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Margaret K 2022. 9. 9. 06:29

2022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발견되었다. 황제는 이를 기념하고자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곁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 뒤로 십자가 경배는 널리 전파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9월 14일로 이 축일이 고정되었다.

☆☆☆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3,13-17)

 

Just as Moses lifted up the serpent in the desert,
so must the Son of Man be lifted up,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may have eternal lif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고통과 슬픔의 상징인 십자가가 영광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요한 복음입니다. 구약의 구리 뱀은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는 특효약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불만에 불 뱀을 내리신 하느님께서 모세의 간청으로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시고자 구리 뱀을 허락하신 것이지요.

요한 복음에서 구리 뱀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이상 죽음과 고통, 그리고 슬픔의 상징으로 여기지 말라는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대개 삶의 고통과 슬픔을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도우심으로 얼른 사라져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고통과 슬픔 안에 함께 아파하시고 함께 울어 주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영광과 기쁨 속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즐거이 함께하셔야 한다는 강박이 신앙을 괴이한 처세의 도구로 타락시키고 맙니다.

요한 복음이 쓰인 당시 교회 공동체는 늘 박해의 위협 속에 살아갔습니다. 얼른 박해가 끝나고 고통이 없는 행복의 나라에서 주님을 섬기고자 한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였을까요. 그러한 공동체에 요한 복음은, 세상의 구원은 십자가의 희생, 바로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어려울수록 서로를 배려하는 나의 자그마한 희생 안에서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고, 거기에 참된 행복과 영광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요한 복음은 짚어 냅니다. 지금을 불평하는 것은 지금을 죽이는 것이고, 지금의 상황이 어떻든 서로 나누고 토닥이고 보듬어 주는 것은 지금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삶의 고통이나 슬픔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마저 함께하는 서로에 대한 애틋한 사랑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작가마다 글을 쓰는 습관이 다양합니다. 어떤 작가는 밖에서 열쇠로 잠가서 방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벌거벗은 상태로 있어서 나가지 못하고 글만 쓰는 작가도 있습니다. 썩은 사과를 서랍에 넣어두고서 글 쓰는 것이 막혔을 때 냄새로 자극을 받는 작가도 있고, 어떤 작가는 글이 안 써질 때 수학 문제를 푼다고 합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책을 아홉 권이나 출판했기 때문에 작가 언저리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만의 글 쓰는 습관은 없는 것 같습니다. 굳이 있다면 어떻게든 계속해서 글을 쓰려고 한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런데 저의 이 말을 듣고서, 어떤 작가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작가들이 다양한 집필 습관을 지니고 있지만, 모든 작가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계속 썼다’라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글을 쓰는 꾸준함이 아름답고 멋진 글이 나오게 하는 가장 큰 이유였던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방법은 아주 다양합니다. 기도와 묵상 등의 영성 생활을 통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봉사와 희생을 통해서, 그 밖의 다양한 방법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 어떤 방법도 다 훌륭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잘 따르는 사람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기도를 했느냐가 아니라 꾸준히 기도했는가였습니다. 한 번의 커다란 희생과 봉사를 했느냐가 아니라 꾸준히 희생과 봉사를 했느냐였습니다. 기분이 좋을 때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안에서 매 순간 주님을 바라보면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주님께서 인류의 죄에 대해 속죄하시려고 짊어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입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인 오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고 있는지를 반성했으면 합니다. 이는 어느 한순간, 그리고 한 번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꾸준히 계속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달아 놓은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만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죄의 홍수 안에서 주님을 바라봐야지만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때 죄가 용서되는 치유가 있을 것이며, 영원한 생명도 주어지게 됩니다.

나의 꾸준함은 어떠했을까요? 특히 주님께 꾸준한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누군가가 당신을 고통스럽게 한다면, 그건 그 자신의 내면이 심하게 고통받고 있어서 마침내 그것이 밖으로 넘쳤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처벌이 아닙니다.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이 그가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입니다(틱 낫한).

지금 짊어지는 십자가.

성 엑스페디투스의 성화를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성인의 축일은 4월 19일로, 기원후 300년경에 활동하셨던 것으로 나와 있더군요. 그런데 이 성인의 성화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까마귀를 발로 밟고 있고, 손에는 십자가를 들고 있었습니다. 이 까마귀 부리 부분에 라틴어로 Cras(내일)이란 단어가 적혀 있었고, 십자가에는 Hodie(오늘)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18세기 이후 독일과 시칠리아 지역에서는 긴박한 상황에 부닥칠 때 성인께 기도를 요청한다고 합니다.

