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9월 13일 연중 제24주 화요일

Margaret K 2022. 9. 9. 06:27

2022 9 13일  연중 제24주 화요일 

 

 주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하고 위로하시며

앞으로 다가서서 상여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라.”하고 명령하셨다. 

(루가 7,11-17)

 

 When the Lord saw her,
he was moved with pity for her and said to her,
“Do not weep.”
He stepped forward and touched the coffin;
at this the bearers halted,
and he said, “Young man, I tell you, aris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 내시자, 사람들은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며 하느님을 찬양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한 청년의 장례 행렬을 만납니다. 외아들을 잃은 홀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시어 관에 손을 대고 말씀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이 한마디 말씀에 죽었던 젊은이가 일어나 앉으며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안타까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얼마나 측은히 여기시는지 잘 알게 해 줍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어려움에 놓인 사람이나 좌절에 빠진 사람들의 아픔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 현실 세계에서 이미 구원의 의미를 느끼도록 해 주셨지요. 구원은 이 현세에서 시작되어 초월적 생명을 얻음으로써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변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배고픈 이들과는 먹을 것을 함께 나누며, 아픈 이들은 낫게 해 주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는 정의롭게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가까운 사람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어려움에 부닥쳐 있는지,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실 내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관심에 더 익숙해 있지 않습니까?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일깨우십니다. “일어나라, 무관심과 무표정에서 깨어 일어나라.” 따라서 이웃들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들에게 힘이 되도록 그들의 구체적인 아픔에 다가가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유럽 여행 중에 겪었던 일이 하나 생각납니다. 어떤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물건을 들고 계산대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계산대에서의 계산이 너무 느린 것입니다. 당연히 계산대의 줄도 상당히 길수밖에 없었지요. 조금이라도 빨리 계산할 수 있도록 또한 제 주머니를 무겁게 하는 동전을 처리할 심정으로 동전을 꺼내서 물건 값에 맞추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평소에 쓰지 않던 동전이라 그런지 얼마짜리 동전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더군요. 작은 동전인 센트까지 구분해서 계산하려하니 복잡했고, 오히려 줄을 서 있는 뒷사람에게 피해를 줄 것만 같았습니다. 

다시 주머니에 동전을 넣으려는 순간에 바로 뒤에 서 있는 분이 “잠깐만요.”라면서(물론 영어로 말했습니다), 제 물건의 가격을 확인한 뒤에 동전을 맞춰서 골라주는 것입니다. 아마 외국인이 동전 때문에 계산을 힘들어한다는 생각에 도와주었던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이 배려하는 마음이 너무나 고마워서 밝게 웃으면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이제까지 내 자신이 청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꽤 많았음을 깨닫습니다. 굳이 모든 것을 다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도움의 손길은 이곳저곳에서 저를 향해 있었습니다. 이는 내 자신 역시 다른 이들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굳이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어렵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이 모습이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만을 들어주실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셔서 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다시 살려주십니다. 이 어머니가 예수님께 아들을 살려 달라고 청했습니까? 아니지요.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아픔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놀라운 기적을 행하십니다.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서 어머니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청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내가 청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필요한 것을 알아서 주시는 주님의 사랑은 보지 않고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는다면서 서운함의 표시를 계속 남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나인’이라는 동네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아주 조그마한 동네입니다. 이렇게 조그마한 동네도 제외시키지 않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달하려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기에 우리는 주님께만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께.....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사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다(세네카).



언양성당 신앙사적지

 

51 언양성당 신앙사적지

경상도 남부지역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이후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곳 언양지역은 그보다 훨씬 더 늦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경남 최초의 공소인 내간월 불당골 공소가 있었는데, 불당골은 김재권 프란치스코가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뒤 다른 신자들과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던 곳입니다. 선교사들을 맞이할 무렵, 불당골은 공소로 변모했으며, 최양업 신부와 다블뤼 주교가 방문하던 1850년대 말에는 언양일대가 신자들의 집단 거주지역으로 변모되어 간월, 죽림(대재, 죽령), 탑곡, 예씨네골, 진목정 등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언양지역의 교우촌들은 병인박해(1866) 때 심한 타격을 입었지만, 믿음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로베르 신부가 살티 공소를 설립하였고, 언양 지역 신자들의 노력으로 1926년 초대 주임 보드맹 신부가 즉시 성당 신축을 계획했고 1936년 10월 25일 드망즈 주교의 주례로 성전 봉헌과 사제관 축복식을 거행합니다. 언양성당은 고딕 양식으로 제작된 부산교구의 유일한 석조 건물입니다. 또한 성소의 온상지로 현재 70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 20여 명의 동정녀를 배출했습니다. 

