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20일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19-21)
“My mother and my brothers
are those who hear the word of God and act on 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잠언의 저자는,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니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이른바 예수님의 새 가족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그렇다고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그 형제들을 외면하시는 예수님의 차가운 태도로 오늘 복음을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마치 거사를 앞두고 가족과 친지를 버리고 떠나는 영웅으로 여기지는 말아야지요. 요컨대 예수님의 새 가족은, 혈연이라는 굳건한 장벽을 뛰어넘어 세상 모든 이를 형제요 자매라 부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루카 복음에서 성모님 또한 말씀을 듣고 간직하실 줄 아는 이로 제시되십니다(루카 1,45; 11,28 참조).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분께 집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분의 삶이 곧 자신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중요한 것은 들은 말씀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분과의 인격적 관계입니다.
누군가의 말에 마음이 상하여 잠 못 이룬 적도 있고, 스치듯 지나간 누군가의 말에 감동받아 평생을 두고 곱씹으면서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말 자체의 무게감만이 아니라 말하는 이와의 관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은 서로의 관계를 위한 도구입니다. 말을 통하여 우리는 서로를 향하고 있는지, 나 자신 안으로 파고들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서로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은 상대를 참 피곤하게 합니다. 실컷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아 예수님과 갈라서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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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함께 같은 것을 할 때 편안해지고 기쁨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도 한 편에서만의 짝사랑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랑이 더욱더 기쁜 것입니다. 혼자 하는 사랑은 어색하고 여기에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함께 하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께 하는 사랑이 많아질 때, 마치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이 편한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 편해지고 더 많은 사랑을 행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가득한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
누가 예수님께 성모님과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알려 줍니다. 이때 어떤 행동을 하셨어야 할까요? 맨발로 어머니와 형제를 만나러 가야 할 것만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과 형제를 반가워하지 않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정말로 반갑지 않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 안에서 피로 맺은 가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가족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혈통과 가족 관계에 따라 이스라엘의 구성원임을 인정하는 구약성경의 친족법을 의식적으로 뒤엎으시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가족은 하느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하느님의 가족입니다. “사랑이 밥 먹여주냐?”라면서 그 공동체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오히려 불편해집니다. 하느님 가족의 숫자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나 자신부터 사랑을 실천하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부터 시작하는 그 숫자가 늘어날수록 사랑의 실천은 편안해지고 더불어 큰 기쁨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하느님 가족이 대가족이 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사랑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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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이렇게 빨리 늙을까?’라고 말하는 어느 작가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작가는 100세 인생이니까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한 60살까지는 20대 초반의 체력, 외모를 유지하며 신나게 놀다가, 80살까지는 지금 모습 그대로 열심히 일하면서 세계 각지로 여행도 다니고, 그 후 80대 즈음에야 슬슬 늙어가며 여생을 보내면 좋을 텐데……. 100세 인생인데 젊은 날이 너무 짧다.”
공감이 갑니다. 젊었을 때는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했지만, 금세 어른이 되고 늙어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노안이 오고, 뜀박질도 못 하겠고, 어디 가는 것이 귀찮다는 생각이 많아지는 것을 보니 이제 젊은이라고는 못할 것만 같습니다.
그래도 지금이 가장 빠를 때라는 말을 기억하면서, 남아 있는 날의 가장 젊은 순간을 사는 지금을 더 충실하게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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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있으면 외롭지 않습니까?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예수님께서 매정하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왜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모질게 대하실까요?
가족은 정말 지긋지긋하지만 버릴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관계일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이 상처를 주기도 하면서 가장 많이 사랑을 받기도 합니다. 이상하게 가족인데도 만나면 서먹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을 보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더 외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정말 가족을 만나면 외롭지 않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실 때의 성모 마리아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서먹하고 외로우셨을까요? 아니면 그래도 기쁘셨을까요?