이 성화를 유심히 바라봅니다. 성인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바로 지금 해야 할 것을 독려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늘 ‘내일’을 말합니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이 문제가 해결되면…. 그러나 성인은 이유를 말하면서 하지 않는, 그래서 찾을 수밖에 없는 ‘내일’을 밟아서 없애야 한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대신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먼저 짊어져야 할 자신의 십자가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뒤로 미루는 십자가가 아닌, 지금 짊어지는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명장은 숙련된 자기만의 무기가 있다

-전삼용신부-

 

오늘은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십자가는 자기 자신을 매달아 죽이는 도구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과 싸움에서 승리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니 십자가 현양 축일은 주님의 십자가를 현양하고 감사하는 날일까요? 물론 그것도 맞겠으나, 내가 어떠한 십자가를 매고 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만 보며 나의 십자가를 내려놓는다면 그것만큼 십자가 현양 축일과 어긋나는 삶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세가 구리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당신도 높이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구리뱀을 들어 올린 이유는 불뱀에 물린 이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치유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불뱀에 물려 죽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장대에 들어 올린 구리뱀을 보면 살게 하셨습니다. 내가 뱀에 물려 죽어갈 때 구리뱀을 보면 살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구리뱀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아야만 살아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모세는 구약의 예수님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십자가에 매다셨듯이, 모세도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것입니다. 자신도 하느님께 불만을 가질 수 있었으나 자신을 죽여 감사와 찬미를 드렸습니다. 아무리 자아라는 불뱀에 물렸더라도 모세의 모범을 따르는 이들은 다시 살았습니다. 구원은 자기 안의 뱀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이뤄진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워 와서 우리 자신을 매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로마 시대의 것입니다. 지금 불만 가득한 나의 자아를 죽이는 나만의 도구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자아를 매달면 이제 자아가 나를 통제하지 못하고 내가 자아를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도구들이 모두 십자가가 됩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아내의 머리를 자신의 모자라고 착각한 사람이 나옵니다. 유명한 성악가로서 지금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인데 그는 노래를 부르지 않을 때는 아이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아내의 머리를 모자로 착각할 정도로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우리도 자아에 지배당하면 사람을 물건처럼 대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그 이상하게 행동하게 만드는 자아를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노래를 흥얼거리면 모든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바로 노래가 십자가입니다. 자아를 통제할 수 있는 무기입니다. 그가 정상적으로 살려면 쉼 없이 노래를 불러야만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자매는 원인도 모르게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한 소유의식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눈으로 보고 있지 않더라도 손이 있고 발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것을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어떤 수술을 받고 나서 마치 투명인간처럼 자신의 몸이 자신 것이 아니고 자신은 몸이 없는 사람처럼 된 것입니다. 오직 자신이 눈으로 손과 발이 있음을 확인하고 머리로 명령을 내려야 그것이 움직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나의 자아입니다. 이 자매에게는 눈으로 보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일일이 자신이 움직이고 싶은 몸을 눈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사라져버린 몸의 의식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큰 영향을 주는 사람들의 특징을 하나만 꼽으라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들이 자기 자신을 이기는 각자의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고 봅니다.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역사의 위대한 인물이 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이기는데 사용하는 무기들이 다 똑같지만은 않다는 것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는 장대를 이용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이용하셨습니다. 영화에서 보면 어떤 장수는 창으로, 어떤 장수는 칼로, 어떤 장수는 표창으로, 또 어떤 고수는 부러진 칼에 줄을 매달아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우선 자신에게 맞는 무기를 찾아야 합니다. 관우, 장비, 여포의 무기는 모두 창이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맞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유비는 쌍칼을 휘둘렀습니다. 몸이 창을 쓰기에는 맞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남을 돌보는 일을 해야 하는 마더 데레사가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무기를 쓰면 안 됩니다. 각자의 삶에 맞는 무기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기를 찾았다면 그 무기로 싸우면 누구도 이길 수 있을 만큼 숙련시켜야 합니다. 그 무기로 누구보다 더 많은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나의 십자가가 됩니다.

 

      저도 나름대로 무기를 찾고 연습해 가고 있습니다. 저는 호흡과 이명을 이용합니다. 특히 이명이라는 저를 괴롭히는 질환을 이용합니다. 자아에 휩쓸려 다른 생각을 할 때는 이명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명을 의식하면 들립니다. 그리고 이명이 들릴 때마다 주님과 함께 있음을 의식하려 합니다.

 

이명이 생기면 이명을 안 들리게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저는 그것을 오히려 저의 무기로 담금질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각자의 십자가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자아를 이기는 무기가 됩니다. 그리고 자아를 이길 때, 다른 이들이 그 사람을 보고 자신도 그러한 삶을 따라가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참으로 현양하는 삶입니다.

