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15일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고 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이다. 자식의 아픔은 어머니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시메온은 성모님의 그 고통을 이렇게 예언하였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기억하는 신심은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으며, 168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 때 이 기념일이 정해졌다. 1908년 비오 10세 교황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인 9월 15일로 기념일을 옮겨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연계하여 기억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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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요한 19,25-27)
Standing by the cross of Jesus were his mother
and his mother’s sister, Mary the wife of Clopas,
and Mary Magdalen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자식의 죽음 앞에 심장이 터지고 허파가 뒤집히지 않을 어머니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제자를 두고 당신의 어머니와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주시는 예수님의 심정 역시 떠나가는 이의 진한 아쉬움을 담아냅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서로에 대한 사무친 사랑의 절정에 교회는 그 시작을 알립니다.
갈수록 모든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 버리는 세상을 우리는 살아갑니다. 저 하나의 목숨을 유지하고자 세상은 사활을 건 전쟁터가 된 지 오래입니다. 죽어 가는 세상에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기억하고 일으켜 세우는 일이 교회의 일이라는 사실도, 꽤 오래전부터 죽어 왔음을 부인할 길이 없습니다. 수많은 신심 활동과 사목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며, 신앙이 결국 교회의 담장을 넘어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 한계가 있음을 우리는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미사를 마칠 때마다 곱씹어 봅니다. 미사는 파견입니다. 미사는 세상살이를 위한 준비고 다짐이며, 그 미사 속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당신을 내어 바치십니다. 세상에 이 한 몸 살라 바쳐 세상이 새로운 가족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미사를 마치고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나가는 이웃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도 좋고, 가끔은 원수 같이 보이는 남편이나 부인에게 살뜰한 애교 섞인 말을 건네도 좋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목숨 바치시어 돌아가시는데, 그 정도도 못하면서 미사 시간에 거룩히 앉아 복음을 듣고 읽고 묵상하는 것은, 참 민망한 일이겠지요. 신앙은 세상 끝까지 뻗어 나가는 속성을 지닌 생물이지 멋진 어항에 갇혀 있는 관상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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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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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후에 죽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사소한 일이나 바보 같은 일 그리고 무엇보다 나쁜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소한 일에 그토록 신경 쓰고, 바보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나쁜 일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영원히 살 것이라는 착각 때문은 아닐까요? 물론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늘 ‘아직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사소한 일에 얽매이고 바보 같은 일을 하고 또 나쁜 일도 서슴지 않는 것입니다.
갑곶성지 안에는 ‘천국의 문’이라는 봉안당이 있습니다. 이곳에 안치되어 오시는 고인은 모두 자그마한 유골함에 담겨 오십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계셨던 분도, 이곳에 안치되시려면 봉안되실 자리에 맞는 유골함에 담길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 뒤에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가져갈 수 없는데도, 사소하고 바보 같으며 무엇보다 나쁜 일까지도 감수하면서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의 삶 안에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반드시 얻어야 할 것으로, 지금이라는 유한한 삶을 사는 우리가 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최대한 삶의 의미를 찾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설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의 문제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함께 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이지요. 인간적으로 볼 때, 성모님의 고통은 엄청난 크기가 분명합니다. 보통 사람은 도저히 이겨내기 힘든 무게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이 모든 고통을 거뜬히 이겨내시고, 예수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하시고,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하십니다. 이를 단순히 성모님을 제자에게 맡기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을 하느님 안에서 이기신 어머니이기에, 우리의 고통 역시 이길 수 있도록 성모님께서 함께 해달라는 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고통을 이기실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 철저하게 순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 말씀처럼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 5,9)의 주인공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기 힘듭니다. 그러나 주님과 성모님이 계시기에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지금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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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떤 청년으로부터 성경은 너무나 남성 중심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꼭 남성이어야 하느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표현 때문에 남성이라고 생각한 것일까요? 그러나 성경 안에서 하느님은 반드시 남성으로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하느님은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라고 나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하느님은 히브리 원어로 ‘엘로힘’입니다. 이 단어가 구약성경에 2,500회 이상을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엘로힘은 ‘엘’이라는 남성 신과 ‘엘로아’라는 여성 신이 합쳐진 복수형입니다. 이는 하느님 안에 남성성과 여성성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표현하는 ‘엘 샤다이’ 역시 ‘젖을 먹이는 하느님’으로 직역할 수 있는데, 이는 어머니의 여성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밖에도 성경 안에는 하느님의 남성성과 여성성이 함께 드러납니다. 즉, 하느님은 성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편협된 생각이 하느님에 대해서도 이러쿵저러쿵 간섭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좀 더 하느님을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이유가 거부하는 이유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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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의미 있다고 믿을 때만 의미 있다