먼저 사람이 왜 외로워지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 해답은 안데르센 동화 ‘미운 오리 새끼’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안데르센은 어머니가 창녀였습니다. 그나마 안데르센을 잉태하고 결혼했지만, 그마저도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아버지는 자살하고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다면 자녀는 올바로 클 수 없습니다. 마를린 먼로를 보면 압니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버림받고 고아원을 전전하며 자랐습니다. 사랑을 그토록 원했지만, 사랑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때, 그것이 자신이 찾던 것이 아니었음을 느끼고는 약물중독으로 사망합니다.
반면 안데르센은 어떻게 저런 환경에서 자라나 그 많은 명저를 남길 수 있었을까요? 미운 오리 새끼가 외로웠을 때는 자신이 오리인 줄 알았을 때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백조임을 알고 백조 무리에 있을 때는 행복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백조가 오리 무리에서 자라면 왠지 오리 부모가 시키는 것이 자기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면 서먹해지는 것입니다. 가족과 있어도 외롭습니다.
사춘기 이전 아이들이 외로워 보이나요? 일반 가정이라면 외로움은 사춘기 때 시작됩니다. 사춘기 이후 부모가 더는 아이의 주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은 몰입하지 못할 때 느낍니다. 아주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 외롭나요? 외롭지 않습니다. 몰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에 몰입하고 있으면 내가 외롭다고 말해 줄 자아가 그 말을 할 기회를 잃습니다.
사춘기 이전 자녀들은 부모의 뜻에 무조건 따르면 되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부모가 더는 그 역할을 해 주지 못합니다. 그럼 누가 해 줘야 할까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그 사람에게 순종하면 외롭지 않나요? 이제 머리가 커서 웬만한 사람에게는 순종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순종하여 그 사람의 뜻을 따르기 위해 일에 몰두할 때 외로움은 사라집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우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이 되시어 당신 뜻에 순종하여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가족은 피를 나눈 공동체입니다. ‘피’ 안에는 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뜻’도 들어있습니다. 부모의 뜻은 자녀들이 어릴 때까지만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에게는 끊어지지 않는 끈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피입니다. 하느님의 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인간의 피는 유한하지만, 하느님의 피는 무한한 결속력을 지닙니다. 그 피가 성령이시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족 안에 들어오시면 그 가족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영원한 결속력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가족이 그래서 끝까지 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 그 가정에 성령께서 오시면 그 가족은 영원히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하느님 뜻이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이 방법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 분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골고타까지 아무 말 없이 따라가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지배하니 외롭지도 않고 그래서 서먹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핏줄이라는 끊어지기 쉬운 줄을 놓고 하느님의 핏줄이라는 끊어질 수 없는 끈으로 우리 가족을 묶읍시다. 하느님의 뜻이 지배하는 사람은 외로움을 모르고, 그러한 가정은 끊어질 수 없는 결속력으로 행복한 친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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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코로나19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외국은 처음에 코로나19에 대해서 경각심을 크게 갖지 않았습니다. 마스크 착용을 거의 하지 않았고, 거리두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감염 된 후에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습니다. 뒤늦게 봉쇄와 단절을 시작했지만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으며, 거리두기를 잘 지키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외국의 경우에 코로나19 확산의 주된 원인은 경각심 부족이며 그로인한 방역의 실패입니다.
