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19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아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루가 8,16-18)
“No one who lights a lamp conceals it with a vessel
or sets it under a bed;
rather, he places it on a lampstand
so that those who enter may see the light
말씀의 초대
잠언의 저자는, 선행을 거절하지 말고 악을 지어내지 말라며, 주님께서는 의인에게 복을 내리신다고 가르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며,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가르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등불을 켜는 이유는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등불을 그릇으로 덮어 두지 않고 등경 위에 얹어 둡니다. 될 수 있는 한 빛이 더 멀리 비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등불과 같습니다. 우리가 선행을 실천하면 빛이 사람들을 비추게 되고, 사람들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십니다(요한 1,9 참조). 예수님을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등불을 자신과 이웃에게 비추게 됩니다(요한 8,12 참조).
어부는 먼 바다에서 그물질을 끝내고 항구로 돌아오다가 등대의 빛을 보면 평화로워진다고 합니다. 어부에게 빛은 편안한 안식입니다. 우리에게도 빛은 희망의 상징입니다. 새해에 많은 사람들은 해맞이를 하러 갑니다. 순례자들은 시나이 산 위에서 맞이하는 일출을 보고 모세 성인이 보았던 하느님의 빛을 연상합니다.
신앙의 빛은 우리의 영혼을 따뜻하게 비추고 기쁨을 발산시킵니다. 그 빛은 은총을 몰고 오고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 그 빛은 사라지고 불안과 괴로움이 따릅니다. 우리는 어두움이 신앙의 빛을 끄지 않도록, 그 빛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은 우리 신앙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보호해 줍니다. 이 세상의 풍파와 고뇌 가운데에서도 은총의 빛을 계속 비추어 주십니다. 우리는 그 빛을 따라가고 어두움을 물리쳐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차를 운전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부정적인 생각들이 점점 늘어만 갔습니다. 그러다보니 신부님들과의 약속 자체도 깨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제까지 이 길을 그렇게 많이 다니면서 이렇게 길이 막혔던 적은 이번 딱 한 번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딱 한 번 길이 막혀서 운전을 오래하고 있을 뿐인데 뭐 이렇게 불평불만이 많은가 라는 마음을 먹으니 그런 생각을 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질 뿐입니다.
하긴 어떤 분이 자기가 지나가려고 할 때면 매번 신호가 바뀌어서 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신호체계를 잘못 만든 것이 아니냐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실제로는 절반 이상을 파란 불을 만나서 그냥 통과하게 된다고 합니다. 많이 신호에 걸려서 차를 세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냥 통과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지요. 바로 부정적인 마음이 잘못된 판단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마음을 바꾸며 살아가는 삶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부정적인 마음,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을 모두 걷어내었을 때, 분명히 기쁨과 행복이 나와 함께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연하지요. 등불은 주위를 밝게 비추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는다면 가장 어리석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이 등불의 역할을 합니다. 세상을 밝게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우리 모두가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들 각자가 갖는 부정적인 마음들, 그리고 욕심과 이기심 등이 주님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퍼지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조금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주님께 더 큰 관심을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의 말씀이 세상 곳곳에 퍼져나갈 것이고, 그로인해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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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있을 순교자 현양 대회 준비로 며칠을 계속해서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미사 중에 순례를 오신 순례자들에게 이러한 말씀으로 부탁을 드렸지요.
“요즘에 순교자 현양 대회 준비 때문에 정말로 정신이 없습니다. 이 현양 대회가 잘 진행되고 참석한 모든 이들이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어제는 특히 바빴습니다. 제단 설치와 미사 때 뜨거운 태양을 막을 그늘막을 설치하느라 미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행사장에 있었지요. 그리고 오후 미사 시간 전에 사무실을 들어갔는데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글쎄 어떤 형제님께서 전날 미사 때 기도해달라는 저의 말을 듣고는 아침 일찍 성지에 오셔서 구석구석을 청소, 정리정돈, 그리고 수리까지 하신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점심도 드시지 않고 하루 종일 성지에서 혼자서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직원이 이름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하니까,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라고 하시면서 말없이 일하시다가 저녁에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너무나 큰 감동이었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들이 계시기에 교회가 더욱 더 발전하고 주님의 뜻이 세상 끝까지 퍼져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내 자신을 알리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알아주는 것보다 주님께서 알아주시는 삶을 사는 것이 더 멋진 모습이 아닐까요?