-전삼용신부-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어제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는 십자가 현양 축일에 이어지는 기념일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모 마리아가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고통이었는데 그것이 무슨 공로가 되느냐고 따집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 아래 있는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성모님의 고통에 어머니가 되기 위한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저 아들이 공공의 적으로 몰려 수난과 죽임을 당하는 것 때문에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이 교회라는 새로운 자녀를 낳는 데 사용되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마리아들도 십자가 아래 있었지만 성모님 고통만이 교회의 어머니가 되는 계기를 만들어줍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통에 당신 고통을 합칠 줄 아는 어머니의 공로 때문입니다. 자녀를 낳을 때 어머니가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무슨 고통인지 그 의미를 모른다면 그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아기를 낳는 것도 동시에 포기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그 의미를 알 때야만 창조의 도구가 됩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당하시는 고통이 교회를 낳는 창조사업을 위해 반드시 감수해야 하는 고통임을 아셨습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침대에서 떨어진 남자」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검사를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간호사들이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침대에 누가 시체의 다리를 잘라서 가져다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왼쪽 다리의 신경이 조금씩 무뎌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입원 치료 중이었는데 그날은 아침에 일어나보니 남의 다리가 만져진 것입니다. 깜짝 놀라 그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침대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다리는 자기 다리였습니다. 올리버 색스 박사는 당혹스러워하는 그 사람에게 “그럼 당신의 왼쪽 다리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안색이 창백해지며 “모르겠어요. 전혀 모르겠어요. 사라져버렸어요. 그냥 없어져 버렸다고요. 아무 데서도 찾을 수 없는걸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아마도 자신의 왼발로 오는 마비 증상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고통이 자기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고통이 있는 자기 다리도 함께 집어 던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고통을 거부하셨다면, 그 고통을 피하려 하셨다면 십자가 밑에서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는 말씀은 들으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고통의 의미를 아셨기 때문에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같은 책에 「수평으로」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93세 노인의 사례가 나옵니다. 그분은 걸을 때 몸이 10도 정도 기울어져 있습니다. 자칫 넘어질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달팽이관의 수평을 유지하는 부분에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그 노인에게 그렇게 몸이 기울어져서 걷는다는 것을 알아듣게 설득하는 일이 어려웠습니다. 자신은 정상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영상을 찍어 보여주자 수긍하였습니다. 만약 위의 사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어차피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그냥 이렇게 걷다가 죽을래요.”
그러나 이 할아버지는 자신이 목수였다며 어떠한 건축물이 평평한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수준기’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나무나 콘크리트 위에 그 수준기를 놓으면 그 건축물이 기울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자신 머리에 있는 그 수준기가 고장 났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평평한 선이 있는 안경을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안경을 통해 밖을 볼 때 평평한 선이 그어있으면 자신이 그것을 보며 비뚜로 걷는지 올바로 걷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경에다 그 선을 만들었더니 너무 가까워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경 앞으로 조금 나오게 그 작은 수준기를 달았습니다. 수준기를 보랴, 앞을 보랴 처음엔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일주일 뒤에는 능숙하게 걸으며 자신의 자세를 꼿꼿이 피는 데 어려움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안경은 여러 어려움으로 수평으로 걷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좋은 발명품이 되었습니다.
고통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때, 90세가 넘어도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창조의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작정 나에게서 던져내려고만 한다면 결국 그 고통과 하나가 된 나 자신도 침대 밖으로 던져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은 내가 유익하고 의미 있어 잘 받아들일 때만 나에게 그 의미를 주고 창조의 계기가 됩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께 오는 모든 고통을 의미 있게 여겨서 그것을 교회를 낳는 새로운 창조의 계기로 만들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앞으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당연히 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주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위해 주시는 의미 있는 고통임을 믿는 것입니다. 고통은 의미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만 의미 있는 열매를 선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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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심리학에서 질문하는 것 중에 ‘같은 색과 같은 모양’이 있습니다. 동그라미지만 색이 다른 경우가 있고, 동그라미와 네모지만 색이 같은 경우가 있습니다. 기능과 역할에 익숙한 세대는 같은 모양을 선택한다고 합니다. 본질과 가문에 익숙한 세대는 같은 색을 선택한다고 합니다. 기성세대는 본질과 가문에 익숙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고, 위험을 이겨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질과 가문에 익숙하면 같은 옷을 입고 응원할 수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려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1997년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금 모으기 운동’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본질과 가문은 분명 장점이 있습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면서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질과 가문에 집착하면 나와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기능과 역할에 익숙하면 굳이 같은 성씨나 같은 민족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도 쉽게 연대하고 협력할 수 있습니다.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게 됩니다. 본질과 가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것에 익숙하신지요? 미국에는 한인 성당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같은 언어, 같은 생각이 편하기 때문에 멀어도 한인 공동체와 함께하는 것 같습니다.
