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9월 17일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2. 9. 9. 06:33

2022 9 17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서

발에 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가 쪼아 먹기도 하였다.

(루가 8,4-15)

 

“A sower went out to sow his seed.
And as he sowed, 
some seed fell on the path and was trampled,
and the birds of the sky ate it up.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다며 부활을 강조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을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는데, 막달레나를 비롯해 여러 여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든다(복음)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좋은 땅에 떨어진 것만으로는 씨앗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간직하고 또한 인내하여야 멋진 열매를 얻어 만납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의 경청이 아니라 말씀의 체화입니다.

많은 이들이 인문학적 소양을 쌓으려 합니다. 근사한 지식의 열매를 삶의 풍요로움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 가려 하지요. ‘진즉에 공부를 좀 더 할 것을’ 하는 후회가 다양한 지식을 쌓는 열정으로 거듭나기도 합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도 그러하였습니다. 힘든 시대일수록 지식인의 똑 부러진 단언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겠지요.

사람들 사이에서 예언자로 이름을 날리셨던 예수님께서는 ‘씨앗의 비유’에서 말씀의 체화를 당부하십니다. 속 시원한 삶의 해답을 다른 이에게 얻는다고 네 삶이 달라질 것은 없다, 저 스스로 자신만의 고유한 열매를 얻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의 화려한 언변은 아무 쓸모가 없다며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십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그것이 길이든 바위든 가시덤불이든 아니면 좋은 땅이든 삶의 우연과 결을 같이합니다. 누구든 이 집안, 이 사회, 이 나라에 태어나고파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곳이 어디든지 일단 그곳에 떨어진 이상, 그곳에서 나만의 열매를 맺고 고유한 삶의 가치를 건져 내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타인의 지식을 배워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지식이 우리 안에서 소화되어 체화될 때, 우리는 구원을 얻어 누립니다.

구원은 본디 제 모습으로의 회복입니다. 다른 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과 쾌락과 유혹에 흔들려 자신을 잃어버린 이에게는 말씀도 구원도 열매를 맺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먼저 나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과 좋은 땅이 있다고 한들, 열매 맺는 내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저널리스트 찰스 두히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습관은 우리 뇌에 자리를 잡는 순간부터 우리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의식조차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이 말에 크게 공감이 갑니다. 갑곶성지에 부임해서 사제관에 들어갔을 때 커다란 텔레비전이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워낙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또 이제까지 텔레비전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재미있는 것 하나?’라는 생각으로 전원을 켜고 채널을 돌리다 보니 재미있는 것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온종일 텔레비전을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를 위한 것은 하나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저를 위해 해 오던 기도, 묵상, 책 읽기 등이 텔레비전 시청보다 뒷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 뒤에, 텔레비전을 치워 버렸습니다. 아예 없어져야 제가 살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담배를 끊은 후에 오는 금단현상처럼 허전함이 가득했지만, 어느 순간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습관이 생기면서 이제 더는 방송 내용이 궁금하지도 않고 보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습니다. 대신 저를 위한 다른 생산적인 일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습관을 지녀야 할까요? 혹시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습관에 빠진 것은 아닙니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씨 뿌리는 분이 바로 주님이시지요. 그리고 씨는 주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씨가 뿌려진 곳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여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땅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길바닥, 바위, 가시덤불과 같은 상태가 된다면 좋은 씨인 주님의 말씀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내 마음이 주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땅이 될 수 있도록 좋은 습관을 간직해야 합니다. 나쁜 습관을 간직하게 되면 결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텔레비전만 보는 사람이 주님과의 대화 시간을 만들 수 있을까요? 돈에 대한 욕심이 가득한 사람이 이 재화를 이웃 사랑을 위해 쓸 수 있을까요? 게으름이라는 습관을 지니고 성실하게 주님의 뜻을 따를 수가 있을까요?

좋은 땅은 우리가 간직하는 좋은 습관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습관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습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


단점보다 장점을 보세요.

SNS(Social Networking Servic)를 하다가, ‘1년 전 오늘의 추억’이라는 게시글이 올라온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1년 전에 이 SNS에 올렸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진을 보면서, ‘맞아. 작년에 이런 일이 있었지.’ 하면서 1년 전 오늘의 일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 괴로웠던 일을 올리면, 매년 그 사진을 괴로워하면서 봐야 하잖아?’

