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16일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일곱 마귀가 나간 막달라 여자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인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라는 여자를 비롯하여 다른 여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돕고 있었다.
(루가 8,1-3)
Mary, called Magdalene,
from whom seven demons had gone out,
Joanna, the wife of Herod’s steward Chuza,
Susanna, and many others
who provided for them out of their resourc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다며 부활을 강조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을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는데, 막달레나를 비롯해 여러 여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든다(복음)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오늘 복음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여인들’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라삐를 따라다닐 수 있는, 그래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제자가 될 수 있는 자리에 ‘여인들’의 몫은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남녀 차별은 사회 문제였고, 오늘날 성차별에 대한 의식의 정도는 그 사회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은 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자주 표현합니다. 그러한 관심은 실은 기존 사회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었고 그 결과는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한국 교회의 순교자들도 루카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 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순교자들을 존경하며 따르고자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약자들이 많고, 자신이 왜 약자인지조차 모르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왜 점점 더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있는지, 또 갈수록 양질의 일자리보다 비정규직이 많아지고 있는지 ……. 제 자식이 비정규직이면 정규직이 되는 것에 그리 애가 타고 부유한 이들의 부정과 편법 상속에 분노하면서도, 대개는 이러한 사회 현상의 근본 원인과 개선을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버리는 문화’로 표현되는 사회 경제 논리만으로는 세상을 치유할 수 없기에, “성경의 가르침대로, 모든 사람은 회개와 참회를 통하여 더 정의롭고 연대하는 세상의 증인이자 예언자가” 되어야 하며, “복음은 이상향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희망”이라고 말씀하십니다(『돈과 권력』 추천사 참조).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우리는 사회의식을 제거하는 경우가 많지요. 세상일과 신앙의 가치를 분리한 채, 마치 복음 읽기와 묵상을 먼 나라 이웃 나라 기행문쯤으로 여기는 태도는 신앙인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에서 여인과 함께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사회의 문제아셨습니다. 차별받고 학대받는 사회 구성원들과 함께하며 욕먹을 각오로 세상을 살아 내는 것, 그것이 복음 묵상의 열매입니다. 제발 부탁하건대, 누군가 피 흘려 이룬 신앙을 제 한 몸 평온하려는 도구로 타락시키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걱정하지 말고 인생을 즐기세요.’
‘왜 신을 믿죠? 그냥 선성(善性)을 위한 선(善)을 행하세요.’
‘나쁜 소식은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좋은 소식은 당신에게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진짜일까요? 하느님의 존재는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영역임이 분명합니다. 전지전능하신 분과 유한하고 부족함 많은 사람의 대결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순간 그분께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몇 달 전, 미국에서 코로나 파티에 참석했다고 코로나바이러스에 전염되어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파티는 누가 먼저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는지를, 그래서 제일 먼저 코로나 확진자가 된 사람에게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파티에 참석했다가 확진자가 된 30대 남성은 “내가 실수를 한 것 같다.”라는 말을 남기고 결국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죽은 자에게 상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후에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요? 인간만이 최고인 것처럼 사는 것은 커다란 실수가 되고 맙니다.
오늘 복음의 루카 복음 사가는 몇몇 여자가 재산을 내놓아 예수님과 열두 제자를 시중든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이 예수님과 사도들을 도왔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을 통한 구원의 길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는 보이지 않는 구원의 길이지만, 주님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 열려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자신의 전 재산까지 내어놓으면서 주님과 함께했습니다.
이들의 이런 노력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여성의 위치는 아주 보잘것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위치를 높여 주십니다. 주님을 돕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복음서에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여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추어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은 주님의 부활을 통해서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중요한 일을 우리 역시 담당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에게 ‘없애고 싶은 습관이 무엇인가?’를 질문해 보십시오. 그러면 아마 이렇게 줄줄이 나올 것입니다.
음주, 흡연, 게으름, 스마트폰 보기, 과식하기 등등….
그렇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떤가요?