신앙은 어디에 가까울까요? 신앙은 역할과 기능보다는 본질과 가문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서 밤을 새워 들판을 다닌다고 하셨습니다. 마침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한국 교회는 선교사 없이 시작되었습니다. 교우들은 교황님께 선교사를 청하였습니다. 교황님은 한국교회의 소식을 아셨고 사제를 파견하였습니다.
중국에서 온 주문모 신부님은 기꺼이 한국으로 왔고 순교하였습니다.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님들도 한국으로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기쁜 마음으로 한국으로 오는 배를 탔습니다. 언어가 다르고 외모가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같은 신앙을 지닌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신앙은 역할과 기능을 따지기 전에 먼저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곳 뉴욕에서 신부님들과 기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교우들도 제게 도움을 많이 주십니다. 같은 신앙을 지녔고, 같은 한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역할과 기능은 그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어제는 십자가 현양 축일이었고,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축일입니다. 치욕과 모욕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구원과 부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고,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지만 신앙인들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고 합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는 물가에 세워진 교회와 같아서 시련과 고통이 오면 쓰러진다고 합니다. 교회가 십자가를 멀리하고, 세상의 권력과 재물에 물들었을 때는 언제나 교회에 위기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은 십자가를 가슴에 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아들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죽으신 예수님을 품에 안으셨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성모님께서 그 모든 고통을 가슴에 품고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교회를 성모님께 맡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아드님 곁에 서서 성모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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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만 기억하지 말고 수난과 죽음, 그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영광스런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희망합시다!
-양승국신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오늘도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고통의 어머니들이 자식들이 겪는 고통으로 인해 똑같은, 아니 더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스갯 소리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아프면 머리가 아프고, 친정 엄마가 아프면 가슴이 아프다.” 조금 지나친 말인가요? 농담 말고 진짜 공감할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아들이 아프면 엄마도 따라 아프다.”
자녀들을 양육하신 부모님들 많이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자녀가 아프면 반드시 엄마도 따라 아픕니다. 자녀가 시들시들 죽어 가면 엄마도 시들시들 죽어갑니다.
마찬가지로 아들 예수님의 고통은 곧 성모님의 고통이었습니다. 반대로 성모님의 고통 역시 아들 예수님의 고통이었습니다. 두분은 일심동체요 한 마음 한 몸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인류구원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큰 기쁨과 보람도 느끼셨지만, 다양한 고통도 겪으셨습니다. 고향 나자렛 사람들과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심한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제자들을 양성시켰지만, 그들은 미성숙했고,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틈만 나면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올가미를 씌우려고 기를 썼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건네신 운명적 고난의 잔을 마셔야했습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골고타 언덕 위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 모든 아들 예수님의 고통은 고스란히 성모님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교회 전례는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기념일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9월 15일 입니다. 그런데 바로 전날 어제 9월 14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이렇게 우리 교회 전례력은 예수님의 고통과 성모님의 고통을 연결시켜 놓은 것입니다.
고통 받는 성모님에 대한 신심은 중세 신심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었습니다. 특히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 곁에서 성모님도 함께 수난당하셨다는 사상,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성모님께서도 영신적 죽음으로 동참하였다는 사상이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교회는 좋은 것도 아닌데, 고통을 겪으신 예수님과 성모님을 기억하는 기념일까지 제정했을까요? 아마도 그 고통은 평범한 고통과는 질적으로 다른 고통이어서 기념하는 것이 아닐까요?
고통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수난과 죽음, 그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영광스런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의미에서, 고통을 기억하자는 것이 아닐까요?