언양 지방 천주교 선교 200주년(1790~1990)을 기념하여 ‘언양 선교 200년사 ’ 편찬과 더불어 설립된 신앙 유물 전시관은 1936년부터 언양 본당 사제관으로 사용되어 온 곳입니다. 1층은 신앙 유물을, 2층은 민속 유물 총 696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언양 성당 뒷산으로 10분쯤 올라가면 오상선(1840~1867, 세례명 미상)의 묘가 있습니다. 오상선은 이 지방 복음 전래 초창기 활동했던 오한우의 증손자입니다. 오상선은 병인박해 때 언양 감옥에 잡혀 있다가 순교하였는데 고무재에 있던 묘를 1995년 5월 15일 성당 뒷산으로 옮겨 단장하였습니다. 

일반 본당과 마찬가지로 매일 미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주소는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구교동1길 11이고, 전화는 052-262-5312~3입니다.                   
 

영성적 메타인지

-전삼용신부-

 

아이큐(IQ)가 좋아야 공부를 잘한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공부를 잘하기 위해 가장 향상시켜야 할 것이라고 믿어지는 대상은 ‘메타인지’입니다. 메타인지란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자각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1970년대 심리학자 존 플라벨(U. H. Flavell)이 정의한 개념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아는 능력이 성적을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몰랐던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저는 수학 문제집을 다 풀고 외울 줄 알면 성적이 잘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잘 나왔지만 응용된 문제가 나오자 하나도 풀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1년 반을 교과서를 안 보고 문제만 풀었던 것이 아주 안 좋은 결과를 냈습니다. 제가 모르는 것은 수학의 원리였는데 원리를 모르고 있다는 것은 외면한 채 문제풀이 능력만 향상시켰기에 학력고사 시험을 망치게 되었습니다.


      메타인지 능력이 좋은 학생들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구별하여, 아는 것은 발전시키고 모르는 것은 보완하는 방식으로 공부를 합니다. 아는 것만을 더 잘 하기 위해 노력하다가는 모르는 것을 아주 모르게 되는 구멍이 뚫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나를 아는 것이 나를 발전시키는 데 매우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자신을 아는 메타인지 능력은 비단 공부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서도 꼭 필요한 능력입니다. 고해성사를 보시는 많은 분들이 용서하기 매우 어려운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피하는 게 좋은지, 아니면 견디는 게 좋은지에 대해 물어보십니다. 그걸 사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시니까 끝까지 견디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다가는 견딜 수 없게 돼 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피하는 게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다가는 자신의 관계 맺는 능력을 향상시킬 기회를 전혀 잡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견디기 힘든 사람을 견뎌야 하는지 피해야 하는지는 본인이 결정해야합니다. 본인이 견딜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견디는 게 좋고 아직은 그럴 힘이 없다면 피하는 게 좋습니다. 그럴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본인만 아는 것입니다. 본인의 능력에 따라 대처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인의 과부는 진정 자신의 능력을 잘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복음만 읽어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과부와 그 죽은 아들이 불쌍해서 과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를 살려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불쌍하게 죽는 이들은 모두 살려주시지 않으실까요?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도 보신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어디에서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받을 마음이 없는데 선물을 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이미 죽었으니 아들의 믿음이 아니라 어머니의 믿음을 보신 것이 확실합니다. 오늘 복음에 어머니의 믿음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 같지만 예수님의 이 말에 어머니의 큰 믿음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돌려주셨다.”는 말 안에는 어머니가 예수님께 먼저 “맡겨 드렸다.”는 말이 전제됩니다. 맡겨 드렸다는 말은 어머니의 능력으로는 안 되기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나인의 과부는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맡길 줄 압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어서 하느님께 맡기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영성에서 가장 중요한 메타인지 능력은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능력이 있어야 더 믿게 됩니다. 자신의 능력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만 믿습니다.

