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3월 23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3. 3. 15. 05:22

2022년 3월 23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마태 5,17-19)

Whoever breaks one of the least of these commandments

and teaches others to do so

will be called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규정과 법규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역사 안에서 우리는 대단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예술, 과학, 정치, 문화 등, 역사 안에서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천재일까요? 타고난 능력이 그들을 거장으로 만든 것일까요?

저는 이들이 대단한 천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저같이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의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시스티나(Sistina Chapel) 성당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그림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안다면 나를 천재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뛰어난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물도 만들 수 없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본인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충분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노력했고, 비로소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 속의 위인은 자기가 원하는 결과에 도달할 때까지 이렇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본인의 능력 없음을 생각하기보다 조금 더 노력하지 않았음을 반성해야 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도 우리의 노력 없이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사람이 과연 주님의 현존을 지금 삶에서 체험할 수 있을까요? 지금 어렵고 힘들어도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또 그 뜻을 실천해나가는 사람만이 주님의 현존을 느끼며 지금을 잘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주시고,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완성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사랑을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철저하게 사랑을 주십니다. 심지어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으시는 사랑을 주시면서,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역시 가장 작은 사랑이라도 철저하게 실천할 때,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라고 불리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안일한 마음이 아니라, 어떻게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만이 큰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늘나라에서 큰사람 대접을 받을 사랑 실천에 계속해서 노력하고 계십니까?

우리만이 사랑할 수 있고, 이전에 그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할 수 없었으며, 이후에 그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할 수 없음을 믿을 때 진정한 사랑의 계절이 찾아온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가장 작은 계명’은 어떤 계명을 말하는 것일까?

-전삼용신부-

https://youtu.be/7P0CwwNedac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우리는 작은 계명조차 어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작은 계명일까요? 우선 큰 계명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큰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조금 더 작은 계명은 그것을 열 개로 나눈 십계명이고, 더 작은 계명은 그것을 더 세세하게 나눈 613개의 계명이며, 더 작은 계명은 관습법이나 전통입니다. 그러니 아주 세세한 사랑의 계명까지 다 지키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율법의 가장 작은 계명까지 철저히 지키는지 모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안식일 법을 만들어 놓고 철저히 주님을 생각하며 쉽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도 철저합니다. 그들만큼 작은 계명까지 철저히 지킨 사람들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보며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고 하시기는커녕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리가 과속하지 않고 신호등을 잘 지키는 것이 가장 작은 계명까지 지키는 일일까요? 아닙니다.

 

JTBC ‘신성한 이혼’에 나오는 첫 번째 에피소드입니다. 변호사 신성한은 ‘결혼은 신중하게, 이혼은 신속하게’란 모토를 걸고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 중입니다. 이때 유명한 라디오 DJ 이서진이 자녀의 양육권을 자신이 갖게 해 달라며 이혼 소송을 청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외도하여 그 동영상이 이미 인터넷에 유포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의 양육권을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래서 처음엔 승리할 수 없다고 그녀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은 지독한 의처증 환자였습니다. 전화를 30분마다 하며 누구와 있느냐고 보고하게 하였고 속옷까지 사진을 다 찍어두었으며 포스트잇을 하루에도 수십 장씩 써서 모욕감을 주었습니다. 심지어 바람피운 엄마와 살겠다는 아들에게 엄마의 유포된 동영상을 보여주기까지 하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이서진 씨가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파렴치한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정에 충실하다고 여겼던, 그리고 겉으로는 그랬을지 모르는 남편이 사랑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행동으로 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인 하지 말라는 계명을 화를 내지 말라는 계명으로 만드십니다. 또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음탕한 욕망을 지니지 말라는 계명으로 만드십니다. 어떤 이들은 생각이나 마음으로는 미워하면서 행동으로 사랑의 행위를 한다면 그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인 줄 압니다. 행위가 크고 생각이나 마음은 작은 것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갈라 3,10)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작은 계명은 마음입니다. 마음에서부터 하느님을 사랑하고 마음에서부터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다음이 생각으로 짓는 죄이고 그다음이 행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행위에 집중할 때 우리는 마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까지도 계명을 어기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인간의 마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장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그래서 타인을 높게 봅니다. 믿기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작은 계명까지 지키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을까요? 부모로부터 양식을 먹고 가르침을 받아 내가 부모처럼 인간이라 믿고 부모를 닮으려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그렇게 나의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영하고 말씀을 배웁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느님이라 고백하며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그러면 그분의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작은 계명까지 어기지 않도록 사는 방식이고 그런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 불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큰 민족이 되는 길

-이기우 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l4oZbqmqwrI

 