곰곰히 생각해보니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겪으셨던 고통은 마치 산고와도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출산을 준비 중인 산모는 분만 과정에서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지만, 그 고통은 다른 고통과 차원이 다릅니다. 잠시 후 나를 통해서 새로운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희망과 설렘과 기쁨을 간직한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할 때 마다 마냥 슬퍼하고 눈물 흘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통 그 너머에 자리 잡고 있는 영광스런 부활, 영원한 생명을 늘 함께 희망하며 두분의 고통을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성모님께서 겪으셨던 고통의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분의 고통은 그저 고통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사랑으로 승화시켰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고통을 예수님의 부활과 승리의 삶에 참여시켰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세상 곳곳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을 홀로 감내해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 나서 그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한 평생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모님은 바로 이런 분들을 한 명 한 명 찾아가실 것입니다. 위로자이신 성모님께서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실 것입니다. 그들의 슬픔을 덜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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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고통을 거울 삼아
-반영억신부-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곁에 계신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이어서 그 제자들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결국 거룩하신 어머니 마리아는 이제 모든이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아들에 의해 모든이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이제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많은 고통을 안고 사셨습니다.
천사를 통해 주님의 잉태를 예고 받지만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시대상황으로 볼 때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 달라’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루가1,38). 그리하여 한동안, 약혼한 요셉으로부터 간음한 여인이라고 오해를 받으셨습니다(마태1,19).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 하려고 마음을 먹기까지 했습니다. 누우실 한 평 방이 없어서 마구간 말구유에서 해산을 했고(루가2,7) 또한 이집트로의 피난길에 나서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율법에 따라 출산 후 40일 만에 정결례를 거행할 때가 되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를 봉헌하면서 시므온의 예언을 접하게 되었는데, “품에 안긴 아기가 많은 사람의 반대 받는 표징이 되어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루가2,34-35)이라는 고통의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실현을 30년 이상 기다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축제 때에는 예수를 잃고 사흘 만에 성전에서 찾았건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하여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루가2,41-52) 그 구원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진 사실을 알렸을 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2,4)라고 외면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시며 평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일찍 남편 요셉을 잃고 홀어머니로서 가정을 꾸려야 했거늘 아들도 집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홀로 버려졌습니다.
어느날 소문을 듣고 아들을 찾았으나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3,33-35).라는 말을 흘려들어야 했습니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는 아들을 지켜봐야 했고,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을 맞으시며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아들과 함께 십자가를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제자들과 새로운 자녀관계를 맺어주며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을 침묵 속에 받아들이고 끝내는 피에 엉긴 아들을 무릎에 눕혀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부활의 소식도 다른 사람을 통해 뒤늦게 알아야 했던 어머니는 인간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고통에 묻혀버린 분이십니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치셨습니다. 성모님께는 하느님이 당신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겸손과 순명으로!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을 거울삼아 자진하여 고통을 참아 받으며 주님께 온전히 희생을 바쳐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생각은 언제나 성모님께서 울고 계시던 구세주의 십자가 곁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항상 성모님과 함께 울도록 하십시오”(교부 푀멘). 힘들고 어려울 때 성모님의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면 위로가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성모통고 신심은
14세기 초에 나타났으며 복음서에 근거하고 있다.
이 신심은 처음에 예수께서 올리브동산에서 피땀흘리시는 장면에서부터 수난 전체로 묵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성모 칠고로 발전되었다.
또한 '성모 칠고' 신심이 보편화되면서 점차 수많은 묵상과 기도문 그리고 시들이 쏟아져 나와 이 신심을 더욱 고취시켰다.
복음서에 근거를 둔 '성모 칠고'는 다음과 같다.