메르스 사태를 경험한 한국은 코로나19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졌고, 방역에 집중했습니다. 시민들도 정부의 정책에 협조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코로나19가 확산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신천지’에 있었습니다. 신천지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모략전도라는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신천지는 밀착예배라는 독특한 예배방법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확진자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밀착예배는 바이러스 전파에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처음 한국에서의 확진자의 대부분은 신천지와 관련되었을 정도입니다. 의료진의 헌신과 정부의 노력 그리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로 한국은 신천지로 인한 코로나 확산을 막을 수 있었고, 코로나19의 방역에 성공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국은 최근에 또다시 대규모 확진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긴 대규모 집회와 교회를 통해서 확진자가 늘어났습니다. 일부 교회의 목회자와 신도들은 정치와 방역을 혼동하였습니다.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반대할 수 있고, 집회를 할 수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기에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엄중한 시기에 집회를 하더라도 방역지침을 준수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더라도 방역지침을 준수해야 합니다. 자가 격리 대상이 되면 지켜야 됩니다. 그래야 본인은 물론 이웃을 보호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방역을 혼동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검사를 거부하고, 확진으로 입원했지만 도망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코로나19는 신앙이 없습니다. 코로나19는 하느님을 모릅니다. 그저 생존을 위해 사람을 숙주삼아 퍼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코로나19는 신앙의 차원이 아니라 방역의 차원에서 막아내야 합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속임수 혀로 보화를 장만함은 죽음을 찾는 자들의 덧없는 환상일 뿐이다. 악인의 영혼은 악만 갈망하고 그의 눈에는 제 이웃도 가엾지 않다.” 모략전도로 사람들을 자신들의 모임으로 끌어들이는 행위는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정치와 방역을 혼동하며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기는 행위는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목적이 좋다고 해서 나쁜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신앙인의 태도는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참된 신앙인은 혈연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인은 종교의 이름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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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양승국신부-
누군가가 제게 각별히 좋아하는 구약 성경을 꼽으라 하신다면 코헬렛과 잠언이라고 말합니다. 코헬렛과 잠언은 구약 성경 속 지혜 문학의 쌍두마차입니다.
코헬렛은 인생의 산전수전과 허망함을 경험한 현인의 지혜로 가득합니다. 모든 것이 헛된 인생사안에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만이 최고의 선택임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잠언은 각자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지혜를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잠언이 다루는 주제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일 직면하는 문제들입니다.
가끔씩 세상과 인간에 대해 실망하고 좌절할 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 앞에 섰을 때, 제가 즉시 펴드는 책이 코헬렛이요 잠언입니다. 쿵쾅거리는 마음을 일단 진정시킨 후, 심호흡을 좀 하다, 천천히 코헬렛과 잠언을 펴서 읽기 시작하면, 오래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마음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잠언 속 지혜의 스승들이 외치는 권고들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촌철살인의 말씀은 오늘 우리들을 자극하고 일깨웁니다. 지혜의 스승들은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우리에게 잠깐 브레이크를 잡으라고 외칩니다. 급히 가던 길을 멈추게 하고,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라고 권고합니다.
잠언 속 현인들은 분노하고 힘겨워하는 우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정시킵니다. 한 걸음 물러나서 사건을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문제를 한템포 늦춰서 바라보도록, 객관적 입장, 제3자 입장에서 바라보도록 요청합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보도록 안내합니다.
대표 저자인 솔로몬은 잠언을 통해 거룩하고 고상한 일들 뿐만 아니라, 의식주를 포함한 매일의 평범한 일상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역사하시기에, 주님 마음에 들게, 지혜롭게 처신할 것을 당부합니다.
솔로몬은 참으로 박학다식했고, 지적 탐구심이 강했습니다. 그는 한 인간의 구체적이고 세부족인 삶의 요소 하나 하나를 주님 지혜의 눈으로 바라고자 노력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끝도 없었습니다. 개인의 행실, 남녀관계, 사업, 부, 자선, 야망, 훈육, 빚, 육아, 성품, 술, 정치, 복수, 경건...그 숱한 주제들에 대해서 잠언은 소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잠언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지혜를 구하고, 얻고, 깨달으라고 권고합니다. 잠언은 또한 반복하여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강조합니다.
잠언은 금언, 비유, 속담, 격언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한자어 '잠언'(箴言)을 풀이하면 ‘바늘로 찌르는 말씀’입니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잠언 내용의 대부분은 금언, 속담, 격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용이 어렵지도 않고, 짤막하고 간결합니다,
읽어 내려가다보면 요즘 시대와 부합하지 않은 부분도 있으니 잘 새겨서 읽으셔야 합니다.