 

-조재형신부-

 

변화와 혁신의 가장 큰 적은 사실에 근거한 현재라는 말이 있습니다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컴퓨터스마트폰인터넷페이스북구글인공지능은 30년 전에는 이해할 수 없거나생소한 이야기였습니다개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30년 전에는 개인의 책상에 컴퓨터가 있는 걸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개인용 컴퓨터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습니다전화기에 컴퓨터를 넣는 것도 상상하지 못하였습니다전화기는 걸고 받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인터넷은 너무 느렸고사용하는 사람도 적었고가치를 알 수 없었습니다페이스북구글 인공지능은 먼 훗날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으며우리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현실에 안주하지 않고기득권에 연연하지 않고새로운 꿈을 꾸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진실에 입각한 꿈과학에 근거한 꿈은 함께 할 때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2억이라는 큰돈을 기꺼이 기부한 남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남매의 나이는 이제 40대 초반이었습니다어머니께서 남겨 주신 유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기부하였다고 합니다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고 합니다그러나 남매는 생전에 어머니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것을 기억하였고어머니의 뜻을 따라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기로 했다고 합니다여동생은 아이의 돌을 축하하며 생애 첫 기부를 하였고, 5살이 된 딸은 그 사실을 알고 기뻐하였다고 합니다부모에게 받은 유산 때문에 가족들이 다투고재판까지 가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상속세를 아끼기 위해서 불법으로 회계를 조작하고투자한 사람들에게 금전적인 피해를 주는 기업인도 보았습니다부모의 유산은 당연히 나의 것이고상속세는 가능하면 내지 않으려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아낌없이 어머니의 유산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기부한 남매는 이미 이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십자가는 치욕과 형벌의 상징이었습니다국가에 반역한 사람중죄를 지은 사람이 십자가 형벌을 받았습니다며칠씩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면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이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가야파에게 끌려가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심문을 받았습니다유대인들은 사형시키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았습니다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유대인들의 폭동이 두려워서 예수님에게 십자가 형벌을 선고하였습니다죄목은 유대인의 왕으로 반역죄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고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치욕과 모욕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지고가심으로써 속죄와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세상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을 외부에서 찾은 적이 많습니다. ‘성공명예업적능력이 내가 해야 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리고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그러나 정말 해야 할 일은 나의 깊은 내면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눔헌신십자가사랑입니다그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하는 것입니다십자가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고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었지만 신앙인에게는 구원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여러분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인지요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은 예배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렸습니다.

첨탑이 저리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드러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인생의 십자가가 다가올 때 마다 즉시 예수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십자가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십자가라는 것, 생각할수록 묘하고 신비스런 그 무엇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존재 자체가 무거운 십자가의 연속인 분들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삶 자체가 힘겨운 십자가인 분들도 계십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치 성냥개비 두개를 교차시켜 만든 듯한 가벼운 십자가, 잠자리 날개처럼 초경량급 십자가가 살짝 주어졌음에도, 세상 끝난 것처럼 난리를 치고 괴로워합니다.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감당하기 벅찬 천근만근 무게의 십자가를 매일 지고가면서도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기쁘게 살아갑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아마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십자가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산고를 겪고 있는 엄마는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하늘을 찌르는 것처럼 극심하지만, 잠시 후 태어날 새 생명을 생각하며 기꺼이 견뎌냅니다. 선두에서 단독 질주 중인 마라톤 대회 우승 후보자는 40킬로미터 지점 쯤에서 느끼는 육체적인 고통이 엄청납니다. 그러나 잠시 후 결승선에서 누리게 될 영예와 성취감을 생각하며 기쁘게 달려갑니다.

  

우리 모두 불완전한 인간 존재로서 불완전한 이 세상 안에 살아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이런 저런 다양한 무게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십자가 하나를 잘 극복했다 생각하면, 어느새 또 다른 십자가가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의 어깨 위에는 별의별 유형의 십자가가 셀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얹혀 있어서 제대로 걸어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평생의 과제는 숙명과도 같은 십자가를 평생 친구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겁다, 괴롭다, 여기며 도피하지 말고, 이왕 지고갈 십자가 큰 마음으로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 한 가지!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인간적인 눈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영적인 눈으로,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입니다. 결국 매일의 십자가에 대한 지속적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부단히 십자가의 신비를 묵상하는 일입니다. 세상 울적하고 괴로운 얼굴이 아니라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한 두명도 아니고 7명이나 되는 어린 자녀들을 지극정성으로 양육하는 한 젊은 어머니를 뵙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로 인해 어머니의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무럭무럭 성장하는 아이들의 교육과 의식주 해결을 위해 하루 온종일 동분서주하노라면 하루가 후딱 지나갑니다. 하루 온종일 지지고 볶고, 세탁기를 돌리고 또 돌립니다. 청소기를 돌리고 또 돌립니다.