1.시메온의 예언 (루가 2,34-35)
2.이집트로 피난가심 (마태 2,13-21)
3.삼일 동안 예수를 잃으심 (루가 2,41-50)
4.갈바리아로 오르심 (요한 19, 17)
5.예수,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심 (요한 19,18-30)
6.예수, 십자가에서 내리심 (요한 19,40-42)
7.예수, 무덤에 묻히심 (요한 19, 40-42)
예수님의 수난이 곧 성모님의 고통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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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마리아의 십자가
-송영진신부-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천사가 전하는 ‘예수님의 탄생 예고’ 말씀에
응답하는 순간부터 줄곧 ‘십자가의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동정녀로서 아기를 잉태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고,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방을 구하지 못해서 외양간으로 가야만 했던 일,
시메온 예언자가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한 일, 헤로데가 아기를 죽이려고 해서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만 했던 일, 소년 예수님을 잃어버린 일,
예수님의 활동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시는 것을 본 일,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과 사도들이 받은 박해까지,
그 모든 일이 다 성모 마리아의 십자가였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일생을 생각하면,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보다 먼저 십자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셨는데, 그 길은 예수님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신 뒤에도
계속 이어진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학적으로나 실제로나 성모 마리아는 당신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른 첫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모 마리아의 십자가를 따로 기념하고 묵상하는 것은
삶 전체가 신앙인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서 그렇게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시메온 예언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이 예언 자체가 성모 마리아에게는 큰 고통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사람들도 있고, 안 믿고 멸망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반대를 받는 표징”은, 많은 사람이 반대하고 거부하는 표적이라는 뜻인데,
예수님께서 겪으실 박해, 수난, 죽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혼이 칼에 꿰찔리다.” 라는 말은, “혹독한 고통을 겪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사형을 당하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고통을 가리킵니다.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이라는 말은,
구원받을 사람이 누구이고 멸망할 사람이 누구인지 드러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시메온의 예언과 가브리엘 천사가 처음에 한 말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31-33).”
가브리엘 천사가 한 말도 예언인데, 예수님의 수난과 성모 마리아의 고통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과
예수님의 통치권은 영원하다는 것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에 대해서, “일부러 처음에는 고난과 고통을 감추었을까?
처음부터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예고하는 것이 더 좋았지 않았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일부러 고난과 고통을 감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예언은 시메온의 예언 앞부분(루카 2,30-32)과 거의 같은 예언입니다.
그렇다면 가브리엘 천사는 시메온의 예언 뒷부분에 들어 있는 ‘반대 받는 표징’과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것과 같은 고통’에 대해서도 말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메온은 성모 마리아가 처음 듣는 예언을 말한 것이 아니라,
이미 가브리엘 천사에게서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을
재확인하는 예언을 말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응답과 순종은 ‘좋은 말’만 듣고서 한 응답과 순종이 아니라,
고난의 가시밭길에 대한 예언도 듣고 나서 한
응답과 순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당신이 지고 갈 십자가를 모르고서 응답하고 순종한 것이 아니라,
다 알면서도 기꺼이 응답하고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5-27).”
자식 잃은 부모의 심정은 다 비슷하겠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 사람의 손에 의해서 살해당한 일이라는 점에서
성모 마리아께서는 보통 사람들은 알기 어려운(더욱 특별한)
큰 고통을 겪으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큰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묵묵히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에 대한 의문은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12-13).”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루카 1,37) 하느님께서 이렇게 무기력하게 일을 끝내지는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 지금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모든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라는 희망,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에 대한 사랑,
이 믿음, 희망, 사랑을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계신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나면
그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분이었습니다(루카 2,19.51).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때도 그랬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모 마리아의 심정을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연속으로 찾아오는 십자가들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묵묵히 참고 견디시는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십자가들을 만나게 되는데,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과정일 뿐이라는 희망, 그리고 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그 고난들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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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9,25-27: 이 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어제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다. 교회는 그다음 날인 오늘을 고통의 성모 마리아를 기념한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에 지내는 이유는 마리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즉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였음을 드러낸다. 이 축일이 오늘로 확정되기 전에는 성지주일 전 금요일에 행해지기도 하였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있어서 “협력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에서부터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 순간까지 어머니로서의 고통을 감수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신 성모님의 모습이다. 우리가 작은 마리아가 될 때, 또 다른 구원의 협력자로서 하느님 앞에 서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마리아는 자신의 삶을 항상 그 영혼을 찌를 것이라는(루카 2,35) 시메온의 예언된 예리한 칼에 대한 전망 속에서 살았다. 이 칼이 바로 그의 십자가이다. 이는 이미 파스카 축제 후에 성전에 남아있던 예수를 잃어버림으로 시작되었다(루카 2,41-52). 마리아의 생애에서 절정의 그리고 더욱 고통스러운 순간은 그녀가 십자가의 발 앞에 있으면서 예수의 외침을 들을 때였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마르 15,34). 가장 큰 잃어버림의 순간이다. 십자가 밑의 마리아의 고통은 아들의 고통과 일치한다. 아들의 외침은 당신이 전적으로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일치를 재건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사랑의 표현이며 아버지께 대한 영원한 응답이다.