‘내가 계속 남기고 싶은 습관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장점보다 단점을 더 많이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채우고 있는 내 삶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계속 유지해야 할 습관 목록을 만들어봐야 합니다. 그 습관들을 제대로 알아야 나쁜 습관을 없애는 힘의 동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부인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엔 소위 ‘예루살렘 부인들’이 등장합니다. 예루살렘 부인들이란 예수님께서 골고타를 향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실 때 눈물 흘리며 통곡하던 여인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녀들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를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신분을 알 수 없는 수산나라고 하는 여인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 주신 여인입니다. 유명한 죄인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안나는 헤로데의 집사였습니다. 권력층이었다는 뜻입니다. 수산나는 누구인지 알 길이 없으나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라는 것을 보면 모두 재력이 어느 정도는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제들에게도 예루살렘 부인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길을 가는 데 도움이 되는 여인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의 ‘도움’이 되라고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 도움은 나중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도움인 척 하면서 오히려 방해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장 안 좋은 부류가 “안 돼”, “틀렸어”, “못 해”, “그걸 하겠다고? 교만하네”라고 말하며 기를 꺾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도움을 주는 듯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자신의 제자로 만들려는 위선자들입니다. 이들을 가까이하면 이용만 당할 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올바른 길을 갈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이 스승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다음 부류는 “내가 도와줄게”, “내가 없었다면 어쩔 뻔 했어”라고 말하며 자신의 도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사제를 다른 사제와 비교하며 자신이 도와주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들도 결국은 그 사제를 이용하여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도움이 안 됩니다. 어떤 분은 “모두가 사제를 칭찬해주니까 사제가 교만해지고 권위적으로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처럼 사제들의 잘못을 지적해주는 사람들이 꼭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없어도 됩니다. 사람은 비난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바뀝니다.
참다운 도움은 ‘예루살렘 부인들’입니다. 조건 없는 신뢰와 도움을 주는 이들입니다. 그녀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실 때, “그러길래, 내 말을 좀 듣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확신과 어머니와 같은 조건 없는 사랑으로 협력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주는 것은 물질적인 도움만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무조건 믿어주니까 덕분에 힘이 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무조건 믿어주다가 사제가 교만해지고, 잘못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보면 많은 여자가 그저 “예수님의 일행”이라고 하여 시중을 들었다고 하지, 가려가며 시중들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어머니 모니카는 무조건 아들을 믿고 기도하여 주었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은 그것 자체가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받는 사람은 비뚤어졌어도 올바른 길을 찾습니다. 그런 사랑으로 돕는 여인들이 참으로 예루살렘 여인들입니다.
제가 영성관에 온 지도 벌써 5년째가 되어갑니다. 처음 올 때는 재정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못했습니다. 워낙 시골에 있어서 교통편이 좋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잘 운영해도 적자 안 날 정도로 빠듯했습니다. 그래서 소위 ‘식복사’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재정을 줄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식복사 한 분을 고용하면 일 년에 2천만 원 정도는 나가야 하는데, 빠듯한 상황 속에서 사제 한 명을 위해 그런 비용을 지출하는 것은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자매님 3분을 일주일에 하루만 함께 와서 좀 도와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성지순례 갈 때 저희 부모님에게 아주 잘했던 분들이어서 그렇게 청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한 분은 청소, 한 분을 빨래, 한 분은 맛있는 집밥을 먹게 해 주셨습니다. 5년 가까이 매주 빠지지 않고 와서 도와주셨습니다. 재정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정적인 도움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민이 있으면 이야기도 하고 하나의 공동체로서 미사도 함께 봉헌하였습니다. 이분들은 제가 하는 일을 모두 긍정해주시지 어떤 방향을 제시하거나 삶을 지적하지 않으십니다. 당신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큰일 났을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일을 다 하고 나서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돌아가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아마 그 여인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따듯함을 느끼고 힘을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재산으로만 제자들을 도왔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자들이 줄 수 없는 무언가가 여인들에게 분명히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무조건적 사랑과 신뢰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여인들의 그러한 도움을 받았다면 지금의 사목자들도 그런 도움이 필요할 것은 분명합니다.
주교님도 도와주시고 동료 사제들도 당연히 제가 여기 있는 동안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이런저런 정보와 충고를 주신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큰 사고 없이 영성관 생활이 마무리된다면 저는 그 공로를 무엇보다 사제관에서 봉사하신 이 세 분에게 돌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처럼 믿고 사랑해주고 도와주신 많은 예루살렘 형제자매들에게 돌리고 싶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골고타로 올라가실 때는 도망가버린 제자들에 비해 그 여인들에게서 더 큰 힘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의 도움으로 하와를 창조하셨듯이 예루살렘 부인들은 제자들과 버금가는 새로운 창조를 위한 필수적인 도움입니다.
