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23일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로 널리 알려진 비오 성인은 1887년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가 된 그는 끊임없는 기도와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섬기며 살았다. 비오 신부는 1918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68년까지 50년 동안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지닌 채 고통받았다. 곧, 그의 양손과 양발, 옆구리에 상흔이 생기고 피가 흘렀던 것이다. 이러한 비오 신부를 200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루가 9,18-22)
Who do you say that I a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코헬렛은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데,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한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한 소년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어느 날, 쪽지 시험을 봤는데 망쳤습니다. 소년은 “다음 시험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맞겠다.”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시험에도 망쳤습니다.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중간고사를 봤는데 망쳤습니다. “다음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맞겠다.”라고 결심했지만, 기말고사도 망치고 말았습니다.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시험을 보고 나서, “다음 시험에는 열심히 공부하자.”라고 결심했지만, 다음 시험도 망쳤습니다. 공부를 안 했기 때문입니다. 재수할 때도, 취업 시험을 보고 나서도 “다음 시험에는 열심히 공부하겠다”라고 결심했지만 늘 망쳤습니다. 공부를 안 했기 때문입니다.
운 좋게 조그마한 회사에 취업했습니다. 이 회사에서 하는 일은 너무 하찮은 일이었습니다. ‘내가 이런 걸 할 사람이 아닌데….’라고 생각하다 보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그에게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런 세상을 한탄했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번 생은 틀렸어. 다음 생에는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뒤로 미루기만 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면서 당신의 신원에 관한 질문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한 분이라는 대답을 합니다. 사실 제자들이 말하는 인물 모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자랑스럽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그 정답을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정답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알려주시지요. 정답을 알기에 미래의 시간을 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과거에 매여있는 분이 아닙니다. 과거의 영광만을 떠올리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하는 하느님이심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희망으로 이끌어주시는 분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과거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걱정 없이 큰 기쁨을 가지고 희망의 미래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나를 만만하게 보는가?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pbQPNttOEcw
여기 피로와 무기력감, 자살에 대한 유혹을 느끼는 막 40대에 접어든 미혼 여성의 삶을 보고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이 여성은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연봉은 많지 않았지만, 그녀가 만족스럽게 살아가기에는 충분했습니다.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난 그녀는 소위 한국의 전형적인 장녀였습니다.
아버지를 일찍이 사고로 잃은 그녀는 고등학생 때부터 집안의 기둥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도 사춘기도, 질풍노도의 시기도 그녀에게는 사치에 가까웠습니다. “네가 빨리 자리를 잡아 어린 남동생을 경제적으로 도와줘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말에 따라 청춘도 연애도 뒤로하고 오직 안정된 직장을 잡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남동생이 재수, 삼수를 하는 동안 학원비는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습니다. 대학에 합격하자 남동생은 그녀가 평생 엄두도 내보지 못한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오기를 원했고 그다음은 사업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사업비용은 어머니의 대출로 이루어졌고 어머니의 대출금은 당연하게도 그녀가 갚아나갔습니다. 동생의 결혼을 여러 날 앞둔 어느 날 어머니의 다음 말은 그녀를 폭발하게 하였습니다.
“너희 아버지가 남겨준 아파트 있지? 그거 네 동생 신혼집으로 주기로 했다. 그래도 명색이 남잔데 집 한 칸은 해줘야 사돈 보기에도 체면이 서지.”
기가 막힌 그녀가 “그러면 엄마는 어디로 이사할 건데?”라고 묻자 어머니는 당연한 듯 말했습니다.
“너희 집으로 가면 되지. 이제 같이 나이 먹어 가는 모녀끼리 친구처럼 한 번 살아보자!”
그녀도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애 처음 반대의견을 말한 뒤 에 돌아오는 것은 어머니의 순식간에 일그러진 얼굴과 폭언,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빨대 꽂아 다 빨아먹은 동생의 적반하장 반응이었습니다.
“불효녀”, “욕심 많은 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누나 왜 그렇게 엄마 힘들게 해!”와 같은 비난이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남겨준 아파트는 동생이 신혼집으로 쓰고 있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집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만나던 남자친구는 어머니의 반대로 헤어졌습니다.
[출처: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시다』, 권순재, 생각의 길]
위 여성의 문제는 이전 세상을 찢을 용기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자궁이 좋아서 자궁을 찢을 용기가 없다면 아기는 자궁보다 더 넓은 세상을 맛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여성의 정체성은 ‘어머니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흔들리고 휘둘리고 이용당하고 가스라이팅 당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내가 나의 것이 된다는 것에 희망을 걸지 마십시오. 나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인간은 분명 누구에겐가는 의존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속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은근히 우리를 자기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자신들 맘대로 하려고 합니다.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에 쉽게 넘어가는 이유는 내가 나를 너무 믿기 때문입니다. 나로 사는 것이 강한 삶이라 착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군가에게 속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로 산다는 말은 세상 것들이나 사람들에게 다 휘둘리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어떤 피조물이건 버려진 깡통과 같습니다. 나 스스로는 다른 것들로부터 나를 보호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피조물의 본성적 의존성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스스로의 힘으로 에너지를 생성하지 못합니다. 모두가 생존하려면 에너지를 소진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 속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소멸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더욱더 누군가에게 속하려고 합니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못한 불안함은 나를 의존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남에게 휘둘릴 준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휘둘리지 않는 유일한 법은 내가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는 대상의 것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대상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흔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루카 9,20)라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루카 9,220)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입니다. ‘의’가 붙으면 소유격이 됩니다. 하느님의 소유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은총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성령으로 아드님을 소유하십니다. 성령은 은총이기도 하지만 소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인지 알리지 말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루카 9,22)
아버지로부터 소명을 받지 않으면 아버지의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뜻에 의해 움직일 때 그 사람의 것이 됩니다. 만약 그 사람이 하느님이라면 그 사람은 세상 누구의 뜻에도 휘둘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휘둘리며 살 것인가, 아닌가는 내가 누구의 것이 되느냐에 달렸습니다.