마리아의 침묵 외침은 당신 아들의 버림에 대한 피조물의 메아리이다. 이 순간에 그녀의 참 정체성이 실현되었다. 당신 아들의 “동반자”가 되도록 영원으로부터 선택되셨고, 이제 처신이 무엇인지 깊은 곳까지 계시가 되었다. 마리아는 아버지로부터 당신의 아들에게 주어진, 아들이 자신의 버림받음으로 실현할 구원된 새로운 인류와 피조물의 가시적 표징으로 예수 앞에 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승리에서 또한 자신을 떼어놓아야 한다. 그분은 마리아를 더는 어머니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또 마리아는 가장 위대한 보물, 그녀 안에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첫 번 잉태의 결실인 아들에게서 떨어져야 한다. 지상에서의 예수의 마지막 행위는 실제로 마리아의 모성을 다른 아들, 전 인류를 대표하는 요한에게로 옮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6-27). 요한복음이 가리키듯이 마리아에게는 요한과 함께 십자가의 발 앞에 있음으로써 두 번째 잉태가 실현된다. 그녀의 고통 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쇄신되고 예수가 된 모든 사람의 어머니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마리아는 이제 당신의 아들을 잃어야 하는 아픔까지 겪으신다. 아들이 죽는 것보다도 이제 다른 아들을 가지시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잉태라는 것이다. 그로써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며,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마리아는 이제 예수님의 어머니로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공동체의 어머니가 되심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혈연관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관계에서 형성되는 관계이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라는 말씀의 확인이다. “자기 집에”라는 표현은 단순히 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말한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삶을 함께했다는 의미이다. “모셨다”라는 표현은 제자가 마리아에게 모든 것을 개방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마리아와 제자 사이에 새롭게 맺은 가족관계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오늘 이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이 더욱 마리아의 삶을 본받고, 이 어머니의 고통을 우리도 함께하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참된 제물을 바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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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 27)
-한상우신부-
십자가까지
품어안는
어머니시다.
삶이
시작되는 곳에
십자가가 있고
어머니가 계신다.
사랑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고통과
함께 아파하고
함께한다는
것이다.
삶이란
십자가를 얻고
사랑을 얻는
은총의
여정이다.
자식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고통이 가장 큰
고통이다.
사랑과
고통사이에
어머니가
계신다.
고통과 사랑은
십자가에서
마침내
결합된다.
어머니의
인격은
십자가의
인격이다.
참된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처럼
십자가의 고통과
함께한다.
어머니의
고통으로
하느님의 사랑에
더욱 가까이
가게된다.
고통이 없는
삶은 없고
고통을 껴안는
삶만 있을 뿐이다.
고통의 어머니여!
우리의
고통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십자가의
고통이
은총이며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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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신부-
교회는 우리 구원의 표지인 성 십자가를 경축한 그 다음날에 십자가 아래서 주님과 함께하신 고통의 성모 마리아를 기립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죽음 없이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신"(복음환호송) 분이십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예수님께서 십자가 곁을 지킨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주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한 제자에게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주신 사랑입니다. 우리도 이 말씀으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게 되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삶의 희로애락을 나누고 기댈 어머니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로운 선물은 단지 우리가 마리아를 영적 어머니로 모시게 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머니와 더불어 마리아의 모성까지 받았습니다. 우리가 남성이건 여성이건, 어느 제도 안의 어느 신분이건 상관없이 마리아의 모성은 우리 영혼 깊숙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이미 말씀의 칼, 사랑의 칼에 찔리었기 때문입니다."(입당송 참조) 우리가 이 모성을 살아갈 때 인간으로서 신앙인으로서 더욱 성숙해지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제1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지상에서 올린 예수님의 기도를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히브 5,7)
예수님의 기도는 당신 한 분의 안위나 평안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 제자들과 당신 편에 선 이들만을 향하지도 않았지요. 그분의 기도는 당신을 적대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들까지, 당신을 모르는 미래의 세대까지 무한히 품으십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구원자의 기도인 동시에 절절한 모성의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이는 모두 마리아의 모성을 생생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 생애를 동반한 마리아께서 그러셨고, 또 우리 육신의 어머니들이 그러하셨듯, 자식에 대한 사랑 앞에서 모성의 발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지요. 우리의 기도가 바로 이 모성을 담아야 합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의 모성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똑같이 사랑하시고 기회를 주시는 아버지의 자비와 맥을 같이합니다. 마리아가 세상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는 것도 이 연유에서이지요. 어머니는 자식을 능력 여부로 가리지 않고 죄인이라고 등 돌리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다 품으니 어머니입니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7)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마리아의 사랑을 받아 누리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모성을 살아가라고 초대합니다. 당연히 고통이 따를 겁니다. 누군가를 사랑해서 품고 기도하고 염려하고 돕는 것에는 아픔이 끼어들게 마련이라는 걸 우리는 이미 잘 압니다. 고통 없이 사랑은 없으니까요.