-조재형신부-
‘터무니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의 유래는 건물이라고 합니다. 건물은 시간이 지나고 오래되면 사라지지만 건물을 세우기 위해서 터를 잡은 돌들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성지순례를 가면 오래된 성당의 터와 남아 있는 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슬람 지역이 된 터키에서 초대교회의 유적을 보았습니다. 유적지를 발굴하면서 예전에 살던 사람들의 집터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터와 돌’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던 장소가 있습니다. ‘행복선언 성당, 오병이어 성당, 수위권 성당, 나자렛 성당, 거룩한 변모 성당, 가나 혼인잔치 성당, 부활 성당, 무덤 성당’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당은 예전에 있던 터전에 새롭게 성당을 세웠고,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터가 남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터무니없다.’는 말은 건물은 물론 터와 돌까지 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낮아져서 해안가에 도시와 건물들이 있었습니다. 지구는 일정한 주기에 따라서 해빙기와 빙하기가 찾아옵니다. 해빙기가 되면 해수면이 상승하고 해안가의 건물과 터는 모두 바다 속으로 잠기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다시 빙하기가 올 때까지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런가하면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터무니없는’ 상황이 됩니다. 터무니없다는 말은 시대가 지나면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실과 동떨어지거나 근거가 없는 말을 의미합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가짜뉴스’도 터무니없는 말이 많습니다. 건전한 상식과 분별을 가진 사람은 터무니없는 말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귀가 얇은 사람,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가짜뉴스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이기에 오히려 식별의 지혜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의 신자들에게 ‘터무니없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사람들이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한 번뿐이 인생이니 먹고 즐기며 마음대로 살자고 했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법을 어기려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삶의 한 방편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뿌리지 않고 거두려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토마 사도도 터무니없는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의 옆구리를 손으로 눌러봐야 그분이 부활했음을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과학과 산업의 발전으로 풍요해진 세상에 살지만 현대인들도 터무니없는 생각과 행동을 하였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 함께 살아야하는 다른 생명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을 파괴하였고, 이는 기상이변과 코로나와 같은 자연 재해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릇된 종교적인 신념으로 다른 문화와 종교를 배척하고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이념과 욕망의 늪에 빠져서 땅을 빼앗고,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두 번의 세계 대전으로 뼈저리게 체험하였습니다. 지금도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강대국의 욕심 때문에 국지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난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생각과 행동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과 자본을 얻기 위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양심과 사랑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자기들의 재산으로
-반영억신부-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 두지 말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입었으면 그에 걸맞은 응답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하게 되면 더 큰 감사를 할 기회가 옵니다. 빈첸시오 성인은 “나누면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버리면 버릴수록 자유로워집니다.”하고 말씀하셨고, 성녀 마더데레사 수녀님은“쌓아 놓으면 쌓아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논리입니다. 사랑은 베풀면 베풀수록 풍요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셨는데 제자들과 막달라여자 마리아,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인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라는 여자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도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일찍이 악령과 질병에 시달린 사람도 있었는데 주님을 만나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악령과 고통이라는 시련을 통해서 주님을 만났고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했기에 모두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주님과의 만남이 더 깊어졌고 나중에는 십자가 곁에도 설 수 있었고(루가23,49), 천사들로부터 주님 부활의 소식을 듣고 이를 사도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습니다(루가24,10).
여인들은 주님을 만남으로써 행복했고, 자기의 것을 내놓음으로써 제자들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베풀었지만 보답을 바라지 않았고 자기네 재산을 바쳤지만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 숨은 공로자들입니다. 그들은“은혜를 베푼 것은 모래밭에 새기고 은혜를 입은 것은 돌 판에 새겼습니다.”재산은 이웃과 나눌 때 비로소 가치를 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도직 단체의 구성원이 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궂은일을 도맡아 합니다. 때로는 오해를 사고 무시당하는 일도 있지만 '하느님은 아시니까' 하면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숨은 공로자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1디모6,8-9).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선한 것이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화가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부자 되었다 해도, 그 가산이 늘었다 해도 너는 두려워하지 마라. 죽을 때면 아무것도 지니고 갈 수 없으며, 영화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하리라”(시편49). 따라서 여인들이 자기네 재산을 주님의 일에 쓴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입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은총을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그리할 때 우리 모두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로자가 됩니다. 지금 감사하십시오! 절대 미루지 마십시오! 그러면 더 많이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만날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사랑에 사랑을 더하여’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여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돕다. ♣
-송영진신부-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1-3).”