 

      나의 무력함을 알아야 주님을 더 믿고 의탁하게 됩니다. 나의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주님의 능력을 온전하게 신뢰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가 부모에게 하는 것처럼 자신의 힘으로 하려하지 말고 온전히 주님께 맡겨드립시다.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부모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이 영성적으로는 가장 높은 메타인지 능력을 가진 신앙인입니다. 나인의 과부처럼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을 맡겨드립시다. 그리고 그분께서 무엇으로 돌려주시는 지만을 기대합시다.

 

청년들을 위한 단상

-김대열신부-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루카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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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있는 이 성당은 이미 소개해드린 것처럼, 다국적, 다문화 교회입니다.
오늘은 베트남 청년들에 대해 이야기 좀 나누고 싶습니다.
주일이면 많은 베트남 청년들이 미사에 참례합니다.
다른 나라들의 청년들도 있지만,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의 숫자입니다.
대부분 연수생으로 온 친구들인데 볼 때마다 너무 예쁘고 싱그럽습니다.

1980년대를 20대로 시작해 20대로 마감한 저에게, 그들이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여러가지로 비슷한 20대를 공유하고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하여간 이 친구들을 보면 대한민국의 80년대가 떠오릅니다.
깊은 신앙과 반듯한 모습에 놀라기도 하고요.
활기찬 모습들도, 순수한 모습들도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요즘, 소위 먹고 살만 하다고 하는 나라들을 들여다보면, 한결같이 젊은이들의 어깨가 축 쳐진 모습들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몹시 거칠어진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고급화된 사회일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각하게 나타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득권 세력들이 쥐고 있는 고도화되고 치밀해진 사회적 구조는 젊은이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저의 20대를 생각해보면, 가진 것이 없어도, 뚜렷한 미래가 없어도,

나누고 격려하고 함께하려던 그 어떤 분위기가 허락된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군사독재에 맞서 불만을 표출하던 어려운 시기였고,

대부분의 친구들이 비슷한 처지의 환경에서 살았기에 쉽게 공감하고,

 

함께 꿈을 키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상처를 가진 세대들 사이에서 태어난 세대들이 바로 이 베트남 청년들입니다.
모든 것을 함께 할 수밖에 없었던 친구들이었기에, 그 나눔이 더욱 자연스럽게 보이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청년들이 엄격한 일본 사회에서 언어를 비롯해, 다방면으로 적응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을 터인데,

 

밝은 웃음을 잃지 않는 얼굴이 대견합니다. 주일에 함께 성당에 모여 무엇이든 나누고 힘을 얻는 모습도 기특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오히려 풍요로움보다는 부족함이 사람을 더욱 사람답게 만드는 환경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경제적 풍요로움이 인간의 욕망으로만 성취된다면, 결국 그 욕망이 서로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어느 나라이든지 청년들이 꿈을 꿀 수 있고, 그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고질적으로 반복되어온 기성세대의 악습이 개선의 여지가 보이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런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복음적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또한 옳은 삶을 지향하는 여타 종교들도 함께 해야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모든 청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힘을 내서 다시 일어나라고, 주저앉기에는 너희 젊음이 너무도 안타깝다고,

어떤 처지에서도 신념을 갖고 살아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루카7.14) 

 

살아도 사는게 아닌, 웃어도 웃는게 아닌...

 -양승국신부-

 

멋진 청년 가수 김진호님의 노래를 가끔씩 듣습니다. 온몸과 마음을 다해, 혼신의 힘과 모든 열정을 다 쏟아부으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서, 참으로 큰 감동을 받습니다.

 

먼저 떠나신 아버지를 주제로 한 ‘가족 사진’이라는 노래는, 들을 때 마다 눈시울을 붉히게 만듭니다. “나를 꽃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버렸던, 그을린 그 시간들을, 내가 깨끗이 모아서, 당신의 웃음꽃 피우길...”

 

또 다른 추모 노래 ‘살다가’의 가삿말은 가슴을 마구 후벼팝니다. “살아도 사는게 아니래. 너 없는 하늘에 창 없는 감옥 같아서. 웃어도 웃는게 아니래. 초라해 보이고 우는 것 같아 보인대.”