“아이를 훈육하는 데에 주저하지 마라. 때로 때려도 죽지는 않는다. 아이를 매로 때리는 것은 그의 목숨을 저승에서 구해 해는 일이다.”(잠언 23장 13~14절)
자녀 교육에 있어 체벌을 정당화하는 뉘앙스인데, 요즘 그랬다가는 큰 일 나니 절대로 그러시면 안됩니다.
반면에 오늘 날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유용한 구절이 있으니 바로 술꾼들에 대한 충고 말씀입니다.
“빛깔이 좋다고 술을 들여다보지 마라. 그것이 잔 속에서 광채를 낸다고 해도, 목구멍에 매끄럽게 넘어간다 해도 그러지 마라. 결국은 뱀처럼 물고 살무사처럼 독을 쏜다. 네 눈은 이상한 것들을 보게 되고 네 마음은 괴상한 소리를 지껄이게 된다. 너는 바다 한 가운데에 누운 자와 같고 돛대 꼭대기에 누운 자와 같아진다. <사람들이 날 때려도 난 아프지 않아. 사람들이 날 쳐도 난 아무렇지 않아. 언제면 술이 깨지? 그러면 다시 술을 찾아 나서야지!> 하고 말한다.”(잠언 23장 31~35절)
술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진작 읽었으면 참 좋았을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첫번째 독서로 봉독하는 말씀들도 귀담아 들을만 합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잠언 21장 3절)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잠언 21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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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형제자매의 관계형성
-반영억신부-
미사 때마다 “형제 여러분!”이라고 하면서 진정 친인척 관계를 뛰어넘는 영적인 형제로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가 형제자매로서의 끈끈한 정을 누리고 있는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가운데 예수님과 영적 관계를 맺게 되고,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관계의 깊이를 더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루카8,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를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영적인 형제를 우선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10,37).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19,29).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의 관계보다도 믿음의 관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성직자나 수도자의 삶을 보면, 출가함으로써 새 가족을 얻게 됩니다.
이 말씀은 부모 형제를 멀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얽매이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투신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 형제, 자매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 주님께서 우리 혈연의 부모나 형제에게도 새 형제, 자매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자, 옆 사람보고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하고 인사하겠습니다.
얼마 전, 홍가브리엘 신부를 만났습니다. 신부님은 과테말라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어린이, 젊은이들을 위한 ‘천사의집’과 ‘미리네 초등학교, 중학교’를 20여 년간 운영하고 있습니다. 3년 만에 고국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몸은 여기 있어도 마음은 매일 매 순간 과테말라에 있다고 말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눈에 밟혀 그곳을 떠날 수가 없답니다. 그곳에 있는 180여 명의 어린이와 봉사자들은 신부님의 참 가족입니다.
사실 영적으로 형제인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마태12,50),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요한1,12),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로마8,14),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갈라3,26), 거룩하게 된 사람(히브2,11-12)입니다. 심지어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함이 없이 살았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형제애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혈연관계에 집착하면 하느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한 신부님께서 누드촌에 와달라는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모두가 다 벗고 있을 터인데 나는 어찌해야 하나? 고민을 하시다가 결정을 내렸습니다. 신부님은 모두가 다 옷을 벗었는데 혼자만 옷을 입는 것도 어색할 뿐더러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옷을 벗기로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사람들이 헌금을 어떻게 하지? 걱정을 했답니다.
누드촌에서도 역시 고민이 생겼습니다. 누드회원이 아닌 신부님을 초대해 놓고 모두 벗고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우리가 옷이 없는 것도 아니고, 밖에 나갈 때는 옷을 입지 않는가? 결국 누드 촌 회원들은 모두 옷을 입기로 결정했습니다. 서로를 위한 배려가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형제, 자매 라고 하면서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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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참가족
-송영진신부-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19-22).”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가족과 육적인 가족을 대립 관계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교회 공동체는 ‘큰 가정’이고, 각 가정은 ‘작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 구성원은 신앙생활의 동료이면서 동시에 가족이고,
가정의 식구들은 가족이면서 동시에 신앙생활의 동료입니다.
