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25일 연중 제26주일
너는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루가 16,19-31)
'My child, remember that you received
what was good during your lifetime
while Lazarus likewise received what was bad;
but now he is comforted here, whereas you are torment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아모스 예언자는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자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드시며,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은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하늘 나라를 위한 연대
-키엣 대주교-
세계화로 인류는 생명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인류의 안위는 누구 하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 공동의 문제입니다. 즉 세상을 구하는 것은 나의 관계들을 회복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이제 관계, 연대는 사회생활에서 없으면 안될 덕목이 되었습니다. 연대는 타인과 나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며,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의 절박한 임무입니다. 우리가 연대의 삶을 통감할 때 인류는 비로소 복음의 길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연대에 대해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서로 형제이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연대는 하늘나라로 가는 꼭 필요한 조건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러한 인류의 연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돈이 많다는 것은 죄가 아니지 않습니까? 부자라는 이유로 왜 지옥에 떨어져야 합니까? 남의 것을 탐내지도, 훔치지도 않았습니다. 내 힘으로 힘들게 번 돈을 내가 쓰는 것은 내 권한입니다. 그러므로 부유한 것은 죄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부유한 것은 죄가 아닙니다. 내가 가진 돈으로 이웃을 도와주고 영원한 친구를 사귀고 그 친구의 도움으로 영원한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긍정적인 돈의 가치입니다. 돈을 쓰는 합리적인 방법을 알고 사용한다면 그 돈은 긍정적인 가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치를 모르고 사용한다면 그 돈 때문에 위기를 맞게 될 것입니다.
돈은 사람의 마음을 유혹합니다.
돈은 사람과 정신을 옭아매는 끈입니다. 사람은 돈에서 자유롭기 어렵습니다. 특히 돈에 유혹된 사람의 마음은 끈에 묶여 있는 새와 같아 멀리 날아 갈 수 없습니다. 한 청년이 신앙의 길을 가고자 마음먹고 ‘어떻게 하면 영원히 살 수 있는 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셨지만 그의 두 발은 돈으로 꽁꽁 묶여 예수님께 한 발자국도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께 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익숙해진 그의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이처럼 돈은 장애물입니다
돈은 사람의 심장을 딱딱하고 굳게 만듭니다.
돈이 많으면 자만심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많은 걸 가지고 있기에 남의 도움을 불필요하게 생각하고, 이웃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와 같습니다. 그는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다 보니 다른 사람을 돌아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라자로가 가파른 숨을 쉬며 대문 앞에 누워 있었지만 보지 못했습니다. 라자로가 갈증과 고통, 굶주림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듣지 못했습니다. 자만심으로 가득한 닫힌 마음의 문이 어려운 사람의 고통에 인색하였습니다. 남아도는 빵 조각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가난한 라자로를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라자로가 허기진 배를 조금이라도 채우기 위해 떨어진 빵 조각을 주워 먹겠다는 희망을 가질 때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남은 빵 조각을 휴지통에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기적인 자만심으로 이웃과 함께하는 연대를 상실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돈은 영원한 행복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하늘나라의 행복이란, 삼위일체의 사랑 속에서, 서로 돕고 이해하는 삶입니다. 받기 위해서는 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기적인 사람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보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사람입니다. 연대감이 없이 사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하늘나라에서 추방하는 사람입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른 사람과 나누는 연대감이 부족하기에 자신의 부는 쌓이는데 그와 반대로 하늘 나라 곳간은 점점 비어가기 때문에 하늘 나라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가난하고 볼품없는 라자로가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저승에서 고통 받을 때 자신에게 물 한 방울이라도 줄 수 있는 사람은 라자로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연대는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와 세상 사람들은 두개의 평행선처럼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사이가 아닙니다. 우리의 운명은 서로를 묶고 있고 의도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관심이라는 마음은 한 순간 의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마음가짐과 실천을 통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웃의 불행에 마음이 움직이고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섬세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도록 나를 단련시켜야 합니다. 나도 부족하지만 나보다 더 많이 부족한 형제들과 나눌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나를 단련시켜야 합니다.