여기에 언급된 여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의 가장 중요한 증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 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은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루카 23,46-49).”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도 뒤따라가 무덤을 보고
또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모시는지 지켜보고 나서,
돌아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였다(루카 23,55-56).”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그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그런데 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여자들이 그 일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
두 남자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루카 24,1-5)”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었다. 그리고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이에게 이 일을 다 알렸다. 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사도들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 사도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루카 24,8-11).”
여자들은 예수님의 수난의 전 과정을 모두 보았고,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았고, 시신을 무덤에 모시는 것을 보았고, 천사들의 ‘예수님 부활 선포’를
처음으로 들었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린 첫 증인들입니다.
(여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제자들이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본 증인들이고, 부활을
처음으로 증언한 첫 증인들이라는 점에서 특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증언’이라는 것은 자신의 증언이 진실이라는 것을 믿고서 할 때에만
가치가 있는 일이고, 자신의 증언이 거짓일 때에는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를
하면서 하는 일입니다.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고서(확신하고서) 한 일입니다.
따라서 여자들은 ‘부활의 첫 증인’들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믿은 신앙인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 교회의 신앙의 바탕이고, 출발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 여자들을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셨을까?
(사도들은 왜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을까?)
예수님께서 여자들을 사도들보다 더 사랑하셨거나 더 귀하게 여기셔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고, 여자들 쪽에서 사도들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거나 편애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도들과 여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똑같은데,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서 사도들과 여자들이 좀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얼마나 차이가 있었는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사도들이 모두 달아난 것은 사실이고, 계속 숨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현장에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여자들이 먼저 갔고, 그래서 부활 선포를 먼저 듣게 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먼저 만난 것은, 여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사도들보다 더 능동적이었고, 적극적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먼저 다가갔으니, 먼저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는 말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들이 연상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과 당신을 구분해서 말씀하셨지만,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었던”(마태 8,20) 예수님의 생활을 생각하면
예수님이 곧 ‘작은 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여자들이 한 일은 단순히 예수님을 위한 ‘시중’이 아니라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한 일입니다.
(여자들이 예수님만 후원하고 가난한 이들은 외면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에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먼저 그런 일을 막으셨을 것입니다.
여자들은 예수님을 후원하는 일과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을
똑같이 다 잘했을 것입니다.)
여자들의 후원과 시중 덕분에 예수님과 사도들이 호의호식한 것은 아니고,
고달프고 힘든 생활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그 후원과 시중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v
여자들이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든 일은,
사실상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한 일과 같다는 점에서
그 일을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2코린 9,6-9).”
여기서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인다.”는 말을, “재산을 많이 바치면
그것에 비례해서 물질적인 복을 많이 받는다.”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또 “재산만 많이 바치면 더 쉽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재물로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입니다.
이 말은, 사랑과 선행을 통해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위선’이 아니라, 진심으로 실천하는 사랑과 선행일 때.)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8,1-3: 예수님을 도와드린 여인들
오늘 복음에서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헌신 봉사하였던 여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제자들과 몇몇 여인들은 예수님을 헌신적으로 도와드리며 따랐다. 그들 중에는 대표적으로 마리아 막달레나, 수산나, 요안나라는 여인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사도들도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처럼 여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 여인들과 수산나는 복음에 그 이름이 전해질만큼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헌신적으로 도운 여인들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여인이 설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복음에서 보면 예수께서도 시키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으로 복음전파를 도운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의 역사 안에서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여성이 헌신적으로 주님의 사업을 도와왔고 지금도 여성들이 그러한 열성을 보이는 것은 또한 주님의 부르심이라고 하겠다. 이들은 주님의 사업을 돕는데 그들 사이에 어떤 시기나 질투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그런 것이 있었다면 예수께서 그 봉사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우리도 이 여인들과 같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봉사하고 하느님의 뜻에 맞는 실천을 하고 있는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한다고 하면, ‘그건 네가 시작한 일이니 잘 해봐!’라고 하면서 협조도 하지 않고 골탕 먹기를 바라고 있는 자세는 없었는지, 그래서 그를 어려움에 빠뜨리고 속으로 손뼉을 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현대 교회의 모습은 사실상 여자들의 수가 더 많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이들도 여자들이 대부분이다. 이 여인들의 봉사로 교회가 살아있을 수도 죽어갈 수도 있다. 우리의 역할은 이렇듯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주님 앞에 더욱 생동감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어려운 가운데 서로가 깊이 일치한 이 여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서도 나타나야 할 것이다.
