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9월 21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Margaret K 2022. 9. 9. 06:39

2022년 9월 21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성 마태오 사도는 세리로 일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마태오 복음서’를 쓴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증언의 핵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서가 서술하는 나자렛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주석 성경』 ‘마태오 복음서 입문’ 참조)이다. 전승에 따르면, 마태오 사도는 에티오피아와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부르셨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 나섰다.

(마태오 9,9-13)

 

As Jesus passed by,
he saw a man named Matthew

sitting at the customs post.
He said to him, “Follow me.” 

And he got up and followed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권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부르시어 세리와 죄인과 한 식탁에 앉으시고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전통적으로 마태오 복음의 저자를 세리 마태오로 여겼지만 학자들의 의견은 다릅니다. 여기서는 주석학 논쟁을 언급하기보다 교회가 왜 세리 마태오를 마태오 복음의 저자로 여겼는지에 주목하여 묵상했으면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세리는 민족의 배신자이자 하느님을 등진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복음서 저자로 여긴 초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념은 상당히 파격적이었습니다. 초세기 신앙인이라고 우리와 다를 것이 있었겠습니까. 초세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의심하고 주저한 흔적은 복음서 곳곳에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이치와 논리에 따르지 않고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이들 또한 교회 공동체와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삶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회적 약자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즐기신 모습이 복음서에 숱하게 등장하지요. 쉽게 생각하고 지나칠 장면이 아님에도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그 장면들을 읽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비난받는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술 한잔 나누는 이가 있다면, 그가 재림하신 예수님이시라면, 우리는 아마도 예수님을 비난하고 경고하고 훈계하며 급기야 쫓아내고 죽일 수도 있을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이에게 의사로 오셨습니다. 제 잘못으로 아프든 타인의 차별과 억압으로 아프든, 아픈 이가 있으면 일단 고쳐 놓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사회에서는 많은 사건들이 터지고, 그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이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함부로 내뱉는 비난의 말들이 아픈 상처를 더 후벼 파는 죄인들의 무지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알면 얼마나 알고 정의로우면 얼마나 정의롭겠습니까. 참된 지혜이시고 참된 공정을 펼쳐 보이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죄인 마태오와 함께 식사하십니다. 바리사이만 멀찍이 떨어져 있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제가 운영하는 카페에 어떤 분이 건의의 글을 올리셨습니다. 저의 묵상 글을 많이 보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치는 효과가 클 것이라면서 글을 바로 써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럴 수 있겠다 싶어 댓글에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더욱 신경을 써서 글을 쓰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사실 이 글을 보고서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괜히 트집을 잡는 것처럼 비치기도 했고, ‘내가 전문적으로 글 쓰는 사람도 아닌데 이 정도도 이해하지 못하나?’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글을 많은 분이 보신다는 사실은 분명히 맞기 때문에,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문법에 관련된 책들을 사서 공부하다 보니 그동안 얼마나 무식하게 글을 써왔는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국어학자도 또 전문작가도 아니어서 많은 실수를 하는 저입니다. 따라서 늘 배우는 자세로 다른 분의 말을 잘 듣고 스스로 고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만과 부정적인 마음으로 인해 비판하려고만 하지 정작 나 자신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발전은 없고 그 자리에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마태오 축일이기에 오늘 복음에서는 그의 부르심 장면이 나옵니다. 세리였던 마태오는 한순간에 사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사도가 되기 위한 어떤 계획도 그는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했을 뿐이었지요.

세리라는 직업을 가지고 세상일에 파묻혀 있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겸손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그를 주저 없이 선택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하느님께 파묻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겸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그들을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을 잘 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과연 우리를 부르실까요? 부르지 않으실까요?

마태오 복음 사가는, 세리와 죄인으로 살다가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으로 올 모든 사람에게 하늘의 잔치를 그려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사처럼, 필요할 때마다, 사람들이 상처를 받을 때마다, 영혼을 치유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영혼이 아픈 이들과 관계를 늘 맺으십니다. 그들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래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의지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려는 겸손이라는 마음입니다. 이 겸손함 없이는 주님의 선택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슬픔은 한 번 더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추긴다(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


어떤 말에 집중할 것인가?