 

노랫가사가 우리 시대 청년들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 또한 가슴이 아픕니다. 많은 청년들 삶의 모습이 살아도 사는게 아닙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울음을 참고 있습니다.

 

한창 물오른 나무처럼, 활짝 피어난 꽃송이처럼 충만하고 화사해야 할 청년들의 모습보다는, 무거운 삶의 무게에 짓눌린 안타까운 청년들의 모습 앞에 할 말을 잃습니다. 어두운 죽음의 분위기가 우리 청년들의 주변에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를 뒤로 하고, 타볼산을 지나, 사마리아로 가시는 길에, 나인이라는 아주 작은 고을 안으로 들어가실 때였습니다. 나인성 입구에서 두 무리가 운명적인 만남을 갖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생명의 행렬과, 아들 잃고 슬피우는 과부와 죽은 청년을 중심으로 한 죽음의 행렬이, 나인성 입구에서 ‘딱’ 마주친 것입니다.

 

죽은 청년은 외아들이었습니다. 여인의 운명을 참으로 기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언제나 죽음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했습니다. 그것만 해도 더없이 원통한 일인데, 거기다 아들까지 먼저 떠나보낸 것입니다.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이른 나이에 죽은 것, 다시 말해서 ‘요절’은 큰 죄에 따른 벌로 간주되었습니다. 남편에 이은 아들의 요절 앞에 슬픔도 슬픔이었지만 고개를 들수가 없었습니다. 과부는 차라리 자신도 따라 죽었으면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녀는 살아있어도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대성통곡을 터트리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하느님의 자비와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기적적 소생이라는 은총을 가져왔습니다.

 

나인성의 소생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에 대해 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삶과 죽음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분은 이 세상 모든 삼라만상의 생명을 좌지우지하시는 분,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로마서 4장 17절) 하느님이십니다.

 

완전히 죽었던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되살아났다는 것은 이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생명의 주님께서 짙은 죽음의 문화와 그림자 속에 살아가는 우리 청년들을, 밝고 화사한 생명의 세계 속에 살아갈 수 있도록, 일으켜 세우시고 힘을 주시길 간청합니다. 우리 청년들이 참 삶, 진정한 삶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서 지속적으로 동반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조재형신부-

 

저는 군대에 있을 때 예비군 업무를 담당했습니다전시에 제가 있던 부대는 후방으로 이동하고예비군으로 구성된 부대가 그 자리를 맡게 되었습니다한 달에 한번 저는 직책에 맡는 예비군을 찾기 위해서 성남시와 이천 군청으로 다녔습니다예비군들은 군에 있을 때 맡았던 직책이 있었습니다. ‘수송취사정보행정암호박격포소총수의무헌병군수와 같이 각자의 주특기가 있었고주특기는 번호로 구분하였습니다예비군 명부에서 직책에 맡는 예비군을 찾아서 기록하는 것이 저의 업무였습니다그렇게 작성된 명부로 1년에 한번 예비군을 동원해서 훈련을 하였습니다정말 많은 주특기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각자의 주특기는 군의 전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겉으로 보면 다 같은 군인이지만 주특기에 따라서 하는 일과 역할이 달랐습니다그러나 조국과 국민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같았습니다.

 

연수에 함께 한 신부님들도 그렇습니다교구도 달랐고사목의 분야도 달랐고각자의 능력도 달랐습니다그러나 우리는 미사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같은 목소리로 미사 경본을 읽었고같은 지향으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교구가 다른 것이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사목의 분야가 다른 것도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능력이 다른 것은 함께 함에 도움을 주었습니다우리가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모였고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로 서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야를 조금만 넓히면 우리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고가진 것을 나눌 수 있고아름다운 지구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이 지구는 태양계은하계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작고외로운 별입니다이렇게 작고 외로운 별에 사는 우리는 먼지보다 더 작게 보이는 존재입니다그러기에 우리는 지구별에서 서로 도와야 합니다서로 사랑해야 합니다서로 아껴주고용서해야 합니다우리 몸의 세포들이 우리 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우리 몸의 지체들이 우리 몸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처럼우리들은 우리의 어머니이며우리의 몸인 지구별을 위해서 서로 협력하고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마음을 이야기 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장례행렬을 보셨습니다슬픔에 찬 가족들을 보았습니다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을 보셨습니다그리고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어둠에 빛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아이의 엄마는 모든 신경이 아이에게 향해 있습니다엄마는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아이가 배고 고픈지옷에 실례를 했는지자고 싶은지 알고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저는 아이가 왜 우는지 모릅니다엄마만큼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병든 이헐벗은 이외로운 이슬픔 중에 있는 이들에게 모든 관심이 있었습니다그래서 그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자비의 눈으로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첫째는 나 자신이 중심이 되려는 교만함입니다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성서에 나오는 많은 죄악들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욕심을 먼저 생각한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둘째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열등감입니다지난날의 잘못과 죄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열등감은 우리를 영성생활에서 멀어지게 합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양털같이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자비의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그러면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일어나라!”