신앙생활과 가정생활은 서로 멀리 떨어진 두 생활이 아니라,
하나로 일치되어 있어야 하는 하나의 생활입니다.
‘가족’이라는 말은 아직 신앙인이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요한 10,16).”
‘우리 밖에 있는 양들’도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입니다.
(교회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그들 자신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부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들 가운데에는 가족을 멀리하라는,
또는 버리라는 가르침으로 오해할 수 있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루카 18,29-30).”
이 말씀들은 실제로 가족을 멀리하거나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으면, 그들은 먼저 자기 가정에 헌신하고
어버이에게 보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1티모 5,3-4).”
“어떤 사람이 자기 친척 특히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그는 믿음을 저버린 자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쁩니다(1티모 5,8).”
가족은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19-21)”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을 찾아온 가족들을 “그들은 나의 가족이 아니다.”
라고 부정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가족들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영적인 참가족’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이라는 말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v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 6,46)”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따라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라는 말씀은, ‘영적인 참가족’의 정의를 내려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 ‘참가족’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하고, “나의 참가족이 되기를 바란다면, 즉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해야 한다.”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는 것은 곧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뜻을) 실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는
방법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뜻을) 실행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모든 인간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시는 주님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멸망을 피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주님의 계명들을(명령들을) 최선을 다해서 실천합니다.
(그것은 그 계명들을 실천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 계명들을 실천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의 계명들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는 믿어도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그것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는데,
머리로만 믿고 실천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과 생활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생활과 종교생활을 구분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사 참례 잘하고, 공동체의 전례나 행사나 활동에 참여하는 일도 잘하는 것은
종교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생활을 잘하는 것을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믿음 없는 사람도 그렇게 겉으로 보이는 생활은 잘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믿는 사람은, 주님께서 바라시는(명령하시는) 일들을
제대로 실천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겉으로는 잘 안 보일 때가 많지만, 주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누가 보거나 안 보거나 간에 충실하게, 믿는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바위’와 비슷합니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루카 8,13).”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또는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지 않은 사람은,
신앙에 뿌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뿌리가 없는 신앙은 얼마 가지 않아서 말라 버리게 됩니다(루카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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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8,19-21: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가족이 되는 방법을 알려 주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 그분의 가족이 된다는 것을 영적인 관계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시고 계시다. 즉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항상 강생 하시는, 그래서 나에게 있어 그 말씀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이들을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만든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밖에서 친척들이 찾는다고 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21절)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으셨다거나, 당신 가족들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신 것은 아니다.
그분은 성경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서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고 잘 될 것이다.”(신명 5,16)고 하셨다. 그분께서 당신의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우리에게 형제들 뿐 아니라, 원수들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실 수 있었겠는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고 하셨다. 우리 모두는 부모님과 형제들을 최우선으로 사랑할 의무가 있다.
이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더욱 들어 높이시는 말씀이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낳아주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신앙이 구세주를 낳아주실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과 같이 한다면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전해주는 마리아와 같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우리는 그분의 형제도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의 어머니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말씀은 성모님을 칭송하는 말씀도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우리가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성모님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왜 신앙인들이 마리아를 공경하는지, 또 마리아를 닮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마리아와 같이 살 때에 우리는 올바로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닮는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올바로 전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당신의 가족이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알았다. 오늘과 같이 각박하고 이기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진정으로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요구된다. 예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하여 우리의 생활을 다시 한 번 반성하며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신앙을 점검하도록 하자. 즉 나의 삶이 얼마나 주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보면서 새로운 결단을 내리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삶의 은총을 주님께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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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 21)
-한상우신부-
힘든 시간을
이겨내게 하는
말씀이다.