원치 않은 기억이 나타나서 하루를 힘들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또 다른 피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디지털 시대가 편하고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잊을 수 있는 것도 잊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어떤 것이든 장단점이 있지 않을까요? 단점이 있어도 장점이 있으므로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단점보다 장점을 보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줍니다.
 

좋은 땅이 되는 길; 하느님은 정의로우시다는 믿음

-전삼용신부-

 

 몇 년 전 돌아가신 한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1등을 놓쳐본 적이 없고 서울대에 들어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못 하는 것이 없었던 분입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을 접고 목사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문제는 이분이 칼뱅의 ‘예정설’에 지나치게 빠져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도 예정설을 바탕으로 해석합니다.

       예정설은 좋은 땅을 만들어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주체는 땅이 아니라 농부이고 그 농부가 뿌리는 씨라는 것입니다. 예정설은 주님께서 나쁜 땅도 구원하고 싶으면 구원하고 좋은 땅도 구원하기 싫으면 구원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길이나 돌밭에 씨가 뿌려져도 그 씨가 길을 부드럽게 만들고 돌을 깨서 좋은 땅이 되게도 하며, 그 씨가 뿌려지지 않은 땅은 땅이 좋더라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씨가 땅을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좀 억지가 심합니다.

 

      이분은 결국 좋은 땅이었는지, 나쁜 땅이었는지는 몰라도 우울증을 겪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인을 인간이 감히 판단할 수는 없겠으나, 어쩌면 참 좋은 땅이었음에도 잘못된 믿음으로 점점 나쁜 땅에 되어버린 사례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땅을 좋게 만들려는 노력보다는 씨의 힘에만 집중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좋은 땅이 되어 더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노력해서 좋은 땅이 되면 그만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믿음입니다. 하늘은 땀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공평한 분이시라 노력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농부는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베트맨으로 유명한 ‘크리스찬 베일’은 궁핍한 가정형편 때문에 연기를 일찍 시작한 배우입니다. 어렸을 때는 명성을 얻었지만, 청소년기는 그저 연기가 평범하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의 연기가 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한 이유는 그의 연기에 대한 자세의 변화 때문입니다. 극사실주의 연기자로 변신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이를 메소드(인물 몰입형) 연기라고 하는데, 극 중 인물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방법입니다. 그는 55kg, 81kg, 100kg의 몸무게를 영화 때마다 맞춰 만들어냈습니다. 싸이코를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매일 싸이코처럼 살았고, 배트맨을 연기하면서는 목소리가 안 나올 정도로 목을 긁어댔으며,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을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하루 두 시간씩만 자며 살았습니다.

 

      물론 좀 지나친 모습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혹사하는 데는 하나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노력한 만큼 보답이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몇 달 동안 참치 한 캔과 사과 하나만 먹으며 체중을 55kg으로 감량했을 때, 그는 가장 큰 행복을 느꼈다고 합니다. 마음의 고요와 평화를 느낀 것입니다. 이런 감정이입 연기를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연기 때문에 오는 결과 때문이었습니다. 좋은 땅을 만들면 그만큼 좋은 열매가 맺힙니다. 씨가 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땅이 열매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씨는 어디에나 뿌려집니다. 하느님은 공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느님이 공평하다는 믿음을 갖기에는 너무나도 잔인합니다. 흙수저, 금수저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하느님은 불공평해 보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하느님은 공평하십니다.

 