-늘 새로운 시작파스카의 삶-

-이수철신부-

 

얼마전 강론에 소개했던 택시 운전을 시작한 젊은이가 자주 전황戰況을 보고하듯 메시지를 보냅니다어제 저녁 밤 운전을 시작하기전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출군出軍합니다.”

아니 출전出戰입니다야간 영적전투에 주님의 전사로 출전하는 겁니다보호자이신 주님과 함께정장한 모습이 핸섬해 보기 좋습니다화이팅주님의 전사형제님.”

감사합니다!!! 신부님과 주님 덕분입니다.”-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늘 새롭게 시작하는파스카의 삶을 사는 이가 진정 주님의 전사입니다하루하루가 주님의 선물이지만또 하루하루가 주님의 전사로서의 영적전쟁입니다믿는 이들 누구나 예외없이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입니다깨어 감사하면서 주님의 전사로 살아갈 때 비로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는 주님을 묵상하면서 저는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때로 생미사와 연미사를 함께 봉헌하면서 산자와 죽은자가 주님 안에서 살아 하나로 연결되어 평화로이 공존하는 듯한 따뜻한 생각도 듭니다주님 안에서 삶과 죽음이 하나임을 깨닫습니다.

 

살아있다 하나 죽어있는 삶도 많을 것입니다육신의 생명은 살아 숨쉬더라도 어둠과 절망죽음같은 무의미하고 무감각무의욕의 허무한 삶이라면 진정 살아 있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참으로 기도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깨어 주님의 빛 안에서 희망과 생명의 영적 삶을 사는 이가 진정 살아 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생명이자 빛입니다죽은 이를 살리시는 주님이십니다복음에는 주님께서 죽은 이를 살리시는 장면이 셋 나옵니다첫째, “탈리타 쿰내가 너에게 말한다일어나라!”(마르5,41)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구절이고둘째, “라자로야이리 나와라!”(요한11,42)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장면이고셋째, “젊은이야내가 너에게 말한다일어나라!”(루카7,11) 바로 오늘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는 장면입니다모두가 생명의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통쾌하고 신바람나는 장면입니다.

 

젊은이야내가 너에게 말한다일어나라!”

 

주님 앞에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가 젊은이입니다오늘뿐 아니라 평생 화두 말씀으로 삼아 늘 마음 깊이 간직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일어나라!” 바로 부활의 파스카의 삶을 가리킵니다늘 말씀드리지만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이 진정 우리를 살아있게 합니다바로 이것이 주님의 영적전사로서의 기본 자질입니다.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내심으로 과부는 물론 함께 했던 모든 이들을 영적으로 살려내신 자비로운 주님이십니다주님을 만나야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주님을 만나 함께 할 때면 삶이지만주님을 떠난 혼자의 삶이라면 살아있다 하나 자기를 잃은 죽음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상징하는바 참으로 심오합니다마치 두 행렬의 조우遭遇같습니다예수님과 제자들의 무리가 빛과 희망과 생명의 행렬이라면죽은 외아들과 과부와 그 고을 사람들의 무리는 어둠과 절망과 죽음의 행렬입니다그러나 자비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과부의 외아들이 살아나면서 극적 반전이 이뤄집니다.

 

어둠은 빛으로절망은 희망으로죽음은 생명에로의 반전입니다파스카의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바로 이것이 파스카의 삶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 내신 주님을 목격한 이들의 반응이 고무적이며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 오셨다.” 하고 말하였다.’(루카7,16).