말씀
한 마디가
우리를 살린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점점 더 말씀을
믿게되고
사랑하게 된다.
말씀과 실행은
분리될 수 없다.
말씀으로
정화되고
말씀의
실천으로
깊어진다.
말씀과 함께
말씀 안에서
바라보아야할
우리의
관계이다.
관계의 방향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하느님 말씀으로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더 사랑하게 된다.
귀 기울여 듣는
경청의 가족이
되게한다.
가족은
감정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간다.
가족의 인연은
말씀의 인연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가족의 힘은
말씀의 힘이다.
말씀을 실행하는
거기가 가족이다.
실행하는
가족의 얼굴은
말씀의 얼굴이다.
말씀이 엮어주는
복음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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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와 더 가까워지고자 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다."(루카 8,21)
우리는 언감생심 주님의 가족이 될 꿈을 꿀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족은 혈연, 즉 핏줄에 기인해서 이어지는 관계성인데, 예수님과 우리는 시대와 인종, 민족, 출신 등등 거의 모든 면에서 공통분모가 없으니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족의 의미를 재정립하십니다. 핏줄에 기인하지 않는 예수님의 가족은 무한히 확장될 가능성을 안고 있지요. 하느님의 말씀이 온 세상 어디에나 선포되듯이, 그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 역시 온 세상 어디서나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마리아와의 가족적 연관성을 부인하시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오늘은 비록 군중 때문에 밖에 서서 예수님 가까이 갈 수 없으셨지만, 말씀을 듣고 실행한 가장 탁월한 모범이요 증인이십니다. 마리아가 잉태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계시니, 성모님만큼 말씀을 듣고 실행해 열매를 맺은 이는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오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새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듣고 머무르고 되새기고 품고 실행하는 말씀이 우리를 엮어 한 가족을 이루게 해 주었지요. 그런데 말씀은 지적 유희의 대상이 아닙니다. 지식과 식견을 쌓는 것과 주님의 가족이 되는 일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말씀은 듣는 이의 실행을 통해 진정으로 완성됩니다.
제1독서에서 나오는 여러 잠언 중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잠언 21,3)
사람은 주님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의례를 행하고 제물을 바칩니다. 말하자면 절대자에 대한 경외와 찬양의 표현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제물보다 자비와 사랑을 바란다고 성경 곳곳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를 위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는 일은 하느님의 마음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목소리조차 낼 줄 모르는 이들의 외침이 되어 주고, 친구가 되어 주는 일은 육화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지요. 이제 우리가 그분 대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그분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꿈을 실현하라고 하십니다. 이쯤 되면 주님과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읽고 실행하는 경지이니 최상의 가족관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의 바람은 우리 모두가 더 친밀히 연결된 당신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 눈빛만 봐도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다독이고 일치하는 진짜 가족 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 말씀을 중심으로 모인 우리도 주님의 가족입니다. 각자에게 다가오시는 말씀을 각자가 처한 환경과 실존 안에서 실천하려 애쓰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지요.
오늘 우리를 당신 곁으로 끌어당겨 가족의 연으로 품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가족으로 불러주신 주님께 더 달아드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https://dthumb-phinf.pstatic.net/?src=%22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line01.jpg%22&type=m10000_10000)
어떤 명사보다 명사이신 주님, 어떤 명언보다 명언이신 주님 말씀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81189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 복음에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이 방법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 분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골고타까지 아무 말 없이 따라가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지배하니 외롭지도 않고 그래서 서먹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핏줄이라는 끊어지기 쉬운 줄을 놓고 하느님의 핏줄이라는 끊어질 수 없는 끈으로 우리 가족을 묶읍시다. 하느님의 뜻이 지배하는 사람은 외로움을 모르고, 그러한 가정은 끊어질 수 없는 결속력으로 행복한 친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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