      뇌성마비로 전신을 움직일 수 없는 송명희 시인이 있습니다. 그녀가 ‘나’라는 유명한 시를 쓴 이유는 주님께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재물도 없고 능력도 없지만, 주님께서 사랑해주시니 행복하다는 내용입니다. 그때 “공평하신 하느님”이라는 말은 좀처럼 쓸 수가 없었습니다. 끝까지 저항하다 그 글을 썼을 때 한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녀가 유명해지자 미국에 사는 한 부부가 그녀를 고쳐주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송명희씨는 “저는 주님께서 주신 몸에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주신대로 살아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해설을 제자들에게만 해 주십니다. 그 이유를 이사야 예언서를 반복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이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신다는 불공평한 말로 들리시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각자의 자유였습니다. 하느님은 그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십니다. 그래서 가리옷 유다 같은 사람도 사도로 뽑혔을 것입니다. 당신께 더 머물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노력에 합당하게 보답해 주시는 이것은 예정설과 같은 차별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노력에 합당한 보답을 주신다는 주님 정의로움에 대한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앞에 나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여 맺은 열매를 들고 주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로또처럼 요행을 바라지 맙시다. 열매는 주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노력이 결정합니다. 주님은 노력한 만큼 갚아 주시는 정의롭고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이 믿음이 우리가 점점 더 좋은 땅이 되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땀은 결코 배신하는 일이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요즘은 비밀의 숲을 보고 있습니다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검사와 경위의 이야기입니다극중에 검사장으로 승진한 검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법불아귀(法不阿貴), 승불요곡(繩不撓曲)” 중국의 사상가 한비자의 말입니다. ‘법은 귀한 자에게 아부하지 않고 먹줄은 굽은 모양에 따라 사용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장인이 건축할 때 반드시 자를 기준삼고먹줄에 굽음이 없는 것 같이 법은 귀한 사람만 봐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강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한비자가 2,300년 전에 한 말입니다검사장이 한비자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아직도 법이 귀한 자에게 아부하고약한 자에게는 냉정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흔히 이런 상황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도 합니다이는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그 권력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언론인들이 늘 마음에 두는 말이 있습니다. “직필인주(直筆人誅), 곡필천주(曲筆天誅).”입니다중국의 고서 춘추(春秋)의 춘추직필(春秋直筆)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직필(直筆)은 사람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곡필(曲筆)은 하늘로부터 천벌을 받는다.”라는 말입니다한 언론인은 벽에 이런 글을 걸어 놓았습니다. “기자정신이 투철한 참 언론인은 늘 부정한 권력에 맞서 싸우며 정의(正義)의 진실을 혼으로 써서 세계역사에 남기는 기록자로서 국민의 알권리와 시대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언론은 2의 신()”이라는 말도 있습니다언론이 가지고 있는 힘이 크기 때문입니다언론이 사회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언론이 역할을 충실하게 하면 사회는 균형과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언론이 어두운 곳을 비추면 밝게 빛날 것입니다언론이 부패한 곳을 비추면 사회는 정화될 것입니다언론이 바른 길을 가면 진실을 깨우치는 목탁이 될 것입니다안타깝지만 우리의 언론이 직필인주와 곡필인주의 정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도 현실입니다국민들은 언론의 정의가 실현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제자들에게 비유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뿌리는 분은 하느님이라고 하셨습니다밭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길가에 뿌려진 씨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세상의 것에 마음이 빼앗겨서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가시밭에 뿌려진 씨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지만 유혹이 다가오면 쉽게 하느님의 말씀을 버리는 사람입니다시련과 고통이 다가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세상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입니다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이런 사람은 말씀이 열매를 맺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변화되고이웃에게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서 열매 맺어야 합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지지만 길가에 뿌려진 씨앗처럼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지 못하는 신앙인이 있습니다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유혹과 시련이 다가오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신앙인이 있습니다우리는 모두 말씀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열매 맺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우리가 맺을 열매는 세상에서의 재물명예권력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우리가 맺을 열매는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 유혹과 시련을 이겨내고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①말씀에 대한 환영 ②말씀에 대한 순응 ③말씀에 대한 충실 ④말씀에 대한 실천!

 -양승국신부-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당연히 믿어야 할 불변의 진리이자 신조인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신비 앞에 어느 정도 확신을 지니고 있는가요?

 

언젠가 그간 우리가 깃들었던 육신의 장막이 허물어지는 날, 주님의 자비와 은총에 힘입어 우리의 영혼은 불사불멸하며,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는 진리에 대해서는 또 몇 퍼센트나 신뢰하고 계시는가요?

  

언제나 진리 앞에서 긴가민가, 알쏭달쏭한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는 확신에 찬 어조로 외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토 15장 42~44절) 

 

곰곰히 돌아보니 이 세상 저 너머의 또 다른 세상은 외면하고, 이 세상이 전부인양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이 세상 좋은 것들에 푹 파묻혀 살아가다보니, 내게 주어진 이 세상의 시간들이 조금씩 지나가는 것을 크게 슬퍼합니다.