 

참 은혜로운 구절입니다이들은 사렙타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엘리야 예언자를 상기했음이 분명합니다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신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방문을 체험한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 오셨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실현되었고이런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구원이요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날 때 찬양이요 찬양할 때 주님을 만납니다과부의 외아들을 살려내신 주님을 목격한 이들의 자연발생적 반응이 외경畏敬의 두려움이요 하느님 찬양이었습니다. “내 영혼아하느님 찬양하라알렐루야!” 지지난주일 화답송 후렴을 기억할 것입니다우리 영혼이 늘 하느님을 찬양할 때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영혼이 살아야 육신도 삽니다.

 

오늘 제1독서 코린토 1서는 하나인 몸과 다양한 지체에 대한 은혜로운 내용입니다우리 믿는 이들은 절대 고립단절된 혼자가 아닙니다고립단절의 혼자가 지옥이며 바로 죽음입니다연결되어 이어지면 살고단절되어 끊어지면 죽습니다이래서 교회 공동체입니다그리스도의 몸에 속해 있으므로 비로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참으로 주님을 믿다가 죽은 이들도 그리스도의 몸의 한 세포로서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1코린12,13-14)

 

세례성사에 이은 이 거룩한 성체성사평생성사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써 참으로 살게 합니다삶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살게 합니다그러니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늘 하느님을 찬양하며 새롭게 시작하시기 바랍니다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 일치시켜 주시어 참으로 살아있게 하시고 파스카의 삶에 항구하게 하십니다아멘. 

 

 합당한 두려움으로 거듭태어나야

-반영억신부-

 

때때로 하느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좀 더 확실히 보여주면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또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새 생활을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기적을 보여주면 오히려 두려움을 가질까요? 어찌 되었든 당장 내가 요구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기적을 행하셨고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을 지니셨지만 그분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어디에서 신비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면 기어이 쫓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비한 현상을 보고 믿음이 성장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그때뿐입니다. 열심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기적을 통해서 주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알맹이에는 관심이 없고 기이한 현상에만 눈길이 머물러있습니다. 그들은 실천 없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믿고자 하는 이들에게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기적이 믿음을 성장시키기 보다는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기적이나 신비한 현상을 보거들랑 하느님께 대한 합당한 두려움으로 죄를 피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새롭게 눈뜨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과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괴로움을 겪고 있는 백성을 차마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청하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죽은 젊은이를 일으키셨습니다. 사실 주님은 능력에 찬 말씀으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 안에 머물면 능력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4,14). “하느님께서 당신의 힘을 펼치시어 나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에 따라, 나는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에페3,7)하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14,1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기적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총에 힘입어 주님의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어려운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듯이 믿음으로 그들을 챙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행동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신비한 현상은 어디에나 있어도 믿음은 어디에나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길이 기이한 현상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께로 모아지길 바랍니다. 은총 덩어리보다 은총의 주관자를 만나는 기쁨에 감사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사랑을 외치는 예언자이셨듯이 우리도 세상의 예언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40,31).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젊은이여 일어나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인 나인의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루가 8, 40-56)와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요한 11, 17-44)와 함께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물론 죽은 이를 살리신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도 등장합니다예를 들면 엘리야가 사렙다의 과부의 아들을 살린 이야기(1열왕 17, 17-24)라든지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이야기(2열왕 4, 32-37)베드로가 도르가를 살린 이야기(사도 9, 36-43)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 이야기와 예수님의 이야기가 어떻게 다른가그것은 다른 이야기들은 그들이 하느님께 간청해서 일어난 일이었지만,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일어나라는 한 마디의 말씀으로 죽은 이를 손수 살리십니다곧 당신의 신적 권능으로 살리시면서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일 중에 가장 슬픈 일 중의 하나는 아마도 소중한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세상에서 떠나보내는 일일 것입니다불의의 사고라면더더욱 그렇습니다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슬픈 일은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자식을 잃었을 때일 것입니다그래서 부모는 죽으면 땅에 묻지만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는 오로지 외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가이제 그 외아들마저 잃었으니 그 슬픔이 오죽하였을까요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하시며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야일어나라.”(루카 7, 14)

 

예수님께서는 어제 <복음>에서처럼말씀의 권능을 드러내십니다단 한마디 말씀으로 목숨을 살리십니다그것은 라자로를 살리실 때처럼기도를 드리신 것도 아니었습니다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처럼간청을 받았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오로지 당신께서는 순전히 당신의 진정한 마음곧 가엾은 마음으로 신적인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사실드러난 것은 신적인 권능이지만그 권능을 불러온 것은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 입니다그것은 마음이 상한아픈 마음 곧 상심이 불러온 사랑입니다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단장의 아픔을 그대로 받으신 예수님의 심장이 찢기어지면서 흘러나온 사랑입니다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아픈 가슴에 가 닿은그 아픔과 분리되지 않은 상한 마음입니다바로 이 사랑이 죽음을 이기는 권능을 불러왔습니다.