하루 종일 봉사해주신 형제님,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조재형신부-
추석 연휴가 끝났습니다. 조카가 삼촌 신부에게 용돈을 주었습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태어났으니 조카도 나이가 제법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즐거워하는 조카를 보았습니다. 어릴 때는 용돈을 받았습니다. 한참 일을 하면서부터 어르신들에게 용돈을 드렸습니다. 이제 저도 용돈을 받는 자리에 서게 되었으니, 시간이 흐른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추석날 아침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밥이 되지 않았습니다. 밥통의 전원을 눌러야 하는데, 깜빡했던 것 같습니다. 가는 길이 멀어서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밥을 하려면 40분은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캐나다에 있을 때 ‘햇반’을 먹곤 했습니다. 햇반을 먹자고 제안을 했고, 조카는 곧 햇반을 사왔습니다. 자칫 우울할 뻔 했던 추석아침이 ‘햇반’으로 밝아졌습니다. 하긴 추석은 햇곡식을 먹는 날이니 ‘햇반’을 먹는 것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핀란드의 끝없는 도전’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북유럽의 작은 국가인 핀란드가 국가경쟁력을 갖는 이유는 ‘교육제도’라고 합니다. 핀란드 교육의 핵심은 선택과 경쟁이 아니라 평등과 협력이라고 합니다. 교사들의 자율과 전문성을 키워주고, 학생들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정부는 일관된 정책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으며,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부모는 자신들의 꿈을 대신하는 자녀들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자녀들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응원을 한다고 합니다. 핀란드에서 가장 갖고 싶어 하는 직업은 ‘교사’라고 합니다. 그만큼 교사들의 자부심이 크고,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핀란드에서 교사는 학생들에게 등불과 같습니다. 사회를 이끌어가는 나침판과 같습니다.
내비게이션과 스마트 폰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생활을 편하게 해 주는 등불과 같은 존재입니다. 내비게이션을 작동하면 과속 방지턱도 알려주고, 과속 단속구간도 알려주고, 막히지 않는 길로 가도록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스마트 폰은 많은 보물이 있는 창고와 같습니다. 많은 애플리케이션들이 있어서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줍니다. 저도 일기예보, 지하철 노선, 버스 노선, 신문과 같은 애플리케이션을 자주 이용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등경 위의 등불과 같은 신앙인으로 이끌어 줄까요?
어릴 때 읽었던 ‘햇님과 바람’의 이야기가 하나의 대답이 될 것 같습니다. 햇님은 따뜻함으로 나그네의 옷을 벗길 수 있었습니다. 바람은 거센 힘이 있었지만 결국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몇 가지 원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남에게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진리는 감추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원하는 대로 남에게 대해주고, 진리의 빛을 환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이미 행복한 사람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한 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오늘 만나는 이웃들에게 희망의 등불, 사랑의 빛, 믿음의 씨앗을 함께 나누어 주면 좋겠습니다.
충만한 기쁨으로 빛나는 그리스도인의 얼굴
-양승국신부-
상습 피로와 열두 서너 가지 고민꺼리들, 누적된 스트레스로 가득 했던 어느 날 새벽,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적합한 형용사를 떠올려보니 여러 가지였습니다. ‘게슴츠레’ ‘우중충’ ‘누리끼리’ ‘꼬질꼬질’ ‘흐리멍텅’...