  

쉴틈 없이 돌아가는 힘겨운 일상에 지쳐 짜증 낼법도 한데, 절대 그런 법이 없습니다. 환한 얼굴에 콧노래가 끊이지 않습니다. 대체 비결은 무엇일까요? 매일의 작은 십자가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가톨릭에서는 십자가를 절대로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성당에 오면 십자가를 말끔히 없애준다고 외치지도 않습니다. 대신 십자가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라고 강조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있는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를 지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바로 그 십자가에서 위로받게 하고 힘을 얻게 합니다.

  

오늘 우리의 작은 십자가들에 반드시 의미가 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십자가가 다가올 때 마다 즉시 예수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십자가를 잘 지고 갈 때, 십자가 그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부활의 영광을 끝까지 희망하며 그렇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예수님께서 이집트 탈출 이후 광야에서 벌어진 한 사건과 연결하여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설명하십니다. 높이 들어 올려진다는 것은 영광에 싸여 윗자리로 영전 받는 것과 다릅니다. 누군가의 폭압적인 손길에 의해 모두의 눈 앞에서 벌거벗긴 채 수치와 모욕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지요.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9)

하지만 하느님 섭리 안에서는, 처참히 매달린 누군가가 구원의 의지를 가지고 바라보는 이에게 생명을 선사합니다. 모세의 구리뱀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내주신 아버지의 목적은 세상의 구원입니다. 그만큼 아버지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지요.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세상이 외아드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예수님께는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세상의 죄를 속량하는 길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다인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인 십자가"(1코린 1,23 참조)를 기꺼이 선택하셨지요.
       
제1독서인 민수기 속 광야 일화에서 우리는 기도의 순수성을 배웁니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민수 21,7)

불편하고 힘들다고 하느님과 자신에게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인간적 분노나 실망감을 내비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보내신 징벌 앞에서 그들이 간청하자 별 생색도 원망도 없이 기도의 소명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기도를 즉각 들어주셨지요.

문득 '욥의 기도'가 떠오릅니다. 삶의 찬란했던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락에 떨어졌던 욥에게 와서, 짧고 현학적인 주장으로 도리어 욥을 괴롭혔던 세 친구를 기억하실 겁니다. 그때 주님은 그 무례하고 무도한 친구들에게 
"나의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간청하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어 너희의 어리석음대로 너희를 대하지 않겠다."(욥 42,8)고 하셨지요. 그리고 욥이 세 친구를 위해 기도드리자 주님은 욥의 운명을 되돌려 주십니다.

당신을 모함하고 음모를 꾸며 사형에 이르게 한 이들을 위해 바친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 역시 맥을 같이하지요
(루카 23,34 참조).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모든 죄악과 패덕을 순순히 받아들고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가장 위대한 기도를 완성하셨지요. 예수님의 기도, 모세의 기도, 욥의 기도에서 자신을 적대하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올린 순수한 기도라는 공통점이 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십자가는 어찌보면 유다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걸림돌입니다. 또, 다른 민족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어리석음입니다. 세상은 경쟁하고 따지고 소송하고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쪽으로 자꾸 치달아가는데, 배알도 자존심도 없는 사람처럼 들어 주고, 받아 주고, 토닥여 주다가, 나를 해하는 이를 위해 생명까지 다 내놓고 기도해 주니 말입니다.

그럴수록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 여기 있으니, 나만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불평하지 말고 따지지 말고 당신이 걸어온 길을 따르라고, 입이 댓발 나올 만큼 억울하고 지치면 그냥 멈춰서 당신을 바라보라고요. 무죄하신 하느님이 죽어 매달려 계신 십자가에 "네 무게를 얹고 잠시 쉬렴." 하십니다.

그렇게 주님과 십자가 길동무를 하면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더욱 깊어가고 두터워집니다. 네 고통인지 내 고통인지 모를만큼 서로의 고통에 민감해지고 또 그만큼 제 고통에 무뎌지면서, 둘은 더 깊은 일치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십자가는 그분과의 일치, 하나됨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자신의 십자가를 그분 십자가에 합하여 봉헌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내 십자가가 힘든 줄 아는 우리는 그만큼 남도 힘든 줄 알지요. 그러니 우리, 기도 안에서 서로를 격려하며 거룩한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걸어갑시다. 서로 보이지는 않지만 말씀으로 연결된 우리기에, 서로의 순수한 기도가 분명 큰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함께 바라보고 있을 무수한 길벗들을 기억하고 힘을 냅시다. 동행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맛 없는 십자가는 지지 않는다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80301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9월 14일 금요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