역사의 인물 속에서나 지금에도 그러한 역할, 그러한 도움은 절대로 필요하다. 이러한 봉사는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으나 그러한 도움이 있어야 하고, 또 그러한 부르심에 따라 자기 소임을 잘한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 큰 영예가 아니겠는가?
예수님을 도와드린 여인들이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묵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봉사를 주님께 항상 영광으로 돌려드릴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은총을 구하자.
09.18.금.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 3)
-한상우신부-
하느님보다
커져버린
우리의 삶이다.
하느님 중심이
되는 삶이 바로
시중드는 삶이다.
시간을 바치는
시중이다.
모순된 삶을
바로잡아 주는
봉사이다.
되살아나는
기쁨이며
되살아나는
믿음이다.
시중드는
봉사가 사람을
아름답게한다.
결국 나를
살리는
봉사이다.
기도의 삶은
시중드는
봉사의 삶으로
드러난다.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다.
계산하지 않는
진실된 나눔이
참으로 그립다.
요란한 소리의
봉사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하는
진실된 봉사이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는
시간은 봉사의
시간이다,
마음을 바치고
시간을 드리는
봉사로 성장한다.
교회의 역사는
봉사의 역사였다.
봉사를 통해
성장하고
기도를 통해
우리는
봉사한다.
시중드는
이들을 통해
교회는 빛난다.
분주한 봉사보다
하느님께 집중되는
봉사로 우리는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진정한 믿음의 길에 장애물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루카 8,2)
복음사가는 예수님 선교 여행의 일행 중에 열두 제자는 물론 몇몇 여인들도 함께 있었다고 밝힙니다. 그당시 여성은 사회적 약자의 입장이었지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때에도 사람 수에 포함조차 되지 못하고 건너뛸 정도의 존재감이었으니까요.(루카 9,14 참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여인들 중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이름이 맨 먼저 불리웁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한 그녀는 남성 제자들이 도망간 마지막 십자가 죽음의 자리를 끝까지 지킨 여인이지요. 그녀는 열렬한 사랑과 용기, 열정의 아이콘입니다.
그녀가 일곱 마귀에 시달렸다는 것은, 복음사가가 굳이 완전의 수, 일곱을 밝힌 데서 알 수 있듯이, 인간으로서 더 망가질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피폐한 상태였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그녀의 신상에 대해 더 세밀한 정보를 주지는 않지만, 이 소개만으로도 그녀의 처지가 미루어 짐작이 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처럼 호되게 악의 힘에 묶여 있었다는 사실은,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녀에게 얼마나 대단한 은총이고 구원이었는지를 반증합니다. 어둠이 짙었던 만큼 그녀가 받은 주님의 빛이 그녀 존재를 더욱 찬란히 밝혀 주었을 겁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기도 합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에 무덤가를 찾아 빈 무덤을 발견한 것도 그녀였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알린 것도 그녀였지요. 또 제자들이 돌아가고 난 빈 무덤가를 울며 서성이다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도 그녀였습니다.(요한 20,1-18 참조) 그녀는 주님의 영광스런 부활의 첫 증인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부활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부활 신앙을 강조하여 일러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1코린 15,12)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으면 그분의 출현과 사망은 그저 하나의 해프닝처럼 이내 잊혀지고 말았겠지요.
부활 신앙은 생명의 주인이신 성부에게서 파견받아 오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해 죽음이라는 인류 최대의 악을 정복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 사건을 통해 이 지상의 삶이 지난 후 주님과 누릴 영원한 생명, 완전한 행복을 꿈꾸고 기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것입니다."(1코린 15,19)
부활 신앙은 우리 시선을 영원에로 돌리라고 촉구합니다. 현재 배부르고 풍요롭고 남부러울 것 없는 이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지만, 지금의 결핍과 고통이 하느님 안에서 내면화되고 가치가 된 이들에게는 부활이 삶의 "희망"이고 "의미"입니다.
이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한때 가장 처절히 무너졌던 한 여인을 통해 세상에 전해졌다는 것, 또 예수님께서 부활의 신빙성을 더해 줄 유망한 종교 지도자나 남성 제자들이 아니라 약자 중의 약자인 한 여성에게 부활의 첫 얼굴을 보여 주셨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 덕에 "부활"은 사실 관계 확인으로 증명되는 정보의 영역을 넘어 믿음의 영역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부활을 압니까?"가 아니라, "당신은 부활을 믿습니까?"라고요.