주님, 이웃 형제들 속에서 주님을 볼 수 있도록 저희 눈을 뜨게 하여 주소서.
고통 받는 이웃의 탄식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저희 귀를 열어주소서.
그리고 그들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저희 마음을 열게 하여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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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나치게 넘쳐나는 생활은 오히려 영적인 삶을 오히려 어렵게 합니다. 이러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3. 복음 속의 부자가 지옥에 떨어진 것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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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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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뉴스를 보면 나쁜 소식을 많이 보게 됩니다. 세상에 좋은 소식은 전혀 없고 나쁜 소식만 있는 것 같습니다. 계속 보다 보면 침울해지고 화도 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속상하게 하는 뉴스가 주 뉴스로 발표되고, 반면에 좋은 소식은 몇 개 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나쁜 뉴스를 다 마치고서야 잠깐 나올 뿐입니다.
세상에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많아서일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극적인 소식에 눈길을 더 두는 우리이기에, 흔하지 않은 나쁜 일이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적은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이 너무 많기에 맨 뒷자리 그리고 흔한 일이기에 아주 적은 숫자의 좋은 뉴스를 발표하는 것이 아닐까요?
조금만 관심을 두면 우리를 환하게 미소 짓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기의 웃음에서, 사람들의 착한 사랑의 실천에서, 공공장소에서 보이는 배려의 모습에서 우리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짓습니다. 여기에 비오다가 갑자기 맑아진 하늘에도 큰 기쁨을 얻습니다. 새벽에 벌떡 일어나 개운한 마음으로 새 아침을 맞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좋은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뉴스거리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온 세상에 나쁜 뉴스로 가득하다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신 보시니 참 좋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세상에서 좋은 말과 행동으로 더 좋은 세상이 되는데 힘을 보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만을 생각하는 욕심과 이기심 속에서 좋은 세상을 함께 만들지 못합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말씀을 보게 됩니다. 부자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즐기며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에 반해 라자로는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없어서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었지요. 이 둘이 모두 죽어 하늘 나라에 가서는 입장이 180도 바뀌게 됩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 옆에서 위로받고, 부자는 불길 속에서 고초를 받습니다.
왜 이렇게 입장이 바뀌었을까요? 부자가 악인이고, 라자로는 선인이기 때문일까요? 부자가 자기 형제를 생각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라자로가 했던 선한 행동은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부자가 보였던 자기만 잘 사는 삶이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누리는 것에만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1티모 6,14)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만큼 주님 말씀에 맞춰서 좋은 세상 만들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큰 영광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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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라자로처럼 '안 좋은 것'을 받아야 천국에 간다는 의미는?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wgEtrEzrZbA
한국계 출신인 조니 킴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믿기 힘들 정도의 경력을 쌓아온 인물입니다.
1984년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한국계라는 사실 역시 그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난과 인종적 차별을 스스로 극복해나가며 남다른 성장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미 해군 특수작전사령부에 우수한 성적으로 네이비실의 일원이 되어 이라크에 두 차례 파병되어 은성무공훈장과 동성 무공훈장을 받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이라크 라마디에서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의무병의 한계를 느끼고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의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를 받고 메사추세츠 종합병원 응급실을 비롯해 보스턴 브리검 여성병원 레지던트로 근무하며 의사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그는 우연히 알게 된 NASA의 우주비행사 프로그램에 지원하여 높은 경쟁률을 뚫고 NASA 우주비행사 선발 프로그램에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지원자 1만 8천 명 중에서 선발된 우주비행사 후보 13명 중 첫 한국계 미국인 우주비행사였습니다.