부랴부랴 세면을 하고 한 수녀원 새벽 미사를 드리다가 한 A급 애기 수녀님의 얼굴을 봤는데, 저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또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초롱초롱’, ‘샤방샤방’, ‘생기발랄’ ‘총기 충만’한 얼굴로 미사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하는지 잘 가르치고 계십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 복음 8장 16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등경 위에 놓인 등불 같은 삶이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짙은 암흑 속에 빛이 되어주는 사람, 심연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 끝도 없는 고통 속에서도 환하게 웃으며 살아가는 사람, 병고 속에서도 빛이 나는 사람...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 밝고 화사해야 마땅한데, 참으로 어둠이 짙습니다. 암담하고 팍팍합니다.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는 점점 줄어듭니다. 표정들은 마치 좀비들처럼 퀭하고 음산합니다. 순간순간 셀 수도 없이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사고들은 우리를 더욱 울적하게 만듭니다.
충만한 기쁨으로 빛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이 더욱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우리 봉헌생활자들이 빛나는 얼굴을 세상에 드러내야겠습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 일거수일투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렬한 생명의 광채를 반사하는 거울이어야겠습니다. 우리 각자 영혼의 등불에 성령의 심지로 불을 밝혀야겠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참으로 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동적 공격의 명수들입니다. 차라리 힘들면 힘들다고, 괴로우면 괴롭다고 표현하면 좋겠습니다만 용기 부족으로 그러지를 못합니다. 대신 “내가 지금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알아?”라는 내면의 메시지를 자신의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닙니다. “내가 지금 지고 있는 십자가 무게가 얼마나 큰 지 알기나 해?”라고 말하지 않고 엉뚱한 행동으로 표현합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최근 가톨릭교회 종사자들의 딱딱함과 불친절에 크게 진노하신 적이 있습니다. 울적하고 어두운 얼굴로 복음을 선포한다면 그 복음이 제대로 전달이나 되겠습니까? 심각하고 울적한 얼굴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을 이야기한다면 누가 그 사랑과 자비를 믿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표정 관리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에서 가장 괴롭고 울적한 표정 짓지 말아야겠습니다.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나보다 불행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하는 얼굴로 살지 말아야겠습니다. 대신 더 자주 미소를 지어야겠습니다. 더 자주 화사하게 웃어야겠습니다. 어둡고 차가운 지하 골방에서 웅크려있지 말고 밝은 세상 밖으로 나와 외쳐야겠습니다.
“저를 한번 보십시오. 제가 곧 제2의 그리스도, 또 다른 그리스도입니다. 제 얼굴을 들여다보십시오. 제 얼굴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제 삶을 한번 보십시오. 제 삶이 곧 살아있는 복음입니다.”
비뚤어진 자
-전삼용신부-
어차피 난 혼자였지, 아무도 없어, 다 의미 없어, 사탕 발린 위로 따윈 집어 쳐, 오늘 밤은 삐딱하게.
내 심심풀이 화풀이 상대는 다른 연인들, 괜히 시비 걸어 동네 양아치처럼, 가끔 난 삐딱하게 다리를 일부러 절어, ... 너 하나 믿고 마냥 행복했었던 내가 결국엔, 영원한 건 절대 없어, 결국에 넌 변했지, 이유도 없어, 진심이 없어, 사랑 같은 소리 따윈 집어 쳐, 오늘 밤은 삐딱하게, 내버려 둬,
어차피 난 혼자였지, 아무도 없어, 다 의미 없어, 사탕 발린 위로 따윈 집어 쳐, 오늘 밤은 삐딱하게.