코로나 19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그래서일까요? 방송을 보면 경제 전문가들이 나와서 미래의 시간을 예측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문득 ‘이렇게 미래의 경제를 잘 아는 것처럼 보이는 경제 전문가들이 가장 큰 부자가 될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 정도로 잘 예측한다면 1년 안에 세상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되고, 수년이면 전 세계의 재산을 거머쥐어야 하지 않을까요?

경제 전문가 중에서 엄청난 부자가 없다고 합니다. 이들이 돈 욕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제대로 된 예측을 못 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전문가의 예측은 기껏해야 40% 정도라고 합니다. 동전 앞뒤를 맞추는 확률보다도 적은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전망은 참고 사항일뿐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다른 이들의 말에 흔들릴까요? 전문가도 아닌 사람의 말에 흔들리고 주저앉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확률 낮은 세상의 말이 아닌, 확률 높은 주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희생 제물이 자비의 열매를 맺으려면

-전삼용신부-

 

 오늘은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마태오는 세리였습니다. 부자고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마태오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 것 같습니다. 그곳에는 역시 많은 세리와 죄인도 함께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자신을 특별하다고 여기는 사람 같았으면, “나를 뭐로 알고 매국노들과 창녀들과 함께 식사하라고 하느냐?”라며 따졌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안에서 행복하셨습니다.

 

      이때 역시 바리사이들이 나타나 예수님의 행동을 못마땅해 합니다. 그들은 죄인들을 가까이하는 사람도 죄인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죄에 물들지 않는 분이심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의사는 병든 이들과 함께하지만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병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사가 병자와 함께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 말씀을 하시는데 “희생 제물”이 등장할까요? 바리사이들은 희생 제물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바치고 계셨을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무였습니다. 이 희생 제물의 가장 초기 모델은 역시 ‘선악과’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특별해지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결과로 자신의 죄를 이웃에게 떠넘기고 이웃을 심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희생 제물을 바치지 않았기에 이웃을 향한 자비를 잃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사이들은 희생 제물을 바치면서도 자비심이 전혀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을까요? 그 이유는 특별해지기 위해 바쳤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바치라는 이유는 하느님이 아니시면 누구라도 특별할 수 없음을 배우고 되새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악과를 바치며 더 특별해지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사이들이 마치 카인처럼 제물을 바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카인은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겨서 더 특별해지기 위한 목적으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제물 봉헌의 목적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이 그것을 주시지 않으면 나는 세상에서도 가장 비천인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갓 오브 이집트’(2016)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이집트의 신들과 인간들이 공존합니다. 이집트를 다스리는 왕들인 신들이고 백성들은 인간들입니다. 신들은 인간들보다 몇 배나 몸집이 더 크고 보통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싸울 때 변신하면 무시무시한 모습이 됩니다.

      이집트 임금의 아들이 왕의 자리를 물려받는 자리에서 그의 삼촌이 와 현 임금인 자신의 형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물려받는 조카의 두 눈을 빼어버립니다. 그런데 한 좀도둑이 보물이 있는 곳에 잠입하여 눈 하나를 훔칩니다. 그러는 가운데 자신의 여자 친구가 화살에 맞아 죽습니다. 그 좀도둑은 그 눈의 주인인 신에게 가서 자신이 눈을 하나 돌려줄 테니 소원을 들어달라고 합니다. 두 눈을 잃고 실의에 빠져있던 신은 어디 파리 같은 게 와서 자신을 놀리냐며 그 좀도둑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좀도둑은 워낙 민첩한 데다 자신은 앞이 보이지 않으므로 결국에는 그의 청을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여자 친구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거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며 그도 감동합니다.