뉴스 홍수 시대에 우리는 전해지는 정보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출처를 확인하기도 하고, 자신의 필터로 내용을 걸러내어 차단하거나 또 힘을 실어주기도 하지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그런 관점에서 인간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었을 것이고,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의혹스런 탄생부터, 제도에서 빗겨나간 삶, 자유로운 가르침, 치욕스런 십자가 죽음, 부활 소식의 메신저까지 그분은 관습이나 정통성, 공신력의 힘에 기대지 않으셨으니까요.
신앙이 우리에게 어떻게 전해졌는지 되돌아봅시다. 누구를 통해, 어떤 사건과 계기로, 어떤 매력으로 다가왔는지요? 확실한 것은, 주님 은총의 손길이 우리 각자에게 어떤 경로를 통해서 와 닿았건, 우리가 가진 색안경(선입견이나 편견, 고정관념, 관습, ..주의, ..관)이 크고 복잡하고 두터울수록 믿음에 이르는 길이 더 멀고 좁고 힘겨웠다는 점일 겁니다.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리이다."(화답송)
이 말씀을 믿는다면, 이 노래가 위안이 된다면, 이 고백이 희망이고 설렘이라면 그대는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건, 믿고 사랑하고 희망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려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 곁에서 자기들의 것을 내놓아 그분을 돕고 섬긴 보잘것없는 여인들처럼 오늘도 겸손히, 열렬히 주님 곁에 머무르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보잘것없는 이들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신앙은 보잘것없는 우리를 통해 세상에 구원이 될 것입니다. 이 길에서 작은 이의 순수한 믿음으로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모든 제자들, 특히 여성 제자들을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며 묵묵히 섬김의 길을 걸어갔던 여성 제자들처럼, 이 믿음의 길에 길동무가 되어주시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고맙습니다.
구원과 헌신의 관계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을과 고을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셨음을 얘기하는데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 중에
여인들도 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이 얘기는 주님께서 당시 소외와 차별을 받는
사람인 여인도 다른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환영하시고,
복음 선포단의 일원 또는 제자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셨음을 얘기합니다.
이것이 다른 복음들과는 다른 루카 복음의 특징임은 이 정도로 갈음하고,
오늘은 주님과 여인들의 관계를 좀 더 집중하여 보고자 합니다.
주님과 여인들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구원의 관계입니다.
물론 여인들은 주님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관계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사랑의 관계만이 아니라 구원의 관계라는 얘기입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는 여인은 많고도 많으며,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런 여인은 많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런 여인과 구원받은 여인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제 생각에 구원받은 여인은 불행에서 건져진 여인이고 그래서
사랑받아 행복한 여인일 뿐 아니라 구원받아 행복한 여인이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여인들의 불행과 비 구원은 그저 인간적인
불행과 비 구원, 그러니까 가난이나 병고나 실연의 고통 정도가 아닌
악령에 의해 인간이 영적으로 파괴된, 그런 불행과 비 구원이었지요.
사실 영의 파괴는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전인적인 파괴이지요.
완전히 영에 제압당하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꼭 구원자가 있어야 하는데, 어떤 명의도 심리학자도 정신과 의사도
이들을 위한 구원자는 될 수 없었습니다.
옛날 제가 양성을 담당할 때 한 형제가 이런 상태였는데 반찬 하나도
자기가 먹고 싶은 대로 먹지 못하고 영이 시키는대로 먹어야 했고,
식당 자리도 마음대로 앉지 못하고 시키는대로 여기저기 옮겨다녀야 했으며,
영의 어두운 기운이 그 형제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짓누를 정도였는데
저의 어떤 말도 의사들의 어떤 치유도 먹혀들지 않아
참으로 무력감을 느낄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여인들도 분명 이러했을 것이고 그래서 주님께 구원을 받았을 때
그 행복함과 주님께 대한 고마움은 그저 여인으로서 사랑을 드리는
그 이상의 것을 하게 하였고 가족들도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였기에
주님을 따라나섰을 뿐 아니라 가진 재산도 바칠 수 있었을 겁니다.
이런 주님의 구원에 대한 여인들의 보답은 헌신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과 여인들의 관계는 구원과 헌신의 관계이고,
그래서 자기 욕심 때문에 주님을 따르던 다른 제자들이 도망쳤을 때도
이 여인들은 끝까지 주님을 따라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죽음을 지켰습니다.
이런 여인들을 보면서 악령에 사로잡힌 적이 없으니 나는 행복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들의 헌신을 보면서 철부지처럼 마냥 행복해해도
되는지 성찰케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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