​-조재형신부-

이번 LA 신문홍보를 하면서 마음이 따뜻한 교우 분들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제가 사제이기 때문에 기꺼이 머물 곳을 마련해 주셨고, 음식을 주셨고, 차량 봉사를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우 분들은 불편했음에도 기쁜 마음으로 저를 받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분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시고, 진실한 신앙을 보시고 축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는 밭에 숨겨져 있는 보물과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교우 분들의 가정에서 하느님께서 숨겨 놓으신 ‘보물’을 찾았습니다. 그 보물은 책 속에 있었습니다. 첫 번째 보물은 정의채 몬시뇰과 차동엽 신부님의 대담을 엮은 ‘모든 것은 은혜였습니다.’입니다. 저는 그 책속에서 정의채 몬시뇰의 깊은 지성과 미래에 대한 통찰을 보았습니다. 두 번째 보물은 류시화가 옮긴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 책속에서 ‘세계는 원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야기들로 이루어져있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사순시기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입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교구장님들은 ‘담화’를 발표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 정순택 베드로 주교님은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 5,8)”라는 성서말씀으로 담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주교님은 특별히 사순시기에 미사참례를 열심히 하기를 당부하였습니다. 미사는 말씀과 성체라는 보물이 묻혀있는 밭이기 때문입니다. 춘천교구 김주영 시몬 주교님은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성령으로 굳건해진 신앙 감각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개인과 공동체로서 주님께 충실하면서 살고 행동하고 말하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식별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신앙 감각은 모든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와 함께 생각하며’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목표를 나누도록 해 주는 본능이다.(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 128항).”라는 신앙 감각을 강조하였습니다. 주교님은 특별히 사순시기에 말씀을 통하여 신앙 감각을 키워가기를 당부하였습니다. 인천교구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님은 “숨겨진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해 주소서.(시편 19,13)”라는 성서 말씀으로 담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숨겨진 잘못에서’ 우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께 다가서도록 당부하였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에 묻혀있는 보물은 ‘하느님의 계명과 율법’입니다. 오늘 독서는 율법과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으로 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지 않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은 축복의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살인하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고, 남의 재물을 탐하지 않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않는 사람은 축복의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보물을 찾으려고 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입니다. 앞서가는 사람은 끌어내리고, 뒤에 오는 사람은 밀쳐내면서 성공이라는 바벨탑에 오르려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이라는 바벨탑에 오르려 합니다. 위선과 가식으로 치장된 명예라는 바벨탑에 오르려 합니다. 그런 보물은 우리를 축복의 땅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런 보물은 우리를 무한경쟁의 싸움터로 내몰기 마련입니다. 그런 보물 때문에 아름다운 자연은 훼손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푸른 지구는 병들고 있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우리가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면 새벽 세 시에도 달려와 주시는 아버지!

-양승국신부-

 

묵상할수록 감사의 정이 저절로 솟구치는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읽을수록 충만한 위로가 피부로 와닿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신명기 4장 7~8절)

 

요즘 특별히 더 감사한 시절입니다. 여러 이단들과 사이비 종교들이 판을 치는 우리나라입니다. 꽃 같은 우리 청춘들을 현혹시켜 인생을 파탄시키는 사탄이요 괴물의 민낯을 보고 있자니, 분통이 터져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가톨릭 신앙은 조금 밋밋한 감은 있지만, 얼마나 보편적이고 상식적인지, 얼마나 편안하고 안심이 되는지 모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생각만 해도 마음 든든한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신명기 말씀처럼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아파 신음할 때면 새벽 세 시라도 달려와 주시는 아버지요 어머니 같은 분이십니다.

 

아동 생활 시설에서 사목할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지도자의 눈길이 뜸해진 순간, 답답함에 온몸을 뒤척이던 아이들은 가출을 시도합니다.

 

맨몸으로 나가다 보니 오래 가지 않아 도벽으로 이어지고, 지역 파출소로부터 연락이 옵니다. 연락이 오면 새벽 두시건, 세시건 가리지 않고 기쁘게 출동합니다. 아이들에게 미리 한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가출하더라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 연락하거라. 새벽 두시건 세시건 아무 때나 괜찮으니.”

 

우리의 하느님도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파 신음할 때, 우리가 큰 곤경에 처해있을 때, 언제든 우리가 그분을 부르면, 지척에 계시다가 즉시 달려와 주시는 따뜻한 아버지 같은 주님이십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

-이영근신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 5,17)

이는 복음을 예표하고 있던 구약의 율법이 이제 복음 안에서 완성(실행, 성취, 채워짐)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에 쓰인 당신에 관한 말씀들이 일어나도록 하심으로써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셨습니다.

곧 온몸으로 율법과 예언을 실행하셨습니다.

진정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실행하는 이의 복됨을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

(마태 5,19)

이는 ‘먼저’ 계명을 ‘지키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안 것을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지킴으로써 계명을 ‘실행’하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렇게 실행으로 가르치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 그레고리우스는 “설교자에게는 법이 하나 있는데, 설교하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는 법이다” 말한 바 있습니다.