 

      나중에 자신 대신 왕위를 차지하고 있는 삼촌과 대결 중에 그는 나머지 눈 하나와 자신에게 눈을 찾아 준 한 인간의 생명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의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눈 대신 한 인간을 살리는 것을 선택합니다. 삼촌은 신이 인간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눈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며 비웃습니다. 그러나 주인공 신은 두 눈을 잃어보았기에 자신도 눈을 잃으면 한 인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존재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런 겸손한 모습 때문에 결국 삼촌을 몰아내고 다시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봉헌은 왜 하는 것일까요? 가진 것을 주님 것으로 인정하며 바쳐보고 불편해 보아야 자신이 주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희생 제물을 진정한 의도로 한 이들은 사람들 앞에서 특별한 존재라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와도 잘 섞이게 되고 이 능력이 구원의 도구가 됩니다. 희생 제물이 이웃을 향한 자비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안 바치는 것이 낫습니다.

      영화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현재 ‘마블’과 ‘DC’의 대결을 흥미 있게 지켜보실 것입니다. 마블에는 아이언 맨이 있고 토르나 캡틴이 있습니다. DC엔 오히려 우리가 잘 아는 슈퍼맨, 원더우먼, 배트맨이 있습니다. 하지만 매번 마블이 흥행하고 DC는 만드는 것마다 거의 망하고 있습니다. 이 차이는 마블은 자신들의 능력을 잃었을 때의 고뇌와 비참함, 그리고 그것을 통한 깨달음에 비중을 두는가 하면, DC는 무조건 더 강력해져서 이기는 게 좋다는 힘의 논리만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관객은 그런 초인적인 인간을 보면서도 슈트가 벗겨진 아이언 맨, 망치를 잃은 토르, 방패를 빼앗긴 캡틴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봅니다. 그러니 공감을 할 수밖에 없고 흥행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귀중한 것을 잃어 봐야 나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되고 그렇게 내가 가진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며 모두 가진 모습을 하면서도 가난하고 비천한 이웃과 잘 섞일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포도밭의 한 그루 무화과나무가 되려 하지 맙시다. 다른 포도나무처럼 주님께 자신의 포도를 봉헌하는 포도나무가 됩시다. 언젠가 그 무화과나무 한 그루는 잘려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희생 제물이 이웃을 향한 자비로 이어지려면 특별해지려는 마음을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끊어버리려는 의도가 있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평화신문에서 사제서품 60주년을 맞이한 노 사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한분은 사제생활 58년을 한국에서 지냈고한분은 사제생활 60년을 한국에서 지냈습니다베네딕토 수도회의 진 토마스 신부님과 메리놀회의 함 제도 신부님입니다한분은 독일에서 태어나셨고한분은 미국에서 태어나셨습니다한분은 수도원에 머물면서 피정지도를 많이 하셨습니다한분은 북한을 60여 차례 방문하시면서 의료지원을 많이 하셨습니다두 분 모두 제가 태어나기 전에 한국으로 오셨습니다한국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한국에 오셔서 선교사로 지내셨습니다두 분 모두 한국 땅에 묻히겠다고 하십니다.

 

