을 펼칠 때입니다.

 

탕자의 귀환을 통해 드러난 영적 순환(큰아들☞작은아들☞아버지), 그것은 오늘 우리네 일상생활 안에서 부단히 되풀이되어야 할 아름다운 스토리입니다.

 

“참된 신앙은 두려움의 집에서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계시는 사랑 자체이신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헨리 나우웬 신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엄격함이 아니라 자비의 영약을 사용해야 합니다. 온유하고 참을성 있고 선하고 자비로운 교회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요한 23세 교황)

「사랑을 기억하라」

-반영억신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하느님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 해도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죄의 유혹에 떨어졌을 때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벗어나 숨게 됩니다. 내가 그분을 멀리할 뿐입니다. 나를 애타게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램블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을 좋아합니다. 그 그림은 바로 오늘 복음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품에 안기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아버지의 눈은 사시가 된 채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나 간 아들이 그리워 마음과 눈이 늘 아들에게로 향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한결같고 또 그칠 수가 없는 법입니다. 무릎을 꿇은 작은 아들은 다 닳아버린 신발 때문에 발바닥을 드러낸 채 아버지의 가슴에 모두를 맡겨버렸고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봅니다. 한 구석에서는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한 여인이 이 장면을 애달프게 지켜보고 있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아닐까? 아니면 방탕한 삶을 멀리하는 표현일까? 생각해 봅니다.

 

아들이 용서를 청하든 그렇지 않든 돌아온 것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의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며 내가 알기도 전부터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아버지가 계심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매끈한 오른손을 통해 어머니의 사랑을, 투박한 왼손이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은 지팡이를 쥔 채 멀뚱멀뚱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회개한 작은 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옛 생활을 버리고 아버지께 돌아왔는데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집의 풍요로움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집의 처지가 밖에 보다 못하였다면 그는 아버지 집을 찾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넉넉함을 기억한다는 것은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큰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아버지는 바로 우리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작은아들이 배고픔에 지쳐 돼지나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허기를 채우려고 하였을 때는 집 밖으로 나온 것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회개한 것은 아마도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하고 연습한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라고 하시며 먼저 받아주셨을 때일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사랑을 느꼈을 때 옵니다.

 

그런데 두 아들이 모두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루카15,12). 하여 자기 것을 챙겨서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좋을 대로 한 것입니다. 반면 큰아들은 아버지의 품 안에 있으면서도 그 사랑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15,29). 하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몸은 같이 있었으나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있었습니다. 이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큰아들의 마음에는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은 받아야 된다는 보상심리가 잠재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아들을 종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종처럼 살았으니 오랫동안 아비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사람을 살았습니다. 바로 그 두 아들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아들이든 작은 아들이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아버지 품을 그리워 하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 품에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해 주신 이유를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의인이라고 자처하며 목을 뻣뻣이 하고 있는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교만함이 자리하고 있다면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