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3월 17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3. 3. 17. 05:36

2023년 3월 17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코 12,28ㄱㄷ-34 )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The second is this: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re is no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호세아 예언자는,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릴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큰 계명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호세아 예언자는,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릴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큰 계명이라고 하신다(복음).

의인들은 올곧게 주님의 길을 따라 걸어가리라

-이기우 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eLd4HZoUjOU

 

​-조재형신부-

LA 신문홍보 마지막 날은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한인성당으로 미사를 갔습니다. 프란치스코 성당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신부님이 사목하는 성당입니다. 미사 전에 신부님은 수녀님과 함께 성무일도를 하였습니다. 교우 분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운율에 맞추어서 성무일도를 하는데 마치 천상의 소리 같았습니다. 신부님과 수녀님이 성무일도를 하는데 교우 분들이 자발적으로 함께 하였다고 합니다. 고급 음식점에서 본 음식을 먹기 전에 전식을 먹듯이 미사 전에 성무일도를 하니 미사의 분위기가 더 그윽하게 느껴졌습니다. 미사 전에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교우들이 함께 성무일도를 한다면 신앙생활의 멋과 맛이 더욱 깊어질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왜 이 거친 광야로 왔느냐? 화려한 것들은 궁궐에 있지 않느냐?”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거친 광야를 포기하고 화려한 궁궐에 머물 때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저는 미사 전에 하는 성무일도에서 ‘광야’를 보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아시리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아시리아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그것은 부, 권력, 명예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양다리를 걸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나의 희생과 나의 봉사는 원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해지기 보다는 행복해지기를 먼저 원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택하여야 하는 것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밤새 울어도 짜증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아파서 병원엘 가야 할 때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 먼 길 바래다주면서 기분나빠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몇 시간씩 공항 대합실에서 출장 갔다 오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는 비행기가 연착되었다고 해서 지루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다림은 설렘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이 가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예전에 즐겨 들었던 노래가 있습니다. 제목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오늘은 그 노래를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 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온 마음과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가 전해 주는 가장 큰 가르침입니다.

​언젠가 이 긴 고통이 끝나면 우리는 그분 정원의 나리꽃처럼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호세아 예언자는 우리가 그릇된 길을 접고 주님께로 되돌아설 때, 주님께서 건네시는 은총과 축복이 얼마나 풍요롭고 황홀한 것인지에 대해서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을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호세아 예언서 14장 6~7절)

 

생각만 해도 든든하고 감사의 정이 솟구치는 표현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모든 지역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많은 지역이 강수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부족한 강수량을 보완해주는 장치가 있습니다. 바로 새벽녘에 내리는 풍부한 이슬입니다. 지역에 따른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많게는 연중 250가량 이슬이 내리기도 합니다.

 

이슬 그거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이슬로 말미암아 나리꽃도 살고, 올리브 나무도 살고, 무화과 나무도 살아갑니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메마르고 척박한 우리네 인생길이지만, 마냥 죽어라 죽어라 하지 않습니다. 생각만 해도 든든한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의 버팀목이 되어 주십니다. 기묘한 방법으로 어떻게든 견뎌내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시고, 환경을 만들어 주십니다.

 

언제나 이 쌩고생이 끝나려나... 힘겨워하시는 분들 많으십니다. 견뎌내야 할 이유와 가치조차 찾기 힘든 고통을 직면하느라 휘청휘청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너무 상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길고도 고통스런 현실을 눈여겨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잘 파악하지 못하지만, 주님 당신 특유의 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돕고 계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언젠가 이 긴 고통이 끝나면 우리는 그분 정원의 나리꽃처럼 활짝 피어나고, 한 그루 싱싱하고 푸르른 올리브 나무처럼 서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호세 14,10)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화답송에서는 “내가 주님, 너희 하느님이다.”(시 81,11)라고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마르 12,29)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먼저 ‘존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곧 행동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우리 주님’이라는 그분의 존재 차원을 밝히십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의 존재의 차원도 밝혀주십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의 소유’라는 것을 밝혀줍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마르 12,34)고 할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아마도 율법학자에게 있어서 아직 사랑의 실천이 남아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아직 더 확장되어야 할 사랑의 계명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구약의 ‘사랑의 계명’은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에서는 ‘이웃 사랑’을 동포 사랑(레위 19,18)과 함께 사는 이방인들(레위 19,34)에 한정시키고 있다면, 신약에서는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으며(루카 10,30-37), 나아가서 원수까지도(마태 5,44)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합니다(마태 5,48).

 

또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레위 19,18)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 15,12)하여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사랑의 시금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신명기(6,4-5)의 ‘하느님 사랑’과 레위기(19,18)의 ‘이웃 사랑’을 한데 묶으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같아집니다.

 

물론 이 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나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암수동체와 같은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 24항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나의 일부인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 되고, 하느님 사랑이 곧 형제 사랑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이중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곧 ‘남’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31)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