무엇이 그분들을 가난하고 낯선 한국 땅으로 오게 했을까요무엇이 그분들이 한국에서 사제생활의 대부분을 보내게 했을까요진 토마스 신부님은 고린토 후서 2장 9절의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해 두셨다.”는 말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함 제도 신부님은 선교는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사랑 때문에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을 얻기 위해서 사제생활의 전부를 한국에서 보내신 두 분 신부님께서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작년 8월 뉴욕에 있는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로 왔습니다중학생 때 신문을 돌려본 적은 있지만 신문과는 상관없이 지냈습니다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홍보를 다니려고 했는데 코로나19가 지구촌을 덮었고 미국에 가장 많은 확진자가 발생했습니다. 6개월째 홍보를 다니지 못하고 있습니다내년 상반기까지도 홍보는 어려울 것이라고 합니다종이신문을 보기보다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는 시대이기에 구독자는 줄어드는 상황입니다한국에서 평생을 보내시는 진 토마스 신부님과 함 제도 신부님을 생각하면서 제게 주어진 시간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비가 온 뒤에 땅은 더욱 단단해 진다고 하듯이기회가 주어지면 홍보를 다니려고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어떤 이들은 예언자로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복음을 전하는 직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세상은 능력에 맞는 직무를 이야기합니다그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그것이 일하는 사람에게도 보람이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교회는 주어진 직무에 사람을 보냅니다때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입니다힘들 때도 있습니다그러기에 사랑이 필요합니다그러기에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복음을 전하는 것은 능력과 재능 이전에 헌신과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헌신으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분들에게 구상 시인의 꽃자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엮여 있다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오늘은 마태오 사도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던 마태오입니다그날은 몸도 좋지 않았을 것 같았습니다운명처럼 예수님을 만났고예수님의 부르심에 라고 응답하면서 따랐습니다마태오 사도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기쁨 마음을 가졌고행동으로 응답하였습니다그리고 모든 것이 변하였습니다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에게 주님의 가르침을 알 수 있는 마태오 복음서를 남겨 주었습니다우리는 마태오 복음서를 통해서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오셨는지주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또한 마태오 복음서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졌던 제자들은 모두 과거와 미래를 예수님께 맡겼습니다예수님께서는 과거와 미래 모두를 버렸던 제자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셨습니다오늘 제1독서는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과거도현재도미래도 모두 한분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우리가 하는 일의 직책도능력도 모두 한분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께 마태오 사도처럼 우리도 라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고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오늘도 어제의 부끄러움과 비참함을 딛고 다시 한번 기꺼이 일어서겠습니다!

 -양승국신부-

 

그 옛날 국경지대 왁자지껄한 세관에 넋잃고 앉아있던 세리 마태오의 얼굴을 떠올려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그는 딸린 부양 가족들 생계를 도맡은 가장으로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덕분에 돈도 좀 벌었습니다. 가족들 앞에 얼굴을 들게 되었습니다. 의식주 걱정없이 그럭저럭 살아갈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깊은 회의감과 절망감이 수시로 밀려왔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세리라는 직업을 계속 해나가야 할 것인가?

  

하루 온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세관에 앉아 환전해주는 일, 암암리에 급전을 빌려 주고 막대한 이자를 챙기는 고리대금업, 동족을 등쳐먹는 일, 윗선에 상납하는 일, 이중 장부 쓰는 일인데... 

 

그런 마태오 앞에 누군가가 나타납니다. 선량하지만 강렬한 눈매를 지니신 분입니다. 지금 네 마음 깊숙한 곳을 꿰뚫고 있다는 표정의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마태오야! 너 지금 여기서 무엇하고 있느냐? 이 일이 인간로서 가당키나 한 일이냐? 지금 즉시 하던 일 다 때려치우고 당장 일어서서 나를 따라라!” 

 

천둥같은 주님의 음성을 마태오는 거스를수 없었습니다. 애지중지해온 장부도 금고도, 세리라는 안정된 수입원도 즉시 내려놓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끝닿는데 없이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것이 꽉 막힌 이 시대, 뭘 하기도 그렇고 안하기도 그렇습니다. 대체 탈출구는 있는걸까? 하는 큰 불안감과 더불어 우울감이 슬금슬금 찾아옵니다. 별의 별 생각을 다 해보고, 이런 계획 저런 아이디어를 고민해보지만, 너무나도 큰 막막함과 무기력함 앞에 아무것도 하지못한채 그저 주저앉아 있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영혼없는 얼굴, 생기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얼굴, 숨만 쉴뿐이지 죽은 얼굴로 하릴없이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오가 들어있습니다.

  

은혜롭게도 주님께서는 그 옛날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듯, 우리 이름을 부르시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합니다.

  

어둡고 음습하고 비정한 세관에만 앉아있지말고, 밝고 화사하며 햇살좋은 곳으로 걸어 나와야겠습니다. 모든 것이 제한되고 답답한 조건 속에서도, 하루 매순간을 보다 의미있고 역동적인 순간으로 꾸며가야겠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왔다.”(마태오 복음 9장 12~13절)

 

역대급 대죄인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삼아주신 예수님의 활짝 열린 개방성을 묵상하며, 똑같은 죄인인 저 역시 주님께 감지덕지하며, 그저 감사의 찬가를 반복할 뿐입니다.