지드레곤이란 유명한 대중가수의 ‘삐딱하게’란 노래 제목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시고, 올곧은 이들을 가까이하신다.”라는 말씀을 묵상하다 비뚤어진다는 의미를 잘 담고 있는 가사 같아서 적어 보았습니다. 우리도 하던 일이 잘 안 되고 누군가로부터 배신당했을 때 망가져버리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그런 심정을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런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신다니 큰일입니다. 비뚤어진 자는 그렇게 살면 나에게 더 손해이고 더 고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굳이 선택해서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일상에서 이런 경험을 많이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창옥 강사가 오토바이를 타다가 손목을 다쳤습니다. 그래서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가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약을 져 주고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김창옥 강사는 그런 불친절한 의사가 준 처방대로 지은 약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 달 넘게 고통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운동을 하지 못하니 식욕도 없고 살이 빠지며 짜증도 많이 났다고 합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다시 그 병원을 찾았는데 여전히 같은 의사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불친절하게 약을 지어 주었습니다. 물리치료 한 시간을 받는데 물리치료사는 자신에게 매우 친절하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약 한 번 먹었더니 80%의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물리치료 한 시간, 약 한 번 먹었으면 되는 것을 나는 왜 그것을 하지 않고 몇 달 동안 고생만 했을까?’
그 이유는 바로 마음이 삐딱했기 때문입니다. 병원은 의사의 성격을 판단하는 곳이 아니라 나의 병을 낫게 해 주는 곳입니다. 그것만 해결되면 되는데 사람까지 판단하다보니 고통을 알고도 참아야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누가 화살을 쏘았으면 그 화살을 뽑을 생각은 안 하고 누가 쐈는지 먼저 찾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인 줄 알면서도 굳이 용서를 하지 않고 고통 받으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눈에 흙이 들어가는 고통도 겪어 낼 테니 미워하게만 해 달라는 듯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삐딱한 삶입니다.
따라서 오늘 독서 잠언 말씀에서는 마음이 삐딱한 이들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면 행복한데 그것을 알면서도 고통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아들아, 네가 할 수만 있다면, 도와야 할 이에게 선행을 거절하지 마라. ... 이웃이 네 곁에서 안심하고 사는데, 그에게 해가 되는 악을 지어내지 마라. 너에게 악을 끼치지 않았으면, 어떤 사람하고도 공연히 다투지 마라.”
이 말씀 바로 뒤에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시고, 올곧은 이들을 가까이하신다.”라고 하시고 또 “주님께서는 악인의 집에 저주를 내리시고, 의인이 사는 곳에는 복을 내리신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비뚤어진 악인은 이웃 사랑이 행복임을 알면서도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빈정대는 자들”이지만 주님께서도 그들에게 “빈정대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해야 행복한지 알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비웃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비뚤어진 사람이 아니라 올곧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시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현자賢者의 삶
-이수철신부-
오늘부터 제1독서는 구약으로 돌아가 소위 지혜서의 말씀을,
특히 이번 주는 잠언과 집회서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 책들은 지혜의 말씀들로 이루어졌으며 이들 말씀은 바빌론 유배이후 유대 지식층들로부터 나왔습니다.
이 책들은 예언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로
개인들의 행동, 친밀한 관계, 올바른 사고에 대해 다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최근 읽었던 예언자들의 주요 관심사인 불의에 대한 비난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는 예언자豫言者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자賢者도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밖으로는 예언자, 안으로는 현자의 삶이면 이상적이겠고 이 둘은 경쟁이 아닌 보완관계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잠언의 책은 학식이 많은 교사들에 의해
젊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윤리적, 종교적 가르침의 모음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격언들은 거의 구약 지혜서의 전형적 본보기입니다.
그것은 종교에 기반한 윤리적 금지를 강조하고 이런 삶에 따라오는 상과 벌의 가르침이 주가 됩니다.
그것은 ‘계시revelation’보다는 ‘체험experience’에 호소합니다.
그 가르침은 짧으나 하느님과 관계된 지혜에 대한 중요한 탐구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지혜는 ‘비의적 지식’이 아니라
개인이나 공동체가 이성적으로 책임감있게 받아들여 따라야 할 ‘상식’입니다.
이런 지혜는 책에서 습득된 것이 아니라 삶의 체험이 반영된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나 어렵지 않게 공감하고 동의하게 됩니다.
하여 격언은 명쾌하여 기억하여 전달하기 쉽습니다.
오늘의 잠언 독서는 좋은 이웃에 대한 다섯가지 가르침입니다.