이런 그의 경력은 미국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가난한 아시아계 가정에서 미국 최정예 특수부대원이자 하버드 의대 박사, 우주비행사 등 한 사람이 한번 가져볼까 한 직업들을 갖고 있어 ‘지상 최강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렸을 적 삶은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2002년 어느 날, 술 취한 아버지가 총과 아령을 이용, 일가족을 살해하려고 하자 조니 킴은 죽을힘을 다해 싸웠고 얼굴에 아령을 맞아 크게 찢어졌습니다. 아버지가 갑자기 잠잠해지고 다락방으로 가자 가족은 경찰과 구급차를 불렀고 아버지는 경찰과 대치하다가 아버지가 폭력적으로 저항하는 바람에 경찰 총격으로 사살당하게 됩니다.
조니 킴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친부와 싸웠고 ‘국가’를 지키기 위해 슈퍼 솔져가 됐으며, ‘동료’를 지키기 위해 의사가 됐고 ‘인류’ 미래를 위해 달 기지 우주인이 된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빱빠쁄루’라는 분은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이야기를 가슴에 묻어두지 않고 꺼내주셔서 너무 감사하네요. 의미 없는 인생 살다가 죽고 싶단 생각을 여러 번 한 제가 너무 부끄러워져요. 여태까지 환경 탓하며 열심히 살지 않은 저를 되돌아보게 되네요.”
‘오씨네곳간’이란 분은 이렇게 댓글을 달았습니다.
“정말 선한 영향력, 긍정적인 영향력, 본받고 싶은 영향력인 분이네요…. 문득 이분 영상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어요. 부모님 없이 힘든 날들을 보내 갈 아이들…. 학대받았던 아이들…. 괴롭힘당하던 아이들, 그냥 모든 아이에게 보여주면 정말 좋겠다…. 이런 생각….”
조니 킴은 말합니다.
“가진 것 없이 태어나도 다음 세대에 공헌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인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
[‘인류 최고의 인간, 조니 킴’, 유튜브 채널, ‘터닝포인트’]
오늘 복음은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지옥에 갔고 라자로는 천국에 갔습니다. 그러한 심판의 이유를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루카 16,25)
라자로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나쁜 것을 선택했을까요? 라자로는 자기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을 개들이 먹게 하였습니다. 개들은 여기서 자신들이 가치 없는 존재라고 느끼며 사는 인간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그런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말은 ‘가치 있는 존재임을 믿어 새로 태어나게 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단순히 인간이라 여길 때 그보다 더 큰 존재임을 깨우쳐주러 오셨습니다. 당신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과 피를 마시고 우리가 하느님과 같은 본성을 지닐 수 있음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세례로 새로 태어납니다.
라자로는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유일한 이름을 지닌 사람입니다. 라자로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죽어 썩어가는 사람까지 살리시는 분임을 믿게 하도록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친구였음에도 죽음의 고통을 이 세상에 희망을 주기 위해 당해야 했던 인물입니다. 이러한 삶이 이 세상에서 안 좋은 것을 받는 삶입니다.
하지만 안 좋은 것을 받고 좋은 것을 받는 것은 우리 선택입니다. 우리 선택이기 때문에 심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조니 킴은 이 세상에서 좋은 것만을 찾아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과 같은 처지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안 좋은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 십자가 덕분으로 많은 이들이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라자로의 삶입니다.
세상에 줄 선한 영향력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삶,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삶, 이것이 안 좋은 것을 받아 라자로처럼 천국에 이르는 길입니다.
내가 죽고 이웃을 살리는 안 좋은 것을 받는 삶, 이 삶으로 나아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갑시다.
부자와 라자로가 함께 읹는 공동 식탁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BcxZsoC7zU
주님께서 오늘 부자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한 가지는 이쪽과 저쪽 사이에 다리 하나를 놓는 것!