이는 사랑이야말로모든 것을 이루는 힘임을 말해줍니다결국사랑이 목숨을 살리는 힘이요구원의 힘임을 말해줍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 10)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먼저 사랑하십시오그리고 원하는 바를 행하십시오.’

 

그렇습니다사랑이야말로 진정한 힘입니다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는 힘이듯이우리의 사랑 역시 이웃과 자신을 구원으로 이끌어줍니다.

 

주님 저에게 아파하는 마음을 주소서!

오늘도 제 마음이 상하고 찢기어지게 하소서!

제 마음이 당신 마음 같게 하소서!”

 

젊은이여일어나라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나인이라는 곳에 가시다가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신다죽은 사람이 과부의 외아들이라는 사실이 슬픈 상황이다동정녀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과부의 아들을 만나신다백인대장의 경우에는 병을 고쳐달라는 청을 받으시지만이번에는 아무도 부탁드리지 않았는데 주검 가까이 가신다예수님은 과부에게는 눈물을 빨아들이는 해면이 되셨고아들에게는 생명이 되셨다.

 

죽은 사람이 땅에 묻히러 가고 있었다친구들이 그를 무덤에로 메고 가는 길이었다이 상여 길에서 생명이요 부활이신 그리스도를 만난다그분은 죽음과 부패를 파멸시키시는 분이시다그분은 죽을 운명의 우리 육신을 죽음의 사슬에서 풀어주신 분이시다그분은 과부의 눈물이 그치도록 자비를 베푸신다. “울지 마라.”(13여인을 울게 했던 원인이 그 말씀과 함께 사라졌다여기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기쁨에 함께 하시며결국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분임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인간의 슬픔을 함께 나누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그래서 예수님은 상여에 손을 대시고 상여를 멈추셨다(14). 그리고는 젊은이야내가 너에게 말한다일어나라.”(14)고 명령하셨다이렇게 하심으로써 그 젊은이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셨다이렇게 다시 살아난 아들이 어머니 품에 안기게 되었다(15).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손을 대시어악행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온갖 육신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자.

 

예수께서는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소외 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보여주심을 이 사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구원은 우리 인간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우리에게 내려지지만그것을 알아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몫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군중들의 반응을 보면 처음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는 말로 바뀐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16)고 한다나인의 과부의 외아들은 아무도 생각지 못한 놀라운 방법으로 살아났으며그 기적은 온 유대아와 그 주변 온 지방에 퍼졌고 모두가 감탄했다놀라운 기적 앞에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신앙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이 말은 우리가 항상 조그만 일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하며 그분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가장 큰 기적은 무엇이라고 했는가그것은 바로 내 자신이 변화하는 것이다내가 먼저 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나 세상이 변할 수 없다나 자신의 진정한 변화의 기적을 청하도록 하자그리고 감사하는 삶을 살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루카 7, 15)

-한상우신부-

우리의 사랑보다
더 간절한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이별이 
다시 뜨거워지고
죽음이 다시 
따뜻해집니다.

이별도 죽음도
예수님에게서
다시 만나게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다시 가는 
참된 사랑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이별이 있습니다.

우리 생애에
일어나는 수 많은
이별들을 
묵상해 봅니다.

이별과 죽음으로
삶과 사랑을
깨닫게됩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과부는 아들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되돌려드린
것입니다.

아들은 이미
예수님안에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자리에서
예수님과 아들을
동시에 만나게됩니다.

살리시는 주님을
믿게 됩니다.

우리모두는 
주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당신의 자녀를 
되살리시는 
주님이십니다.

 

병의 치유가 곧 구원은 아니다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148768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9월 13일 연중 제24주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