이웃이 참으로 곤궁중에 있다면 언제든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아들아, 네가 할 수 있다면, 도와야 할 이에게 선행을 거절하지 마라.
가진 것이 있으면서도 네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게, 내일 줄테니.’하고 말하지 마라.
이웃이 네 곁에서 안심하고 사는데, 그에게 해가 되는 악을 지어내지 마라.
포악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의 길은 어떤 것이든 선택하지 마라.”
이렇게 시작되는 모든 구절들이 구구절절 공감이 갑니다.
아주 기본적이고 상식적입니다.
새삼 우리의 영성생활도 이런 건전하고 상식적인 지혜에 기반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하여 먼저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이런 상식의 지혜에 기초하지 않은 영성생활은 사상누각, 모래위의 집되기 십중팔구입니다.
무엇보다 폭력의 사람들을 닮지 말아야 합니다.
폭력적 사람들이나 하느님 백성의 적들의 분명해 보이는 번영은
언제나 믿는 사람들의 하느님 신뢰에 위협이 됩니다.
예레미야도 욥도 계속 하느님께 “왜?”하고 물었고 이런 경우는 오늘도 계속됩니다.
그러나 다음 격언이 분명한 교훈입니다.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시고, 올곧은 이들을 가까이 하신다.
주님께서는 악인의 집에 저주를 내리시고, 의인이 사는 곳에는 복을 내리신다.”
악인의 번영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도덕적 행위는 하느님이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비도덕적 행위를 싫어하십니다.
반면 주님은 위의 올곧은 사람들을 당신 친구로 삼으십니다.
객관적으로 또는 주관적으로 봐도 악한 삶이 부와 물질적 성공, 권력을 가져다 주는 것 같아도,
실은 하느님과 이웃간의 내적평화나 조화의 소중한 선물은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사실 밖으로 행복해 보이는 성공적 삶을 사는 것 같아도 내적으로 불행한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니 악인의 성공이나 번영을 결코 부러워하지 말라는 지혜서의 가르침입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부와 명예, 권력을 지녔어도
그 내면에 평화와 기쁨, 희망이 없다면, 진정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런 소유들 무슨 쓸모가 있겠는지요.
한편 참으로 착한 사람들이 표면상 시련의 연속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어느 적대자도 빼앗아갈 수 없는 평화와 힘을 체험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서 올바르게 참되게 살아갈 때의 이런 깊은 내적평화와 힘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도 등불의 비유에서 세가지 이런 잠언의 지혜에 호소합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전혀 감춰져 있지 않습니다.
복음은 소수의 엘리트에게 맡겨진 신비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붕 위로부터 모든 이들에게 선포되는 메시지입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된다.”
오늘날의 인터넷이 바로 등경의 등불같은 역할로 세상 만방에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하지 않습니까?
산티아고 순례시, 불암산 산 속 수도원에서 제가 인터넷에 올리는 강론도
세상 수많은 사람이 읽으니 완전히 현대판 기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추종자들인 우리 역시 세상 모든 이들이 보도록 그분의 빛을 반사하는 작은 등불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신자invisible Christian’란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종교를 지키고 이웃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강한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가능하다 할지라도 이웃에게 믿음을 강요해선 안 됩니다.
그러나 ‘와서 보고come and see’, 복음을 듣고 개인적 체험을 갖게 함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듣고 동화된 진리는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습니다.
계속 퍼내야 맑은 샘이 되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하여 나도 살고 너도 ‘살기위하여’ 매일 쓰는 제 강론입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예수님의 잠언같은 지혜의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바로 부익부富益富, 빈익비貧益貧의 원리가 영성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어는 지점에 도달하여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끊임없는 내적성장과 발전을 뜻합니다.
정지하거나 침체되는 것은 쇠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은 살아있는 삶이냐 죽어있는 삶이냐 둘중 하나입니다.