  

이 세상에 목숨을 걸다보니 청춘이 가고 젊음도 가고, 하루 하루 육신이 조금씩 소멸되는 것을 그리도 아쉬워했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사라지게 될 육체의 건강에만 몰두했지, 정작 중요한 영혼의 건강은 뒷전이었습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 우리의 이 소중한 육체를 경시한다거나 차원 낮은 대상으로 바라본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로운 대상입니다. 존중받고 사랑받고 길이 보존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들의 이 육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창조물 가운데 으뜸인 너무나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문제는 지나침입니다. 지나치게 한쪽으로 편중됨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과는 완전 결별하고, 오로지 본능적·세속적·향락적·하위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권고인 것입니다.

  

루가 복음 사가의 표현대로 우리 각자는 하느님에 의해 지상에 뿌려진 한알의 씨앗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씨앗을 뿌리고 가신 후 악마가 나타나 활약을 시작합니다. 

 

악마는 더 이상 어마무시하게 흉흉하고 기이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세상의 좋아 보이는 것들로 가장하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를 항구하게 주님 앞에 머물지 못하게 유혹합니다. 수시로 우리 눈앞에 나타나 알짱거립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인 것입니다. 

 

씨앗은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서 아무 탈없이 무럭무럭 성장합니다. ①말씀에 대한 환영 ②말씀에 대한 순응 ③말씀에 대한 충실 ④말씀에 대한 실천

 

-조욱현신부-

 

복음루카 8,4-15: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5나가 땅에 씨를 뿌린다씨가 땅에 떨어지면 주님의 섭리에 따라 싹이 돋고 자라나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우리가 들은 말씀은 우리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려 행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그러므로 우리에게 뿌려진 씨앗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어떤 것은 백 배어떤 것은 예순 배어떤 것은 서른 배”(마태 13,8)의 열매를 맺는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비유의 뜻을 물었을 때제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하시며 비유를 설명해 주셨다우리도 믿음을 가지고 그 말씀을 실천하려 노력하면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신다그 신비는 믿음과 행실을 통하여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길에 떨어진”(12씨앗은 악마가 쉽게 채간다땅이 굳어있기 때문에 씨가 심어지지 않는다마음이 굳어있고 고집스러운 사람들은 거룩한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그들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자신을 스스로 더러운 마귀에게 어울리는 짓밟힌 길바닥과 같이 되고 만 것이다뿌리를 내릴 수 없게 된 그 씨앗은 악마가 곧 채가고 만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뿌리가 없어서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다.”(13성당에 나와서는 신자처럼 행동하지만교회를 나오자마자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잊고 예전의 습관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사람이다더구나 박해가 일어나고진리의 원수들이 교회를 공격할 때에는 싸움에 나서기보다 도망치고 마는 사람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14말씀의 씨앗이 제대로 자리 잡고 싹을 틔운 것도 있다그러나 세상 걱정과 재물과 쾌락이 그것의 숨을 막아 쓸데없는 부분만 웃자라 말라버리는 현상이다세상일에 대한 걱정과 부자 되려는 욕망은 말씀의 씨앗을 숨 막혀 죽게 하는 가시덤불이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이제 기름지고 잘 가꾸어진 땅에서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좋은 땅에서는 뱁 배의 결실이라는 것으로 보아 그 땅은 기름진 땅임을 알 수 있다돌과 가시덤불과 해로운 모든 것을 없앤 마음이라는 밭에 떨어진 말씀은 뿌리를 깊이 내리고건강한 싹이 나 자라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나는 이 네 부류 중에 어디에 속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지금부터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면서백 배의 열매를 맺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자.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 15)

-한상우신부-

모자람과
서투름 사이에
우리가 있다.

삶에 서툰
우리들이다.

아직도 삶을
모르는
우리들이다.

점점 바르고
착한 마음을
잃어가는
우리들이다.

점점 소중한
것을 듣고
간직하며 사는

인내의 마음까지
놓치며 사는
우리들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이란
말씀의
연속이다.