어쩌면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이들, 아프게 하는 이들, 사사건건 걸림돌이 되는 이들이 내 모성을 필요로 하는 '자녀'일 수 있습니다. 그가 부모이건 배우자건 자녀건 친지와 지인이건 관계없이 성모 마리아와 나의 기도, 관심, 사랑을 목말라 하는 자녀인 셈이지요. 내 모성을 들썩이는 건 늘 좋고 사랑스럽고 우애 넘치는 이들만이 아닐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마리아와 함께 기도합시다. 고통의 성모께 고통을 안고 사랑하는 법을 배웁시다. 그분의 기도에 합하여 세상 모든 자녀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를 멈추지 맙시다. 서로의 어머니고, 또 서로의 자녀인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https://dthumb-phinf.pstatic.net/?src=%22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line01.jpg%22&type=m10000_10000)
주님의 Passio에 성모님의 Compassio>
-김찬선신부-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이나 고통을 나누면 반으로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고통을 함께 나누면 고통이 반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두 배가 된다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고통을 나누는 것은 고통을 줄이기 위해 나누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는 사랑을 나누고 증대시키기 위해 함께 나누는 것이 될 때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이건 기쁨이건 나누는 것은 나의 고통이 줄어들거나 기쁨이 증대되는,
어쩌면 이기적인 목적 때문이 아니라 순수하게 사랑하기에 나누는 것이고,
사랑을 나누다보니 사랑이 증대되는 결과를 낳게 되고, 기쁨은 증대되고
고통이 줄어드는 부수적인 결과도 낳게 되는 것이어야 좋지 않겠습니까?
오늘 주님 십자가 밑에 함께 계신 분들은 사랑 아닌 다른 목적이 없었지요.
반면 십자가 길에서 도망친 제자들은 사랑 아닌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같이 죽게 되고 같이 고통을 받게 될 때엔 함께 할 수 없었지요.
이유와 목적이 사랑인 분들과
이유와 목적이 자기 만족과 성취인 사람의 차이입니다.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를 세운 마리 드 라 빠시옹이
우리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했듯이
성인들은 사랑이 아닌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었고 성공은 물론
내 고통과 슬픔을 줄이기 위해 고통과 슬픔을 나누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십, 몇백 번 성모송을 바치고,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마리아가 여인중에 복되시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계시는 것은 말 그대로
주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리아가 고통 중에서도 주님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요,
주님의 Passio(수난)에 마리아가 Compassio(동병상련)했기 때문임도
묵상하는 오늘 성모 통고 축일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요한 19,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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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의 고통에 어머니가 되기 위한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저 아들이 공공의 적으로 몰려 수난과 죽임을 당하는 것 때문에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이 교회라는 새로운 자녀를 낳는 데 사용되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마리아들도 십자가 아래 있었지만 성모님 고통만이 교회의 어머니가 되는 계기를 만들어줍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통에 당신 고통을 합칠 줄 아는 어머니의 공로 때문입니다. 자녀를 낳을 때 어머니가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무슨 고통인지 그 의미를 모른다면 그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아기를 낳는 것도 동시에 포기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그 의미를 알 때야만 창조의 도구가 됩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당하시는 고통이 교회를 낳는 창조사업을 위해 반드시 감수해야 하는 고통임을 아셨습니다.
모님께서 고통을 거부하셨다면, 그 고통을 피하려 하셨다면 십자가 밑에서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는 말씀은 들으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고통의 의미를 아셨기 때문에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고통은 내가 유익하고 의미 있어 잘 받아들일 때만 나에게 그 의미를 주고 창조의 계기가 됩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께 오는 모든 고통을 의미 있게 여겨서 그것을 교회를 낳는 새로운 창조의 계기로 만들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앞으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당연히 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주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위해 주시는 의미 있는 고통임을 믿는 것입니다. 고통은 의미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만 의미 있는 열매를 선물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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