-양승국신부-
부(富)는 사실 좋은 것입니다. 어느 정도 재물이 있어야 인간적인 품위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궁핍한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봉사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도 어느 정도 돈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 그리고 건전한 방법으로 축척한 재물은 주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전한 재물로 인생을 즐기는 것도 참 좋은 것입니다. 내가 매일 땀 흘려 모든 돈으로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은 취미생활도 하고 삶을 만끽하는 것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은 재물에 대한 과도한 집착입니다. 돈이면 다, 돈이 최고라며 돈에 모든 것을 거는 그릇된 신조입니다. 재물을 주님이나 신앙보다 더 위쪽에 두는 황금만능주의를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돈 좀 있다고 해서 없는 사람 업신여기는 부자들, 가까운 동료 인간들이 저리도 경제적 어려움 앞에 저리도 힘겨워하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하는 부자들,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측은지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부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는 강력합니다.
“애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주님께서 오늘 부자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다리 하나를 놓는 것입니다. 부자들의 세상과 가난한 사람들의 세상을 갈라놓은 구렁 그 위에 다리는 하나 놓은 일입니다. 사랑의 다리, 관심의 다리, 나눔의 다리, 측은지심의 다리...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여겼는데 천국에서 주님 품에 안겨 호강을 하고 있는 라자로입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다고 확신했던 부자는 지옥 불의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영원불변의 진리를 떠올립니다.
주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방식과 인간의 방식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말씀을 듣고 걱정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선이라야 부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름의 부를 축척하고 계신 분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지탄받고 저승에서 영원한 고통을 겪을 부자는 조금도 나눌 줄 모르는 인색한 부자였습니다. 지척에서 고통받고 있는 동료 인간을 향한 자비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향한 갑질과 횡포, 고성과 폭력이 일상인 분들, 지금이라도 지난 부끄러운 삶을 성찰하고 회심하며, 새 삶을 시작할 때, 늦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도 축복하실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한국에서 동창 신부님들이 와서 며칠 지냈습니다. 야구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서 표를 샀습니다. 요즘은 핸드폰으로 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당일 날 비가 와서 경기가 취소되었고, 다음날 2경기가 연속으로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경기장에 가서 표를 보여주니 문제가 있다고 티켓 판매 직원에게 가보라고 했습니다. 티켓 판매 직원에게 문의를 하니 자리를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 30분은 기다렸는데 전산에 문제가 있는지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직원은 저쪽 벽에서 기다리라고 하는데 그때까지는 참고 있었는데 감정이 상했습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물었더니 답이 없었습니다. 정 그러면 환불해달라고 했더니 5분만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5분이 지나니 직원이 표를 핸드폰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다시 입장하려하니 이번에는 좌석이 이미 지정되었다고 했습니다. 함께 티켓 판매 직원에게 가자고 하니 자기는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합니다. 동창들에게 면목도 없고, 다시 티켓 판매 직원에게 가서 이번에는 입구까지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직원은 저와 함께 입구로 갔고, 드디어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1시간이 지났습니다.
저와 비슷한 문제로 판매 직원에게 온 사람들은 쉽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말을 잘 못해서 무시한 것 같기도 했습니다. 동양인이라서 무시한 것 같기도 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벽 쪽에서 기다리라고 하는 것도 저를 무시한 것 같았습니다. 다행히 직원은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하였고, 나중에는 함께 입구까지 가 주었기에 오해는 풀렸습니다. 전산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창 신부님들은 그래도 미국에서 몇 년 살았기에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다며 저를 응원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이방인으로 타국에서 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난민이 되어서 사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첫째는 언어의 소통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직업을 구하기도 어렵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부담이 됩니다. 둘째는 차별입니다. 차별은 인격적인 차별도 있고, 경제적인 차별도 있습니다. 셋째는 자녀의 교육입니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주민과 난민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이주민과 난민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면 좋겠습니다.