사랑하기에
말씀이 있고
사랑하기에
좋은 열매를
맺으려한다.

말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동안 말씀을
많이도 놓치며
살았다.

말씀으로
열매를
맺는다.

자연스러운
말씀의
열매이다.

땅은 열매로
드러나고
드러난 열매는
땅을 다시
성찰케한다.

모든 열매는
말씀의
열매이다.

좋은 땅은
인내의
사랑이다.

사람의 삶이
말씀의
열매이다.

말씀을 듣고
간직해야할
오늘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주님의 적극적인 불굴의 열성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루카 8,8)

성경 안에는 예수님의 큰 목소리가 들리는 대목이 가끔 등장하는데, 오늘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알아듣기를 간절히 바라시기에 그렇게 외치실 겁니다. 이 외침에는 군중의 무관심하고 건조하고 냉랭한 마음의 벽을 뚫으시려는 절절한 바람이 묻어납니다. 

"길, 바위, 가시덤불"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는 씨가 자랄 수 없는 세 종류의 환경이 등장합니다.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기는 하지만, 짓밟히거나 말라버리거나 숨이 막히는 고통 속에서 씨앗이 새 생명을 틔우지 못하고 죽게 되는 상황들입니다. 
 
"악마, 시련의 때,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
따로 비유의 뜻을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풀어서 설명해 주십니다. 우리 마음에 심어진 말씀이 맥없이 스러지게 되는 원인들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 요소들은 인생길에서 우리 힘으로 피해가거나, 없는 듯 무시해버릴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까지 포함해 삶이니까요.

'씨뿌리는 사람'의 모습을 관상합니다. 또 씨앗이신 말씀,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관상합니다. 그분은 땅을 가리지 않으십니다. 길바닥이건 바위건 가시덤불이건 개의치 않고 뿌려지십니다. 충분히 대접도 받고 이익이 될 곳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셔도 그러지 않으시지요.

그분은 짓밟히고 먹히고 말라버리고 숨막히는 고통에 삼켜지거나, 설령 죽음까지 당하게 되더라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지치지 않고 우리의 딱딱한 길바닥같은 마음, 물기도 온기도 없는 돌같이 굳은 마음, 세속적 욕망과 탐욕의 가시덤불이 무성한 복잡한 마음을 마다하지 않고 오시고 또 오십니다.

긴 세월 동안 말씀은 번번이 우리에게 거절당하고 외면 받고 문전박대를 당해오셨지요, 하지만 그분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마음이 당신을 받아들여 품고 새 싹을 틔울 때까지, 열매를 맺을 때까지 다가오고 또 다가오십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분이시랍니다!

제1독서에는 대비되는 개념이 반복되어 등장합니다.

"썩어 없어질 것, 썩지 않는 것"
"비천한 것, 영광스러운 것"
"약한 것, 강한 것"
"물질적인 몸, 영적인 몸"
"첫 인간 아담, 마지막 아담"
"생명체, 생명을 주는 영"
"물질적인 것, 영적인 것"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 하늘에서 오신 분"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본래적으로 타고난 육적인 생명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될 영원한 생명을 이처럼 구체적 언어로 대비시켜 반복합니다. 전자에 나열된 내용들이 우리에게 퍽 익숙한 인간의 실존적 상태라면, 후자에 나열된 말씀들은 은총으로 얻는 새 희망의 실체들입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1코린 15,49)

오늘 제1독서의 대목은 양 극단의 개념들이 이처럼 조화하고 통합될 가능성을 제시하며 마무리됩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육의 지배를 받는, 물질 세상에 속한 인간이지만,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고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지요.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루카 8,15)

땅의 토질이나 상태를 가리지 않고 당신 자신을 던지신 말씀께서 비로소 생명을 틔우실 곳을 만나십니다. 이 땅에서는 그간 겪으신 짓밟힘도 질식도 죽음도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그분이 온전히 받아들여지시고 녹아들어 씨앗과 땅이 한몸이 됩니다.

육의 조건에 갇힌 우리와 영이신 말씀께서 함께 머물며 서로에게 스며들어 하나가 되는 곳이 곧 성경이 "좋은 땅"이라 일컫고 그분이 열렬히 갈망하는 우리의 존재입니다.