하느님 향해 끊임없이 흐르는 맑은 강물이냐, 혹은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이냐 둘 중 하나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맑게 흐르는 강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믿음은 말씀대로 사는데서 드러납니다
-반영억신부-
신앙의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진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바를 가슴에 담고 가슴에 담은 것을 실행함으로써 비로소 열매가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믿음을 고백하지 않고 생활화하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공허한 믿음이요, 죽은 믿음(야고 2,17)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추구합니다. 믿음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사는 것입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합니다”(루카8,16). 당연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빛을 주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 빛을 다른 사람에게 비춰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빛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으로 봉사하고 섬겨야 하겠습니다. 아직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만큼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 믿음이 약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은 게을리 합니다. 기도를 하거나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영적성장을 위해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주님의 은총을 희망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복음의 지식을 생활화 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오히려 지식과 믿음이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않고 또 살지 않으면 이미 받은 믿음의 은총도 시들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8,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간수하지 않으면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제대로 간수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어가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한 번 주신 은총이나 선택의 은총은 다시 거두어가지 않습니다”(로마11,29). 다만 내가 잃어버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이 받은 은총의 선물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남을 위해 봉사하시기 바랍니다”(1베드4,10).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당신의 보화를 담아 주셨고”(2고린4,7) 당신의 빛을 나를 통해서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부디 우리의 관심사와 모든 행동이 주님을 담아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려 행동하면 할수록 더 견고한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등경 위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행동하는 믿음 안에서 기뻐하는 날들 이루시길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역설을 사는 행복한 사람들
- 기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8) 이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이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하느님 나라의 영적 원리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역설적인 삶의 자세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가진 자’는 누구이며, ‘가진 것이 없는 자’는 누구일까요?
‘가진 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하늘 나라의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늘 나라의 지식이란 이성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체험적 지혜와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앎을 말합니다. 따라서 ‘가진 자’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지닌 자요, 말씀의 진리를 삶의 실천으로 깨달은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더욱 온전한 지식을 얻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가진 자’는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하느님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삶의 전부가 되는 사람이기에 정녕 ‘하느님 외에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현세의 재물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애착으로 그것을 소유한 사람은 진정 하느님을 차지하지 못하는 ‘가진 것이 없는 가련한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적 이치를 따르는 ‘가진 자’는 듣는 자세도 다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되새기며 실천하는 '가진 자'는 더욱 더 깊은 영적인 통찰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가진 자’는 빛(요한 1,9; 8,12)이요 등불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고(8,16),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에게 굴하지 않고 드러나게 활약하시겠다는 결의를 나타내셨던 예수님처럼 행동과 말로 선포합니다.
누구든 말씀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춤으로써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믿음에 있어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잠언은 그 길을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곧, 선행을 거절하지 말고,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며, 이웃에게 해가 되는 악을 지어내지 말며, 이웃과 다투지 않으며 포악한 사람의 길을 선택하지 말아야 합니다(3,27-31)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닌 믿음과 사랑과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자세 등이 자신의 힘만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신실한 청지기의 비유(루카 19,11-27)에서 알 수 있듯이 그런 축복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은총과 은사의 선물들을 충실히 관리하고 주님의 뜻대로 활용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세의 것들은 지니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현세의 모든 것들은 모든 선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사용하는 우리의 의식과 지향입니다. 현세의 것들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주님께 되돌리고 이웃과 나누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더 많은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소유는 영원하지 않아 언제든 잃어버릴 수 있으니 즉시 나누고 선을 위해 활용해야 하는 것이지요.
잠시 멈춰, 세상의 것들을 많이 소유하지만 주님의 사랑과 영의 가난, 믿음과 말씀을 경청하고 선을 실행하지 못한 채, 가진 것마저 빼앗기며 살아가는 가련한 자신의 모습을 살피고 맑게 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합니다.
<네가 할 수만 있다면, 도와야 할 이에게 선행을 거절하지 마라. 가진 것이 있으면서도 네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게, 내일 줄 테니.” 하지 마라.> (잠언 3,27-28)
-오상선신부-
추석연휴 잘 보내셨나요?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지요.