고집부리는 것과 줏대 있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고집부리는 사람은 분명 누군가에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의 주인입니다. 그러면 흔들립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발로 차 봅니다. 하지만 줏대 있는 사람은 누군가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누군가의 권위에 따라 사람들은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만만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고집부리는 사람이 가장 만만합니다. 그 사람의 주인이 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의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차피 휘둘리게 태어납니다. ‘나’라는 존재는 실제로 어떤 권위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휘둘린다고, 나를 무시하는 거냐고 화내지 마십시오. 그건 내가 누구의 권위 있는 대상의 것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용당하고 가스라이팅 당하지 않으려면 누구도 그럴 수 없는 대상의 것이 되십시오.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창조자의 것이 되십시오. 그분의 뜻을 따르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창조자로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우리가 당신 것이라 천명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분,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이사 43,1)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BkiB7if6OE
-조재형신부-
예전에 ‘사랑은 뭐길래!’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극중에서 엄격한 남편에게 순응하면서 지내는 아내가 혼자서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으로 비 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제목은 산스크리트어 ’타타타‘ 입니다. 우리말로는 ‘그래 그런 거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한문으로는 진여(眞如)라고 합니다. 엄격한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자녀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자상한 아내는 남편을 잘 알았습니다. 자녀들의 꿈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아들이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딸이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었습니다. 드라마 제목처럼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모든 것이 ‘때’가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라고 합니다. 열흘 넘게 피는 꽃이 없고, 권력이 10년 이상 가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도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겸손’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한 자매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와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세례명을 바꾸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사연은 자신이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성인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게 살았고,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삶이 힘들고, 어려운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즐겁고, 재미있게 살았던 성인으로, 예술 분야에서 성공한 성인으로 세례명을 바꾸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함께 기도하고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 뒤로 그 자매님이 저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저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이 제게 말하는 겁니다. ‘저요, 세례명 바꾸지 않을래요.’ 그러면서 그동안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좋은 일도 많았었고, 주보성인의 삶을 따르기 보다는 세상의 명예와 자리를 너무 따라갔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앞으로 주보성인처럼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살겠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주변을 보니 다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었다고 말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자신의 것보다 더 가볍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매님처럼 때로 우리의 십자가를 던져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굴레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럴 때 구상 시인의 ‘꽃자리’라는 시를 떠올립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 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우리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 너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지금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구원의 강을 건너게 해주는 고마운 다리가 될 것입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루카 9,7)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뿐만이 아니라, 바로 앞 장면에서 보여준 제자들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될 것입니다.
이토록 그분의 제자들마저 그 권능을 행하는 것을 전해들은 헤로데는 몹시 당황했던 것입니다.
'당황했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로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헤로데의 이 혼란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본문에 따르면,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죽은 요한이 살아났다는 것’과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과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라고 단정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습니다.(루카 9,9)
그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의혹, 혹은 소문을 확인하거나 그분을 따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왜곡된 마음으로 업신여기고 조롱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이를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루카 23,11-12)
사실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이 행한 권능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한다면, 우리도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몹시 불안할 때, 얼른 주님께 의탁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할 일입니다.
오히려 온갖 혼란과 의혹, 조바심과 노파심, 불안과 두려움에 쌓이는 유혹의 순간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더 간곡히 부르시고 계실 때임을 알아차려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저는 이러한 고백과 기도를 드려봅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며 저를 쫄쫄 따라다니시는 저의 추종자입니다.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해도 저를 믿으시는 저의 신자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제 곁에 있어주시며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픔을 먼저 보시는 저의 벗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도 저를 사랑하시는 당신은 저의 연인입니다.
말하기도 전에 저의 마음을 훤히 아시는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입니다.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존재, 당신의 것, 당신의 사랑입니다.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사랑, 그 놀라움, 사랑이신 당신을 찬미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루카 9,9)
주님!
당신은 제가 당신을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며 저를 쫄쫄 따라다니시는 저의 추종자입니다.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해도 저를 믿으시는 저의 신자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제 곁에 있어주시며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픔을 먼저 보시는 저의 벗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도 저를 사랑하시는 당신은 저의 연인입니다.
말하기도 전에 저의 마음을 훤히 아시는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멘.
말씀 나누기 - 연중 25주 금요일-줄탁동시(啐啄同時)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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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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