 

“저 같이 부당한 죄인을 당신 가까이 불러주신 자비하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진홍빛보다 붉은 감당하기 힘든 죄들, 머릿칼보다 많은 숱한 죄들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롭게 당신의 제자로 불러주시니, 온몸과 마음을 다해 감사드립니다. 죄인들의 주님은 세세대대로 찬미받으소서! 저는 그저 매일 좋으신 주님 자비와 은총의 손길을 기다리면서, 오늘도 어제의 부끄러움과 비참함을 딛고 다시 한번 기꺼이 일어서겠습니다.”

 

-김명겸신부(OFM)-

 

      <p style="line-height: 2;"><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rgb(33, 33, 33); font-family: 굴림, Gulim;">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공관복음 세 군데에 모두 나옵니다.

 

      그리고 그 세 부분 모두 단 한 구절로

 

      마태오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음을 전합니다.



      마태오의 즉각적인 대답이

 

      조금은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의사가 필요한데도

 

      의사를 찾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내가 지금 아프다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을수록

 

      의사와 멀어지고 싶습니다.

 

      관계 안에서 입은 상처가 떠오를수록

 

      그 사람을 보고 싶지 않고

 

      멀리하고 싶습니다.

 

      그 사람을 볼수록

 

      그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불편하기보다는

 

      불편하게 느끼는 나의 모습을 직면한다는 것이

 

      더 큰 불편함으로 다가옵니다.

 

      겉으로는 그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 상처와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입니다.



      사실 우리 안에 모든 것을 다 포용할 수 있는 힘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내 상처도 소화가 되지 않아

 

      버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았던 것처럼

 

      그 불편함의 자리에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갈수록

 

      내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서

 

      힘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멀리 떨어져 앉고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같은 식탁에 앉아 있다는 것이지,

 

      그 불편함의 자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지,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는 것은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불편함에 머물러 있으면서

 

      조금씩 더 나의 모습을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 가서 마태오가 한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대답해도

 

    늦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span></p>
 

마태오 
-송영진신부-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모든 사람의 구세주’입니다.
‘모든 사람’이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관점에서는 ‘나’와 ‘그들’을,
또는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구원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고,
모든 사람을 향한 것입니다.
이 부르심은 어떤 차이도, 차별도 없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신 일은
‘구원의 부르심’과는 다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열두 사도는 제자들(신앙인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선택해서 뽑으신 사람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루카 6,12-13).
그들이 사도로 뽑힌 것은 그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두 사도의 명단을 보면, 직업이나, 출신이나, 학력 같은 것은 보지 않으시고,
그들의 믿음, 열성, 충성심 등만 보고서 뽑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신 일이 ‘구원의 부르심’이라면,
‘구원받아야 할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로서 부르신 일이고,
나중에 사도로 뽑으실 것을 염두에 두시고 부르신 일이라면,
그가 사도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보셨기 때문에 부르신 일입니다.
마태오가 세리였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직업이 세리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죄인이라고(죄인이었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신 것은 그가 세리였기 때문도 아니고,
죄인이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마태오를 부르신 일에 대해서 “예수님은 죄인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죄인을 더 많이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관심과 사랑이라는 말이 “좀 더 세심한 치료가 필요한
‘아픈 사람’에게 쏟는 관심과 사랑”이라는 뜻이라면 타당하지만,
단순히 죄인을 향한 것이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라면 옳지 않은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마태오의 ‘응답’입니다.
마태오는 부르심을 받자마자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응답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라고 말한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루카 9,61).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9,62).
마태오가 부르심을 받고 응답한 이야기 뒤에 잔치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그 잔치가 가족과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 마태오가 마련한
잔치라면, 마태오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먼저 하고,
작별 인사는 나중에 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0-13)”