이는 흙으로 된 우리가 영이신 말씀을 품을 때 일어나는 신비입니다. 우리가 나약하고 불결한 육적 조건을 떼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조건 안에 하늘을 품고 함께 변모하는 것이지요. 하늘에 속한 분의 모습을 담아, 그분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벗님! 내가 어느 땅인지, 무슨 땅이었는지 아픈 과거를 헤집으며  뉘우치느라 귀한 기도의 시간을 흘려버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는 이미 좋은 땅입니다. 우리가 지닌 인간적 한계와 죄스러움을 활짝 열어 말씀을 품고 머무르면 잠시 피폐해지고 퇴락했던 땅은 본래의 제 모습을 되찾을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치유하도록 내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이 희망을 이야기하러 여기 모인 것이지요.

말씀이신 그분이 지치지 않으시니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분은 짓밟혀 죽더라도 우리에게 뿌려지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시니, 그분께서 이토록 적극적으로 우리 구원을 위해 다가오시는데 걱정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벗님! 우리에게 오신 말씀을 겸손히 듣고 소중히 받아안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불확실성과 고통, 근심으로 복잡한 지상 생활에 지쳐가더라도, 하늘을 품을 수 있는 이 놀라운 신비에 감사드리며 마음껏 누립시다. 이 여정을 통해 부족한 우리가
 "그분의 모습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 말씀 안에서 지치지 말고 서로 격려하며 함께 나아갑시다.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하늘 냄새 언뜻언뜻 풍기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제발 들어라!  

-김찬선신부-

 

그제 저는 "제발 받어라!"는 제목의 말씀 나누기를 하였습니다.
오늘 저는 "제발 들어라!"는 주제로 말씀 나누기를 하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그런데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외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제발'이라는 표현을 아니 쓰셨어도
내용상으로는 너희가 들을 귀가 있다면 제발 들으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주님께서 제발 들으라고 하실 때 그 대상은 둘입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과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듣지 못하는 사람은 능력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요,
듣지 않는 사람은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이 더 문제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부러 듣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니,
그러니까 들으려고는 하나 듣지 못하는 것이니
듣지 않는 사람보다 낫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것이 귀에 장애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면 그렇게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들을 귀가 없어서,
그러니까 영적인 장애가 있어서 그런 것이면 탓이 없다고 할 수 없지요.

그러니 들을 귀가 있기 위해서는 귀가 머는 것이 숫제 낫겠습니다.
언젠가 얘기한 적이 있지만 귀가 거의 멀은 저의 선배가 있습니다.

귀가 점점 멀어갈 무렵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기를 쓸데없는
세상 소리는 듣지 말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소리만 들으라는
하느님 뜻인 것 같다고 그래서 당신은 오히려 복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이 들을 귀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못 듣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 소리 때문에 또는 세상 걱정 때문에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은 교만 때문에 듣지 못하는 것에 비하면 차라리 낫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안에 자기 소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남의 소리는 하느님의 말씀까지 포함하여-하느님의 말씀까지
남의 소리로 치부하기에-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마음 안에 미움이나 분노나 자기 주장 등으로 가득 차 있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 때문에 늘 화가 나 있으며,
자기 맘에 들지 않는 것 때문에 불만에 불평이 끊이지 않지요.

그러니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마음에 어떻게 다른 존재의 소리,
그러니까 이웃의 소리건 풀벌레 소리건 하느님의 소리건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교만으로 인해 이렇게 시멘트같이 된 마음을 일컬어
오늘 주님께서는 길바닥이라고 하십니다.
길바닥은 돌이 섞인 밭이나 가시덤불로 덮인 밭보다
더 들을 귀가 없거나 아예 없다는 말씀이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자주 얘기하듯
교만이란 지독한 자기 중심이고 자기 집중이기에
겸손으로 들을 수 없게 하고 사랑으로 듣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게 하지요.

그러니 오늘 우리는 혹 욕심은 허락하더라도
교만만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겠노라고,
교만이 내 마음 밭에 발을 붙여 내 마음이 길바닥이 되는 것은
결코 허락치 않겠노라고 굳게 마음을 다져야 하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9월 22일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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