추석 동안 우리는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정을 나누는 시간을 잠시나마 가졌지요.
사실 매일 그렇게 어른들도 찾아뵙고
작은 선물도 나누고
함께 먹고 마시고 놀며
가족의 정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데ㅆ
사는 게 뭔지...?
"뭐가 중한디?"
다시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온 오늘
잠언의 말씀이 마음을 울리네요.
"가능하면 나누고 살고
도우며 살아라.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마라."
이렇게 말하네요.
맞지요. 그리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게지요.
내 욕심만 챙기며 산다고
때부자가 된 것도 아닌데
나누고 사는 삶이
참부자로 사는 길이겠지요.
오늘 내가 도와야 할 일이 보이거나
어려움에 있는 사람을 보거나 알게되면
망설이지 말고
기꺼운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 봅시다.
그리 하실꺼죠?
<불빛>
-상지종신부-
희미한 불빛 하나
가녀린 숨결
스스로 끊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완전한 어둠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보일 듯 말 듯
실낱같은 불빛 하나
어둠을 사를지언정
모든 것 무(無)로 만들
칠흑 같은 어둠조차
여린 빛 삼킬 수 없기에
사람이 그렇다
삶이 그렇다
사람 사는 세상이 그렇다
위로부터 오는 빛<루카,8/16-18.>
-이석진신부-
등경위에 올려놓은 빛은 방안을 비추며 빛 속에 살게 합니다. 어둠을 비추는 저 높은 하늘의 태양은 아침을 열며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 가야할 길을 가도록 하고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합니다. 빛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잠을 자거나 움직일 수 없습니다. 등경위에 등불은 바로 하느님 자신임을 알려주십니다. “ 숨겨진 것은 들어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난다.” 태양의 빛이 빛이면 빛 속에 숨은 것은 하나도 없고 감출 것도 없이 들어나듯이 위로부터 비치는 하느님의 빛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 까지 들여다 보십니다.
빛이 하늘을 향하여 비치지 않고 땅을 비춥니다. 태양은 빛을 비출때 때 땅이 없으면 빛의 효과가 나지 않듯이 빈 공간이 아니라 무엇으로 꽉 찬 공간을 비추고 있습니다. 높은 이상은 이상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현실에 적응이 되어야 실현가능합니다.
사람은 가야할 길을 발이 가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서 발에게 명령하여 가게 합니다. 손이 무엇을 잡는 것도 머리에서 명령을 내려 잡을 것을 잡고 눈이 무엇을 보아도 머리가 본 것을 식별하고 본 것을 올바로 판단해 주어야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이 우리에게 빛이어야 볼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듣고 빛속에 살게 됩니다. 하느님은 태양이 높은데서 비추듯이 우리를 성령을 통하여 빛을 비추고 가질 것을 가지고 행할 것을 행하게 하시며 양심 따라 향동하고 계시를 통해 사람의 갈길을 가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빛이 없이는 들어도 바로 듣지 못하고 머리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어둠속에 있는 현실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모든 일은 하느님의 영으로 이루어 졌으니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는 알아듣고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영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 비추어 가진 바를 바르게 분별하며 살도록 기도합니다. 빛으로 어둠 속에 분별력을 주소서 아멘.
-한상우신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 8, 16)
내면의 등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됩니다.
우리의 내면을
충만함으로
채워줄 수 있는
분은 오직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빛은
우리 내면에
숨겨져 있는 것과
감추어져 있는 것들을
훤히 드러나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우리 어둠까지도
맡겨드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등불이 있습니다.
그 등불이
타오르며 빛을
자아낼 수 있도록
먼저 헛된 욕망을
정화시키고 내려놓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보다 앞서 나갈
우리의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 먼저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의
내면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여러가지
인간적인 상황을
먼저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
빛안에 머무르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빛을 보게되는 이는
기쁨으로 가득찬
삶을 살게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가진 자는
더 받아
그 빛으로 더욱
충만해질 것입니다.
어두운 우리 마음에
더욱 간절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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