예수님께서는 세리들의 초대만 받아들이신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의 초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것을 바리사이들이
비난하는 것은 죄인들과 어울리면 부정하게 되어서 죄인이 된다는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하고, 자기들하고만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구원 활동’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의 말은 “구원받을 가망이 없는 사람들을 왜 만나는가?” 라는 뜻이 됩니다.
어떻든 바리사이들의 말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죄와
다른 사람의 구원 문제를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는 죄를 짓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모독죄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라는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1) “하느님은 인간들 위에 군림하면서 섬김을 받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들이 당신 뜻에 합당하게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이다.”
하느님의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면,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해야 하니까,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만나야 합니다.)
2) “물질적인 제물을 바치면서 형식적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자비와 사랑을 실천해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려면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만나야 합니다.
(사랑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낙인찍고 그 사람들과 접촉도 안 하려고 하는 것은
‘사랑 없는’ 태도이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말씀은,
‘죄인만’ 부르러 오셨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부르러 오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너희는 정말로 의인이냐?” 라는 질문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한 바리사이들은
“나는 의인이다.” 라는 교만에 사로잡혀 있었던 자들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세리들보다는 바리사이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어 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공공연하게 죄인 취급을 받는 세리들은 대부분 자기들이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바리사이들은 대체로 위선자들이었고,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모르고 있거나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도소 재소자들이 재소자 아닌 사람들보다 더 진실하게
고해성사를 보고 회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마태 9,9-13: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께서는 세관에서 일하고 있던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다주님께서는 그가 세리였지만 기꺼이 부르셔서 한순간에 사도가 되게 하셨다그는 세상일에 파묻혀 있었지만 거짓 없는 신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음속을 아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다는 판단을 받는다주님께서 그에게 나를 따라라.”하시자한 순간도 머뭇거리거나 미루지 않고 곧바로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9)고 하기 때문이다.

 

마태오는 주님의 방문을 기해 자기 동료들을 불러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된다이렇게 예수께서는 그래서 세리들과 또 죄인들이라고 표현된 그 사람들과 식사를 하시게 되었다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심으로써 예수님은 나쁜 평판도 얻게 된다. “보라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마태 11,19; 루카 7,34)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헐뜯게 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로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아주 경멸하였고 상종하지 못할 사람들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과 거래는 물론 말도 하지 않았다이러한 사람들이 예수께서 세리인 마태오를 부르시고 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자신들은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키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자처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3). 이 말씀은 당신이 지금 당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와 계시며그러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으며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열심하고 착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들은 이미 자신이 모든 것을 잘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으로 이미 가득 찬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배워라”(13). 여기서 말하는 제사는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예식인데 그 제사에 마음이 담기지 않은 제사형식적으로만 드리는 제사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다는 것이다형식과 의식은 중요한 것이지만여기에 우리 마음이 함께 봉헌되는 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자비를 통하여 우리가 실천하는 삶을 함께 봉헌할 때 참된 제사가 될 수 있다이러한 자선이 바로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시듯이 죄인들에게 가까이하시는 모습이다선입견과 편견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을 베풀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이러한 삶을 우리도 살아가도록 노력하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 9)

-한상우신부-

진실한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다.

사랑을
품고사는
죄인들이다.

용서와 사랑의
복음이 간절한
우리들이다.

죄가 아니라
복음이다.

죄인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의 의미인
함께하는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함께 먹고
함께 마시고
함께 어울리는
진정한 사랑을
아픈 우리들에게
보여주신다.

삶의 기쁨을
잃어버린
우리들이다.

예수님 친히
복음이 되시어
우리가운데
오셨다.

목마른
우리 역사안으로
들어 오셨다.

복음은
생생한 체험이며
다시 시작하는
이들의 간절한
만남이다.

복음은 오늘을
흔들어 깨운다.

참된 열매는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따름의
열매이다.

열매의 길은
부르심의 길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복음의 힘은
세리였던
한 사람을
복음의 사도로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그 놀라운 힘을
그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마태오 사도는
체험한 주님을
기쁘게 기록하여
생생히 우리에게
전하여 준다.

우리는 무엇을
전하고 있는가.

주님의 현존인
복음을 나누는
것이다.

자격이 있어
나누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에
따르는 것이다.