유명한 설교가였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도 말합니다.

“가르치는 바를 행동으로 파괴시킨다면, 사람이 법을 안다고 자랑하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실현됩니다.

곧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안에서 실현됩니다.

 

그러니 주님의 계명을 안 이는 먼저 계명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행하는 이라야 진정 가르치는 이가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한다는 것은 진정한 사랑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

(1요한 2,5)

그래서 그는 복음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요한 14,21)

하오니, 주님!

제가 말씀의 계명을 스스로 지킴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이가 되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비록 작은 것 하나에라도 깊은 사랑을 담고 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마태 5,19)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제가 행동으로 가르치게 하시고,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게 하시고,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최종목적지는 사랑입니다」

-반영억신부-

율법은 삶의 규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 생활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주신 성스러운 법령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의 율법은 613개 조항에 이릅니다.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개 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이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십계명이 되고, 더 줄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됩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무시하거나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의미를 알고 지켜야 합니다. 정신을 알고 지키면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그러나 율법이라는 도구를 절대시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멀어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형식화됩니다. 따라서 껍데기만을 지킬 것이 아니라 내용을 지켜야 합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자체이십니다. 우리가 가야 할 최종목적지도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계명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계명 준수만으로는 율법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도 법이니까 지킨다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안전과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나의 생명을 지키는 차원에서 지킨다면 그것은 큰 사랑의 행위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사소한 것이라고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되지만 동시에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5,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말은 덧없이 지나가고 사라지지만 예수님을 통하여 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최종적인 하느님 뜻의 계시자이기에 우리의 길이요 진리이십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 안에서 언행일치의 삶을 살고 있는가? 지금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사는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은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하시고 가장 사소한 것이 가장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큰사람은 행동으로 말합니다.

 

성경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여러분은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마르12,32-33). 는 것을 잊지 말고, 사랑을 실천하여 율법을 완성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과 율법』

-송영진신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율법이나 예언서들’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구약성경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사이들은,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을

폐지하려고 하는 이단자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들이나 장애자들을 고쳐 주신 일 때문에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이 부딪친 일이 많은데, 그럴 때마다

바리사이들은 죄인이라고(이단자라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요한 5,16).”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요한 9,16).”

그래서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폐지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왔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을 비난하는 자들을 향해서 반박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 미완성 상태여서 당신이 그것을

완성해야 한다는 뜻도 아니고,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당신이 그 부분을 채우려고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여기서 ‘완성’은 ‘완전한 실천’을 뜻하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불완전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인도하기

위해서 당신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어느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을 때(마태 12,1),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보고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마태 12,2).

그때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배가 고팠을 때 한 일을

예로 들면서(마태 12,3) 제자들을 옹호하셨습니다.

이웃의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는 것만 생각하는 것은

‘사랑 없이’ 법만 내세우는 것이고,

그것은 율법을(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과 말씀은 ‘사랑으로 실천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없으면 실천이 아닙니다.

실천이 아니면 그것은 무엇인가?

율법주의자들의 자기 만족감일 뿐입니다.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상황이어서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보았다면, 우선 그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안식일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바로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은

‘사랑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과 말씀에서 사랑을 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지극 정성으로 계명들과 율법들을 지킨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그냥 위선일 뿐이고, 남들에게 지키라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그냥 종교로 포장된 폭력일 뿐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이 말씀에서도 ‘율법’이라는 말은,

율법들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뜻과 말씀’의 ‘시간적인 영원성’을 강조하는

말씀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계시된 ‘하느님의 뜻과 말씀’은 어느 누구도 변경하거나

축소하거나 변질시키거나 폐지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해석’의 경우는 어떤가?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은 일인데, 그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성경을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번역과 해석의 차이로 자꾸만 종파 분열이 일어납니다.

구약성경이든지 신약성경이든지 간에 성경을 해석할 때의

기본 원칙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입니다.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표현만 보면,

마치 율법주의자들의 말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니고,

뜻은 “아무도 축소하거나 왜곡하거나 변질시킬 수 없다.”입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는

계명들과 율법들이 필요 없다는 뜻일까?

그 나라는 모든 것이 완성된 나라이고, 완전해진 사람들만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계명들과 율법들이 없어도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의 뜻과 말씀대로 잘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필요 없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 말씀은, 자기들 마음대로 ‘큰 것(중요한 것)’과

‘작은 것(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계명들과 율법들을 분류한 다음에,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라고 분류한 것은 무시하고

안 지키는 자들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은 큰 것과 작은 것이 따로 없다.

전부 다 똑같이 크고 중요하다.”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자기 혼자서 죄를 짓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자를 뜻합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라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에는 ‘큰사람’도 없고 ‘작은 사람’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