생각하면 성서는 이주민과 난민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난민은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인류의 시작이 바로 난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잘 지낼 수 있도록 지켜 주셨습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가뭄을 피해서 풍요로운 땅인 이집트로 가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난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긴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을 끌려갔습니다. 낯선 땅에서 유배생활을 하였습니다. 난민이 아닌 포로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뜻을 지키지 않았음을 뉘우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도 이집트로 피난 가서 살았습니다. 헤로데가 2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저의 집안도 신앙 때문에 박해를 피해서 서울에서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낙원에서 쫓아냈지만 잘 지켜 주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버렸던 형제들을 용서하였고, 이집트에서 가족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고통 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페르시아 왕은 유배지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레스 왕을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가장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한 이들에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주민과 난민 그리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가진 것을 나눈다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될 것입니다. 저도 미국 땅에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가진 것을 나눌 수 만 있었다면, 헐벗고 가난한 라자로에게 자비를 베풀 수 만 있었다면 아브라함의 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나눌 수만 있다면 부자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만 있다면 라자로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연중 26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이번 주일 말씀전례의 주제도 재물의 사용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가진 자들의 흥청거림과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곧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요한 집안이 망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을 위한 싸움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라고 권고합니다.
곧 티모테오에게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의로움과 ~ 사랑'을 추구하며, '그리스도가 나타날 떼까지 흠 없이 계명을 지키기'를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로, 극단적인 두 인물의 대조된 모습을 통해 재물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우리를 하느님의 말씀에로 초대합니다.
이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루카 16,20)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의 이름은 제시하지 않으나, 거지는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이’라는 뜻의 ‘라자로’라고 그 이름을 밝힘으로써 하느님이 그를 인정하고 도우신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반면에 부자가 가련한 라자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라자로 사이에 골짜기를 파놓고 분리된 삶을 살았음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이승에서 파놓고 건너가지 않은 그 분리의 골짜기는 저승에서도 그가 건너갈 수 없는 분리의 골짜기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난힌 이들과 형제들과 사이에 높은 문턱을 쌓아놓고 살게 되면, 저승에다 건널 수 없는 구렁을 파놓는 꼴이 될 것입니다.
사실 이 부자는 특별한 악행을 저지른 것이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단지 소유한 자신의 재물을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면서도 타인을 위해 쓰는 데는 인색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대문 앞에 누워있는 가난한 라자로를 무시하고 그에게 무관심했을 뿐입니다.
마치 제1독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가진 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이 비유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할 바를 다한 것이 아니라, 선행과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죄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는 부유함(부자)=멸망, 가난함(빈자)=구원이라는 등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심판받은 것은 그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하지 않은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마시되 자신의 혀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자비를 입었으니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죽어서 아브라함에게 한 말인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6,24)라는 간청은 ‘제가 자비를 베풀게 해주십시오.’ 라는 간청으로 바뀌어야 할 일입니다.
세계적인 거부 석유 왕 록펠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돈을 벌기보다 쓰기가 열 배는 어렵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음의 눈을 뜨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대문 앞에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로 누워있어도 못본 척한 것처럼, 내 곁에 형제가 상처투성이로 누워있어도 못 보는 것은 우리 마음의 눈이 감겨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아니, 탐욕과 인색에 눈이 가려져버린 까닭일 것입니다.
자신의 호사스러움과 즐거움에 눈이 가려져버린 까닭일 것입니다.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한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형제들 사이에, 또 가난한 이들과의 사이에, 냉대와 무시와 무관심의 골짜기를 파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곧 저승에서의 골짜기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저승에서 처지가 뒤바뀐 부자는 자기 형제들에게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루카 16,29)
이승에서 자비를 베풀어야 저승에서 자비를 입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심판 후에는 그 기회가 마감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사실 부자는 이승에 살고 있는 자신의 형제들의 회개를 위해서 라자로를 보내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승에서는 이미 하느님의 말씀이 있으니 그 말씀을 들어야 하며,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기적적인 사건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일’에 있음을 밝혀주십니다.
사실 당신을 믿지 못함은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혹은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듣고도 받아들이지를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혹은 신비를 체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완고한 까닭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복되다.”
(루카 11,28)
<오늘의 말 · 샘 기도>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루카 16,20)
주님!
마음의 눈을 열어 타인의 처지를 볼 줄 알게 하소서.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고, 자신의 혀만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게 하소서.
재물을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않게 하시고, 탐욕에 빠지지 않고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악을 저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시고,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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