따르기에
복음이고
열매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죄인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11)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와 함께 계신지, 그들과 어떤 행동을 하시는지에 대해 과민하게 반응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누구와 함께하며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따라 사람을 구분 짓고 가르는 것이 그의 내면을 살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 같습니다. 그러니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하느님의 사람이고 예언자라면 의인과 죄인을 구별할 줄은 알아야 한다고 여겼겠지요. 어쩌면 예수님도 민족에게 반역하는 직업군에 속한 세리 마태오로 인해  제자단의 수준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이 많아지리라는 것을 모르시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주저하시지 않고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사람을 구분하고 단죄하고 줄 세우는 건 세속의 방식일 뿐 하느님의 방식이 아니니까요.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오신 이유를 밝히십니다. 죄인들과 자신을 구분하여 그들과 다른 편임을 자부하는 바리사이들과 달리, 예수님은 자칭 의인들보다 죄인들 편에 서시겠다고 천명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는 죄인도 자칭 의인과 다를 바 없이 아버지의 사랑하는 자녀일 뿐입니다. 

스스로 의인임을 자부하는 이들 안에는 '나는 너 같은 자와 다르다.'는 배타적 차별 의식이 강하게 작용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배타성이 쉽게 구분과 차별로 이어져 영혼을 천박하게 만들고 일치를 저해하며 분열을 야기한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예수님의 내면 안에는 오히려 '하느님이고 사람인 나와 피조물인 그대가 사랑 안의 한 형제'라는 의식이 변함없이 흐릅니다. 이 마음이 곧 하느님의 창조 의도이고 사랑의 계획이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부르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에페 4,7)

모든 사람이 각자 다 다른 것처럼, 우리가 받은 소명도 다 다릅니다. 물론 사도나 예언자, 목자 등 큰 카테고리는 존재하지만, 그 소명을 수행하는 각 개인의 특성만큼 개인 소명은 그 곱절로 다양해지고 풍요로워집니다. 각 개인에게 내리시는 은혜가 다르기 때문인데, 저마다 받은 은총의 다양성이 상호보완적으로 서로 작용해 교회는 더욱 온전한 완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에페 4,13)

사도는 부족하고 나약한 죄인인 우리에게 무척 놀라운 비전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일치하고 성숙할 뿐 아니라, 하느님이시고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전이야말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람이 지닌 한계 속으로 밀어넣은 채 당신과 동떨어진 존재로 봉인해 버리지 않으셨음을 의미합니다. 피조물에게도 당신의 신비를 누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주신 것이지요. 사람은 구분하고 차별할지 몰라도 하느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심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당신의 충만함까지도 활짝 열어 개방하고, 아낌없이 나눠주고 싶어하십니다.

주님은 자칭 의인들이 "왜 저자들과 함께하느냐?"고 비난하는 바로 그들(우리) 곁으로 가셔서(오셔서) 그들과(우리와) 함께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우리) 마음에 "용기를 내어라. 너도 나처럼 될 수 있다."고 속삭이십니다.

오늘의 말씀은 내치고, 갈라내고, 밀쳐내는 사람과, 끌어안고,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주님과의 대비를 통해 우리가 받은 부르심에 대하여 묻습니다. 어느 직분으로 부르심을 받았건 주님에게서 온 소명은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에페 4,3)를 씁니다. 이 부단한 일치와 하나됨의 열망이 부족한 우리를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까지 끌어올려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뭇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의혹의 눈초리를 받았을 마태오 사도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마태오 사도는 자기로 인해 예수님과 제자단에게 씌워진 오명이 송구하고 죄송했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죄인도 놓치지 않으시려는 주님의 구원 의지는 그의 죄스러움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강력합니다.

어떤 처지에서 부르심을 받아 어떤 소명을 살아가건, 사랑과 평화, 일치를 보존하기 위해 애쓰는 이의 소명은 결국 그리스도의 충만함에까지 다다를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있든 두려워말고 저마다 받은 은총을 활짝 꽃피우며, 각자 받은 소명을 당당히 살아가십시오. 그런 벗님으로 인해 주님께서 흐뭇해하며 기뻐하십니다. 아멘.

성 마태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행복성소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81128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9월 21일 금요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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